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음이 두 번 울렸다. 세 번째 신호음 대신 딸깍 소리가 났다. 세계수의 잎들이 일제히 바스락거리다 멈췄다.
우주—고객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운명 고객센터, 우주입니다.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렸다. 나무에서도, 땅에서도, 연이의 휴대폰에서도. 지나치게 친절한 목소리였다.
연이—오래 기다린 거 알긴 알아요? 대기 인원 무한대였어요!
우주—네, 고객님. 불편을 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현재 우주 전체에 문의가 폭주하고 있어서요.
모카—우주가 상담원이었어? 상담원이 우주였어?
윤달—둘 다 맞는 것 같은데요.
우주—접수 내용 확인했습니다. 운명 코드 손상, 87퍼센트. 원인 흑월. 처리 결과, 흑월 소멸. 명식 8/8 복구.
연이—다 알고 있었어요?
우주—기록은 다 남습니다, 고객님. 처리가 늦었을 뿐이에요.
네오—늦은 게 늘 문제지.
네오가 낮게 투덜거렸다. 연이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지금 이 순간 그 말을 할 자격은 네오에게 제일 없었다.
서한비—저도 한마디 해도 될까요. 그 기록에, 제가 한 일도 다 남아 있나요?
우주—네, 고객님. 빠짐없이요. 지운 박수도, 돌려준 이름도 같은 쪽에 적혀 있습니다.
서한비는 고개를 숙였다. 변명하지 않았다. 우산 손잡이를 쥔 손가락에만 힘이 들어갔다.
윤달—그럼 제가 궁합 보고 받은 돈도 다 적혀 있겠네요.
우주—네. 환불 요청이 세 건 들어와 있습니다.
윤달—우주에도 민원이 들어가요? 누가 넣었는데요?
우주—마지막 절차가 하나 남았습니다. 23번 카드 작성입니다. 비어 있는 운명은 또 무언가를 불러들이거든요.
빈 카드가 연이 앞으로 내려왔다. 펜도 함께였다. 연이의 메모장에 꽂혀 있던 그 볼펜이었다.
연이—내가 써요? 뭘 써요? 맞춤법 틀리면요?
우주—한 줄입니다. 고객님이 쓰신 한 줄이 이 문의 규칙이 됩니다. 신중하게 부탁드립니다.
윤달—연이 씨. 한 줄이면 뭐든 돼요. 진짜로 뭐든.
연이는 펜을 쥐었다. 머릿속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엄마의 일 년. 윤달의 이름. 서한비의 첫 번째 봄. 그리고 네오.
우주—참고로 안내드립니다. 수호자는 임무가 끝나면 이 세계의 기억을 두고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규정입니다.
펜을 쥔 손이 멈췄다. 연이는 네오를 보았다. 네오는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연이—너 알고 있었어?
네오—처음부터. 돌아가면 나는 박 뭐시기다. 너를 모르는.
연이—그 박 뭐시기 소리 하지 마. 짜증 나.
둘레가 카드 회랑으로 바뀌었다. 세계수 꼭대기에서 바라본 하늘처럼, 수많은 카드가 별처럼 떠 있었다. 둘만 남은 것처럼 조용했다.
연이—그럼 그 한 줄에 쓰면 되잖아. 네오는 기억을 가지고 돌아간다. 이렇게.
네오—그렇게 쓰면 되지.
연이—근데 그렇게 쓰면.
연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위를 보았다. 세계수의 가지에서 떨어진 종이 잎들이 아직 땅에 흩어져 있었다. 이름이 지워진 채로.
연이—저 사람들 이름은 못 돌려줘. 도담이도. 무성이도. 윤달 씨 진짜 이름도.
네오—알아.
연이—너는 왜 맨날 다 알아. 짜증 나게.
네오가 큰 머리를 연이의 어깨에 기댔다. 무거웠다. 따뜻했다. 갈기 끝이 볼을 간질였다.
네오—내 이름은 이미 네가 하나 지어 줬다. 그거면 됐다. 쓰고 싶은 거 써라.
연이—그게 제일 치사한 말이야.
네오—알아.
연이는 네오의 갈기에 얼굴을 묻었다. 비 냄새와 햇볕 냄새가 섞여 있었다. 첫날 밤 침대 끝에서 맡았던 냄새였다.
연이—내가 다시 찾으면. 그때는 모른 척하지 마.
네오—모른 척이 아니라 진짜 모를 거다.
연이—그럼 진짜로 알게 만들 거야. 별점 테러를 해서라도.
네오—그건 무섭군.
연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리고 카드 위에 펜을 댔다. 글씨가 삐뚤었다. 고치지 않았다.
[ 23 · THE DOOR · 먹힌 이름은 모두 주인에게. 문은 안에서도 열린다. ]
마지막 글자를 쓰자 카드가 빛났다. 그림이 생겨났다. 문 하나. 반쯤 열린 나무 문. 문 앞에 우산 하나가 기대어 있었다.
우주—접수되었습니다. 좋은 한 줄이네요, 고객님. 특히 뒷부분이요.
연이—뒷부분은 그냥 쓴 거예요. 문은 안에서도 열려야 공평하잖아요.
우주—네. 저희가 그 조항을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은 앞으로 양쪽에서 열립니다.
네오의 귀가 쫑긋 섰다. 우주의 말 속에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걸, 연이보다 네오가 먼저 알아챘다.
세계수의 잎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지워졌던 종이마다 글자가 다시 채워졌다. 이름들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주인을 찾아서.
멀리서 북소리가 들렸다. 작은 손으로 치는 서툰 북소리. 연이는 그 박자를 알았다. 식상의 섬에서 들었던 박자였다.
모카—도담이야. 도담이가 자기 이름 찾았나 봐.
그다음엔 노랫소리가 들렸다. 까마귀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아니었다. 소년의 맑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
연이—무성이다. 노래하네. 아무도 안 비웃네. 음정은 좀 나가는데.
윤달이 자기 손바닥을 보았다. 이름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손금 위에 내려앉았다. 윤달은 그 글자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윤달—아.
서한비—뭐라고 써 있어요?
윤달—비밀이라니까요. 집 문 앞에서 말한다고 했잖아요.
연이—여기가 문 앞이잖아요! 문 생겼잖아요!
윤달이 반쯤 열린 나무 문을 보았다. 그리고 체념한 듯 웃었다.
윤달—새벽이요. 강새벽. 새벽 다섯 시 이십 분에 태어나서 엄마가 그렇게 지었대요.
모카—새벽 오빠. 윤달보다 훨씬 낫다.
윤달—그래도 궁합 볼 때는 윤달로 할게요. 그쪽이 장사가 잘돼서.
서한비가 망토 안쪽을 들추었다. 이름을 꿰매 두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실밥만 몇 가닥 남아 있었다.
서한비—다 갔네요. 이제 제가 들고 있을 이름이 없어요.
연이—서운해요?
서한비—아니요. 가벼워요. 이렇게 가벼운 건 오랜만이라 좀 어색할 뿐이에요.
문 앞에서 작별 인사가 시작되었다. 아무도 먼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결국 모카가 팔짱을 끼고 먼저 나섰다.
모카—나는 여기 남아. 섬에 노래 다시 가르쳐야 하거든. 랩 포함.
연이—랩은 빼는 게.
모카—랩이 핵심이야! 너 별점 그거 다시 매겨. 이번엔 다섯 개로.
연이—다섯 개. 맛이 범죄라서 다섯 개.
모카—앱 지우지 마. 메시지 보낼 거야. 진짜로.
윤달, 아니 강새벽이 손을 내밀었다. 연이가 그 손을 잡았다. 장갑 없는 손이었다. 따뜻했다.
윤달—현실에서 만나면 모른 척하지 마요. 저 잊혀지는 거 이제 질렸어요.
연이—생년월일 물어보면 모른 척할 거예요.
윤달—그건 직업병이라 못 고쳐요.
네오—손 너무 오래 잡는다.
윤달—작별인데요? 이 정도는 봐주세요, 사자 씨.
네오—삼 초 줬다. 끝났다.
서한비가 연이 옆에 섰다. 테이프 세 겹 감긴 우산을 쥐고. 서한비도 같은 문으로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이름이 주인에게 돌아갈 때, 서한비라는 이름도 현실로 돌아갔다.
서한비—저는 저쪽에서 할 일이 있어요. 갚을 게 많거든요. 장부 없이요.
마지막으로 네오가 남았다. 하얀 사자는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연이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둘 다 한동안 문만 보았다.
네오—별점은 몇 개 줄 거냐.
연이—지금 그걸 물어? 아직 안 정했어.
네오—정하면 알려 줘라. 듣고 갈 수 있으면 듣고 가게.
사자의 몸이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다. 갈기가 짧아지고, 큰 발이 동그래졌다. 사자에서 고양이로.
연이—가지 마.
네오—가야 한다. 규정이다.
연이—우주한테 다시 전화할 거야. 대기 무한대여도 할 거야.
네오—그건 좀 보고 싶군.
고양이가 된 네오가 연이의 발목에 이마를 비볐다. 첫날 밤처럼. 그리고 연이의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양말. 짝 맞춰 신어라.」
연이—마지막 말이 또 그거야?
「마지막 아니다. 문은 안에서도 열린다며.」
고양이의 모습이 빛으로 풀렸다. 하얀 빛이 문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이는 손을 뻗었다. 손끝에 털 한 올이 스쳤다.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자취방 천장. 얼룩 하나까지 그대로였다. 창밖에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 끝이 비어 있었다. 고양이가 늘 웅크리던 자리. 둥글게 눌린 자국도 없었다.
연이—네오.
대답은 없었다. 사료 그릇도, 털 뭉치도, 긁힌 소파 모서리도 없었다. 처음부터 고양이 같은 건 키운 적 없는 방이었다.
그런데 현관 옆에 우산이 하나 서 있었다. 테이프가 세 겹 감긴 노란 우산. 연이는 그 우산을 산 기억이 없었다.
연이—이건 있네. 이건 남았네.
책상 위 메모장도 그대로였다. 마지막 장에 삐뚤삐뚤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네오는 고양이 아님. 사자. 내 편.
연이는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박 뭐시기. 찾을 것. 그리고 볼펜을 내려놓았을 때, 머리맡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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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는 화면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엄지를 별 위에 올렸다가, 누르지 않고 내려놓았다.
연이—아직. 다 끝나면 줄 거야.
창밖이 완전히 밝아졌다. 연이는 짝이 맞는 양말 두 짝을 서랍에서 꺼냈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