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 DESTINY꿀꿀 운세

EP.51 · 68 / 70

갚는 사람

현실에서 직접 갚으러 다니는 서한비. 비 오는 정류장에서 이번엔 연이가 우산을 기울인다.

한글 약 2,743자 · 읽는 시간 약 7분

일주일이 지났다. 연이의 휴대폰 검색 기록은 박으로 시작하는 이름으로 가득했다. 박민수, 박준호, 박성훈. 전부 아니었다.

연이—대한민국에 박 씨가 사백만 명이래. 미쳤나 봐.

메모장 마지막 장은 이제 줄이 늘어 있었다. 박 뭐시기. 하얀 머리일 수도. 양말에 집착함. 별점에 예민함.

연이—단서가 이게 다라니. 탐정이었으면 해고야.

그래도 불운은 정말로 멎어 있었다. 토스트는 버터 면이 위로 떨어졌고, 버스는 제시간에 왔다. 연이는 그게 조금 서운했다.

연이—운 좋은 건 좋은데. 놀릴 사람이 없잖아.

침대 끝 빈자리에 연이는 쿠션 하나를 놓아 두었다. 아침마다 그 쿠션을 보고, 아침마다 조금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현관 밖에서 쿵 소리가 났다. 이어서 무언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 연이는 슬리퍼를 꿰어 신고 문을 열었다.

복도에 화분 흙이 흩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서한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양손에 새 화분을 하나씩 든 채로.

서한비—아. 시끄러웠죠. 죄송해요.

연이—그게 다 뭐예요?

서한비—302호 할머니 화분이요. 그날 제가 깨뜨렸어요. 호랑이 꼬리로.

연이는 기억해 냈다. 휴대폰에서 검은 손이 뻗어 나오던 밤. 복도를 가로질러 뛰던 검은 호랑이. 그 꼬리가 쓸고 간 자리.

연이—그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서한비—다 적어 뒀어요. 장부는 아니고, 그냥 수첩이에요.

서한비가 내민 수첩에는 단정한 글씨가 줄지어 있었다. 줄마다 끝에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거나 비어 있었다.

[ 302호 화분 두 개 ○ · 복도 창문 ○ · 편의점 우산 열두 개 · 경비실 의자 · 그리고 연이 씨 ]

연이—마지막 줄은 뭔데요. 저는 물건이 아닌데요.

서한비—그건 동그라미를 언제 칠 수 있을지 몰라서요. 제일 큰 줄이에요.

연이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서한비는 흙을 손으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우아한 존댓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손톱 밑이 까매졌다.

연이—같이 해요. 빗자루 가져올게요.

서한비—아니요, 이건 제가.

연이—흙 치우는 데까지 혼자 하겠다는 건 고집이에요. 갚는 거랑 고집은 달라요.

둘은 말없이 흙을 쓸었다. 302호 문이 열렸다. 할머니가 새 화분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한비—깨뜨린 사람이 저예요. 죄송합니다.

할머니는 한참 서한비를 보았다. 그리고 화분 하나를 도로 서한비 손에 쥐여 주었다.

연이—하나는 가지래요. 방에 초록이 없어 보인대요.

서한비—받으면 안 되는데.

연이—받는 것도 연습해요. 빵 받을 때처럼.

서한비는 화분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대가 없는 빵 앞에서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서한비—감사합니다. 잘 키울게요. 이번엔 진짜로요.

연이—근데 편의점 우산 열두 개는 어떻게 갚아요? 그것도 호랑이 꼬리예요?

서한비—그건 발톱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일하기로 했어요. 야간으로요. 월급에서 우산값을 빼 달라고 했어요.

연이—사장님이 그러자고 했어요?

서한비—이상한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받아 주셨어요. 세상엔 이상한 사람을 받아 주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서한비는 그 말을 하고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자기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게 신기하다는 듯이.

오후의 캠퍼스 정문 앞. 못 보던 천막 하나가 서 있었다. 손글씨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궁합 상담. 첫 회 무료. 생시 모르면 맞혀 드림.

연이—이 사람이 진짜.

윤달—손님, 생년월일시부터. 아, 연이 씨네요. 공짜 손님은 반갑지 않은데.

연이—첫 회 무료라면서요.

윤달—연이 씨는 첫 회가 아니잖아요. 저기서 오십 번은 봤는데.

강새벽. 운명의 세계에서 윤달이라 불리던 남자. 그는 이제 장갑을 끼지 않았다. 손바닥에는 평범한 손금만 있었다.

연이—사람들이 이제 기억해요?

윤달—어제 단골이 제 이름을 불렀어요. 새벽 씨, 하고. 그 자리에서 울 뻔했어요.

윤달—엄마한테도 전화했어요. 첫마디가 밥은 먹었냐였어요. 삼 년 만인데.

연이—뭐라고 했어요?

윤달—먹었다고 거짓말했죠. 그건 집안 내력이라.

연이는 웃다가 천막 의자에 앉았다. 윤달은 아니, 새벽은 묻지도 않고 만세력을 펼쳤다.

윤달—한비 씨는요? 잘 지내요?

연이—복도에서 흙 쓸고 있어요. 수첩 하나 들고.

윤달—그분다운 속죄네요. 장부 대신 수첩이라. 좋은 업그레이드예요.

연이—새벽 씨는 사자 없어서 안 심심해요? 맨날 싸웠잖아요.

윤달—솔직히 좀 심심해요. 질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연이 씨 손금 보는 맛이 안 나요.

윤달—박 씨 찾는다면서요. 사백만 명 중에.

연이—그건 어떻게 알아요?

윤달—검색 기록 다 보이게 휴대폰 들고 다니시잖아요. 점술가는 관찰이 반이에요.

새벽이 연이의 명식을 짚었다. 년 壬午, 월 丙午, 일 乙亥, 시 庚辰. 여덟 칸이 빠짐없이 차 있었다.

윤달—庚이 돌아와 있어요. 그 사람이 어딘가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남의 남편 털 같은 사람이요.

연이—그 표현 그만 써요.

윤달—이번 주 세운을 보면, 동쪽 물가. 꽃이 지기 전. 귀인이 서 있는 자리예요.

연이—동쪽 물가면 강이잖아요. 서울에 강변이 몇 킬로인데요.

윤달—그건 다리로 찾으세요. 점은 방향까지만이에요. 나머지는 발품이고요.

연이는 일어서다가 멈췄다. 천막 밖으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새벽이 하늘을 흘끗 보고 말했다.

윤달—그리고 오늘 저녁엔 비가 와요. 우산 챙기세요. 남는 거 하나 더.

저녁 여섯 시. 소나기가 쏟아졌다. 연이는 노란 우산을 펴고 정류장 지붕 아래로 뛰어들었다. 테이프 세 겹 감긴 그 우산이었다.

지붕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우산 없이. 어깨가 반쯤 젖은 채로. 서한비였다.

연이—한비 씨. 우산은요?

서한비—없어요. 그 검은 우산은 고리랑 같이 사라졌어요. 원래 제 게 아니었으니까요.

빗소리가 지붕을 두드렸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둘은 나란히 서서 물웅덩이에 번지는 신호등 불빛을 보았다.

서한비—여기예요. 첫 번째 봄에 연이 씨가 저한테 우산을 씌워 준 데가. 이 정류장.

연이—나는 기억 못 해요.

서한비—알아요. 그래서 좋았어요. 연이 씨가 그 봄을 몰라서, 제가 처음부터 다시 갚을 수 있으니까.

연이는 우산을 기울였다. 반쯤. 서한비의 젖은 어깨 위로. 자기 왼쪽 어깨가 빗물에 젖어 들었다.

서한비—그러지 마요. 그러면 제가.

연이—알아요. 그때도 이렇게 했다면서요.

서한비의 얼굴이 무너졌다. 광기 컷의 무너짐이 아니었다. 오래 버티던 사람이 마침내 앉아 버리는 쪽에 가까웠다.

서한비—연이 씨. 저는 용서해 달라고 말할 자격이 없어요.

서한비—속은 건 흑월 탓이지만, 연이 씨 운을 거둬들인 건 제 손이었어요. 그 손으로 이 우산을 받으면 안 돼요.

연이—알아요. 그래서 내가 정하려고요.

연이는 우산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빗물이 우산 끝에서 줄지어 떨어졌다.

연이—화분은 갚았죠. 창문도. 우산 열두 개는 아직이고. 그건 계속 갚아요.

서한비—네.

연이—근데 그거랑 별개로. 이제 용서해. 내가 정했어.

서한비가 연이를 보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리고 알게 된 사람처럼. 숨을 한 번 길게 들이쉬었다.

서한비—그렇게 쉽게 정해도 돼요?

연이—하나도 안 쉬웠어요. 일주일 내내 생각했어요. 박 씨 찾는 틈틈이.

서한비—틈틈이요?

연이—박 씨가 메인이에요. 미안해요.

서한비가 웃었다. 젖은 얼굴로, 소리를 내서. 연이는 서한비가 소리 내어 웃는 것을 그때 처음 들었다.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구름 사이로 노을빛이 새어 나왔다. 젖은 아스팔트가 주황색으로 반짝였다.

서한비—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그 봄에 우리, 약속한 게 하나 있었어요.

연이—바다요?

서한비—기억나요?

연이—아니요. 한비 씨가 말해 줬잖아요. 우산 돌려주던 날, 물이 맑아진 뒤에.

서한비—그걸 기억해 줬어요?

연이—메모장에 적어 놨거든요. 박 뭐시기 바로 위에.

연이는 엄지로 휴대폰 달력을 넘겼다. 벚꽃이 지고, 장마가 오기 전. 빈칸이 하나 있었다.

연이—오월 둘째 주 토요일. 바다 가요. 김밥은 제가 쌀게요.

서한비—그럼 저는 우산을 살게요. 두 개요. 이번엔 제 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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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얘는 어떻게 알았어.

서한비—우주가 고자질한 것 같은데요.

버스가 왔다. 서한비가 먼저 올라탔다. 연이는 우산을 접다가, 길 건너편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강 쪽으로 난 길. 아직 꽃이 남은 벚나무 아래. 하얀 우산을 접는 남자의 뒷모습. 머리카락 한 줄기가 빛을 받아 하얗게 보였다.

연이—어.

남자가 재채기를 했다. 발치를 지나가는 길고양이를 보고 한 걸음 물러섰다. 고양이 털 알레르기라도 있는 사람처럼.

버스 문이 닫혔다. 연이는 창에 손바닥을 붙였다. 남자는 동쪽, 강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서한비—연이 씨? 왜 그래요? 아는 사람이에요?

연이—몰라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근데 재채기 소리가.

연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가방 속 메모장을 꺼내 마지막 줄 아래에 급하게 적었다. 하얀 우산. 고양이 알레르기. 강 쪽.

연이—동쪽 물가. 꽃이 지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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