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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운명 노벨1부 · 비겁의 섬

EP.03 · 4 / 44

본체 인증 실패

본체 인증에 실패한다.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면 자신의 명식부터 증명해야 한다.

한글 약 5,012자 · 읽는 시간 약 12분

거울 회랑은 숨소리까지 되비추는 곳이었다. 연이의 짧은 콧숨이 사방 유리벽에 부딪혀, 몇 겹으로 겹쳐 되돌아왔다.

맞은편에는 연이의 진짜 얼굴을 한 존재가 서 있었다. 젖은 앞머리, 낡은 후드티, 두 다리로 선 사람. 그게 천천히 웃었다.

거울 속 연이—그럼 증명해봐.

연이—…뭘.

거울 속 연이—네가 진짜 연이라는 걸.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겁의 섬 전체가 발밑에서 쿵, 하고 한 박자 내려앉았다.

연이—우왁?! 야, 이 세계 지진 옵션도 있어? 나 이런 거 신청한 적 없거든?!

공중에 떠 있던 수백 개의 거울이 일제히 뒤집혔다. 뒷면마다 파란 글자가 차례로 켜졌다.

[ 비겁의 섬 · 본시험 시작 ]

[ 본체 인증을 진행합니다. ] [ 제한 시간 10:00 ]

연이는 둥근 눈을 깜빡였다. 머리 위 꽃잎이 파란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물들었다.

연이—뭐야. 갑자기 웬 본인 인증. 나 방금 로그인했는데.

거울 속 연이—맞아. 네 인생 로그인 권한을 걸고.

연이의 앞발이 멈칫했다. 얼굴에서 능글맞은 웃음기가, 물 빠지듯 스르륵 사라졌다.

연이—…로그인 권한?

네오—비겁의 섬은 네 '자리'를 시험한다. 여기서 자리를 빼앗기면, 현실로 돌아가는 권한까지 흔들린다.

연이—잠깐. 그 말은—

연이—쟤가 나 대신 현실로 걸어 들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야?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흰 사자의 꼬리 끝만 딱, 한 번 멎었다. 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거울 속 연이—이해 빠르네. 역시 내 머리야.

거울 속 연이가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손가락 열 개, 마디마디 멀쩡한 손가락이었다. 젖은 머리, 후드티, 두 다리, 원래의 얼굴. 전부 연이가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반면 연이는 꽃돼지였다. 짧은 앞발. 둥근 배. 정수리에 얹힌 작은 꽃 한 송이. 너무 귀엽고, 너무 불리했다.

연이—와. 시작부터 스펙 차이 실화냐.

거울 속 연이—억울하면 이기면 되지.

연이—야, 내 얼굴로 그런 재수 없는 말 하지 마. 기분 이상해.

거울 속 연이—그것도 네 말투인데?

연이—…내가 이렇게 얄밉게 말한다고?

거울 속 연이—응. 아주.

연이—오케이. 자기 객관화 방금 강제 완료. 좀 상처인데.

그때 거울 하나가 스르륵 내려와 연이 코앞에 딱 멈췄다. 유리 표면에 문장이 떴다.

연이—히익, 가까워! 얼굴 앞에 훅 들이대기 있어? 이거 개인 공간 침해라니까.

[ 인증 항목 1 · 이름 ]

쉬운 문제였다. 연이는 곧장 입을 뗐다.

연이—연이.

거울이 삐빅, 하고 야박한 소리를 냈다.

[ 불충분 ]

연이—…왜? 내 이름 내가 대는데 뭐가 불충분이야.

거울 속 연이—이름은 나도 알거든.

거울 속 연이가, 똑같은 목소리로, 태연하게 따라 말했다.

거울 속 연이—연이.

그러자 거울이 파랗게, 훨씬 밝게 빛났다.

[ 후보자 2명 확인 ] [ 본체 판별 불가 ]

연이—야, 네오. 이 시스템 보안 완전 허술한 거 아냐? 이름만 대면 통과면 나도 남 계정 털겠다.

네오—비겁은 '같은 기운'이다. 겉이 같은 것만으로는 구분되지 않아. 그래서 어려운 거다.

연이—그런 중요한 걸 왜 이제 말해?

네오—지금 알면 된다.

연이—너 고객센터 열면 별점 1점이야. 응대가 너무 불친절해.

네오—여긴 별점을 매기는 창구가 없다. 유감이군.

두 번째 거울이 소리 없이 내려왔다. 유리 안쪽부터 서서히 밤 빛깔로 어두워졌다.

[ 인증 항목 2 · 기억 ]

거울 속에 연이의 현실이 비쳤다. 아침 알람이 울리지 않던 날. 개찰구에서 버스 카드만 세 번 오류 나던 순간.

제출 직전 과제 파일이 깨져, 커서만 깜빡이는 화면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밤. 보내려다 지운 메시지. 하루 종일 확인만 하던, 읽히지 않는 답장.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던 얼굴.

연이는 입술을 다물었다. 장면 하나하나는 별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한꺼번에 밀려오자, 가슴 안쪽 어딘가가 손으로 꾹 눌린 것처럼 답답해졌다.

거울 속 연이—나는 늘 늦었어.

[ 기억 일치 ]

거울 속 연이—말하고 싶을 땐 이미 늦었고, 붙잡고 싶을 땐 놓쳤고, 괜찮은 척하다가 혼자 방에서 무너졌지.

[ 기억 일치 ]

연이의 머리 위 꽃이, 바람도 없는데 희미하게 떨렸다.

거울 속 연이—봤지? 나도 네 인생,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아.

연이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맞다. 저건 한 장면도 빠짐없이 자신의 기억이었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뭔가가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남았다.

거울 속 연이는 분명 그 기억들을 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아팠던 감정만, 쏙 빠져 있었다. 마치 남의 일을 깔끔하게 정리해 제출한, 각주까지 달린 감정 없는 보고서 같았다.

연이—…맞아. 늦었어.

거울이 파르르 흔들렸다.

연이—말해야 할 때 입 꾹 다문 적도 있고, 답장 기다리다 괜히 잠금화면만 백 번 켠 적도 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은 적도 많아.

연이는 짧은 앞발을, 둥근 가슴 위에 얹었다.

연이—근데 그때 나, 속으로는 하나도 안 괜찮았어.

거울 속 연이의 표정이, 아주 살짝 굳었다. 완벽했던 보고서에 처음으로 오타가 하나 난 것처럼.

연이—웃긴 척한 것도 괜찮아서가 아니야. 안 웃으면 그 자리에서 진짜 울어버릴 것 같아서였어.

거울이 눈부시게 빛났다.

[ 감정 일치 ] [ 본체 반응 감지 ]

연이의 머리 위 꽃이, 조금 더 환하게 물들었다. 서늘하던 파란빛에 따뜻한 기가 한 겹 섞였다.

거울 속 연이—…제법이네?

연이—나도 내 얘기 정도는 좀 알거든.

거울 속 연이—그럼 다음도 맞혀봐. 이번 건 좀 아플 거야.

세 번째 거울이 내려왔다. 다른 거울과 달리, 이건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척하다가 스르륵 상을 맺었다.

[ 인증 항목 3 · 현재의 몸 ]

거울 안에는 꽃돼지가 있었다. 분홍빛 몸. 정수리의 작은 꽃. 둥근 배. 짧은 다리. 연이 자신이었다.

연이—아…. 이건 아직도 적응 안 된다.

거울 속 연이—그럼 포기해. 편하게.

연이—싫은데?

거울 속 연이—싫다며. 그 몸.

연이—싫지. 솔직히 싫어. 손가락도 없고, 다리도 짤막하고, 놀라면 콧구멍에서 꿀 소리 나오고—

연이—내 인생 비주얼 밸런스 지금 완전 붕괴 났어. 그래프로 그리면 절벽이야.

말끝에 저도 모르게, 꿀, 하고 작은 콧김이 새어 나왔다. 연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연이—아 진짜. 방금 그거 카운트 안 하기다.

네오—카운트는 시스템이 한다. 네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울 속 연이—봐. 너도 싫잖아. 이런 게 네 본체일 리 없잖아.

연이—싫어.

연이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파란 불빛 속에서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연이—근데 싫다고, 그게 내가 아닌 건 아니잖아.

거울 속 연이의 웃음이, 뚝 멈췄다. 연이는 거울에 비친 꽃돼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연이—이 모습 마음에 안 들어. 근데 지금 도망 안 가고 이 회랑에 서 있는 건, 나야.

머리 위 꽃이 스스로 빛을 냈다. 이번엔 거울이 준 빛이 아니었다.

연이—겁나도 버티는 것도 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끝까지 따지는 것도 나고, 네 말에 빡치는 것도 전부 나야.

거울이 크게 요동쳤다. 유리 표면에 잔금이 쫙, 하고 번졌다.

[ 현재 인정 ] [ 본체 반응 상승 ]

연이의 앞발 바로 아래, 유리 바닥을 뚫고 초록빛 새싹 하나가 톡, 돋아났다. 손톱보다 작았다. 하지만 선명했다.

네오—잡아라. 지금.

연이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짧은 앞발을 뻗었다. 새싹이 발끝에 닿는 순간, 따뜻한 기운이 몸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 乙 ]

연이—이게… 뭐야.

네오—을목이다. 네 사주의 천간, 그 첫 글자.

초록빛 새싹이 연이의 앞발 위에서 가늘게 흔들렸다. 숨을 쉬듯이.

네오—작은 풀, 꽃, 덩굴. 강해 보이지 않아도 쉽게 죽지 않는다. 꺾이는 대신 휘고, 휜 다음 다시 자란다.

연이는 자기 앞발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손가락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언가를 꼭 쥔 감각이 남았다. 아주 작은 뿌리 하나. 작지만 살아 있는 것.

거울 속 연이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거울 속 연이—…안 돼.

그녀가 손을 뻗자, 흩어졌던 거울 조각들이 쇳가루처럼 다시 모였다. 이번엔 곡면이 아니라,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졌다.

네오—조심해라. 이제부터 겁재가 움직인다.

연이—겁재? 그게 또 뭔데.

네오—나와 같은 기운. 하지만 내 것을 빼앗아 가는 힘. 형제 같은 얼굴을 하고, 내 몫을 나눠 가지려 든다.

거울 속 연이—맞아. 네가 겨우 손에 넣은 그 새싹도— 내가 가져갈 수 있어.

거울 속 연이 주변으로 수십 개의 칼날이 부챗살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일제히 연이를 향해 쏟아졌다.

네오가 튀어 올랐다. 금빛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쨍! 쨍! 쨍! 칼날이 흩어졌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모였다. 깨져도 다시 생기고, 베어도 다시 날아왔다. 끝이 없었다.

연이—네오!

네오—나는 길을 열 수는 있다! 하지만 네 글자를 대신 지켜줄 수는 없어!

그 외침과 동시에, 거울 속 연이가 연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앞발 안에 자리 잡은 [乙]의 기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작은 새싹이 흙째 뽑히려는 것처럼.

연이—야, 이거… 이거 빠져나가는데?!

네오—겁재다! 네가 네 것을 네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면, 그대로 빼앗긴다!

거울 속 연이—작은 풀 한 포기가,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그 한마디에 [乙]의 빛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연이는 흔들리는 새싹을 내려다봤다.

밟히면 꺾일 것 같고, 바람 한 번에 날아갈 것 같은 작은 것. 그런데. 그런데도, 그 잎은 여전히 파르르 살아 있었다.

연이—작아도 내 거야.

꺼져가던 [乙]의 빛이 다시 살아났다. 거울 속 연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연이—약해 보여도 내 거라고. 네가 대단하다고 도장 찍어줘야 내 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머리 위 꽃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앞발 아래에서 초록 덩굴이 쭉쭉 뻗어 나갔다.

덩굴은 거울 조각 사이를 헤집더니, 날아오던 칼날들을 하나하나 휘감아 붙잡았다. 쨍그랑! 칼날들이 허공에서 그대로 멎었다.

네오—…좋다.

연이—어? 나 방금 뭐 한 거야?

네오—乙을 쓴 거다.

연이—오, 나 스킬 생긴 거야? 나 이제 각성한 거야?

네오—비슷하다.

연이—이름 붙여도 돼? '새싹아 제발 버텨줘' 이런 거 생각했는데.

네오—지금은 안 된다. 그 이름은 나중에도 안 된다.

연이—너 왜 그렇게 단호해. 작명 센스 존중 좀.

연이—그럼 '풀떼기'는? 짧고, 강렬하고, 외우기 쉽잖아.

네오—안 된다.

연이의 콧구멍에서, 항의하듯 꿀, 하고 콧김이 한 번 샜다. 아무도 편들어 주지 않았다.

거울 속 연이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여유롭던 얼굴에, 처음으로 초조함이 스쳤다.

거울 속 연이—…아직 끝난 게 아니야.

그녀가 손을 내리자, 마지막 거울이 스르르 앞으로 떠올랐다. 다른 거울과 달랐다.

그 안에는 검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번엔 연이도 능청을 떨지 못했다.

물은 파문 하나 없이 너무 조용했다. 그런데 그 고요함이, 오히려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네오—乙만으로는, 을해가 완성되지 않는다.

연이—…저게 亥야?

네오—그래. 亥는 깊은 물이다. 한겨울의 물. 겉은 얼어붙은 듯 잠잠하지만, 안쪽엔 아주 많은 걸 품고 있어.

거울 속 검은 물이 천천히 흔들렸다. 그 안에서, 물속처럼 먹먹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내려와. ]

연이는 몸을 굳혔다. 아까 강가에서 덮치던 검은 손들과는 결이 달랐다. 밖에서 덮쳐오는 적이 아니라, 안쪽에서 조용히 부르는 무언가였다. 깊고, 차갑고, 자꾸만 외면하고 싶은 감정.

거울 속 연이—거긴 못 들어가.

연이—…왜.

거울 속 연이—너, 깊어지는 거 싫어하잖아.

그 말에 연이는 곧바로 받아치지 못했다. 능청도, 밈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거울 속 연이—생각이 많아지면 일부러 딴소리하고, 혼자 있으면 무너질까 봐 웃긴 척하고, 진짜 속상한 건 꼭 한참 늦게야 인정하지.

거울 속 연이—그 물이, 처음부터 네 안에 있었어.

검은 물속에 장면들이 떠올랐다. 답장을 기다리던 밤. 다 쓰고도 보내지 못한 긴 메시지. 괜찮은 척 알림을 끄고 닫아버린 채팅방. 불 꺼진 방, 혼자 침대에 누워 천장만 올려다보던 얼굴.

연이는 숨이 턱 막혔다. 그건 거울 속 연이의 어떤 말보다 아팠다. 전부 진짜였기 때문이다. 각색 하나 없이.

네오—乙은 찾았다. 하지만 亥를 외면하면, 을해일주는 완성되지 않아.

연이—…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네오—너는 네 중심을, 딱 반만 되찾게 된다. 반쪽짜리로 현실에 돌아가는 거다.

연이는 세 번째 거울을 바라봤다. 검은 물. 깊은 물. 그 바닥 어딘가에서, 두 번째 글자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는 앞발에 힘을 줬다. 여전히 손가락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무언가를 붙잡는 건 손가락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거울 속 연이—못 가.

연이—넌 왜 자꾸 못 한다는 말만 해?

거울 속 연이—네가 무서워하니까.

연이—무서우면 못 하는 거야?

거울 속 연이—너는… 늘 그랬잖아.

연이—내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말랬지.

거울 속 연이—왜? 맞는 말이라서?

연이—아니. 맞는 말이라서 더 짜증 나.

거울 속 연이가 손을 확 뻗었다. 세 번째 거울 속 검은 물이 테두리를 넘어 쏟아졌다. 쏴아아아! 순식간에 회랑 바닥을 뒤덮었다.

연이는 피하려 했지만 늦었다. 차가운 물이 짧은 앞발을 감싸며, 발목 위까지 순식간에 차올랐다.

연이—네오!

네오가 뛰어올랐다. 발톱이 금빛으로 타올랐다. 검은 물을 세로로 갈랐다. 하지만 물은 갈라졌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붙었다.

네오—이건 베는 게 통하지 않는다!

연이—그럼 대체 어떡하라고!

네오—도망치지 마라!

연이—지금 안 도망치면 그냥 빠지는데?!

네오—도망치면 더 깊어진다!

거울 속 연이는 검은 물 위에 서 있었다. 발끝 하나 젖지 않은 채, 마른 신발로.

거울 속 연이—맞아. 도망치면 더 깊어져. 네가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검은 물이 연이의 둥근 몸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연이는 발톱 없는 앞발을 바닥에 박았다. 하지만 몸이 작았고, 힘도 부족했다. 무서웠다. 개그로도 덮이지 않는, 진짜 무서움이었다.

[ 내려와. 괜찮은 척하지 마. 묻어둔 마음을 봐. ]

연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앞발 안쪽에서 따뜻한 기운이 번졌다. 조금 전 손에 넣은 [乙]이었다. 작은 새싹의 온기.

연이는 눈을 떴다. 앞발 아래에서 초록 덩굴 하나가 다시 자라났다. 그런데 덩굴은 검은 물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물속으로, 스스로 뿌리를 내렸다.

네오—그래, 그거다!

연이—이거 맞는 거야?! 나 지금 물속에 뿌리 박고 있는데?!

네오—乙은 물을 피해서 자라는 게 아니다. 물을 받아 마시고 자란다!

연이—그런 사용설명서를 왜 이제 알려줘!

네오—네가 이제야 나한테 보여줬으니까!

덩굴은 가늘었다. 손끝으로 튕겨도 끊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검은 물이 위에서 덮쳐도, 한 번 휘어졌다가 기어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연이는 그 광경을 보며 숨을 삼켰다. 작았다. 약해 보였다. 그런데 살아 있었다. 꼭, 지금의 자기 자신처럼.

거울 속 연이—멈춰.

연이—싫어.

연이는 앞발을 더 단단히 디뎠다. 물살에 밀리는 몸을, 덩굴 뿌리가 아래에서 붙잡아 주었다.

연이—나 아직도 무서워. 근데 무섭다고 네가 내 이름 가져가는 건— 그게 더 싫어.

검은 물이 크게 출렁였다. 세 번째 거울 속에서, 글자 하나가 물안개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 亥 ]

아직 멀었다. 손 뻗어 닿기엔 너무 깊었다. 하지만 분명히 보였다. 연이의 머리 위 꽃이 흔들렸다. [乙]의 새싹이, [亥]의 검은 물을 향해 조심스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거울 속 연이—그만해!

거울 속 연이가 처음으로 소리쳤다. 그 목소리엔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그 순간, 세 번째 거울 안쪽에서 거대한 물결이 일어섰다. 벽처럼 솟은 검은 물이 연이의 몸을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네오—날 잡아!

네오가 달려와 연이의 앞발을 덥석 물었다.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물의 힘이 너무 강했다. 흰 사자의 작은 몸까지 함께 끌려갔다.

거울 속 연이—그럼— 직접 내려가 봐.

세 번째 거울이 문처럼 활짝 열렸다. 검은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연이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결국, 몸이 통째로 앞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이—꾸울아아아악!

이번엔 연기가 아니었다. 개그 콧김이 아니라, 진짜로 놀라서 터져 나온 비명이었다.

네오—이름을 놓치지 마라! 乙을 붙잡아!

연이는 앞발 안쪽의 따뜻한 기운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손가락은 없었다. 그래도, 마음으로 꽉 붙잡았다.

빨려 들어가기 직전, 거울 밖에 선 인간 연이가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엔, 이제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거울 속 연이—깊은 물속에서도— 네가 너라고 말할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연이는 검은 물속으로, 끝없이 떨어졌다. 머리 위 꽃이 마지막으로 한 번, 환하게 빛났다.

[ 乙 ]

그리고 어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지금껏 잠들어 있던 두 번째 글자가 조용히 눈을 떴다.

[ 亥 ]

[ 해수의 심연이 열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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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필 안내

『연이의 운명 노벨』은 Code Destiny가 직접 쓰고 그린 창작 소설입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재하는 인물·단체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사주 명리학의 십성, 자미두수의 열두 궁, 숙요 27수라는 실제 전통 체계에서 가져왔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서사에 맞게 각색했으므로, 작품 속 묘사를 그대로 점술 지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 주세요. 각 체계의 실제 해석 규칙은 별도의 기능 가이드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본문은 게시 전 편집자가 문장과 흐름을 다듬습니다. 오탈자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면 문의로 알려 주시면 확인 후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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