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 DESTINY꿀꿀 운세

EP.48 · 65 / 70

을경합

공망 속에서 네오에게 닿는다. 을경합, 기억이 돌아오고 여덟 글자가 모두 찬다.

한글 약 2,664자 · 읽는 시간 약 6분

사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앞발에 턱을 괴고, 투명한 눈으로 연이를 보았다. 몸 아래쪽이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일렁였다.

둘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먹힌 것들의 조각이 먼지처럼 떠다녔다. 누군가의 생일 케이크 촛불, 누군가의 졸업 사진, 이름표 하나.

「메모라. 이상한 녀석이군. 여기까지 메모 하나 믿고 왔다고.」

연이—응. 내 글씨라서.

「나는 너를 모른다. 미안하지만.」

연이의 가슴 한가운데가 쿡 하고 아팠다. 이상했다. 자기도 이 사자를 모르는데. 모르는 사람한테 모른다는 말을 들은 것뿐인데.

연이—괜찮아. 나도 너 몰라. 그럼 비긴 거네.

「비긴 거라.」 사자가 작게 콧김을 뿜었다. 웃음 같기도 했다. 「그 말투,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군.」

연이—(어디서 들었는데. 나한테서였으면 좋겠다.)

연이는 사자 옆에 앉았다. 우산을 무릎에 눕혔다. 사자의 시선이 테이프 감긴 손잡이에 잠깐 머물렀다.

「그 우산. 세 겹이군.」

연이—어떻게 알아?

「모른다. 그냥 보였다. 두 겹이면 충분했을 텐데.」

연이—세 겹이 마음이 편해서.

사자의 귀가 움찔했다. 아주 조금. 연이는 그걸 보았다.

연이—메모에 너 잔소리 많다고 써 있어.

「모함이다.」

연이—거봐, 벌써 말 많잖아. 그리고 흰색. 이건 맞네. 사자. 이것도 맞고.

「양말은 뭐냐.」

연이—모르겠어. 근데 네가 그 얘기를 엄청 했대. 윤달 씨가 그랬어.

「윤달이 누구냐.」

연이—너 엄청 질투하던 사람. 그것도 메모에 넣으려다 말았어.

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너무 고양이 같아서 연이는 웃다가, 갑자기 목이 메었다.

흑월—정겹구나. 하지만 시간이 없단다, 그릇.

사방의 어둠이 목소리가 되었다. 사자의 몸이 그 소리에 조금 더 흐려졌다.

흑월—그를 돌려받고 싶으냐. 방법은 하나다. 진짜 이름을 불러라. 이름은 바닥에 쓰여 있지.

사자가 누운 바닥에 글자가 떠올랐다. 세 글자였다.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는 선명했다. 가운데 글자만 비어 있었다.

[ 박 □ 하 ]

연이—가운데가 없어.

흑월—너는 알고 있다. 혀끝에 있지 않느냐. 부르면 기억이 다 돌아온다. 그와 함께한 모든 날이.

정말로 혀끝에 있었다. 그 글자의 모양이. 부르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탑 아래서 잃어버린 모든 것이 한꺼번에 돌아올 것 같았다.

흑월—보여 주마. 네가 잃은 것을.

어둠 위로 장면들이 스쳤다. 비 오는 밤의 고양이. 섬 위에서 갈기를 흩날리던 사자. 우산을 기울여 주던 커다란 손. 얼굴만 보이지 않았다.

연이—얼굴 보여 줘. 얼굴만.

흑월—이름을 부르면 보인다. 쉬운 거래지 않느냐.

「부르지 마라.」

사자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모르는 녀석이지만, 그 이름은 부르지 마라. 이유는 모른다. 그냥, 부르면 안 된다는 것만 안다.」

연이—부르면 너 사라지지.

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이는 바닥의 빈칸을 오래 보았다.

연이—나 메모에 이것도 써 놨거든.

연이가 메모장을 펼쳤다. 종이가 젖어서 몇 군데 번져 있었다. 그래도 읽을 수 있었다.

[ 네오 · 사자 · 흰색 · 잔소리 많음 · 양말 · 우산은 사람일 때 · 늦게 온 적 있음 · 내 편 ]

연이—여기 어디에도 박 뭐시기는 없어. 내가 쓴 이름은 이거 하나야.

흑월—그건 이름이 아니다. 네가 지어 붙인 별명이지.

연이—맞아. 내가 지었어. 그러니까 내 거야. 너는 못 먹어.

연이는 사자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금빛이 남은 왼손이었다. 빗물에 다시 밝아진 그 손이었다.

연이—네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번 더.

연이—네오. 일어나. 별점 하나 준다니까.

사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투명하던 갈기 끝에서 하얀 빛이 한 올, 두 올 차올랐다.

「별점은 다섯 개 받을 때까지 안 일어난다고 했을 텐데.」

연이—그런 말 한 적 없거든.

「했다. 꿈에서. 벚꽃 밑에서.」

사자의 몸이 빛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위로. 앞발, 가슴, 갈기. 흐려졌던 자리마다 하얀 털이 돌아왔다.

그 빛 속에서 사자의 윤곽이 잠깐 사람의 모양이 되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우산을 든 손. 연이가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알았다.

네오—늦어서 미안하다. 이번에도.

연이—또 늦었어. 진짜 별점 하나야.

네오—하나면 됐다. 0점보다는 낫지.

연이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첫날 밤 고양이. 섬에서 받친 숨. 젖은 갈기. 탑 위에서 던져질 때 들은 마지막 잔소리.

연이—양말. 너 양말 짝 맞추라고 했잖아. 그게 마지막 말이 뭐야. 바보야.

네오—다른 말은 너무 길어서. 그거라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가운데 글자도 돌아왔다. 연이는 그 글자를 알았다. 입 안에서 조용히 굴려 보았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연이—이름 알아. 다 기억났어. 근데 안 불러. 너는 네오야. 내가 지어 준.

네오—다 기억났으면, 내가 숨긴 것도 알겠군.

연이—알아. 이름 불리면 사라진다는 거. 그거 왜 혼자 정했어. 나한테 물어봤어야지.

네오—물어보면 네가 안 된다고 할 테니까.

연이—당연히 안 되지! 그러니까 물어봤어야지!

연이가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세게 치지는 못했다. 두 번째 주먹은 그냥 거기 머물렀다.

연이—다음부터 그런 거 혼자 정하면 별점 마이너스야.

네오—마이너스는 없는 걸로 아는데.

연이—지금 생겼어.

사람의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빛이 가라앉자 다시 하얀 사자가 서 있었다. 이번엔 다리 끝까지 선명했다.

흑월—무슨 짓을. 그 이름은 값이 아니다. 아무 힘도 없다.

네오—힘이 없는 이름이라 값을 안 치르지. 우주도 그건 몰랐을 거다.

연이의 왼손이 다시 뜨거워졌다. 이번엔 손바닥만이 아니었다. 가슴 안쪽, 명식의 빈칸이 있던 자리가 뜨거웠다.

윤달—연이 씨! 들려요? 지금이에요! 乙이랑 庚, 둘이 합하면!

윤달의 목소리가 틈 밖에서 들렸다. 모카의 랩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박자를 놓치면서도.

연이의 乙과 네오의 庚이 서로를 향해 끌렸다. 덩굴이 쇠기둥을 감듯이. 쇠가 덩굴을 베지 않고 받쳐 주듯이.

[ 年 壬午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庚辰 · 8/8 ]

연이—다 찼다. 여덟 칸 다. 처음 앱 깔았을 때부터 비어 있던 칸이.

네오—乙庚合. 나무와 쇠가 하나가 되면 金이 된다. 그릇이 아니라 칼이 되지.

흑월—아니다. 비어 있어야 한다. 그릇은 비어 있어야.

연이—꽉 찼는데? 남의 것 하나도 없이. 다 내 거로.

흑월—그릇이 차 버리면 나는 어디에 담기란 말이냐. 나는 어디에.

흑월의 목소리가 비로소 작아졌다. 굶주린 아이의 목소리 같았다. 연이는 그 소리에서 아주 잠깐,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연이—그건 네가 정해. 남의 그릇 말고 네 자리에서. 근데 여기는 아니야.

네오가 연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하얀 갈기가 어둠 속에서 등불처럼 밝았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깎여 나가지 않았다.

네오—나가자. 밖에서 다들 기다린다. 모카의 랩이 더 길어지면 그게 더 위험하다.

검은 해 안쪽이 무너졌다. 그릇이 찬 순간 흑월이 기댈 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연이와 네오는 갈라진 틈 밖으로 튕겨 나왔다.

검은 판 위에 둘이 굴러떨어졌다. 모카의 랩이 마지막 한 줄에서 뚝 끊겼다. 윤달이 손을 거두며 털썩 주저앉았다.

모카—나왔다. 둘 다. 앙코르 안 해도 된다.

윤달—노래 한 곡 버틴다더니 세 곡 했어요. 모카 씨 진짜 불이네.

서한비—사자님.

네오—서한비.

둘은 잠깐 마주 보았다. 백사자와, 이제 호랑이가 아닌 여자. 같은 봄에서 온 두 사람이었다.

네오—고맙다. 이 녀석 옆에 있어 줘서.

서한비—갚으시는 거예요? 그럼 받을게요. 이번 한 번은.

모카—근데 너네 저 안에서 뭐 했어. 연이 얼굴 왜 빨개.

연이—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이름 불렀어!

윤달—이름만 불렀는데 시주가 꽉 찼다고요? 궁합이 그 정도면 저는 은퇴해야겠네요.

네오—윤달. 그 손 치워라. 연이 어깨에서.

윤달—아, 이 질투. 진짜 돌아오셨네.

축하할 틈은 없었다. 검은 해가 비명을 질렀다. 다섯 개의 눈이 하나씩 터졌다. 해는 점점 작아졌다. 주먹만 하게, 그리고 씨앗만 하게.

흑월—끝나지 않았다. 먹을 하늘이 없으면, 하늘 아래를 먹으면 된다.

검은 씨앗이 검은 판을 뚫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아래에는 어둠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서 거대한 뿌리 하나가 드러났다.

윤달—저건. 모든 하늘의 뿌리예요. 세계수.

네오—저걸 먹으면 다섯 하늘이 아니라 모든 하늘이 끝난다. 현실까지.

연이—그럼 쫓아가. 다 같이.

서한비—이번엔 저도 앞에 설게요. 반 걸음 말고 한 걸음.

모카—나 목 쉬었으니까 이번엔 너네가 시끄럽게 해. 특히 사자.

윤달은 말없이 장갑을 다시 끼었다. 손목까지 번진 검은 원이 장갑 밖으로 비쳤다. 아무도 그걸 말하지 않았다.

네오가 등을 낮췄다. 연이가 그 등에 올라탔다. 하얀 갈기가 손안에 가득 찼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감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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