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 DESTINY꿀꿀 운세

EP.46 · 63 / 70

모든 하늘의 일식

다섯 하늘이 공망으로 무너진다. 흑월의 마지막 모습이 드러난다.

한글 약 2,740자 · 읽는 시간 약 7분

문 너머에는 바닥이 없었다. 발을 디딘 곳에서만 검은 판이 생겼다가, 발을 떼면 사라졌다.

위도 아래도 없었다. 저 멀리 검은 해 하나가 떠 있었다. 빛을 내는 게 아니라 빛을 빨아들이는 해였다.

윤달—공망. 비어 있어서 무엇이든 들어가는 자리예요. 제 손바닥 속이 이렇게 생겼을 줄은 몰랐네요.

모카—남의 손바닥 속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 진짜 이상하다.

윤달—손금 밟지 마세요. 연애선이 끊어지면 모카 씨 책임이에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웃음소리가 나오자마자 검은 해 쪽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연이—소리도 먹어?

서한비—다 먹어요. 그래서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돼요.

연이는 주머니의 메모장을 꺼냈다. 첫 줄의 글씨가 조금 흐려져 있었다. 연이는 손가락으로 그 줄을 한 번 덧그렸다.

[ 네오 · 사자 · 흰색 · 잔소리 많음 · 양말 · 내 편 ]

연이—아까 문 너머에서 목소리 들렸지. 양말 짝 맞추라고. 여기 어딘가 있어.

서한비—그럼 찾는 게 먼저예요. 싸우는 건 그다음.

모카—찾다 보면 싸우게 되겠지. 늘 그랬잖아.

그때 발밑이 흔들렸다. 검은 판들 사이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큰 것들이었다. 건물만 한 조각들.

열두 궁이 있던 별의 궁전이 거꾸로 떨어졌다. 지붕의 별들이 하나씩 꺼졌다.

천문대 하늘배가 돛이 찢긴 채 미끄러져 내려왔다. 열두 집의 하늘이 접힌 지도처럼 구겨져 있었다.

스물일곱 달집 사원의 종이 한 번 울렸다. 그리고 사원째로 검은 해 쪽으로 기울어졌다.

카드 회랑의 카드들이 눈보라처럼 흩날렸다. 마지막으로 바다 위의 섬 다섯 개가, 장난감처럼 작게 굴러떨어졌다.

모카—저거 우리 섬이야! 식상의 섬!

윤달—다섯 하늘이 다 여기로 무너지고 있어요. 흑월이 문을 열어 둔 거예요. 우리가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연이—우리 들어왔다고 다 부숴?

윤달—부수는 게 아니라 먹는 거예요. 다 먹고 나면 이 자리에 하늘이 하나만 남겠죠. 저것만.

윤달이 검은 해를 가리켰다. 무너진 조각들이 그 둘레를 돌면서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검은 해에 눈이 생겼다. 하나가 아니었다. 무너진 하늘마다 하나씩, 모두 다섯 개.

흑월—어서 오너라. 기다렸다, 그릇.

해의 둘레에 이름들이 떠올랐다. 연이가 길에서 들었던 이름들이었다. 검은 化忌. 검은 달 릴리스. 라후의 머리와 케투의 꼬리. 무너지는 탑.

윤달—다 같은 놈이었어요. 하늘마다 이름만 바꿔 달고 있었던 거예요.

흑월—이름은 많을수록 좋지. 먹을 때마다 하나씩 늘었단다.

해 아래로 검은 손이 수백 개 뻗어 나왔다. 손가락마다 누군가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서한비—그 이름들 돌려줘요. 하나도 당신 거 아니에요.

흑월—빗물아, 너는 늘 남의 걸 돌려 달라는구나. 정작 네 것은 한 번도 지키지 못했으면서.

서한비가 우산 손잡이를 꽉 쥐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연이 앞으로.

흑월—싸우기 전에 거래를 하자. 나는 공정하거든. 장부를 쓰는 아이에게 그걸 가르친 것도 나였지.

검은 손 하나가 모카 앞으로 내려왔다. 손바닥 위에서 작은 무대가 열렸다. 해가 걸린 정오의 무대. 관객이 가득 찼다.

흑월—불씨야. 네 섬의 노래를 전부 돌려주마. 박수까지. 대신 여기서 손을 떼라.

모카—우리 섬 노래는 우리가 불러서 돌려받았어. 너한테 받은 거 아니야.

모카가 무대를 손등으로 쳐 냈다. 작은 무대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모카—그리고 박수는 빌리는 거 아니야. 받는 거지. 그 차이 모르면 공연하지 마.

흑월—점쟁이야. 너는 집에 가고 싶지 않니. 네 시를 돌려주마. 卯時. 이름도.

손바닥 위에 시계가 떠올랐다. 바늘이 다섯 시 이십 분 근처에서 떨렸다. 윤달의 눈이 그 바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윤달—그거, 진짜예요?

연이—윤달 씨.

윤달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시계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러다 멈췄다. 장갑 낀 손가락이 공중에서 떨렸다.

윤달—진짜여도 안 받아요. 그거 받으면 저는 집에 가요. 근데 연이 씨는 여기 남잖아요.

윤달—그리고 제 시는 제가 찾았어요. 생시 보정으로. 당신한테 받을 이유가 없지.

검은 손이 서한비 앞으로 왔다. 손바닥 위에 비 오는 정류장이 있었다. 첫 번째 봄의 정류장. 벤치 위에 봉투가 놓여 있었다.

흑월—빗물아. 돌아가게 해 주마. 그날 그 정류장으로. 이번엔 내가 끼어들지 않으마. 그 애도, 봉투도, 바다도 다 네 거다.

서한비의 숨이 멎었다. 정류장의 빗소리가 너무 진짜 같았다. 봉투에 적힌 글씨가 보였다. 같이 바다 가기.

서한비—그 봄으로.

연이—한비야.

연이는 그 이름만 불렀다. 말리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서한비가 고르게 두었다.

서한비—그 봄으로 돌아가면, 이 봄의 연이 씨가 저한테 준 우산은 없어져요. 테이프 세 겹 감은 거.

서한비—안 가요. 저는 이 봄에서 갚을 거예요.

서한비가 정류장을 손으로 덮었다. 조용히, 오래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듯이. 작은 정류장이 빗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흑월—하나같이 재미없구나. 그럼 그릇에게 직접 묻지.

마지막 손이 연이 앞에 내려왔다. 손바닥 위에 하얀 것이 웅크리고 있었다. 작은 사자였다. 눈을 감은 채 숨을 쉬지 않았다.

흑월—네가 잊은 그것이다. 이름도 기억 못 하지? 비어 주면 돌려주마. 네가 그릇이 되면 이것도 그 안에 같이 있게 된단다. 영원히.

연이는 그 사자를 보았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도 흐릿했다. 그런데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연이의 왼손 바닥에서 금빛이 새어 나왔다. 탑 아래에서 쥐고 있던 흰 털이 녹아든 자리였다. 금빛이 검은 손 쪽으로 뻗었다가, 화들짝 놀란 듯 다시 웅크렸다.

흑월—아.

연이—뭐야, 이거. 손이 왜 뜨거워.

처음으로 흑월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다섯 개의 눈이 한꺼번에 연이의 손바닥을 보았다.

흑월—거기 있었구나. 내가 다 못 먹은 조각이.

검은 손 수백 개가 한꺼번에 덮쳐 왔다. 연이를 향해서. 정확히는 연이의 왼손을 향해서.

서한비—연이 씨, 뒤로!

서한비가 우산을 펼쳤다. 우산 아래로 비가 쏟아졌다. 비는 벽처럼 서서 손들을 막았다. 손가락이 빗물에 닿을 때마다 이름표가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모카—성냥 없어도 돼. 내 불은 원래 입에서 나와!

모카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소리쳤다. 랩이었다. 박자도 가사도 엉망이었다. 그래도 목소리에서 불꽃이 튀었다. 손 몇 개가 그을려 물러났다.

윤달—제가 먹을게요. 조금만 비켜요.

윤달이 장갑을 벗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들이 그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윤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공망의 원이 손목까지 번졌다.

연이—그만해요! 손이 커지잖아!

윤달—원래 이럴 때 쓰라고 있는 손이에요.

하지만 손은 끝이 없었다. 비의 벽이 조금씩 얇아졌다. 모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윤달의 무릎이 꺾였다.

흑월—왜 버티느냐. 그릇 하나만 내주면 다 끝나는데.

연이는 금빛이 새는 왼손을 가슴에 꼭 안았다. 이 빛을 줘 버리면 사자는 영영 저쪽에 있다. 그것만은 알았다.

연이—윤달 씨. 이거, 이 빛. 뭐예요.

윤달—庚이에요. 사자님의 金. 연이 씨 그릇 안에 한 조각 남아 있었던 거예요.

윤달—연이 씨 명식은 원래 다섯 기운이 다 있어요. 木, 火, 土, 水, 그리고 그 金.

윤달이 서한비, 모카, 자기 자신, 그리고 연이를 차례로 가리켰다.

윤달—그리고 여기 마침 다섯이 있네요. 불, 흙, 물, 나무. 금은 연이 씨 손에.

연이—다섯 기운을 모으면.

윤달—일식은 해와 달이 겹쳐서 생겨요. 다섯 기운이 한 바퀴 돌면, 그 겹침이 풀려요. 아마도요.

모카—아마도가 왜 이렇게 많아!

그 순간 비의 벽이 찢어졌다. 검은 손 하나가 빈틈으로 들어왔다. 연이가 아니라 서한비의 손목을 낚아챘다. 오른 손목, 고리 흉터가 있던 자리였다.

흑월—그럼 물부터 먹지. 다섯에서 하나 빠지면 아무것도 돌지 않으니까.

서한비의 몸이 검은 해 쪽으로 끌려갔다. 우산이 손에서 떨어졌다. 테이프 감긴 손잡이가 검은 판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연이—한비야!

연이는 생각하지 않았다. 굴러온 우산을 주워 들고 뛰었다. 금빛이 새는 왼손으로 우산을, 오른손으로 서한비의 다른 손을 붙잡았다.

서한비—놔요! 연이 씨까지 끌려가요!

연이—안 놔. 너 아까 나 골라 줬잖아. 이번엔 내가 골라.

두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끌려갔다. 모카가 연이의 가방끈을, 윤달이 모카의 허리를 붙잡았다. 넷이 줄줄이 매달린 채로 검은 해가 가까워졌다.

모카—이게 무슨 줄다리기야! 우리 편 너무 약해!

윤달—줄다리기는 원래 마지막에 한 번에 당기는 거예요. 아직 아니에요.

그때 연이의 왼손에서 금빛이 한 번 더 번졌다. 우산 손잡이를 타고, 서한비의 손목을 타고. 검은 손가락이 그 빛에 닿자 움찔하며 조금 풀렸다.

흑월—그 빛을 내놔라. 그건 원래 내 것이다.

연이—웃기지 마. 내 메모에 써 있어. 내 편이라고. 내 편은 네 것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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