자정, 폰이 비명을 질렀다.
알림음이 아니었다.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다. 유리가 얼어붙는 소리와, 아이가 우는 소리의 중간쯤.
옷을 챙겨 입은 채 얕게 잠들었던 연이가,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며칠째 이 순간을 기다려 왔으면서도, 막상 닥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둠 속에서 폰 화면만이, 붉은 경고등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연이—…왔다. 이 소리. …이게 그거야. 몇 달째 기다린. …제발. 제발 큰일 아니길.
떨리는 손으로 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 가득, 루나의 이름으로 온 메시지 조각들이 깨진 유리처럼 흩어져 있었다. 문장은 끝맺지 못한 채 뚝뚝 끊겨 있었고, 그 끊긴 자리마다 붉은 '전송 실패'가 박혀 있었다.
[ 긴급 ] 루나: 연이 미안 지금 하늘이 이상해 별이 다 검은색이야 언니가 언니가 갑자기 쓰러졌 (전송 실패) (전송 실패) (전송 실패)
연이—루나?! 루나! 답장이 안 가…!
연이는 미친 듯이 화면을 두드렸다. 보낸 메시지마다 붉은 느낌표가 떴다. 전송 실패. 전송 실패. 두 세계를 잇던 우체통이, 처음으로 침묵했다.
연이—루나 언니가 쓰러졌다고? 하늘이 검다고? …루나, 제발 한 번만 더. 딱 한 줄만 더 보내 줘. 지금 어디야, 괜찮은 거야…!
답장 칸은 침묵했다. 연이는 백문의 채널을 눌렀다. 회색. 네오의 채널을 눌렀다. 회색. 모카도, 루나 언니도. 두 세계를 잇던 모든 통로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꺼져 있었다. 우체통이 통째로 끊긴 것이다.
연이—…다 끊겼어. 한꺼번에. 이건 그냥 신호 문제가 아니야. …별들의 궁이, 두 세계 사이의 다리를 통째로 걷어 가고 있는 거야. 소망이 되쓸 때 봤던 그 검은 별. …기어이 시작됐구나.
연이의 등줄기로 서늘한 것이 흘렀다. 몇 달째 반복된 그 꿈. 검은 비, 얼굴 없는 남자, 창백한 아이, 은빛 사자. 그 모든 조각이 이 밤을 예고하고 있었음을, 이제야 온몸으로 깨달았다.
연이—…꿈이 계속 또렷해진 게, 이 밤이 가까워져서였어. 백문 님이 그랬지.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이제 알겠어요, 백문 님. 그 진실이, 지금 문 앞까지 온 거예요.
방 안의 형광등이 지직거리며 명멸했다. 책상 위 폰 화면이 저 혼자 밝아졌다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마치 두 세계의 경계가 이 작은 자취방에서 서로를 잡아당기며 얇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연이—…방까지 이상해져. 이쪽 세계랑 저쪽 세계가 겹쳐지고 있어. …그만큼 저쪽이 급하다는 거야. 루나가, 언니가, 소망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망설일 시간이 없어.
연이는 떨리는 손을 꽉 쥐어 진정시켰다. 무서웠다. 당연히 무서웠다. 하지만 그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이 가슴에서 밀고 올라왔다. 저기 아파하는 이들에게 가야 한다는, 단 하나의 마음이었다.
연이—…괜찮아. 나 이거 몇 달째 준비했잖아. 도서관에서 본뜻을 배우고, 사람이 되고, 루나를 물의 아이로 키우고, 소망이를 품에 안고. …전부, 오늘 밤을 위한 거였어. 자, 연이. 일어나. 갈 시간이야.
창문이 덜컹, 크게 울었다. 흰 고양이가 유리에 앞발을 대고, 호박색 눈으로 연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평소의 도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털을 잔뜩 세운 채, 밤하늘을 향해 사납게 울부짖었다.
연이—…너, 왜 그래. …밖에 뭐가 있어? …그 하늘. …너도 느끼는 거야? 저쪽에서 뭔가 터진 거.
고양이는 대답 대신, 창밖의 한 지점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도시의 밤하늘 저편, 별 하나가 완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소망이가 있다던, 별들의 궁 꼭대기의 그 방향이었다.
그리고 고양이는, 몸을 돌려 열린 창틈으로 뛰어내렸다. 어둠 속으로. 마치, 먼저 건너가려는 것처럼. 마치, '따라와'라고 말하는 것처럼.
연이—야, 네오…?! …아니, 고양이야! 어디 가! …하, 정말. 저 녀석까지. 다들 나보고 오라고, 오라고 그러네.
연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밤이 올 것을. 몇 달째 꿈이, 우체통이, 검게 물드는 별이, 이 밤을 예고해 왔으니까. 두려움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연이—…가야 해. 지금. 루나가, 루나 언니가, 소망이가, 다 저기 있어. …겁먹을 시간 없어. 준비는, 이미 다 해 뒀잖아.
연이는 서랍을 열어, 며칠째 챙겨 둔 것들을 꺼냈다. 하나씩, 손에 쥘 때마다 그 주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먼저 언니의 손수건. 재성에서 루나 언니가, 담보로 잡혔던 시간을 견디며 늘 목에 두르고 있던 것. 회복한 뒤 연이에게 쥐여 주며 '이건 지켜 주는 물건이에요'라고 했었다. 연이는 그것을 목에 둘렀다.
다음은 백문의 본필. 진실만을 쓰는 붓. 노사서가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남에게 건넨 물건이었다. '자네가 읽는 모든 것이 진실을 드러내게'라던 그 축문이, 붓대에 배어 있는 것만 같았다. 연이는 그것을 품에 꽂았다.
그리고 루나의 물 조약돌. 루나가 처음으로 물방울을 띄운 날, '언니한테도 물을 나눠 주고 싶어'라며 손목에 걸어 준 것. 그 작은 돌에, 루나의 맑은 물이 늘 흐르고 있었다. 연이는 그것을 손목에 감았다.
마지막으로, 품속 가장 깊은 곳. 소망이의 종이 물고기. 백문의 잃어버린 딸. 세상에서 가장 순한 이야기. 이 아이만은, 반드시 아버지 품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연이는 그것을 가슴에 꼭 품었다. 넷이, 함께였다.
연이—손수건은 언니 대신 나를 지켜 주고. 붓은 진실을 쓰고. 조약돌은 루나가 흐르게 해 주고. 종이 물고기는… 소망이를 집에 데려가려고. …자, 됐어. 넷 다 챙겼어. 이제 문만 열면 돼.
연이는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봤다. 삼각김밥 봉지, 밀린 과제, 반쯤 마신 캔커피. 평범한 자취방. 이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는 알았다. 그리고 이 평범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쪽 일을 끝내야 했다.
연이—…다녀올게, 내 방. 이번엔 다 끝내고 올 거야. 그 여자 문제도, 그 여자가 가둔 창백한 운명도, 소망이도, 다. …그리고 돌아오면, 진짜 푹 잘 거야. 알람 다 끄고.
연이가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손에 쥔 폰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회색으로 죽어 있던 화면이, 스스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두 세계를 잇던 우체통이 마지막 힘으로, 연이를 저쪽으로 부르고 있었다.
화면이 저절로 바뀌었다. 앱이 스스로 타로 문 카드를 띄웠다. 카드가 뒤집히며 화면 너머에서 강물 냄새가 났다.
[ Code Destiny ] 비상 소환 — 수신인: 사주가 완성된 자. 사유: 운명 세계 침식 감지. …돌아와 주세요.
연이—…물어볼 것도 없지. 내 이름들이 저기 있는데.
연이는 주저 없이 화면에 손을 얹었다. 문이 열렸다. 그런데.
강이 검었다.
별빛이 닿지 않는 수면. 금화 대신 검은 깃털이 떠 있었다. 강은 연이를 알아보고도 길을 내주지 못해 몸부림쳤다.
연이—강물이… 앓고 있어. 이거 부정계약 같은 게 아니야. 훨씬, 훨씬 깊은 데가 아픈 거야.
연이는 강가에 무릎을 꿇었다. 검은 물결이 손등을 스치자, 얼음보다 차가운 슬픔이 뼛속까지 스몄다. 이건 미움이 아니라, 오래 곪은 슬픔의 물이었다. 누군가의 백 년 묵은 눈물이, 온 세계의 강에 번지고 있었다.
연이—…괜찮아. 나 알아. 너, 아픈 거지. 누가 널 이렇게 검게 물들였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아. …그래도 딱 한 번만. 나 좀 건네줘. 저기 아픈 애들한테 가야 하거든.
강은 연이를 알아보고도 몸부림쳤다. 검은 물이 스스로 길을 내려다, 또 검게 덮이길 반복했다. 연이가 아무리 청록빛 손을 뻗어도, 오염이 그보다 빨랐다. 강 혼자서는, 이제 맑아질 수 없었다.
연이—…안 되겠어. 나 혼자 힘으론 이 강을 못 갈라. …루나. 네가 필요해. 여기, 지금.
그때, 손목의 물 조약돌이 스스로 빛나기 시작했다. 루나가 저 멀리서 흘려보낸 맑은 물의 기운이, 조약돌을 타고 연이의 손끝으로 흘러들었다. 두 세계는 끊겼어도, 물과 물은 이어져 있었다.
연이—…루나? …이거, 네 물이야. 네가 나한테 물길을 보내 주는 거야? …그래. 흐르게 두라고 했지. 억지로 가르지 말고. …고마워, 루나. 같이 가자.
조약돌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줄기가, 검은 강 위에 가느다란 은빛 실개천을 그었다. 오염이 덮으려 할 때마다, 맑은 물이 유연하게 비껴 흘렀다. 막지 않고, 흐르며 이겼다. 루나의 물이었다.
연이는 그 은빛 물길을 밟고 검은 강을 건넜다. 한 걸음 한 걸음, 발밑에서 맑은 물이 검은 물을 밀어냈다. 건너편 기슭에, 낯익은 실루엣의 마을이 검게 잠겨 있었다. 재성이었다.
강을 건너며, 연이는 처음 이 세계에 왔던 밤을 떠올렸다. 그때도 강이었다. 금화가 별빛처럼 떠 있던 맑은 강. 아무것도 모르던 꽃돼지 한 마리가, 겁에 질려 그 강가에 던져졌던 밤. …그 강이, 지금은 이렇게 검게 앓고 있었다.
연이—…강아. 나 처음 왔을 때, 넌 금화를 띄우고 반짝였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괜찮아. 나 이제 도망 안 쳐. 네가 왜 이렇게 됐는지, 내가 저 위에 가서 다 알아낼게. 그리고 되돌릴게.
검은 물이, 연이의 발밑에서 잠시 잔잔해졌다.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오염 속에서도, 강은 아직 연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작은 반응이, 연이에게는 큰 위로였다. 이 세계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연이—…아직 살아 있어. 강도, 재성도, 다들. 늦지 않았어. …고마워, 강아. 조금만 버텨 줘. 나 얼른 다녀올게.
재성의 섬. 그러나 연이가 알던 그 활기찬 시장이 아니었다. 등불은 회색으로 스러지고, 간판의 글자들이 흐릿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웅성거렸다. 별이, 하나둘 검게 꺼지고 있었으니까.
연이—…재성이 시들고 있어. 이 섬은 사람들 인연이랑 이야기로 사는 곳인데. …별들의 궁이 이 세계 전체의 이야기를 빨아들이고 있는 거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다.
연이는 뛰었다. 회색으로 번지는 골목을 지나, 낯익은 빵 냄새가 나던 그 길로. 루나가 있는 곳으로. 루나의 언니가 쓰러졌다는, 그 빵집으로.
빵집 앞. 익숙한 그림자 하나가, 겁에 질린 손님들을 밖으로 이끌고 있었다. 특유의 나비넥타이는 삐뚤어졌지만, 목소리만은 여전히 컸다. 모카였다.
모카—자자 침착하게, 한 명씩! 뛰지 말고! 냐옹 모카 님이 있는 한 아무도 안 다쳐! …어이 거기 꼬마, 울지 마. 하늘 좀 검어진 게 뭐 대수라고. 이 몸이 다 정리한다니까?
허세를 부리면서도, 모카의 꼬리는 잔뜩 곤두서 있었다. 겁을 억누르며 남을 먼저 챙기는 것. 그게 재성에서 배운 모카의 방식이었다.
연이—모카!
모카—…어? 그 목소리… 냐옹?! 연이! 연이잖아! 왔구나! 진짜 왔어! …흑, 아니 안 울었어. 눈에 먼지 들어간 거야. 어쨌든! 잘 왔어 선생! 지금 완전 난리도 아니야!
연이—모카, 상황 설명은 뛰면서. 루나 언니는? 루나는 어디 있어?
모카—안에! 루나가 언니 붙잡고 안 나와! 아니 못 나와! 냐옹 내가 끌어내려고 해도… 직접 봐, 선생. 저 안, 좀 이상해.
연이는 빵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밀가루 포대와 식은 오븐 사이, 푸른 물의 돔이 방 한가운데를 감싸고 있었다. 그 안에, 쓰러진 언니와 그 언니를 끌어안은 루나가 있었다.
돔은 물이었다. 투명하고 맑은 물의 방패. 바깥에서 검은 안개가 밀려와 부딪칠 때마다, 물의 벽이 유연하게 출렁이며 그것을 흘려보냈다. 막지 않고, 흘리며 지키는 물. 루나가 만든 방패였다.
연이—…루나. 저거… 네가 만든 거야? 물방울 방패. …너 진짜로, 지키는 물을 익혔구나.
연이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체통으로 물방울 사진을 보내며 헤헤 웃던 아이가, 지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쓰러진 언니를 온몸으로 감싸고 있었다. 혼자서, 몇 시간을. 그 작은 등이, 온 세계의 무게를 지고 떨고 있었다.
루나가 만든 물의 돔은 완벽하지 않았다. 곳곳이 얇아지고 찢기려 했고, 그때마다 루나가 이를 악물고 물길을 돌려 메웠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언니를 감싼 팔만은 한 번도 풀지 않았다. 재성에서 연이가 지켜본, 그 겁 많던 아이가 아니었다.
연이—(…루나. 너 여기서 이만큼 버텼구나. 나 오는 동안, 혼자서. …잘했어. 진짜 잘했어. 이제 나 왔으니까, 같이 하자.)
루나—언니…! 언니 왔어…! 흑, 나 못 하겠어. 언니가 자꾸 검게 물들어. 내가 아무리 씻어도, 자꾸 다시… 흑, 언니 좀 봐 줘. 우리 언니 좀 봐 줘…!
연이—…루나. 나 봤어. 너 혼자 이만큼 버틴 거. …너 진짜 대단해. 이제 손 안 놔도 돼. 나랑 같이 붙잡자. …울지 마. 언니, 내가 살릴게. 너랑 같이.
물의 돔 안, 루나의 언니가 창백하게 누워 있었다. 재성에서 되찾은 그 온화한 얼굴에서, 별빛 같은 것이 자꾸 빠져나가 검은 안개에 섞여 위로 빨려 올라갔다. 별들의 궁이, 이 세계 사람들의 '빛'까지 위에서부터 거둬 가고 있었다.
루나 언니—…루나야. 그만… 힘 빼렴. 언니는… 괜찮아. 저 위에서 부르는 힘이… 너무 세단다. 너까지… 휩쓸리면 안 돼…
연이—언니, 말 아끼세요. …루나, 방패 유지해. 잘하고 있어. 언니 몸에서 빠져나가는 저 빛, 저건 언니의 '이야기'야. 별들의 궁이 그걸 빨아들이는 거고. 내가 붙잡을게. 넌 물로 계속 감싸.
루나—…응! 응, 언니. 나 방패 안 풀어. 절대. …언니가 붙잡아 줘. 우리 언니 이야기, 뺏기지 않게.
연이는 물의 돔 안으로 손을 넣어, 루나 언니의 손을 잡았다. 본필을 쥔 손이었다. 그리고 언니의 몸에서 빠져나가려는 그 빛을, 이야기로 붙들었다.
연이—「이 사람은 루나의 언니. 백 년의 잠에서 깨어, 다시 빵을 굽는 사람. 동생을 위해 담보로 잡혔던 시간을 견디고, 마침내 아침을 되찾은 사람. 이 이야기는, 누구도 가져갈 수 없다.」
본필이 청록빛으로 타올랐다. 언니의 몸에서 빠져나가던 빛이, 연이의 문장에 붙들려 되돌아왔다. 루나의 물이 그 빛을 감싸 정화하자, 검은 기운이 씻겨 나갔다. 두 사람의 힘이, 처음으로 맞물렸다.
루나 언니—…아. …따뜻해라. …몸이… 다시 내 것 같구나. …연이 학생. 루나. …너희 둘이… 나를 붙잡아 줬어.
루나—언니! 언니 눈 떴어! 정신 들어?! …히잉, 다행이야. 진짜 다행이야. 언니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루나 언니—…죽긴 누가 죽어. 언니 빵 아직 다 못 팔았는데. …그보다 연이 학생. 방금 그 문장. …자네, 또 누군가를 살렸구나. 값이 아니라, 뜻으로.
그때, 빵집 창밖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별들의 궁이, 완성된 사주가 이 세계에 도착한 것을 감지한 것이다. 검은 안개가 성난 파도처럼 골목을 삼키며 빵집으로 밀려들었다. 오염된 물, 무성의 기운이었다.
모카—냐옹?! 밖에 사람들 아직 못 뺐는데?! 검은 안개가 갑자기 미쳐 날뛰어! 연이 네가 여기 온 걸 저 위에서 눈치챈 거 같아! 어떡해, 다 휩쓸리겠어!
연이—…내가 왔다고 반응하는 거야. 미안, 나 때문에. …루나! 방패를 넓힐 수 있어? 언니만 말고, 밖에 저 사람들까지! 지금 네 물이 필요해!
루나—사람들까지…?! 그렇게 넓게는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아니야. 할 수 있어. 해야 해. 언니가 믿음이랬잖아. …물아, 흘러라. 넓게, 부드럽게, 아무도 안 놓치게!
루나가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언니를 감싸던 작은 물의 돔이, 출렁이며 빵집 전체로, 다시 골목으로 퍼져 나갔다. 겁에 질려 웅크린 사람들 위로, 투명한 물의 지붕이 드리워졌다. 검은 안개가 그 위를 때렸지만, 물은 막지 않고 흘려보냈다.
루나—으…! 무거워…! 이렇게 넓게 하니까, 물이 자꾸 찢어지려고 해…! 언니, 나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몰라…!
연이—찢어지는 데를 억지로 메우려 하지 마! 물은 구멍이 나면, 그 구멍으로 더 흘려보내면 돼! 안개가 뚫으려는 곳으로, 오히려 물을 몰아! …그래, 그렇게! 넌 지금 완벽하게 하고 있어, 루나!
루나는 이를 악물고, 찢기는 곳마다 물길을 돌렸다. 막는 방패가 아니라, 흐르는 방패. 무성의 검은 물이 아무리 두드려도, 루나의 맑은 물은 부서지지 않고 그 힘을 흘려 넘겼다. 억지로 가두는 물과, 흐르게 두는 물의 대결이었다.
연이—(…이거야. 무성의 물은 억지로 가두는 물이라 부딪치면 부서져. 근데 루나 물은 흐르는 물이라 부딪쳐도 안 부서져. …루나, 넌 무성의 천적이야. 아직 너도 나도 그걸 다 모르지만.)
연이도 가만있지 않았다. 본필을 들어, 밀려드는 검은 안개의 '정체'를 읽어 내려갔다.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으니까.
연이—「이 검은 물은 무성. 스물일곱 별자리의 하늘. 원래는 말과 이야기를 낳는 맑은 샘이었으나, 누군가의 명령으로 세상의 이야기를 삼키는 오수(汚水)가 되었다. 이것은 본디 악이 아니다. 억지로 오염된, 갇힌 물일 뿐.」
연이의 문장이 청록빛으로 번지자, 밀려들던 검은 안개가 잠시 주춤했다. 마치 자기 본래 모습을 상기당한 것처럼. 그 틈에 루나의 물이 안개를 밀어냈고, 검은 파도는 스르르 골목 밖으로 물러났다.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뱉었다.
루나—…해냈다! 물러갔어! 내가, 내가 사람들 다 지켰어! 언니, 봤어?! 나 이만큼 넓게도 할 수 있었어!
연이—…봤어. 똑똑히 봤어. 루나, 너 진짜 강해졌다. 재성에서 눈물 흘리던 애가, 이젠 온 골목 사람을 물로 지켜. …이래서 내가 너한테 위로 오는 길을 찾으랬어. 넌 저 위에서, 결정적인 힘이 될 거야.
모카—냐옹… 나 방금 좀 감동했어. 루나 너 언제 이렇게 컸냐. …좋아, 결심했어. 재성 방어는 내가 총대 멘다! 루나 넌 위로 갈 물길 찾는 데 집중해! 사람들은 이 모카 님이 지킬게. 진심이야, 이번엔.
연이—…언니가 무사하니까 됐어요. …근데 이건 임시방편이에요. 근원을 안 막으면, 저 위에서 계속 빨아들일 거예요. 재성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이렇게 시들 거예요.
연이는 창밖을 올려다봤다. 하늘 꼭대기, 검은 별들이 소용돌이치는 곳에 거대한 원반의 윤곽이 어렸다. 명반(命盤). 별들의 궁. 모든 침식이 시작되는 자리. 그리고 그 꼭대기에, 소망이와 창백한 아이가 있었다.
연이—…근원은 저 위야. 별들의 궁. 소망이도, 그 여자가 가둔 창백한 운명도, 다 저기 있어. 내가 올라가야 해. 저 여자를 만나서, 이 침식을 멈춰야 해. …값의 셈이 아니라, 다 사는 셋째 길로.
루나 언니—…연이 학생. 잠깐. 그렇게 빈속으로 가려고? …안 돼. 이리 와 봐. 언니가 아까 정신 잃기 전에 구워 둔 거, 아직 따뜻해. …가져가렴. 위에서 힘들 때 하나씩 먹어.
루나 언니가 떨리는 손으로, 밀가루 묻은 천에 갓 구운 빵 몇 개를 쌌다. 방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람이, 제 몸보다 먼저 남의 끼니를 챙기고 있었다. 그게 이 빵집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연이—…언니. 지금 언니 몸도 성치 않으면서. …고마워요. 진짜로. …그러고 보니 언니가 그랬죠. 빈속으로 운명이랑 싸우는 거 아니라고. 밥 든든히 먹고 오라고. …그 말, 지키러 가는 김에 지킬게요. 이거 먹고, 힘낼게요.
루나 언니—…그래. 꼭 그러렴. …그리고 하나만 더. 우리 루나. …저 아이, 이제 나 없이도 저렇게 컸어. 다 연이 학생 덕이야. …저 위에서 힘들거든, 혼자 다 짊어지려 하지 마. 루나를, 우리를 믿어. …알겠지?
연이—…네, 언니. 안 짊어질게요. 나눠 들게요. …루나가 위로 올라오면, 그때부턴 둘이 같이 싸울 거예요. 약속해요.
루나—들었지 언니?! 언니가 나 믿는대! 나 물길 꼭 찾아서, 저 위에서 연이 언니랑 같이 싸울 거야! …그니까 언니는 여기서 푹 쉬어. 이번엔 내가 언니 지킬 차례야.
연이는 세 사람을 — 아니, 두 사람과 한 마리를 — 둘러보았다. 물의 아이 루나, 무대의 고양이 모카, 빵 굽는 언니. 재성에서 만난, 피 한 방울 안 섞인 가족들.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 위의 일을 끝내야 했다.
연이—…나 진짜 복 받았다. 형제 없는 자취생이었는데, 이 세계 와서 이렇게 든든한 식구들이 생겼어. …그러니까 더더욱, 아무도 안 잃을 거야. 여기 있는 너희도, 저 위의 소망이도, 그 부서진 별도, 다.
모카—별들의 궁?! 냐옹, 거긴 자미두수 왕이 있는 데잖아. 재성 상인들 사이에서도 소문만 무성한, 아무도 안 돌아온다는 그 하늘. …연이 너 혼자 거길 간다고? 안 돼, 나도 갈래! 무대는 못 접어도 이 몸 발톱은 아직 쓸 만하다고!
연이—…모카. 마음은 고마워. 근데 넌 여기서 사람들 지켜 줘. 재성이 이렇게 시드는데 누군가는 남아서 붙잡아야지.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겁먹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치는 거.
모카—…큭. 그건, 뭐. 인정. …알겠어 선생. 여긴 내가 지킬게. 대신 약속해. 꼭 살아 돌아온다고. 안 그러면 이 몸이 저 위까지 쫓아가서 멱살 잡을 거니까. 알았지?
연이—…응. 약속. 살아서, 다 데리고 돌아올게. 소망이도, 그 여자가 가둔 창백한 운명도, 다.
그때, 회색으로 죽어 있던 우체통 앱에 한 줄이 힘겹게 피어올랐다. 잡음투성이였지만, 분명 그 노(老)사서의 문장이었다. 도서관도 침식되는 중에, 마지막 힘을 짜낸 메시지였다.
[ 백문 ] …연이. 들리는가. 도서관도… 서가가 한 장씩 검게 지워지고 있네. 소망이가… 저 위에 있어. 부탁이네. …허나 명심하게. 별들의 궁의 왕은, 미움으로는 절대 못 이겨. 그 왕도… 실은 갇힌 자일세.
연이—백문 님! …도서관까지. …네, 알아요. 미워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 읽으러 가는 거예요. 그 왕도, 박지은도, 다 무슨 슬픔에 갇혀 있는지. …소망이 꼭 데려올게요. 조금만 버티세요.
[ 백문 ] …그래. 자네라면. …아, 하나 더. 자네 꿈속의 그 얼굴 없는 남자. 별들의 궁에서… 그를 만나거든. 놀라지 말게. 그리고… 네오를 잘, (여기서 문장은 잡음에 끊겨 사라졌다.)
연이—…네오를 잘, 뭐요? 백문 님?! …끊겼어. …그 남자랑 네오. 별들의 궁에서 만난다고. …백문 님이 마지막까지 그 얘길 하려던 거면, 진짜 중요한 거야. …각오, 단단히 하자.
연이는 품속의 종이 물고기를 꺼내 꼭 쥐었다. 소망이. 별들의 궁 가장 높은 탑, 창백한 아이 곁에서 울지 않으려 애쓰는 아이. 연이는 그 아이에게,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연이—소망아. 나 지금 올라가. 조금만 더 견뎌. 무서워도 울지 마. …아니, 울어도 돼. 내가 곧 가서, 네 아빠한테 데려다줄게. 백 년을 기다린 네 아빠한테. …이번엔, 절대 안 놓쳐.
창밖, 검은 별들이 소용돌이치는 하늘 한복판. 유난히 작고 창백한 별 하나가, 파르르 떨며 꺼져 가고 있었다. 다른 별들과 달리, 그 별만은 검게 물드는 게 아니라 그저 힘없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박지은이 부숴 가둔, 시들어 가는 어느 운명의 별이었다.
연이—…저 별. 저게 그 여자가 가둔 창백한 운명의 별이야. 검게 삼켜지는 게 아니라, 그냥 꺼져 가고 있어. …그 여자가 왜 이렇게 온 세계를 쥐어짜는지 알겠어. 제일 아끼는 전리품이 꺼지려 하니까. 그 꺼져 가는 별에, 온 세상의 빛을 긁어모아 채워 넣으려고. 끝까지 제 곳간에 붙들어 두려고.
연이—…미워할 수가 없네, 정말. 방법이 최악일 뿐이지, 그 마음은… 나도 알 것 같아. 그래서 더더욱, 내가 셋째 길을 찾아야 해. 저 별도 살리고, 이 세계도 안 뺏기는 길을.
그때 빵집 창틀에, 흰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호박색 눈의 흰 고양이. 연이의 방을 떠나 어둠 속으로 뛰어내렸던 그 고양이가, 어느새 이 세계, 재성의 빵집 창가에 와 있었다.
연이—…너?! 어떻게 벌써 여기…! …역시 너, 두 세계를 건너다니는구나. …네오. 진짜 네오 맞지. 이 작은 몸으로, 나보다 먼저 건너와서. …왜? 왜 자꾸 내 곁에 오는 거야?
고양이는 대답 대신, 창밖 별들의 궁 쪽을 올려다보았다. 호박색 눈에 두려움과 그리움이 동시에 어렸다. 마치, 저 위에 자기가 두고 온 무언가가 있다는 듯이. 마치, 저기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피할 수 없다는 듯이.
연이—…너도 저 위랑 얽혀 있구나. 잃어버린 별자리. 도망쳐 온 곳. …그래. 같이 가자, 네오. 무섭겠지만. 이번엔 네 얘기도, 내가 읽어 줄게. 네가 왜 별자리를 버려야 했는지.
그 순간, 하늘 꼭대기의 명반이 크게 울렸다. 검은 별들 사이로 한 줄기 빛기둥이 쏟아져 내려, 빵집 지붕을 뚫고 연이의 발밑에 내리꽂혔다. 별로 짠 길, 별길이었다. 그것이 연이의 완성된 사주를 알아보고,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연이의 몸이 서서히 빛기둥 안으로 떠올랐다. 발끝이 바닥을 떠났다. 별들의 궁이, 완성된 그릇을 마침내 자기 앞으로 부르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인력이었다. 아니, 연이는 저항할 생각이 없었다.
루나—언니?! 언니 떠올라?! 안 돼, 혼자 가지 마! 나도 갈래! 나도 데려가!
루나가 빛기둥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별길은 루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완성되지 않은 사주를 튕겨 내듯,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루나를 바깥으로 밀어냈다. 루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루나—왜…! 왜 나는 안 돼! 왜 언니만! …나 이제 물도 다룰 줄 알아! 방패도 만들 수 있어! 나도 싸울 수 있단 말이야! 왜 나만 두고 가!
모카—…나도 튕겨 나왔어. 냐옹, 저 빛기둥, 연이 사주만 인정하나 봐. …젠장. 이런 순간에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진짜 싫다.
연이—…루나. 모카. 미안. 이 길은, 완성된 사주만 오를 수 있대. 그 여자가 그렇게 문을 걸어 놨어. 나만 부른 거야. 나만 필요하니까. …근데 그거 알아? 저 여자가 나만 부른 거, 그게 저 여자의 실수야.
연이—혼자 부르면, 혼자 온 줄 알겠지. 근데 난 혼자가 아니야. 너희가 여기 있고, 내 안에 너희가 있어. 손수건도, 붓도, 조약돌도, 너희 마음도. …저 여자, 나 하나 부른 줄 알겠지만, 사실은 우리 전부를 부른 거야.
루나—…언니. …나 진짜 같이 못 가? …나 언니 없으면 무서운데. 재성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언니가 다 해결해 줬는데. …이번엔, 나 뭘 하면 돼? 여기서 그냥 울고만 있으면 돼?
연이—…아니. 루나, 너한테 제일 중요한 일 줄게. …물은, 어디든 흐르잖아. 별길이 막혀도, 물은 틈으로 스며. 위로도, 아래로도, 어디로든. …네 물이 이만큼 자랐으니까. 너는 네 방식으로, 저 위로 오는 길을 찾아. 나, 위에서 너 기다릴게.
루나—…물은 어디든 흐른다. …내가, 내 물로, 위로 가는 길을 찾으라고? …나 혼자서? …할 수 있을까.
연이—할 수 있어. 넌 재성에서 눈물로 도장을 씻은 애야. 물방울을 띄우고, 방패를 만든 애야. 언니 이야기를 나랑 같이 붙든 애야. …루나. 넌 이미, 강해. 그러니까 이건 부탁이 아니라, 믿음이야. 반드시 와 줘. 결정적일 때.
루나—…응. …응! 알겠어, 언니! 나 물길 찾을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위로 갈게! 그때까지 언니, 절대 지지 마! 죽지도 말고! …나 갈 때까지, 꼭 버텨!
루나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그 눈은 처음으로 겁이 아니라 결의로 빛났다. 길잡이였던 아이가, 이제 스스로 길을 여는 사람이 되려 하고 있었다. 연이는 그 성장을, 떠오르는 빛기둥 속에서 지켜보았다.
모카—냐옹! 여긴 걱정 마 선생! 재성은 이 모카 님이 사수한다! 루나가 위로 갈 물길 찾는 것도 내가 도울게! …그러니까 너는, 저 위에서 네가 할 일만 해. 그 잘난 '읽기'로, 다 뒤집어엎어 버려!
루나 언니—…연이 학생. 언니가 마지막으로 하나만. …저 위의 왕도, 그 여자도, 미워 보이거든 그 미움 뒤를 봐. 거기엔 늘,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단다. …자네는 그걸 볼 줄 아는 아이야. 그러니 두려워 말고. …다녀오렴.
연이—…네, 언니. 갈림길을 보여 주라, 그 말 기억할게요. …다들, 고마워. 그리고 미안. 또 나 혼자 위로 가네. 근데 이번엔 안 외로워. …다녀올게. 우리 세계, 꼭 되찾아서.
창틀의 흰 고양이가, 마지막으로 연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몸을 돌려, 별길과는 다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자기만 아는 길로, 먼저 저 위를 향해. 연이는 그 뒷모습에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거기서 만나, 네오.
빛기둥이 연이를 완전히 감쌌다. 재성의 빵집이, 루나의 젖은 얼굴이, 모카의 곤두선 꼬리가, 점점 아래로 멀어졌다. 연이는 별들이 짜 놓은 길을 따라, 검은 하늘 꼭대기로 빨려 올라갔다.
상승은 낙하와 닮아 있었다. 위로 올라가는데, 뱃속은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 사방에서 별들이 강물처럼 흘렀다. 그리고 그 별들의 강 사이사이, 열두 개의 문(門)이 떠 있었다. 각기 다른 빛으로 물든, 거대한 별자리 관문이었다.
연이—…열두 개의 문. …이거, 자미두수의 열두 궁(宮)이야. 명궁, 형제궁, 부처궁, 자녀궁… 사람의 운명을 열두 갈래로 나눠 읽는 그 별자리 지도. 별들의 궁은, 이 열두 문 너머에 있는 거구나.
첫 번째 문, 명궁(命宮)을 지날 때. 문 안에서 연이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을목 넝쿨의 사주. 값이 아니라 뜻을 읽는 자. 완성된 그릇. 별들의 궁이 왜 그토록 연이를 탐냈는지, 그 문이 조용히 일러 주었다.
연이—…내 명궁. 별들의 궁이 원하는 건 결국 이거야. 백 년을 모아 완성한, 온전한 그릇 하나. 그 여자는 이걸 통째로 제 곳간에, 제 컬렉션의 정점으로 삼으려는 거고. …안 돼. 이 그릇은, 저 여자 진열장에 안 들어가. 갇힌 걸 다 풀어 주는 데 쓸 거야.
두 번째, 형제궁(兄弟宮)을 지날 때. 문 안에 루나가, 모카가, 백문이, 소망이가 어렸다.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운명을 나눈 이들. 연이가 이 여정에서 얻은, 진짜 형제들이었다. 그 온기가, 차가운 상승길에 잠시 온도를 더했다.
연이—…형제궁에 너희가 있네. 그래. 나 형제 없는 자취생이었는데, 이 세계 와서 잔뜩 생겼어. …이 문이 그걸 알아봐 주네. 고마워, 얘들아. 너희 덕에 나 안 외로워.
형제궁의 빛 속에서, 얼굴들이 하나씩 스쳐 갔다. 처음 재성에서 길을 잃은 연이를 데려간 루나. 무대 위에서 허세를 부리다 결국 사람들을 감싸던 모카. 백 년 만에 서가를 나선 백문. 죽음의 문턱에서도 남의 끼니를 챙기던 루나 언니. 그리고 품속에서 조용히 숨 쉬는 소망이.
연이—…루나. 넌 이제 나 없이도 온 골목을 물로 지키는 애가 됐어. 모카. 넌 겁쟁이인 척하면서 늘 제일 먼저 남을 감싸. 백문 님. 당신은 백 년의 외로움을 견디고도 남을 믿는 법을 안 잊었어. 언니. 당신은 아픔 속에서도 빵을 굽죠. …다들, 나보다 강해.
연이—…그래서 나 안 무서워. 이 그릇 하나 완성한 게 대단한 게 아니야. 너희 같은 사람들을 만난 게, 진짜 내 힘이야. 별들의 궁이 이걸 알았다면, 날 부르지 않았을 텐데. …이 형제궁이, 저 왕을 이길 진짜 무기야.
형제궁의 온기가 등 뒤로 멀어졌다. 그러나 그 온기는 연이의 가슴에 그대로 남아, 앞으로 마주할 어둠을 견딜 심지가 되었다. 연이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다음 문을 향해 올라갔다.
세 번째, 부처궁(夫妻宮)과 자녀궁(子女宮)이 나란히 떠 있었다. 부처궁은 흐릿하게 비어 있었지만, 자녀궁 안에서는 뜻밖의 얼굴이 어렸다. 종이 물고기, 소망이였다. 마치 연이가, 그 아이의 또 다른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연이—…자녀궁에 소망이가. …나 아직 그럴 나이 아닌데. 근데 이상하게, 저 애 생각하면 꼭 내 새끼 같기도 하고… 아니, 꼭 나 자신 같기도 해. 반드시 지켜야 할. …백문 님 딸인데, 왜 자꾸 내 궁마다 뜨지? …지켜야 할 마음엔 나이도 핏줄도 상관없는 걸까. 아니면 저 애랑 내가, 생각보다 훨씬 깊게 얽혀 있는 걸까.
네 번째, 질액궁(疾厄宮)을 지날 때. 문 안이 온통 검은 비였다. 그리고 그 비 한가운데, 창백한 아이가 가슴에 시계를 안고 앉아 있었다. 박지은이 부숴 가둔 어느 운명. 빌린 시간으로 겨우 깜빡이는, 지워진 별. 그 아이가 힘없이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이, 어딘가 연이 자신을 닮아 있었다.
연이—…저 아이. 질액궁에 있어. 병의 궁. …그래, 넌 아프구나. 부서진 채, 시들어 가는구나. 저 여자가 부숴서 곳간에 가둔, 어느 지워진 운명. …근데 왜 이렇게 낯익지. 왜 자꾸 나랑 겹쳐 보이지. …기다려. 나 지금 올라가고 있어. 널 다시 살려서, 원래 자리로 돌려줄게.
질액궁 깊은 곳에서, 얼굴 없는 남자가 검은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꿈에서 본 그 남자. 그가 창백한 아이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아이의 젖은 머리를 안타깝게 쓸어 주고 있었다. 이 아이만은 다른 길로 살리고 싶다는 듯이. 그리고 그의 등 뒤로, 은빛 사자의 그림자가 겹쳤다. 마치 그 남자와 사자가 한 몸인 것처럼.
연이—…또 저 남자야. 얼굴 없는. 은빛 사자랑 한 몸으로 겹치는. …네오. 백문 님이 마지막에 하려던 말. '네오를 잘…' 그다음이 뭐였을까. …저 남자랑 네오는 하나야. 그리고 저 창백한 아이는 나랑 겹쳐 보여. …이게 다 무슨 뜻이지. 왜 자꾸 가슴이 미어지지.
남자가 고개를 들어 연이를 보았다. 얼굴은 여전히 지워져 있었지만, 그 텅 빈 자리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와 줘서 고맙다. 하지만 조심해. 저 위의 왕은… 나이기도 하고, 내가 아니기도 하니.」
연이—…왕이 당신이기도 하고, 당신이 아니기도 하다고? …그게 무슨. …당신, 대체 누구야. 자미두수의 왕이랑 당신이랑… 설마 같은 사람이야? 아니, 갈라진 거야? 네오처럼, 하나였다가 둘로?
남자는 대답 대신 슬프게 웃는 듯했고, 검은 비에 흩어졌다. 질액궁의 문이 뒤로 멀어졌다. 연이는 그 조각 같은 말들을 가슴에 새겼다. 왕은 나이기도 하고, 내가 아니기도 하다. 그 수수께끼의 답이, 이 여정의 가장 아픈 진실일 것이었다.
나머지 문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재백궁, 천이궁, 노복궁, 관록궁, 전택궁, 복덕궁. 그리고 마지막, 부모궁(父母宮). 그 문 앞에서 연이는 잠시 숨이 막혔다. 부모궁 안에, 그림자 여인이 홀로 부서진 운명의 그림자를 제 전리품인 양 움켜쥐고 있었다. 그 여자, 박지은. 그리고 그 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얼굴 없는 남자가 그 광경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연이—…부모궁에 박지은이 저 시들어 가는 운명을 움켜쥐고 홀로. 안는 게 아니라, 놓칠까 봐 움켜쥐는 손이야. …그리고 저 얼굴 없는 남자는, 좀 떨어져서 안타깝게 볼 뿐이야. 저 여자 곁이 아니라. …저 남자, 저 여자랑 무슨 사이지? 근데 왜 저 남자가 내 꿈에 나와서 미안하다고 하지? 왜 나를 이 세계로 끌어들였다고 하지?
열두 문을 다 지나며, 연이는 이상한 걸 느꼈다. 자미두수의 열두 궁은 사람의 운명을 열두 갈래로 쪼개어 값을 매기는 지도였다. 그런데 그 어느 문에서도, 연이는 '값'을 보지 못했다.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의 뜻만 보았다. 명궁엔 각오가, 형제궁엔 온기가, 자녀궁엔 지켜야 할 마음이.
연이—…재밌네. 별들의 궁은 사람을 열두 칸짜리 표로 읽는 곳인데. 나는 그 표 안에서 자꾸 사람만 봐. …그래. 이게 나야. 값의 셈법으로 지은 이 궁에서, 나는 끝까지 뜻으로 읽을 거야. 그게 저 왕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라.
연이는 열두 문에서 본 얼굴들을 하나씩 마음에 새겼다. 루나, 모카, 백문, 루나 언니, 소망이, 그리고 얼굴 없는 남자와 창백한 아이. 지켜야 할 사람과, 이해해야 할 사람. 미워해야 할 적은, 한 명도 없었다. 그게 이 여정의 가장 어려운 점이자, 가장 연이다운 점이었다.
연이—…적이 없어. 이 싸움엔. 다들 각자의 슬픔에 갇혀 있을 뿐이야. 자미두수의 왕도, 박지은도, 무성도. …그럼 내가 할 일은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그 갇힌 문을 하나씩 열어 주는 거야. 루나 언니 말대로. 미움 뒤의, 지키고 싶은 걸 봐 주는 거.
부모궁의 문이 열두 궁 중 마지막으로 닫혔다. 연이는 이제, 그 열두 문 너머에 있었다. 별들의 강이 끝나고, 발밑에 단단한 무언가가 딛혔다. 상승이, 멈췄다.
눈앞에, 그것이 있었다. 검은 하늘 전체를 차지한, 별로 지어진 거대한 궁전. 스물여덟 개의 탑이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처럼 돋아 있고, 그 사이를 검은 물이 강처럼 휘감아 흘렀다. 별들의 궁이었다.
연이—…이게 별들의 궁. …엄청나다. 탑이 스물여덟 개. …저 검은 물. 무성이야. 식상의 하늘, 오염된 검은 물의 새. 저게 궁 전체를 휘감아서, 아래 세계의 이야기를 위로 빨아올리고 있어. …근원은 저 물이야. 그리고 저 물을 부리는 게, 왕이겠지.
연이가 딛고 선 발밑에서, 검은 물이 스스로 다리를 놓았다. 궁의 정문까지 이어지는, 검은 물의 외길. 다른 길은 없었다. 오직 앞으로, 왕에게로. 별들의 궁은 손님을 딱 한 방향으로만 안내했다.
연이가 그 외길을 걷기 시작하자, 검은 물 위로 새들이 솟구쳤다. 스물일곱 마리. 잉크로 빚은 듯한 검은 새들이, 소리 없이 연이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무성. 스물일곱 별자리의 하늘이, 침입자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연이—…스물일곱 마리. 저게 무성의 진짜 몸이구나. 새 한 마리가 별자리 하나. …날 감시하고 있어. 근데 공격은 안 해. 왕이 나를 '데려오라' 했으니까. …그래. 왕한테 갈 때까진, 얌전히 안내받아 주지.
연이는 무성의 검은 눈들을 올려다보며, 문득 안쓰러움을 느꼈다. 원래는 맑은 샘이었던 새. 억지로 오수가 되어, 남의 이야기를 삼키는 일에 동원된 새. 저 새도, 갇힌 자였다.
연이—…너도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잖아. 이야기를 삼키는 게 아니라, 낳는 애였잖아.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괜찮아. 나중에, 너도 풀어 줄게. 지금은 아니지만. …기억해 둬. 나 널 미워하러 온 거 아니야.
새 한 마리가, 아주 잠깐, 날갯짓을 멈췄다.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이내 다시 검은 무리에 섞여 맴돌았다. 연이는 그 찰나의 멈칫을 놓치지 않았다. 저 안에도, 되살릴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검은 물의 외길 끝, 별들의 궁 정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안쪽은 온통 어둠이었고, 그 어둠 깊은 곳에서 왕좌의 윤곽만이 희미하게 빛났다. 연이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재성도, 루나도, 현실의 자취방도, 전부 저 아래에 두고 왔다. 이제 연이는 이 거대한 침묵의 궁전에, 홀로 서 있었다. 그러나 손목의 조약돌은 여전히 따뜻했고, 품속 물고기는 여전히 숨 쉬었다.
연이—…홀로 왔지만, 혼자는 아니야. 넷이 함께잖아. …자, 이제 정말 시작이다. 별들의 궁. 자미두수의 왕. 그리고 이 모든 슬픔의 한가운데. …끝까지 읽고, 끝까지 되쓸 거야.
연이는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며, 궁전의 규모를 가늠했다. 천장은 밤하늘 그 자체였고, 스물여덟 별자리가 낱낱이 박혀 조용히 회전했다. 그 별들 아래, 사람의 운명을 재고 나누고 셈해 온 백 년의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연이—…춥다. 여긴 온도가 없어. 웃음도, 눈물도, 밥 짓는 냄새도 없어. 오직 셈만 있어. …이 차가운 곳에서 백 년을 앉아 있었으면, 누구라도 마음이 얼겠지. 저 왕도. 박지은도. …그래서 내가 온기를 들고 온 거야.
연이는 회랑을 따라, 그 희미하게 빛나는 왕좌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마다, 발밑의 검은 물이 파문을 그리며 그 도착을 궁 전체에 알렸다. 손님이, 마침내 심장부에 다다르고 있었다.
궁의 가장 높은 탑, 그 꼭대기에서 아주 작은 불빛이 깜빡였다. 힘없이 꺼져 가는 창백한 빛. 그 여자가 부숴 가둔 지워진 운명의 별. 그런데 그 창백한 빛 한가운데, 작고 순한 청록빛이 겹쳐 깜빡이고 있었다. 소망이였다. 두 빛은, 떼려야 뗄 수 없이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연이는 그 빛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연이—…소망아. 저기 있구나. 그 창백한 운명이랑 한 빛으로 포개진 채. …왜 자꾸 너랑 저 운명이, 그리고 나까지, 셋이 아니라 하나처럼 느껴지지. …기다려. 나 왔어. 이제 이 궁 다 지나서, 너한테 갈게. 그리고 저 시들어 가는 운명도, 다 되살려서 데리고 내려갈게.
연이는 어둠의 회랑을 걸었다. 발소리가 별들의 궁 벽에 부딪혀, 백 년의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벽마다, 이 세계에서 빨아올린 이야기들이 검게 굳어 박제되어 있었다. 재성의 웃음, 도서관의 지혜, 이름 없는 이들의 사랑. 전부, 여기 걸려 있었다.
연이—…여기가 다 삼킨 이야기들의 무덤이야. 저 여자, 이걸 다 모아서 뭘 하려는 거지. …아니, 알아. 딸의 꺼져 가는 별에 부으려는 거지. 이 모든 세계의 이야기를, 단 한 아이의 시간으로. …그건 안 돼. 절대.
회랑을 걸을수록, 검은 물이 속삭였다. 「돌아가라. 너 하나 그릇을 내어 주면, 모두가 편해진다. 그 여자가 만족하고, 이 세계도 더는 시들지 않는다. 값을 치르면, 셈은 끝난다.」 유혹은 달콤했고, 논리는 매끄러웠다.
연이—…그럴싸하네. 나 하나 희생하면 다 산다. …근데 그거 알아? 그런 '한 명만 죽으면 다 산다'는 셈, 그게 바로 이 궁이 백 년째 돌린 셈법이야. 그 셈이 지금 온 세계를 이렇게 만든 거고. …나는 그 셈을 안 풀어. 다른 답을 써서 올 거야.
속삭임이 잠시 그쳤다. 연이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완성된 그릇은 대개 두려움에 떨거나, 체념하거나, 도망쳤다. 스스로 걸어 들어와, 셈법 자체를 거부하는 손님은 처음이었다.
회랑 벽의 박제된 이야기들이, 연이가 지날 때마다 미세하게 떨렸다. 오래 삼켜져 잊혔던 이야기들이, 연이의 '읽는 눈' 앞에서 잠깐씩 제 빛을 되찾으려 꿈틀댔다. 마치, 구해 달라고 손을 뻗는 것처럼.
연이—…다들 아직 여기 있구나. 삼켜졌어도, 안 죽고. …기다려. 나 저 왕이랑 얘기 끝내면, 너희 전부 제자리로 돌려보낼게. 재성으로, 도서관으로, 원래 너희가 있던 사람들 마음속으로. …하나도 안 버려.
연이의 발걸음에, 두려움 대신 사명이 실렸다. 이 궁은 이야기들의 무덤이 아니라, 잠시 이야기들을 맡아 둔 창고여야 했다. 연이가 그렇게 되쓸 것이었다. 회랑은 길었지만, 연이는 한 번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연이—(…흔들리지 마, 연이. 저 속삭임, 그럴싸해서 더 위험해. 정말로 시들어 가는 운명이 저기 있으니까. 근데 그건 저 여자가 부순 거야. 내가 나를 내어 주는 걸로 갚을 죄가 아니야. …값의 셈이 아니라, 다 되살리는 셋째 길을 찾아야 해.)
연이는 손수건을 매만지고, 본필을 고쳐 쥐고, 물 조약돌의 온기를 느끼고, 품속 종이 물고기의 무게를 확인했다. 넷이 함께였다. 그 감촉 하나하나가, 검은 물의 속삭임을 밀어냈다. 연이는 흔들리지 않고, 왕좌를 향해 마지막 걸음을 옮겼다.
그때, 궁 전체가 낮게 울렸다. 스물여덟 개의 탑이 일제히 연이 쪽으로 기울듯, 검은 물이 발밑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궁의 심장부, 별들이 가장 짙게 소용돌이치는 왕좌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낯익은, 그러나 어딘가 금이 간 목소리였다. 다정함과 잔인함이 한 몸에 깃든, 그런 목소리. 「왔구나. 왕좌의 손님.」
연이—…드디어. 당신이군요. 별들의 궁의 왕. …그리고 어쩌면, 내 꿈속 그 남자와… 얽힌 사람. …좋아요. 미워하러 온 거 아니에요. 읽으러 왔어요. 당신이 뭘 그렇게 지키고 싶은지. 자, 문 여세요. 우리 얘기 좀 해요.
왕좌의 어둠이 천천히 술렁였다. 금 간 목소리가, 이번엔 웃음기를 머금고 되돌아왔다. 「얘기라. …백 년 만에 듣는 말이구나, 그 단어. 좋다. 이야기해 보자. 네가 내 셈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아니면 결국 저 여자의 마지막 수집품이 될지.」 별들의 궁의 진짜 문이, 이제 막 열리려 하고 있었다.
제30화 · 앱이 다시 울린 밤 — 끝. 제31화 「별들의 궁」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