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번 카드, 달. 하늘에 달이 두 개 떠 있었다. 하나는 차갑게 빛났고, 하나는 그 그림자처럼 검었다.
길 양옆에 탑이 하나씩 서 있었다. 멀리서 개와 늑대가 번갈아 울었다. 어느 쪽이 개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윤달—달 카드의 규칙은 하나예요. 보이는 걸 믿지 말 것.
모카—그럼 뭘 믿어. 눈 감고 걸어?
윤달—서로를 믿으세요. 손 잡고, 이름 부르고. 대답이 오는지 확인하고.
연이는 주머니 속 메모장을 한 번 만졌다. 종이 모서리가 손끝에 닿았다. 그것만으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연이—(내 편 얼굴은 몰라도 내 편 글씨는 알아. 그거면 돼.)
웅덩이마다 달이 비쳤다. 그리고 웅덩이마다 연이가 비쳤다. 연이가 걸음을 멈춰도 물속의 연이는 반 박자 늦게 멈췄다.
연이—쟤, 아까부터 나 따라 해. 근데 조금씩 늦어.
서한비—보지 마세요. 웅덩이는 밟지 말고 건너요.
그때 안개가 내려왔다.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어깨로. 순식간이었다.
모카—야, 손! 손 잡아!
연이가 손을 뻗었다. 손끝에 무언가가 스쳤다. 그리고 놓쳤다. 안개 속에서 모두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서한비는 우산을 펴 들고 섰다. 테이프 감긴 살이 안개를 조금 밀어냈다. 옆에는 윤달만 남아 있었다.
윤달—모카 씨랑 연이 씨가 반대편으로 갔어요. 소리로는 그래요.
서한비—소리를 믿으면 안 되는 카드라면서요.
윤달—맞아요. 그래서 지금 제 말도 반만 믿으세요.
안개 너머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노란 가방이 먼저 보였다. 그다음 연이의 얼굴이.
연이—한비야! 찾았다. 윤달 씨도.
서한비가 반 걸음 앞으로 나가려다 멈췄다. 연이의 운동화가 말라 있었다. 웅덩이를 그렇게 지나왔는데.
서한비—모카 씨는요?
연이—저쪽에서 헤어졌어. 근데 그것보다, 한비야. 나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연이—네오가 먹힌 거, 너 때문 아냐?
안개가 조용해졌다. 개도 늑대도 울지 않았다.
서한비—연이 씨.
연이—첫 번째 봄에도 너였잖아. 네가 문을 열어 줬잖아. 이번에도 네가 앞에 섰는데 네오가 먹혔어.
윤달—연이 씨, 그건.
연이—윤달 씨는 빠져. 이건 우리 둘 얘기야.
서한비의 우산 끝이 떨렸다. 대답하려는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은 서한비가 매일 밤 장부에 적던 말이었다.
서한비—맞아요. 그래서 저는 갚으려고.
연이—그럼 그 우산부터 줘. 그거 원래 내 거잖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달빛 속의 비였다. 그때 안개를 가르고 또 다른 발소리가 달려왔다. 첨벙, 첨벙. 웅덩이를 그대로 밟는 소리였다.
두 번째 연이가 나타났다. 머리부터 운동화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무릎에는 넘어진 자국이 있었다. 뒤에서 모카가 헐떡이며 따라왔다.
모카—저거 뭐야! 연이가 왜 둘이야!
윤달—아, 이건 반만 믿을 수도 없네요.
젖은 연이가 마른 연이를 보았다. 마른 연이도 젖은 연이를 보았다. 둘의 얼굴은 똑같았다. 눈 밑의 부기까지.
연이—너 뭐야. 내 얼굴로 뭐 하는 거야.
연이—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한비야, 쟤가 가짜야. 아까 웅덩이에서 웃던 거 기억하지?
서한비가 둘을 번갈아 보았다. 마른 연이의 웃음이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숨이 막혔다.
윤달—확인할게요. 연이 씨 생년월일시.
연이—이천이년 칠월 육일, 여덟 시 반. 乙亥 일주.
연이—맞아. 그거 나야. 근데 쟤도 알잖아!
윤달—둘 다 정답이에요. 흑월은 명식을 먹는 놈이라. 숫자로는 못 가려요.
모카—그럼 내가 할게. 연이야, 나한테 처음 준 별점 몇 개야?
연이—두 개. 맛이 범죄라서.
연이—두 개! 아 진짜, 그것까지 알아?
모카—이것도 둘 다 맞네. 미치겠다.
비가 굵어졌다. 젖은 연이는 이를 딱딱 부딪쳤다. 마른 연이는 비를 맞는데도 젖지 않았다. 아무도 그걸 가리킬 만큼 침착하지 않았다.
흑월—어차피 같은 얼굴이란다, 빗물아. 첫 번째 봄에도 너는 고르지 못했지.
서한비가 고개를 들었다. 그 목소리. 정류장 벤치 뒤에서 들리던, 장부를 처음 건네주던 목소리였다.
서한비—그때는 못 골랐어요. 이번엔 고를 수 있어요.
서한비가 우산을 접었다. 비가 그대로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차가운 비가 코트 안까지 스몄다.
마른 연이가 손을 뻗었다. 서한비의 손에 든 우산을 향해서였다.
연이—잘했어. 이리 줘. 내 거니까.
젖은 연이도 움직였다. 이를 부딪치며, 비틀거리며 서한비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가방을 머리 위로 들어 서한비의 머리를 가렸다. 자기 머리는 비에 그대로 둔 채로.
연이—바보야, 우산을 왜 접어. 감기 걸려.
노란 가방 아래로 빗물이 갈라졌다. 서한비의 머리 위에 작은 지붕이 생겼다. 서툴고 비뚤어진, 반쪽짜리 지붕이었다.
서한비—진짜 연이는 우산을 먼저 내밀어요. 달라고 하지 않아요.
서한비—우산이 없으면 가방이라도요.
서한비가 마른 연이를 향해 돌아섰다. 접힌 우산 끝이 그 가슴을 겨눴다.
서한비—그 얼굴 벗어요. 그건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에요.
마른 연이의 얼굴이 웃은 채로 금이 갔다. 금 사이로 검은빛이 새어 나왔다.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졌다.
흑월—아깝구나. 이번엔 오래 쓰려고 했는데.
얼굴이 조각조각 떨어졌다.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검은 원 하나가 달빛을 먹고 있었다. 두 개였던 달 중 검은 쪽이었다.
흑월—하지만 상관없다. 달 카드 안에서는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지. 너희의 엄마도, 친구도, 그 사자도.
안개 속에서 수많은 얼굴이 떠올랐다. 연이의 얼굴, 서한비의 얼굴, 모카의 얼굴. 하얀 갈기의 실루엣도 있었다.
연이—네오.
연이는 저도 모르게 불렀다. 그 이름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하얀 갈기를 보자 손끝이 먼저 떨렸다.
윤달—연이 씨, 저건 가짜예요. 진짜는 저렇게 말끔하지 않아요. 털이 늘 엉켜 있었어요.
연이—그걸 왜 지금 알려 줘. 더 보고 싶어지잖아.
모카—됐어, 다 비켜. 거짓말엔 불이야.
모카가 성냥을 그었다. 남은 두 개를 한꺼번에. 불꽃이 손가락 사이에서 커지더니 하늘로 솟구쳤다.
해가 떴다. 19번 카드, 해. 안개가 한순간에 타올랐다. 달빛에 숨어 있던 얼굴들이 종이처럼 말려 사라졌다.
눈을 뜨자 일행은 낯익은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정오의 해가 걸린 무대였다. 해 카드 속 세상은 모카의 섬과 닮아 있었다.
모카—우리 섬이네. 해 돌아온 날 그 무대.
연이—모카 씨 진짜 해였네. 성냥 두 개로 해를 띄우다니.
모카—두 개 다 썼다는 얘기야. 이제 나 맨손이다. 책임져.
서한비—장부에 적을까요? 성냥 두 개, 미수.
모카—너 그 장부 안 적힌다며!
서한비는 대답 대신 젖은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연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연이가 그 손을 잡았다. 둘 다 아직 젖어 있었다.
연이—한비야. 아까 그 말, 고마워. 근데 나도 헷갈렸어. 저게 나인 줄 알았어.
서한비—저도 헷갈렸어요. 웃는 얼굴은 똑같았거든요.
연이—그럼 뭘 보고 골랐어?
서한비—젖은 쪽이요. 연이 씨는 늘 젖은 쪽이에요.
해 카드의 무대 뒤로 문이 하나 열려 있었다. 그 너머에서 나팔 소리가 들렸다. 20번 카드, 심판.
하늘의 천사가 나팔을 불 때마다 땅에서 이름이 하나씩 떠올랐다. 흑월에게 먹힌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이름들은 다시 가라앉았다. 부를 사람이 없었다.
윤달—심판은 부르는 카드예요. 누가 불러 줘야 이름이 일어나요.
연이—그럼 내가 부르면 되잖아.
윤달—주인을 알아야 불러요. 연이 씨가 아는 이름은 몇 개 없어요. 저도 제 이름을 몰라요.
윤달이 장갑 낀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 안쪽이 검게 비쳐 보였다. 공망이 조금 넓어져 있었다.
연이—손, 아까보다 커졌어요.
윤달—오늘 안개를 좀 마셨거든요. 괜찮아요. 아직은 장갑에 들어가요.
그다음 문은 21번, 세계였다. 둥근 월계 고리 안에서 사람이 춤추고 있었다. 바보의 여행이 끝나는 카드였다.
연이—끝이면, 이제 흑월 있는 데로 가는 거야?
윤달—원래는 21장에서 끝나요. 바보가 0번이니까 스물두 장. 근데 보세요.
월계 고리 아래, 카드와 카드 사이에 좁은 틈이 있었다. 카드 한 장이 들어갈 만한 폭이었다. 그 틈에서 바람이 새어 나왔다.
[ 23 · THE DOOR ]
틈 위로 글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연이는 그 글자를 본 적이 있었다. 첫날 밤 방 안에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에.
연이—저 문. 나 저 문 알아. 내 방에 있던 거.
틈이 벌어지자 문이 나타났다. 나무 문이었다. 손잡이가 낡았고 문패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서한비—이번엔 문패가 비었네요. 읽을 것도 없어요.
모카—그게 더 무섭다, 얘.
윤달이 문 앞에 섰다.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의 검은 원이 문 쪽으로 기울었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윤달—이 너머, 제 손바닥이랑 같은 냄새가 나요. 비어 있는 냄새.
윤달—공망이에요. 흑월의 집이에요. 그리고 아마, 사자님이 있는 곳이에요.
연이—그럼 열어.
윤달—단호하시네. 들어가면 다섯 하늘이 다 거기로 무너져요. 각오는요?
연이—메모에 써 놨어. 기억 안 나도 감.
연이가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그때 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양말. 짝 맞춰 신어라.」
연이의 손이 손잡이 위에서 굳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몰랐다. 그런데 눈물이 먼저 났다. 연이는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짝이 다른 양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