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 아래에는 아침이 오지 않았다. 하늘이 회색으로 멈춰 있었다.
일행은 무너진 벽돌 사이에 둘러앉아 있었다. 아무도 먼저 일어서자고 하지 않았다.
연이는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왼쪽은 흰 양말, 오른쪽은 회색 양말이었다. 짝이 맞지 않았다.
연이—(양말은 짝 맞춰 신어라. 누가 그랬더라. 엄마 말고. 엄마는 그런 말 안 하는데.)
이상했다. 그 잔소리의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낮고, 귀찮다는 듯하고, 조금 웃음이 섞인 목소리.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윤달—양말 보고 있어요?
연이—응. 누가 짝 맞춰 신으라고 했던 것 같아서.
윤달—사자님이요. 연이 씨가 양말 짝 안 맞추는 거, 그분이 제일 싫어했어요.
연이—사자님. 그 사람이 네오야? 메모에 있는.
윤달—사람 아니고 사자요. 메모에도 그렇게 써 있잖아요.
연이는 메모장을 다시 펼쳤다. 몇 번째인지 몰랐다.
같은 글씨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네오는 고양이 아님. 사자. 내 편.
모카—나도 생각해 봤는데, 그 사자. 내 성냥으로 불 붙여 준 적 있던 것 같아. 아닌가. 내가 불 붙여 줬나.
서한비—저는 흰 우산밖에 안 남았어요. 비 오는 정류장, 접힌 흰 우산. 늦었구나, 그 목소리.
셋이 조각을 하나씩 내놓았다. 조각은 서로 맞지 않았다.
사자, 우산, 성냥, 양말. 하나의 얼굴이 되지 않았다.
연이—이거 다 같은 사람 맞아? 사자가 우산을 써? 성냥에 불을 붙여?
윤달—맞아요. 다 했어요. 우산은 사람일 때, 불은 사자일 때. 양말 잔소리는 언제나.
연이는 웃지 못했다. 다들 아는 사람을 자기만 모르는 기분이었다.
아니, 다들 반쯤 아는 사람을 자기는 하나도 모르는 기분이었다.
연이—나 진짜 나쁜 애인가 봐. 메모에 내 편이라고 써 놓고, 내 편 얼굴을 몰라.
연이는 휴대폰을 꺼냈다. 운명의 세계에서도 화면은 켜졌다.
달빛 문 위에 작은 별 하나가 박힌 앱 아이콘. 처음 이 앱이 깔리던 밤과 같은 모양이었다.
연이는 고객센터를 눌렀다. 전화를 걸 수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버튼이 있었다. 통화.
[ 고객센터: 우주 ] [ 상담원: 없음 · 대기 순번: ∞ ]
연이—여전하네. 별점 하나 줬던 그 앱 맞네.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받지 않았다. 연이는 끊지 않았다. 귀에 대고 있으면 이상하게 덜 외로웠다.
연이—(누군가도 이렇게 매일 걸었겠지. 받지도 않는 전화를. 누군가를 찾으려고.)
대기 순번의 무한 표시가 아주 잠깐 깜빡였다. 숫자가 될 뻔하다가 다시 무한으로 돌아갔다.
연이는 그걸 보지 못했다. 화면을 볼 힘이 없어 눈을 감고 있었다.
[ 대기 순번: ∞ ] … 9,999 … ∞
주머니가 따뜻해졌다. 휴대폰이 아니었다. 그 옆, 오래 넣어 두었던 카드 한 장.
남색 뒷면에 별 무늬가 박힌 카드. 연이의 탄생 카드였다.
연이—이거, 계속 안 뒤집히던 거.
카드가 혼자 몸을 뒤척였다. 손바닥 위에서, 아주 천천히. 별 무늬가 아래로 가고 그림이 위로 올라왔다.
[ 탄생 카드 · 17 · 별 ]
밤하늘 아래 물가. 한 여자가 무릎을 꿇고 두 개의 물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나는 물에, 하나는 땅에. 머리 위에 커다란 별 하나와 작은 별 일곱.
윤달—별 카드. 탑 다음 카드예요. 다 무너진 다음에 뜨는 카드.
연이—나 이 카드 알아. 내 방에 있었어. 우산 뒤집힌 날, 방바닥에 이 그림이.
처음 운명의 문을 열던 밤이 떠올랐다. 별점 하나 준 버스 카드, 뒤집힌 우산, 바닥에 흩어져 있던 카드들.
그 가운데 별.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카드가 빛을 쏟았다. 회색 하늘이 갈라지고 밤이 내려왔다.
무너진 벽돌 사이로 물이 차올랐다. 발목까지 오는 맑은 물. 그 위에 별이 비쳤다.
모카—여기 어디야. 카드 속이야?
윤달—연이 씨 카드 속이요. 탄생 카드는 그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데, 같이 있으면 같이 들어와지나 봐요.
물가에 카드 속 여자는 없었다. 물병 두 개만 놓여 있었다. 하나는 비어 있고, 하나는 차 있었다.
서한비—물병이 두 개네요. 하나는 물에 붓고, 하나는 땅에 붓는.
윤달—별 카드는 받은 걸 돌려주는 카드예요. 받은 만큼 물에, 나눌 만큼 땅에.
서한비가 차 있는 물병을 들어 보았다. 무거웠다. 물병 안에서 빗소리가 났다. 그녀의 이름과 같은 소리였다.
서한비—이거, 제 비예요. 제가 장부에서 풀어 준 비. 다 여기 모여 있었어요.
서한비—연이 씨. 손 줘 봐요. 탑에서 쓸린 데.
연이—별거 아니야.
서한비—별거 아니면 더 빨리 낫겠네요.
서한비가 물병을 기울였다. 가는 비가 연이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차갑지 않았다. 쓸린 자리가 아주 천천히 닫혔다. 피딱지도 남지 않았다.
서한비는 물병을 들고 일행을 돌았다. 모카의 그을린 수염, 윤달의 떨리는 손바닥.
비가 닿는 곳마다 상처가 하나씩 지워졌다.
윤달—공망 쓴 자리가 안 아파요. 이런 적 처음인데.
모카—수염 다시 났어. 한비 너 이런 거 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서한비—진작에는 거두는 것밖에 몰랐어요.
물병의 물이 조금 줄었다. 서한비의 손등에 아주 옅게 남아 있던 장부 잉크 자국이 같이 씻겨 나갔다.
그녀는 그걸 오래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빗방울이 연이의 오른손에 떨어졌다.
탑에서부터 꽉 쥐고 있던 손이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하얀 털 한 올. 빗물에 젖자 털이 금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연이의 손바닥 속으로 스며들었다.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들어간 것이었다.
연이—뜨거워. 가슴이. 아니, 가슴 안쪽이.
윤달—잠깐만요. 연이 씨 명식 다시 볼게요.
[ 年 壬午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辰 ] 7/8 · 日 乙 안쪽에 희미한 金
윤달—일간 안에 금이 있어요. 乙 안에. 이건, 합이 걸려 있다는 뜻이에요.
모카—합? 오빠 또 궁합 얘기야?
윤달—진짜 궁합 얘기예요. 乙이랑 庚은 서로 끌어당기는 짝이에요. 庚이 칸에서 빠져도 乙이 한 조각을 붙잡고 있었던 거예요.
윤달이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 공망 속에도 금빛 한 줄기가 걸려 있었다.
탑에서 사자가 삼켜질 때 빨려 들어온 한 줄기였다.
윤달—저도 하나 갖고 있었어요. 말할 타이밍을 못 잡았어요. 연이 씨가 너무 울어서.
연이—그럼 흑월이 다 먹은 게 아니네. 조각이 남아 있어. 나한테 하나, 윤달 씨한테 하나.
윤달—그리고 연이 씨는 바라니예요. 베다 하늘에서 봤죠. 품는 별. 그릇은 담는 거고, 품는 건 지키는 거예요.
서한비—흑월은 연이 씨를 그릇이라고 불렀죠. 그 그릇에 사자님이 담겨 있으면, 흑월은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연이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뜨거운 자리가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그 자리가 거기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연이—기억은 안 나. 근데 이 글씨는 내 거야. 이 손도 내 거고. 내가 쓴 걸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어.
연이는 메모장 새 쪽을 펼쳤다. 볼펜 뚜껑을 이로 뽑았다. 일행이 내놓은 조각을 하나씩 받아 적었다.
[ 네오 · 사자 · 흰색 · 잔소리 많음 · 양말 · 우산은 사람일 때 · 늦게 온 적 있음 · 내 편 ]
모카—잔소리 많음은 꼭 넣어야 돼?
연이—제일 확실한 정보야. 모두가 기억하잖아.
윤달—하나 더 넣어요. 저를 엄청 질투했음.
연이—그건 확인이 필요해. 윤달 씨 말은 반만 믿으라고 누가 그랬어.
윤달—그것도 사자님이 한 말이에요.
모두가 웃었다. 탑에서 내려온 뒤 처음 터진 웃음이었다. 웃음이 별 웅덩이 위로 번졌다. 물 위의 별들이 조금 흔들렸다.
연이는 메모장 맨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이번에는 아무도 불러 주지 않은, 자기 문장이었다.
[ 찾으러 감. 기억 안 나도 감. 내 글씨 믿음. ]
서한비—그 줄은 제 장부보다 훨씬 좋은 장부네요.
연이—장부 아니고 메모. 갚을 거 없는 메모.
물병의 마지막 물이 별 웅덩이에 떨어졌다. 웅덩이에 비친 별이 하나둘 자리를 옮겼다.
별들이 길을 만들었다. 18번 카드 쪽으로.
윤달—다음은 달이에요. 18번. 달 카드는 거짓말 카드예요. 보이는 게 다 진짜가 아닌.
서한비—흑월이 좋아할 카드네요.
모카—거짓말 카드면 내가 불로 다 태워 버리면 되잖아. 성냥 아직 두 개 있어.
윤달—모카 씨는 그 두 개를 꼭 아껴 두세요. 해 카드가 바로 다음 장이거든요.
모카—해? 그건 내 담당이네. 기다려라, 달.
연이—모카 씨 갑자기 멋있다. 별점 하나 올려 줄게.
연이는 일어서다가 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물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눈이 부어 있고, 머리가 엉망이었다.
그런데 물속의 연이가 웃고 있었다. 연이는 웃지 않았는데. 물속의 입꼬리가 한 번, 두 번 올라갔다.
웃는 법을 연습하듯이. 세 번째에야 연이의 웃음과 비슷해졌다.
연이—한비야. 이거 봐. 내 얼굴이.
서한비가 웅덩이를 보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웃음을 본 적이 있었다. 첫 번째 봄, 비 오는 정류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