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 DESTINY꿀꿀 운세

EP.53 · 70 / 70

너와 나의 평범한 봄

최종화. 몇 해 뒤의 결혼식, 비 오는 하객석과 별 다섯 개짜리 리뷰. 운명 복구 완료.

한글 약 2,736자 · 읽는 시간 약 7분

삼 년 뒤, 봄. 알람이 울리기 십 분 전에 연이는 눈을 떴다. 창밖에서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냉장고 문에는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바닷가. 우산 두 개. 김밥 옆구리가 터진 도시락. 네 사람이 다 눈을 감은 채로 찍힌 사진.

연이—한 장도 제대로 된 게 없었지. 셀카봉을 그 사람한테 맡긴 게 실수였어.

침대 끝에는 아직도 쿠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제는 버릇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쿠션 옆에 하얀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연이—진짜 오늘이네. 꿈 아니지?

[ 앱 알림 · 박병하: 일어났냐. 양말 짝 맞춰라. 오늘은 진짜로. ]

연이—결혼식 날 아침에 첫 문자가 양말이야? 사랑한다는 말은?

연이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맞췄음. 사진 첨부. 짝 맞는 하얀 양말 두 짝.

[ 박병하: 합격. ]

연이—이 사람은 진짜 변한 게 없어.

연이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낡은 메모장이 들어 있었다. 마지막 장의 삐뚤삐뚤한 글씨. 네오는 고양이 아님. 사자. 내 편.

그 아래에 연이는 오늘 날짜를 적고 한 줄을 보탰다. 이제 남편. 그리고 메모장을 드레스 가방 안주머니에 넣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기도 전에 우아한 존댓말이 들려왔다. 끝음이 서늘한데 이상하게 다정한 목소리였다.

서한비—신부님, 메이크업 선생님 모시고 왔어요. 그리고 우산도요. 오늘 오후에 비 소식이 있어서.

연이—비? 결혼식 날에?

서한비—걱정 마요. 사월 비는 금방 그쳐요. 그리고 비 오는 결혼식은 잘 산대요. 새벽 씨가 그랬어요.

연이—새벽 씨가 한 말은 반만 믿기로 했잖아요.

서한비—그 반이 대체로 맞아서 문제죠.

서한비는 이제 편의점 점장이었다. 야간 아르바이트로 우산값을 갚던 사람이, 사장님이 은퇴하면서 가게를 넘겨받았다. 세상은 생각보다 이상한 사람을 잘 받아 주었다.

그녀의 수첩은 여전히 가방 안에 있었다. 줄마다 동그라미가 빼곡했다. 맨 마지막 한 줄만 빼고.

[ 그리고 연이 씨 ]

연이—그 줄, 아직도 비워 놨어요?

서한비—네. 오늘쯤 칠까 했어요. 결혼 선물로.

연이—치지 마요. 그 줄은 평생 비워 둬요. 갚는 거 말고, 친구로 계속 오라는 뜻으로.

서한비는 한참 수첩을 내려다보다가 펜을 도로 꽂았다. 그리고 동그라미 대신 줄 끝에 작은 우산을 그려 넣었다.

서한비—그럼 이렇게 할게요. 갚는 표시 말고, 같이 쓰는 표시로.

메이크업이 끝나고, 서한비가 드레스 뒤 단추를 하나씩 채워 주었다.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거울 속의 서한비가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

서한비—첫 번째 봄의 연이 씨도 이런 드레스를 입고 싶어 했어요. 정류장에서 그런 얘기를 했었거든요.

연이—그 봄의 나는 뭐라고 했어요?

서한비—결혼식 날엔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요. 우산을 같이 쓸 핑계가 생기니까.

연이—그 봄의 나도 참 나답네.

서한비—그 봄의 연이 씨한테는 못 갚아요. 그래서 이 봄의 연이 씨한테 두 배로 잘할 거예요.

연이—두 배는 됐고. 오늘 부케나 잘 받아요. 던지는 방향 맞춰 줄 테니까.

식장은 학교 뒤 강변 공원이었다. 하객석 맨 앞에 정장 차림의 강새벽이 서 있었다. 손에는 사회자 대본이, 주머니에는 만세력이 들어 있었다.

윤달—신부 입장 전에 확인 하나만요. 오늘 택일비는 아직 못 받았는데요.

연이—축의금에서 까요.

윤달—그럼 축의금을 더 많이 내야겠네요. 계산이 이상한데.

강새벽은 이제 캠퍼스 앞 천막이 아니라 작은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간판에는 여전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생시 모르면 맞혀 드림.

강새벽 뒷줄에는 작은 체구의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연이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다. 강새벽이 귀 끝까지 빨개졌다.

윤달—엄마예요. 따라오셨어요. 아들 이름 불러 주는 사람들 보고 싶다고요.

연이—어머님! 새벽 씨가 궁합으로 사기 치는 거 아세요?

윤달—그건 비밀이었잖아요!

중년 여인이 웃으며 아들을 불렀다. 새벽아. 강새벽은 대답 대신 대본을 펼쳤다. 펼친 대본이 거꾸로였다.

윤달—그리고 축전이 하나 왔어요. 아주 먼 데서.

[ 앱 알림 · 모카: 축가는 내가 랩으로 한다. 도담이 북 치고 무성이 코러스. 거절 불가. 별점 다섯 개 받은 몸이니까 ]

연이—이건 거절할 수가 없네.

윤달—그 랩이 이 세계에서 재생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우주가 알아서 하겠죠.

휴대폰 스피커에서 정말로 북소리가 났다. 서툴고 신나는 북소리. 그 위로 소년의 맑은 목소리와, 그 목소리를 덮어 버리는 랩이 얹혔다.

연이—음정은 여전히 나가네.

윤달—그게 매력이죠. 아무도 안 비웃잖아요.

벚나무 아래 짧은 길. 그 끝에 박병하가 서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 한 줄기는 그대로였다. 정장 넥타이가 조금 삐뚤었다.

연이는 걸어갔다. 아버지 팔 대신 혼자서. 혼자 걷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 길만큼은 자기 발로 가고 싶었다.

네오—늦었다.

연이—삼 분. 네가 기다린 시간 치면 아무것도 아니야.

네오—그건 맞다.

하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연이는 박병하의 넥타이를 고쳐 주었다.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길들여진 고양이처럼.

네오—연이. 첫 번째 봄에는 여기까지 못 왔다.

연이—알아. 그래서 이번엔 내가 걸어왔잖아. 혼자서.

네오—그래. 이번엔 네 발로 왔다. 내가 끌고 오지 않았다.

연이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덩굴은 쇠를 감고 오르지만, 쇠가 덩굴을 끌어올리지는 않는다. 서로 받칠 뿐이다.

윤달—그럼 서약하겠습니다. 신랑 먼저.

네오—나는 말을 잘 못 한다. 그래서 짧게 하겠다.

네오—양말은 내가 짝 맞춰 놓겠다. 매일. 네가 짝짝이로 신고 나가도 화 안 내겠다. 잔소리만 하겠다.

연이—그게 서약이야?

네오—그리고 다시는 이름 숨기고 옆에 있지 않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박병하로. 네오로.

하객석이 조용해졌다. 서한비가 손수건을 꺼냈다. 강새벽은 대본을 보는 척 고개를 숙였다.

연이—내 차례.

연이—비 오면 노란 우산은 내가 들게. 반은 너, 반은 나. 어깨 젖어도 안 따질게.

연이—별점은 매년 다시 매길 거야. 깎일 수도 있어. 긴장해.

네오—무섭군.

둘이 손을 맞잡았다. 연이의 손바닥 한가운데가 따뜻해졌다. 박병하의 손은 조금 차가웠다가, 금세 같은 온도가 되었다. 乙과 庚. 덩굴과 쇠.

그때 정말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는 봄비. 하객들이 웅성거렸다. 서한비가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노란 우산 하나와 검은 우산 하나.

서한비—거봐요. 이번엔 제 돈으로 산 거예요.

연이는 노란 우산을 펴서 박병하 쪽으로 반쯤 기울였다. 자기 어깨가 젖어 들었다. 박병하가 말없이 우산대를 연이 쪽으로 밀었다.

연이—반은 나라니까.

네오—반의 반은 내 거다. 서약 수정.

그 순간 연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가 아니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연이가 삼 년 동안 한 번도 지우지 못한 이름이었다.

[ 수신 · 고객센터: 우주 ]

연이—지금? 결혼식 중인데?

네오—받아라. 저놈들 대기 시간 생각하면 지금 안 받으면 또 삼 년이다.

우주—고객님, 축하드립니다. 운명 고객센터, 우주입니다. 처리 결과 안내와 만족도 조사를 위해 연락드렸습니다.

연이—하필 지금이요? 삼 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다가?

우주—네. 결과가 확정되는 날이 오늘이라서요. 접수 시점은 고객님 스물셋의 봄. 처리 완료 시점은 오늘입니다.

우주—처리 과정에 만족하셨다면 별점을 남겨 주세요. 고객님의 소중한 리뷰는 다음 고객님께 큰 힘이 됩니다.

연이는 하객석을 보았다.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서한비. 대본으로 얼굴을 가린 강새벽. 휴대폰 너머에서 아직 랩을 하는 모카. 우산 아래 어깨가 반쯤 젖은 박병하.

연이—처음엔 반 개도 아까웠는데.

엄지가 별 위로 갔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 ★★★★★ · 리뷰: 늦게 와서 하나 빼려다 참음. 대기 시간 최악. 상담원 친절함. 결과 만족. 재구매 의사 없음. 한 번이면 충분해서. ]

우주—소중한 리뷰 감사합니다. 고객님, 평범한 봄 되세요.

통화가 끊겼다. 비가 그쳤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쏟아졌다. 젖은 벚꽃잎들이 반짝이며 떨어졌다.

윤달—방금 그거 우주였어요? 결혼식에 우주가 전화를 해요?

서한비—하객 명단에 넣을 걸 그랬네요. 축의금은 안 냈겠지만요.

윤달—상담비는 받아 갔겠죠. 삼 년 치로.

네오—뭐라고 썼냐.

연이—비밀. 별점은 매년 다시 매긴다고 했잖아. 내년에 보여 줄게.

발치로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갔다. 하얀 털. 박병하가 재채기를 했다. 하객들이 웃었다. 연이도 웃었다.

부케는 연이의 손을 떠나 정확히 서한비의 품으로 떨어졌다. 서한비가 놀라 우산을 떨어뜨렸다. 강새벽이 박수를 쳤다. 아무도 박수를 빌려주지 않았고, 아무도 거둬 가지 않았다.

서한비—이건 받아도 되는 거예요?

연이—그건 무조건 받는 거예요. 갚지 마요.

연이—평범하다. 진짜 평범한 봄이야.

네오—그거면 됐다. 내년 봄에도, 그다음 봄에도.

[ 운명 복구 완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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