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가 어느 순간 부드러워지고, 빛이 몸을 감쌌다. 팔이 짧아지고, 손가락이 뭉툭해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 그녀는, 강 위에 뜬 커다란 연잎 배 한가운데 있었다.
연이—나 돼지 됐잖아아아아!
비명이 밤하늘 같은 강 위로 길게 퍼졌다. 그러다 뚝, 끊겼다. 소리 지를 폐활량조차, 이 몸엔 얼마 남지 않았다.
연잎은 믿기 힘들 만큼 컸다. 웬만한 원룸 침대보다 넓었고, 가장자리엔 이슬이 조명처럼 맺혔다. 노도, 돛도, 엔진도 없었다. 그냥 거대한 연잎. 근데 떠 있었다. 심지어, 안정적으로.
연이는 한참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짧은 앞발. 동그란 배. 꼬불꼬불한 꼬리. 머리 위에 핀 작은 꽃. 분홍빛 몸은 아무리 봐도,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연이—아니. …이 손으로, 과제는 어떻게 해.
그 순간, 말끝에 이상한 소리가 섞였다.
연이—이거 진짜 말이 안 되잖아, 꿀.
연이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연이—……방금 뭐야.
연이—안녕하세요. 저는, 인간입니다.
멀쩡했다. 연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연이—좋아. 말은 됨. 그나마 다행.
하지만 곧, 앞발을 다시 봤다.
연이—…손가락이, 없어졌다.
연이—이건 명백한 다운그레이드야. 손가락 열 개짜리 인간에서, 앞발 두 개짜리 돼지로.
조금 전까지 그녀는 자기 방에 있었다. 젖은 양말, 이상한 앱, 타로 문. 그리고 지금은 — 꽃 달린 돼지. 정확히는, 꽃돼지.
연이는 연잎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랑한 몸이 살짝 눌렸다 되돌아왔다. 그 감각이 너무 생생해서, 오히려 더 싫었다.
연이—오케이. 알겠어. …이거, 꿈이야.
당연했다. 사람이 앱 하나 잘못 눌렀다고 꽃돼지가 되는 건, 아무리 요즘 세상이 이상해도 선을 넘었다.
연이는 앞발로 연잎 바닥을 톡톡 쳤다. 촉감이, 있었다.
연이—꿈이면 꼬집어서 깨야 하는데. …앞발이, 얼굴에 안 닿아.
연이—…그래픽 좋네.
그녀는 아주 진지하게 결론 내렸다. 어제 새벽 세 시까지 한정 이벤트를 돌았으니, 이건 명백한 게임 후유증이라고.
연이—상태창.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연이—메뉴. …인벤토리.
바람만 지나갔다. 연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연이—…UI 불친절하네. 별점 하나.
그때, 연잎 끝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네오—현실 부정이, 길군.
연이는 그대로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연잎 끝에, 무언가가 앉아 있었다.
처음엔 흰 고양이인 줄 알았다. 몸집은 작고, 날렵하고, 꼬리도 길었다. 그런데 목덜미에 — 황금빛 갈기가 있었다. 고양이인데, 갈기가.
연이—…너 뭐야.
네오—나는 네오.
연이—고양이야?
네오—아니다.
연이—사자야?
네오—굳이 말하자면, 사자에 더 가깝다.
연이—근데 왜 이렇게 작아? 손바닥만 해.
네오의 눈썹이 꿈틀했다.
네오—…첫 만남부터, 무례하군.
연이—나는 방금 이세계 끌려와서 돼지 됐어. 오늘만큼은, 무례할 권리 있다고 봐.
네오는 잠시 침묵했다.
네오—…그건, 인정한다.
연이—너 NPC야?
네오—아니다.
연이—NPC들이 원래 다 그렇게 말해.
네오—…방금 그 말도, NPC 대사 같군.
네오—나는 사주의 강을 지키는 가디언이다.
연이—…설정 있는 NPC네.
연이는 머리 위 꽃을 앞발로 눌렀다. 꽃잎이 작게 흔들렸다. 그 감촉이, 또렷했다. 너무 생생했다.
연이—아. 디테일 미쳤다.
네오—아픈가.
연이—아프진 않은데, 기분이 이상해.
네오—그럼 현실이다.
연이—그 판정 너무 대충이잖아.
네오는 대답 대신 배 밖을 바라봤다. 연이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보였다.
강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강이 아니었다. 물은 검푸른 밤색, 물결마다 별빛이 부서졌고, 물속엔 낯선 한자들이 물고기처럼 헤엄쳤다. 갑자, 을축, 병인, 정묘 — 시험 범위에 나오면 바로 포기하고 싶은 글자들이었다.
멀리엔 안개, 그 너머로 기둥 같은 것들이 흐릿하게 서 있었다. 하늘엔 큰 달. 달빛은 이상하게 차갑지 않았다. 예뻤다. 말도 안 되게. …그래서 더 무서웠다.
꿈이면 깨면 된다. 게임이면 끄면 된다. 하지만 여긴, 끄는 법을 모르는 꿈 같았다.
연이—…여기 어디야.
네오—사주의 강.
연이—사주?
네오—사람의 운명 코드가 흘러가는 곳이다.
연이—응. 하나도 모르겠어.
네오—정상이다. 처음 온 인간은, 대부분 그렇다.
연이—인간 아니게 됐는데.
네오—정확히는, 꽃돼지다.
연이—그 단어, 들을수록 기분 나빠져.
네오—그냥 돼지보다는, 낫지 않나.
연이—…그게 위로야?
네오—객관적인 분석이다.
연이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작은 콧김이 나왔다. 꿀꿀. 너무 귀여운 소리였다. 제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는 사실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연이—왜 하필 돼지냐고! …그리고 여기 어디야, 나 집에 갈래.
네오—쉽지 않다.
연이—쉬운 답, 기대도 안 했어.
네오가 연잎 위를 천천히 걸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이 작게 빛났다. 발끝엔 별 모양 문양. 그냥 이상한 소리만 하는 고양이는, 아닌 것 같았다.
연이—네오. 니가 여기 담당자야?
네오—비슷하다.
연이—그럼 민원 넣을게. 사람이 앱 눌렀다고 돼지 되는 거, 과하지 않아?
네오—나름 귀엽지 않나.
연이—민원 추가. …그리고 내가 누른 건 앱이거든. Code 뭐시기 하는.
네오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네오—그건, 문이다.
연이—앱처럼 생겼던데.
네오—요즘 인간이 누르기 좋은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다. 네가 문을 여는 것보다, 앱을 더 잘 누를 테니까.
연이는 할 말을 잃었다. 맞는 말이라, 더 기분 나빴다.
그때, 배 아래 강물이 크게 흔들렸다. 첨벙. 연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연이—방금, 뭐야.
네오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까까진 귀찮은 고양이 같더니, 지금은 달랐다. 갈기 끝이 희미하게, 금빛으로 타올랐다.
네오—불운의 찌꺼기. …네 현실에서, 새어 나온 것들이다.
연이—내… 현실?
네오는 강물 위, 검은 먹물이 번지는 곳을 가리켰다. 그 검은 물은 지나가는 글자를 하나씩 삼켰다. 빛나던 한자들이 검게 변하고, 형태가 비틀렸다.
네오—요즘, 운이 계속 꼬였지.
안 울린 알람. 세 번 튕긴 카드. 속 없던 삼각김밥. 손상된 과제 파일. 엎어진 약속. 지워지지 않던 앱. — 연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전부 농담처럼 넘겼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에선 계속 신경 쓰였다. 왜 이렇게까지 꼬이지. 왜 나만 타이밍이 안 맞지. 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매번 나를 비껴가듯 망가지지.
연이—그게… 여기랑, 관련 있어?
네오—네 운명 코드가 훼손됐다. 네 사주 글자가, 흩어졌다는 뜻이다.
연이—내 사주를, 누가 건드렸다고? 왜. 거기 뭐가 있다고 굳이.
네오—그걸 알아내려면, 네 글자를 먼저 되찾아야 한다.
네오가 말을 끝내기 전에, 강 아래에서 검은 손이 솟았다. 손이라기엔 너무 길고, 그림자라기엔 너무 선명한. 검은 물로 된 손이, 연잎 가장자리를 붙잡으려 했다.
연이는 얼어붙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억지로 붙들던 농담이, 머릿속에서 싹 사라졌다. 저건 꿈의 장식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자신을 잡으러 오고 있었다.
연이—저거… 나한테 오는 거야?
네오—그렇다.
연이—왜.
네오—네가 표적이니까.
연이—그걸 왜 그렇게 차분하게 말해!
검은 손이 배 위로 뻗어왔다. 연이는 물러나려 했지만, 몸이 아직 남의 것 같았다. 짧은 다리가 연잎 위에서 헛돌았다.
연이—아니, 이 몸 조작감 왜 이렇게 구려!
네오—조작은, 익숙해지면 된다.
검은 손이 연이를 붙잡으려는 순간 — 네오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금빛 선 하나가 공중을 갈랐다. 촤악. 검은 손이 반으로 갈라지고, 먹물 방울이 흩어졌다.
네오는 연잎 끝에 착지했다. 작은 몸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 움직임은, 조금도 작지 않았다.
연이—…오.
네오—이제 고양이라고 부르지 마라. 나는, 사자다.
연이는 잠시 고민했다.
연이—…전투 고양이?
네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오—그냥 네오라고 불러라.
연이—알겠어, 네오.
검은 손은 사라지지 않았다. 강 아래에서 더 많은 그림자가 올라왔다. 잘린 손들은 물속으로 녹아, 더 굵고 긴 형태로 다시 뭉쳤다.
네오가 연잎 바닥을 앞발로 쳤다. 툭. 가장자리에 투명한 물방울이 떠올라, 작은 방패처럼 둘러섰다. 검은 손이 방패를 긁었다. 끼이이익.
연이—…소리 최악.
네오—오래는 못 버틴다.
연이—그럼 어떡해.
네오—…네 머리 위 꽃은, 살아 있다.
연이가 머리 위 꽃을 만졌다. 꽃잎이 손끝에 닿았다. 그 순간, 꽃이 아주 약하게 빛났다. 따뜻했다. 아주 작지만, 분명히.
연이—이건, 뭐야.
네오—네 일간의 흔적. 너 자신을 나타내는, 중심 글자다.
연이는 바로 이해를 포기했다.
연이—좋아. 지금은 그냥, 내 꽃이 배터리라고 치자.
네오—비슷하지 않다.
연이—내가 이해하기 쉽게 바꾼 거야.
네오—틀린 이해는, 위험하다.
연이—너 설명, 꼭 교양 필수 교수님 같아.
검은 손들이 다시 다가왔다. 네오는 강 너머를 바라봤다. 안개 속에, 네 개의 빛이 떠올랐다.
하나는 날카롭고 푸른빛. 하나는 따뜻한 불빛처럼 흔들렸다. 하나는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마지막 하나는, 오래된 책장처럼 부드럽게 빛났다.
네오—네 사주 글자는, 네 개의 섬에 흩어져 있다. 비겁의 섬. 식상의 섬. 재성의 섬. 인성의 도서관.
연이는 네 개의 빛을 바라봤다. 꿈이라기엔 손에 잡힐 듯 선명했고, 게임이라기엔 등골이 서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 빛들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마음 깊은 곳이, 조용히 흔들렸다.
연이—저걸 다 가야, 집에 갈 수 있다는 거지.
네오—그렇다.
연이—잠깐. 나 약관 동의한 적, 없는데.
네오—동의 절차는, 없다.
연이—중간에 환불은.
네오—없다.
연이—문의 게시판은.
네오—없다.
연이—고객센터는.
네오—…나름, 내가 있다.
연이—…뭔가 엄청 불안한데.
네오—불만은, 접수하지 않는다.
연이—최악의 고객센터네.
네오—별점은, 나도 접수하지 않는다.
그때 검은 손 하나가, 방패를 뚫고 들어왔다.
연이—꿀악!
연이는 바로 제 입을 막았다.
연이—…방금 건, 놀라서 그런 거야.
네오—알고 있다.
네오가 다시 뛰어올랐다. 발톱에 금빛 문양이 떠올랐다. — 사주성광. 앞발을 휘두르자, 별빛 칼날이 강물 위를 가르며 퍼졌다. 검은 손들이 한꺼번에 잘려 나갔다.
연잎 배가 앞으로 밀려났다. 강물이 길을 열듯 갈라졌다. 네오는 착지하자마자, 낮게 말했다.
네오—첫 목적지는, 비겁의 섬이다.
연이—비겁?
네오—너와 닮은 것들이, 있는 섬이다.
연이—나랑 닮은 게, 또 있어?
네오—많다. 친구, 경쟁자, 자존심, 질투 — 그리고, 용기.
연이는 말없이 안개 속 첫 번째 빛을 바라봤다. 그 빛은 아름답기보다, 유리처럼 날카로웠다. 가까이 가면, 베일 것 같았다.
연이—…왜 하필 첫 섬부터, 느낌이 별로야.
네오—너 자신과 마주하는 일은, 원래 편하지 않다.
연이—…또 명언처럼 말하네.
네오—사실이니까.
연잎 배가 속도를 냈다. 뒤에선 검은 손들이 다시 강물을 찢고 올라왔다. 앞에선 안개가 짙어졌다. 그 너머로, 섬의 그림자가 조금씩 드러났다. 비겁의 섬.
섬 주변엔 수많은 작은 거울 조각이 떠 있었다. 그 거울마다 — 무언가가,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