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 DESTINY꿀꿀 운세

EP.47 · 64 / 70

다섯 기운

나무·불·흙·물, 그리고 연이가 그릇에 담아 둔 네오의 금. 다섯 기운이 하나로 모인다.

한글 약 2,705자 · 읽는 시간 약 6분

넷이 줄줄이 끌려갔다. 검은 해가 하늘 전체를 덮을 만큼 가까워졌다. 해의 가장자리에서 뜨겁지 않은 바람이 불었다.

서한비—연이 씨, 손 놔요. 제발요.

연이—싫어. 당기면 당길수록 더 세게 잡을 거야.

그런데 당길수록 더 끌려갔다. 검은 손은 연이의 힘까지 같이 먹고 있었다. 당기는 힘이 그대로 저쪽의 힘이 되었다.

윤달—연이 씨,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저건 당기는 힘을 먹어요!

연이—그럼 어떡해. 놓으라고?

그때 아주 오래된 말 하나가 떠올랐다. 누가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섬에서, 첫 번째 고리 앞에서 들은 말이었다.

연이—(잡아당기지 말고, 밀어.)

연이는 서한비를 당기던 손에서 힘을 뺐다. 대신 왼손을 서한비의 손목에 갖다 댔다. 검은 손가락과 흉터 사이로, 금빛이 새는 손바닥을.

연이—한비야, 받아. 이거 갚지 마.

금빛이 손바닥에서 서한비의 손목으로 밀려 들어갔다. 검은 손가락이 그 빛에 닿자마자 쩍 갈라졌다. 칼날에 베인 것처럼 깨끗하게.

흑월—크윽.

서한비의 손목이 풀려났다. 넷은 검은 판 위로 나뒹굴었다. 우산이 데굴데굴 굴러가다 모카의 발에 걸려 멈췄다.

모카—살았다. 아니 살았나? 다들 손가락 몇 개야. 세어 봐.

윤달—열 개요. 아직은 제 것도 열 개예요. 하나는 좀 검지만.

검은 해가 잠시 물러났다. 다친 손을 거두어들이는 짐승 같았다. 일행은 그 틈에 가장 넓은 검은 판 위에 모였다.

연이는 왼손을 펴 보았다. 금빛이 아까보다 흐려져 있었다. 작은 불씨만큼만 남아 있었다.

연이—줄었다. 한비한테 밀어 넣은 만큼.

서한비—저 때문에 그 조각이 이렇게 작아졌어요.

연이—아니. 내가 정한 거야. 그리고 잘했잖아. 너 지금 여기 있잖아.

서한비는 대답 대신 오른 손목을 쥐었다. 흉터 위가 따뜻했다. 처음 느껴 보는 온도였다. 금이 지나간 자리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윤달—잠깐. 서한비 씨, 그 손목 좀 보여 줘요.

윤달이 서한비의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흉터 위의 물방울이 금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윤달이 짧게 웃었다.

윤달—됐다. 방금 연이 씨가 한 거, 그게 정답이에요.

모카—무슨 소리야. 쉽게 말해. 나 불 담당이라 머리 안 써.

윤달—오행은 서로를 낳아요. 나무가 불을, 불이 흙을, 흙이 쇠를, 쇠가 물을, 물이 다시 나무를.

[ 木 → 火 → 土 → 金 → 水 → 木 ]

윤달—방금 연이 씨의 金이 서한비 씨한테 들어가서 물이 됐어요. 金生水. 사자님 기운이 비를 낳은 거예요.

서한비—제 비가 사자님한테서.

윤달—원래 그래요. 연이 씨 명식은 여름 나무라 물이 필요하고, 그 물은 金에서 와요. 사자님은 처음부터 비를 데려오는 쪽이었어요.

연이—(그래서 그 사자는 늘 우산을 들고 있었나. 사람일 때.)

연이는 자기 생각에 놀랐다. 사람일 때 우산이라니. 그런 걸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메모에 적혀 있었다. 우산은 사람일 때.

윤달—그러니까 한 바퀴를 돌려요. 다섯이 손을 잡고, 앞사람이 뒷사람한테 밀어 주는 거예요. 당기지 말고.

모카—그럼 순서가 중요하겠네. 누가 누구 옆이야.

윤달—궁합 보는 거랑 비슷해요. 이번엔 공짜로 봐 드릴게요.

윤달이 검은 판 위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다섯 자리에 한 사람씩 세웠다.

윤달—연이 씨는 木. 덩굴이니까 맨 처음. 모카 씨는 火, 연이 씨 오른쪽.

모카—나무가 나를 키운다는 거지? 연이야, 나 잘 키워라. 비싸게.

윤달—저는 土. 불 다음. 공망이 흙이에요. 비어 있어서 뭐든 담는 땅.

서한비—그럼 저는 물이니까.

윤달—서한비 씨는 金 다음, 연이 씨 왼쪽. 문제는 金 자리예요.

다섯 번째 자리가 비어 있었다. 윤달과 서한비 사이. 아무도 서지 않은 자리.

연이—사자 자리네.

윤달—네. 그래서 제가 이걸 들고 왔죠.

윤달이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 공망의 가장자리에 금실 한 가닥이 감겨 있었다. 탑에서 사자가 먹힐 때 공망이 빨아들인 털 한 올이었다.

윤달—제 손이 먹은 것 중에 유일하게 쓸모 있는 거예요. 버리지 않길 잘했다.

연이—그거 계속 갖고 있었어요?

윤달—남의 남편 털을 함부로 버릴 수가 있나요.

연이—남편 아니라니까요! 아직!

모카—아직?

연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기가 왜 아직이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서한비가 작게 웃었다. 이번엔 어깨만이 아니라 소리까지 냈다.

원을 그리고 나서 잠깐,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검은 해가 멀리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연이—윤달 씨. 아까 그 시계, 진짜 안 아까웠어요?

윤달—아까웠죠. 다섯 시 이십 분. 바늘이 거기 있는 걸 보는데 숨이 막혔어요.

윤달—근데 그걸 흑월한테 받으면 저는 평생 그놈한테 시간을 빌린 사람이 돼요. 그건 싫더라고요.

서한비—빌린 건 불어나요. 제가 잘 알아요.

윤달—장부 전문가가 그렇다면 그런 거죠.

모카—집에 가면 뭐 할 건데, 윤달 오빠.

윤달—엄마한테 전화요. 제 목소리 기억하는지. 기억 못 하면 다시 소개하죠, 뭐.

윤달은 웃었지만 장갑 낀 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연이는 그 주먹 위에 손을 잠깐 얹었다가 뗐다.

연이—기억할 거예요. 우리가 기억하잖아요. 그럼 엄마도요.

흑월—무슨 작당을 하느냐.

검은 해가 다시 다가왔다. 이번엔 손이 아니라 해 자체가 내려왔다. 다섯 개의 눈이 모두 연이를 보고 있었다.

윤달—지금이에요. 손 잡아요!

다섯이 원을 만들었다. 연이, 모카, 윤달, 빈자리의 금실, 서한비. 윤달이 금실을 빈자리에 띄우자 실이 공중에서 팽팽하게 섰다.

연이—모카 씨, 받아요!

연이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모카의 손에 밀어 넣었다. 덩굴이 손등을 타고 뻗어 나갔다. 모카의 손바닥에서 불이 피어났다. 성냥보다 훨씬 큰 불이었다.

모카—오, 이거 뭐야. 장작이 생긴 느낌이야!

모카가 불을 윤달 쪽으로 밀었다. 불이 윤달의 손바닥에 닿자 검은 원의 가장자리가 단단하게 굳었다. 구운 흙처럼.

윤달—뜨거워라. 그래도 처음으로 손이 안 비는 느낌이네요.

윤달이 굳은 흙의 기운을 금실로 밀었다. 실이 굵어졌다. 한 가닥이 열 가닥이 되고, 열 가닥이 갈기가 되었다.

빈자리에 하얀 사자의 윤곽이 잠깐 섰다. 눈은 없었다. 금빛 선으로만 그린 사자였다. 그 사자가 고개를 돌려 서한비 쪽으로 숨을 내쉬었다.

서한비—받았어요. 연이 씨, 이번엔 제가 줄게요.

서한비의 우산에서 비가 쏟아졌다. 차갑지 않은 비였다. 비는 연이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왼손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려졌던 금빛이 빗물 아래서 다시 밝아졌다.

연이—돌았다. 한 바퀴 돌았어!

흑월—원이라. 원은 한 군데만 끊어도 끝이지.

검은 손 하나가 윤달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공망이 한순간 크게 벌어졌다. 윤달의 손에서 흙 기운이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윤달—아, 이건 좀.

모카—내 옆에서 누굴 건드려!

모카가 윤달의 손을 더 꽉 쥐었다. 불이 흙을 다시 굽듯 감쌌다. 윤달의 손바닥이 다시 단단해졌다.

다섯 기운이 원을 따라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돌 때마다 빨라졌다. 검은 판 위에 빛나는 다섯 꼭짓점의 별이 그려졌다.

흑월—그만둬라. 그건 그릇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연이—그릇 아니라니까. 나 이연이야. 대학생이고, 별점 리뷰 쓰고, 양말 짝 잘 못 맞추는.

별이 검은 해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해와 달이 겹친 자리였다. 겹친 테두리에 금이 갔다. 금 사이로 아주 오래된 빛이 새어 나왔다.

모카—갈라진다! 갈라진다고!

서한비—저 안에서 뭔가 빛나요. 아주 작은 거.

연이—하얀색이야. 하얀 거.

윤달—겹침이 풀리고 있어요. 근데 오래는 못 버텨요. 다시 닫혀요.

갈라진 틈은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했다. 그 안쪽 깊은 곳에서 하얀 무언가가 희미하게 깜빡였다. 반딧불만 한 빛이었다.

연이는 그 빛을 보았다. 이름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발이 먼저 틈 쪽으로 움직였다.

서한비—혼자 가면 안 돼요. 그건 그릇을 먹으려고 기다리는 입이에요.

연이—알아. 근데 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건 그릇뿐이잖아. 내가 그릇이면, 그것도 쓸모가 있는 거지.

윤달—들어가면 제가 공망으로 입구를 붙잡을게요. 오래는 못 해요. 길어야 노래 한 곡.

모카—그럼 내가 노래할게. 끝날 때까지 나와. 앙코르는 없어.

서한비가 우산을 연이 손에 쥐여 주었다. 테이프 세 겹 감긴 손잡이를.

서한비—가져가요. 빌려주는 거예요. 꼭 갚으러 와요.

연이—너 방금 장부 말투 썼다.

서한비—이번 한 번만요.

연이는 우산을 쥐고 틈 안으로 뛰어들었다. 등 뒤에서 모카의 엉망인 랩이 시작되었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떨어지는 동안 소리가 하나씩 꺼졌다. 랩도, 빗소리도, 자기 숨소리도. 손에 쥔 우산 손잡이만 따뜻했다.

연이—(무서우면 메모. 찾으러 감. 기억 안 나도 감. 내 글씨 믿음.)

안은 깊고 고요했다. 바닥에 하얀 사자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몸이 유리처럼 투명했다. 사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누구냐.」

연이—나도 잘 몰라. 근데 너 찾으러 왔어. 메모에 그렇게 써 있거든.

전체 목차숙요 27숙과 궁합 구조비주얼 노벨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