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51S · 71 / 73

남는 사람

연이가 운세 세계를 삶의 터전으로 고른다. 서한비는 현실로 돌아가고, 스물세 번째 문은 두 세계의 소식을 잇는다.

한글 약 1,800자 · 읽는 시간 약 4분

연이의 손가락이 달빛 세계수 카드에 닿았다. 광장 전체가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열린 문의 벚꽃 풍경이 조용히 멀어졌다.

[ 선택 완료 · 운세 세계에 남는다 ]

연이—나 여기 남을게.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내가 지킨 사람들과 내가 바꾼 세계에서 다음을 살고 싶어.

네오—그럼 나도 남는다. 이번엔 수호자 규정 때문이 아니라, 박병하로서 내가 고른다.

네오의 몸을 풀던 빛이 멈췄다. 하얀 고양이의 꼬리가 신기루처럼 겹쳐지더니, 인간 박병하의 심장 소리가 다시 또렷해졌다.

서한비—연이 씨, 저는 돌아갈게요. 그곳에서 따져야 할 빚과 사과해야 할 사람이 있어요.

연이—가서 갚지 말고 살아. 다 갚은 다음에 살겠다고 미루면, 그건 또 다른 장부야.

서한비—네. 이번엔 매일 한 줄씩 제 삶을 쓸게요. 귀환이 청산만은 아니라는 걸 기억할게요.

연이는 노란 우산을 펼쳐 서한비의 손에 쥐어 주었다. 테이프 세 겹이 감긴 우산대가 두 세계 사이에서 따뜻했다.

모카—잠깐. 현실로 가면 이거 받아. 내 신곡 첫 소절이야. 저작권은 아직 없으니까 마음대로 들어.

윤달—스물세 번째 문은 폐쇄가 아니라 연결이에요. 한 달에 한 번은 소식을 보낼 수 있어요.

연이—그럼 엄마한테도 편지할 수 있네. 사라진 딸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집을 지은 딸로.

네오—처음 편지는 같이 쓰자. 네가 충동적으로 별점부터 매기면 안 되니까.

연이—내 편지에 왜 네가 검수를 해. 그리고 엄마는 내 별점 습관 이미 알아.

서한비가 웃었다. 첫 번째 봄에는 보지 못했던 웃음이었다. 그녀는 우산을 들고 현실의 벚꽃 문 앞에 섰다.

서한비—다음 비에 다시 만나요. 그때는 제가 우산을 기울일게요.

문이 닫힌 뒤에도 노란 빛 한 줄이 공중에 남았다. 그 빛은 끊어진 길이 아니라, 문처럼 열린 약속이었다.

모카—자, 작별은 끝. 남은 사람들은 밥부터 먹자. 세계를 구해 놓고 굶으면 체면이 말이 아니야.

모카가 팬을 돌리자 야채와 불꽃이 비트에 맞춰 뛰었다. 연이는 웃으며 테이블에 접시를 놓았다.

윤달—이제 연이 씨의 명식은 이 세계에도 자리를 잡았어요. 운이 주소를 정한 게 아니라, 사람이 주소를 선택한 거예요.

연이—여기서도 아침에 잘 일어나야 하고, 일하고, 싸우고, 사과하겠지. 그래서 남은 거야. 삶이 계속되는 곳이니까.

네오—잘 알고 있군. 내일 아침 일곱 시에 깨운다. 운세 세계에 남았다고 지각이 사라지진 않아.

연이—선택 취소할까 생각 중이야.

모두가 웃었다. 세계수 잎사귀 사이로 달빛이 내렸고, 연이는 그 빛 아래서 처음으로 여기를 집이라고 불렀다.

작별 뒤의 광장은 조용했지만 허전하지 않았다. 허전함이 들어올 자리마다 남은 동료들의 숨소리와 발소리가 차곡차곡 채웠다.

연이는 현실을 버린 것이 아니라 두 세계 사이의 거리를 새로 정한 것이라고 자신에게 설명했다. 설명할수록 마음은 더 분명해졌다.

연이—내가 선택한 것에도 그리움은 남을 거야. 그래도 그리움이 있다고 잘못 고른 건 아니야. 두 마음은 같이 있을 수 있어.

네오—그래. 선택은 하나를 사랑하려고 다른 하나를 미워하는 일이 아니다. 네가 남긴 곳도 네 삶의 일부야.

병하는 세계수 뿌리 결을 따라 작은 집터를 보여 주었다. 물길이 보이고 찻집의 달빛은 닿지만, 국자 소리는 조금 작게 들리는 곳이었다.

모카—내 국자가 소음이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결혼 선물로 대형 냄비 세트를 보내 줄 거니까 기대해.

연이—우리 아직 결혼 얘기 안 했거든? 집터만 봤거든?

네오—나는 마음속으로는 했다. 소리 내서 하는 건 집을 지은 다음에 하지.

연이의 귀 끝이 붉어졌다. 꽃돼지 몸으로도 표정은 감추어지지 않았다. 모카는 마이크를 낮추고 평생 놀릴 소재를 얻은 수달처럼 웃었다.

밤이 깊어지자 함께 걸었던 섬들에서 소식이 도착했다. 일식은 물러갔고, 멈춘 축제는 다시 열렸으며, 잊힌 이름들은 하나씩 주인을 찾았다.

윤달—연이 씨가 남아서 할 일이 벌써 생겼네요. 구하는 일이 끝난 뒤에는 회복하는 일이 남아요.

연이—그건 혼자 못 해. 다 같이 할 거야. 내가 주인공이라고 세계 전체를 들고 갈 생각은 없어.

연이는 하루의 끝에 세계수 뿌리에 등을 기댔다. 아직 집도, 직업도, 앞으로의 계획도 완전하지 않았지만 발밑의 흙은 확실했다.

병하가 그 옆에 앉았다. 둘은 긴 시간 말이 없었다. 사라지지 않고 같은 밤을 견디는 일이, 그들에겐 가장 새로운 약속이었다.

연이—내일부터 여기서 살아 보자. 잘하는 날도, 잘 못하는 날도 다 내 선택으로 만들면서.

연이는 서한비가 떠난 문 앞에 작은 의자 하나를 놓았다. 다음 월에 편지가 올 때면 그곳에 앉아 한 글자도 빼뜨리지 않고 읽을 생각이었다.

남는 것은 문을 닫는 일이 아니었다. 연이는 이제야 돌아갈 곳을 상상하는 대신 여기서 내일 할 일을 쓰기 시작했다.

연이—내일은 찻집 창문을 닦고, 모레는 비겁의 섬에 가서 깨진 거울을 고칠 거야. 그다음은 그때 고르자.

네오—충분히 현실적인 계획이군. 단, 창문은 내가 닦는다. 네가 닦으면 오히려 무늬가 더 생겨.

연이는 평소처럼 반박했고, 병하는 평소처럼 굳이 양보하지 않았다. 그 사소한 다툼이 두 사람 모두에게 기적보다 더 기적 같았다.

첫 번째 봄에서는 내일이 없었고, 두 번째 봄에서는 내일을 지키려고 모든 것을 숨겼다. 이제 둘은 내일을 공개적으로 함께 준비했다.

연이—영냥이, 네가 나를 구하러 왔다는 건 안 잊을게. 하지만 이제부터 살아 남는 건 우리가 같이 할 거야.

네오—알겠다. 구조는 한 번으로 끝나지만, 삶은 계속 서로의 손을 요구하니까.

[ 스물세 번째 문 · 첫 번째 편지 발송 준비 · 내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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