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 DESTINY꿀꿀 운세

EP.49 · 66 / 70

세계수

마지막에만 열리는 세계수. 윤달이 공망으로 흑월의 핵을 삼키고 저주도 함께 닫힌다.

한글 약 2,707자 · 읽는 시간 약 6분

뿌리를 따라 한참을 내려갔다. 어둠이 끝나는 곳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하늘 다섯 개를 다 합친 것보다 큰 나무였다.

가지마다 잎 대신 작은 종이가 매달려 있었다. 종이마다 여덟 칸이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의 생년월일시였다.

윤달—세계수. 모든 명식이 매달린 나무예요. 점술가들 사이에서는 전설인데. 진짜 있었네.

모카—저 종이 하나하나가 사람이야?

윤달—네. 모카 씨 것도, 제 것도, 연이 씨 엄마 것도 어딘가에 있어요.

연이—(엄마 것도. 저기 어딘가에.)

네오—찾지 마라. 찾으면 손을 대고 싶어진다. 여기서는 남의 종이에 손대면 안 된다.

연이—안 찾아. 그냥 저기 있다는 것만 알면 돼.

연이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종이 잎이 바스락거렸다. 수십억 개의 생일이 한꺼번에 속삭이는 소리였다.

그런데 바스락 소리 사이로 다른 소리가 섞여 있었다. 무언가를 갉아먹는 소리였다.

줄기 한가운데에 검은 구멍이 나 있었다. 씨앗만 하던 흑월이 그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구멍 둘레의 나이테가 하나씩 검게 변했다.

네오—나이테를 먹고 있다. 한 줄이 일 년이다.

위쪽에서 종이 잎 몇 장이 팔랑 떨어졌다. 땅에 닿기도 전에 글자가 지워졌다.

연이—저 사람들, 어떻게 돼? 종이가 지워지면?

윤달—현실에서 누군가의 일 년이 없어져요. 생일이 기억에서 빠지거나, 이름이 흐려지거나. 제가 겪은 것처럼요.

서한비—뿌리가 마르고 있어요. 물을 줄게요.

서한비가 우산을 거꾸로 들었다. 우산 안에 비가 고였다가 넘쳐흘렀다. 물이 뿌리를 따라 스며들었다. 시든 잔뿌리가 하나씩 고개를 들었다.

모카—나도 뭐 해야지. 불 붙여서 저거 태워 버릴까?

윤달—안 돼요! 여긴 나무예요! 모카 씨 불 붙이면 세계가 장작 돼요!

모카—나 할 줄 아는 게 불밖에 없는데!

연이—불 말고 따뜻하게. 우리 섬에서 했잖아. 해 뜰 때.

모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줄기에 댔다. 불꽃이 아니라 온기가 퍼졌다. 줄기 겉의 서리가 녹았다. 잎 사이에서 잠든 새들이 깨어났다.

모카—이렇게 하는 거구나. 태우지 않고 데우는 거.

서한비—모카 씨, 방금 그거 꽤 멋있었어요.

모카—칭찬하지 마. 어색해. 너 장부 쓸 때가 더 편했어.

서한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웃음에 맞춰 흔들렸다.

네오—구멍을 넓혀서 놈을 끄집어내겠다.

네오가 앞발을 들었다. 발톱 끝에 금빛이 섰다. 그런데 발톱이 줄기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연이—왜 멈춰.

네오—나는 金이다. 金은 나무를 벤다. 놈을 끄집어내려면 이 나무를 갈라야 한다.

네오의 발톱이 떨렸다. 연이는 그 떨림을 알았다. 섬에서, 숨을 받쳐 주던 날에도 그랬다. 나는 너를 다치게 하는 기운이야, 라고 말하던 날.

연이—그럼 베지 마. 받쳐 줘. 나한테 했던 것처럼.

네오가 발톱을 거뒀다. 대신 등으로 줄기를 받쳤다. 금빛이 줄기를 감싸며 버팀목이 되었다. 갉아먹힌 나이테가 더 이상 갈라지지 않았다.

네오—이러면 놈을 꺼낼 수는 없다. 대신 나무가 쓰러지지는 않지.

연이—그게 맞아. 넌 원래 그쪽이야. 받치는 쪽.

흑월—받쳐 봐라. 버텨 봐라. 결국 나는 이 안에 있다.

줄기 속에서 검은 손이 뻗어 나왔다. 이번엔 수백 개가 아니었다. 단 하나. 대신 크고 굵었다. 나무의 결을 따라 위로 기어올랐다.

흑월—이 나무가 내 마지막 몸이다. 나를 꺼내려면 나무를 죽여야 하고, 나무를 살리려면 나를 둬야 하지.

모카—비겁해! 남의 집에 숨어서 협박이나 하고!

흑월—그게 내가 사는 법이다. 빈 곳에 들어가 사는 것. 너희 그릇이 차 버렸으니 이제 여기밖에 없다.

연이는 그 말을 곱씹었다. 빈 곳에 들어가 사는 것. 비어 있어서 무엇이든 들어가는 자리.

연이—(빈 곳. 비어 있는 자리. 어디서 들었더라.)

연이는 고개를 돌렸다. 윤달이 이미 장갑을 벗고 있었다.

흑월—너희도 알지 않느냐. 비어 있는 건 배가 고프다. 나는 처음부터 배가 고팠을 뿐이다.

연이—배고픈 건 알아. 근데 남의 생일을 먹으면 안 되지. 그건 그 사람 거야.

흑월—그럼 나는 무엇을 먹느냐. 나에게는 생일이 없다.

연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물음은 이상하게 오래 귀에 남았다. 생일이 없는 것.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것.

윤달—연이 씨가 방금 생각한 거, 저도 생각했어요.

연이—아니에요. 생각 안 했어요. 진짜 안 했어요.

윤달—빈 곳은 빈 곳이 먹어요. 제 손바닥은 흑월이 처음 만든 구멍이에요. 청토끼가 제 시를 먹을 때 뚫린 자리. 원래 저놈 거라고요.

윤달—그러니까 돌려주는 거죠. 주인한테. 아주 꽉.

네오—그걸 먹으면 너도.

윤달—압니다. 공망이 얼마나 커질지 모르죠. 저도 같이 비워질 수도 있고요.

서한비—그건 갚는 게 아니에요. 그냥 사라지는 거예요.

서한비—제가 할게요. 저는 원래 흑월 쪽에 있던 사람이에요. 빚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게 맞아요.

윤달—서한비 씨 손은 물이에요. 물은 구멍을 못 메워요. 그냥 흘러 들어가죠. 이건 제 손이어야 해요.

윤달—서한비 씨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많이 컸네요, 우리 장부 전문가.

윤달은 웃으며 손바닥을 줄기의 검은 구멍에 댔다. 장갑 없는 맨손이었다. 손목까지 번진 검은 원이 구멍과 맞닿았다.

빨아들이는 소리가 났다. 아주 길고 깊은 숨 같은 소리. 검은 손이 줄기에서 뜯겨 나와 윤달의 손바닥으로 끌려 들어갔다.

흑월—놓아라. 이건 내 구멍이다. 내가 뚫은.

윤달—그러니까요. 당신이 뚫었으니까 당신이 메워야죠.

윤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검은 원이 손목을 넘어 팔꿈치까지 번졌다. 그의 윤곽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모카—어, 저기, 저 사람. 누구였지. 이름이.

모카가 말하다 멈췄다. 입술이 움직이는데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모카 자신도 놀란 얼굴이었다.

연이—윤달 씨!

연이가 소리쳤다. 이름이 공중에 걸렸다. 윤달의 윤곽이 그 소리에 아주 조금 선명해졌다.

윤달—그거 가명이에요. 있어도 없는 달. 그래서 잘 안 붙어요.

연이—가명이어도 우리가 부른 이름이에요! 네오도 별명인데 돌아왔잖아요!

서한비—윤달 씨. 윤달 씨.

모카—윤달 오빠! 생년월일 물어봐도 돼! 다 알려 줄게!

이름이 한 번 불릴 때마다 윤달의 윤곽이 한 겹씩 돌아왔다. 넷의 목소리가 그를 바닥에 붙잡아 두었다.

네오—윤달. 아직 연이 어깨에서 손 치우라는 말 덜 했다. 돌아와라.

윤달—아, 그 말 들으니까 돌아가고 싶네요. 질투받으러.

마지막 한 가닥까지 빨려 들어갔다. 윤달의 손바닥 위에서 검은 원이 오므라들었다. 점점 작게, 작게. 마침내 점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점마저 사라졌다. 남은 것은 평범한 손바닥이었다. 손금이 있고, 굳은살이 있고, 조금 떨리는 손.

흑월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아주 작은 한숨이었다. 배부른 한숨인지, 배고픈 한숨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연이—(잘 가. 다음엔 네 생일이 있는 데서 태어나.)

윤달—닫혔어요. 공망이. 비어 있는 게 비어 있는 걸 먹으니까 메워졌어요.

윤달이 손을 쥐었다 폈다. 몇 번이나. 쥐어지는 감각이 낯선 것처럼.

줄기의 구멍도 아물었다. 검게 변했던 나이테가 다시 갈색으로 돌아왔다. 떨어졌던 종이 잎들이 바람을 타고 가지로 되돌아가 매달렸다.

모카—윤달 오빠. 이름 기억나. 아까 왜 안 났지. 미안해.

윤달—괜찮아요. 저도 제 이름 모르는데요.

그 순간 윤달의 손목 위로 작은 빛이 떠올랐다. 시계 바늘이었다. 다섯 시 이십 분. 바늘이 거기서 딱 멈췄다.

[ 卯時 · 05:20 · 돌아옴 ]

윤달—제 시예요. 진짜 제 시. 새벽 다섯 시 이십 분. 해 뜨기 직전.

윤달은 오래 말이 없었다. 그러다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누구도 그 모습을 놀리지 않았다.

연이—그럼 이름도요? 진짜 이름.

윤달—그건 비밀. 아직 집에 안 갔잖아요. 집 문 앞에서 말할게요.

네오—끝까지 능글맞군.

윤달—사자님이야말로. 아까 제 이름 부를 때 목소리 떨리던데요.

네오—안 떨렸다.

연이—떨렸어. 나 들었어. 별점 하나 추가.

나무 꼭대기가 열렸다. 가장 높은 가지 끝에서 카드 한 장이 천천히 내려왔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카드였다.

카드 위쪽에 숫자만 적혀 있었다. 23. 이름 칸은 비어 있었다. 그림도, 글자도 없었다.

네오—23번째 카드. 아직 아무도 쓰지 않은 운명이다.

연이—비어 있으면 또 누가 먹으러 오는 거 아냐?

네오—그래서 누가 써야 한다. 이번엔 먹는 놈 말고, 쓰는 사람이.

그때 연이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이 세계에 온 뒤 한 번도 울린 적 없는 휴대폰이었다.

[ 고객센터: 우주 · 연결 대기 1명 ]

연이—대기 1명. 9,999명이 아니라.

네오—받아라. 이번엔 받을 거다.

연이는 통화 버튼 위에서 엄지를 멈췄다. 모두가 연이를 보고 있었다. 모카, 윤달, 서한비, 네오. 하나도 빠지지 않고.

연이—별점 리뷰 쓸 준비 됐어. 다섯 개짜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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