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벙. 발끝이 수면을 뚫었다. 그리고 세상이 검게 접혔다.
차갑고, 검고, 끝이 없는 물이었다. 이상하게도 숨은 쉬어졌다. 그게 더 무서웠다. 연이는 떨어지는 게 아니라,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아주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연이—몸은 깃털인데 마음은 왜 돌덩이야.
머리 위의 작은 꽃만 물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불빛처럼 빛났다. 연이는 앞발을 꽉 쥐려 했다. 역시 잘 안 됐지만, 발바닥 안쪽에 남은 따뜻한 기운은 또렷했다.
연이—아까 그 새싹. 너는 아직 여기 있구나.
[ 乙 ]
연이—네오! 네오, 어디야!
대답은 없었다. 검은 물결만 천천히, 아무 대답도 아닌 채로 움직였다.
위도 아래도 똑같이 어두웠다. 멀리서 오래된 기억 같은 빛들이 떠다녔다. 읽지 못한 메시지. 보내지 못한 문장. 삼켜버린 말. 울컥했지만 웃어넘긴 순간들.
그것들이 작은 물고기처럼 연이 곁을 스쳐 헤엄쳤다. 지느러미가 스칠 때마다 살갗이 서늘했다.
연이—어, 방금 지나간 저 물고기 나 이불킥 각인데?! 야, 초상권 침해라고, 저리 안 가!
연이—뭐야 여기…… 내 흑역사 통합 저장소 클라우드야?
연이—구독 해지 좀 하자. 무료 체험만 하고 싶었다고.
말끝에 작은 기포가 새어 올라갔다. 뽀글. 그런데 기포 안에 글자가 적혀 있었다.
[ 괜찮아. ]
그 기포는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무겁게, 검은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연이—야, 괜찮아가 왜 밑으로 가. 괜찮으면 둥둥 떠야 하는 거 아냐?
연이—이거 버그 신고 접수요. 약관 어디에도 '괜찮아는 가라앉음'이라곤 안 써 있었잖아. QA는 하고 출시한 거 맞아?
그때 대답처럼, 다른 기포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 별일 아냐. ] [ 나 진짜 괜찮아. ] [ 신경 안 써. ] [ ㅋㅋㅋ 괜찮다니까. ]
연이는 얼굴을 굳혔다. 전부 자기가 했던 말이었다.
정확히는, 하나도 안 괜찮았던 날에만 골라 쓰던 말들이었다.
기포들이 하나둘 연이 몸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갑자기, 추처럼 무거워졌다.
연이—잠깐, 잠깐! 이거 왜 이래!
연이—앞발! 뒷발! 야, 너네 왜 다 따로 놀아! 팀워크 좀!
짧은 네 다리가 물속에서 정신없이 발버둥 쳤다. 그런데도 몸은 한 뼘도 앞으로 안 갔다.
연이—푸학— 코로 물 한 바가지 원샷했네. 이 돼지코, 흡입력 하나는 아주 프리미엄이야.
연이—이 몸 진짜 완전체 하자품이네. 돼지가 수영을 못 하는 게 말이 돼?
그 순간 머리 위 꽃이 파르르 빛났다. 앞발 안쪽에서 초록빛 덩굴이 뻗어 나왔다. 乙의 힘이었다.
덩굴은 물을 헤치며 뻗어나갔다. 하지만 검은 물은 너무 깊었다. 뻗다가, 멈췄다.
어디에 뿌리내려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덩굴 끝이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거울 속 연이—그러니까, 말했잖아.
검은 물결을 가르고 거울 속 연이가 나타났다.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젖지도 않았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거울 속 연이—여긴 네가 못 들어오는 곳이라고.
연이—너는 물속에서 어떻게 드라이 유지되냐? 방수 코팅이라도 했어?
거울 속 연이—나는 흔들리지 않으니까.
연이—아, 진짜 재수 없어.
발끈한 콧구멍에서 저도 모르게 김이 뽀르르 샜다. 꿀. 애써 지은 위협적인 표정이 반쯤 깎여 나갔다.
거울 속 연이—그것도 네 말투인데.
연이—…그 말 이제 저작권 등록함. 쓰지 마.
거울 속 연이는 물속을 걷듯 천천히 연이 주위를 돌았다. 발밑에서 검은 물이 잔잔히 갈라졌다.
거울 속 연이—여긴 亥의 심연이야.
연이—알아. 네오가 말해줬어.
거울 속 연이—그럼 알아야지. 乙은 물이 있어야 사는 새싹이야. 그런데 네가 세상에서 제일 못 하는 게 뭔지 알아?
연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만 벌렸다가, 다물었다.
거울 속 연이—깊어지는 거.
거울 속 연이가 손끝을 튕기자, 검은 물속에 장면 하나가 필름처럼 떠올랐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든 연이. 답장이 오지 않는 채팅방.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지운 문장 하나.
[ 나 사실…… 조금 서운했어. ]
그 문장은 전송되지 못했다. 커서 하나 남기고 지워진 뒤, 기포가 되어 아래로 가라앉았다. 연이의 목이 뻐근하게 잠겼다. 물이 아니라 그 문장 때문에 숨이 막혔다.
연이—그만해.
거울 속 연이—왜? 네 기억인데.
또 다른 장면. 친구들 앞에서 활짝 웃는 연이.
거울 속 연이—「아, 괜찮아. 나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던 옆얼굴.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하나도 웃고 있지 않았다.
다음 장면. 밤새 쓴 과제 파일이 통째로 날아간 새벽. 연이는 꺼진 커서를 보며 혼자 픽 웃었다.
거울 속 연이—「와, 레전드. 내 인생 진짜 예능이다.」
그리고 몇 초 뒤, 그 웃음이 조용히 지워졌다. 방 안에 자판 두드리는 소리도 멎었다.
다음 장면. 면접이 취소됐다는 문자. 그걸 받고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
거울 속 연이—「ㅋㅋㅋ 나 오늘도 운빨 망함ㅋㅋ」
하지만 그 아래, 끝내 전송 버튼을 못 누른 문장 하나가 회색으로 남아 있었다.
[ 사실 좀 무서워. 계속 이렇게 안 풀릴까 봐. ]
연이는 눈을 감았다. 가볍게 넘긴 줄 알았다. 웃어서 지나간 줄 알았다. 그런데 전부 여기 있었다. 검은 물 밑바닥에, 하나도 안 삭제된 채로 가라앉아 있었다.
거울 속 연이—너는 항상 말끝을 웃음으로 틀어막아. 아프면 아프다고 하면 되는데, 꼭 드립부터 쳐.
연이—…그게 그렇게 나쁜 거야?
거울 속 연이—나쁘진 않지. 재밌기까지 해.
거울 속 연이—근데 네가, 네 마음을 한 번도 안 들어주잖아.
그 말에 연이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검은 물이 다시 무거워졌다. 기포들이 온몸에 들러붙었다.
[ 괜찮아. ] [ 별일 아냐. ] [ 신경 안 써. ] [ 나 원래 이래. ]
기포 하나하나는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런데 붙을수록 무거웠다. 연이의 몸이 아래로, 아래로 끌려갔다.
연이—야, 괜찮은 척 좀 했다고 이렇게 심해까지 끌고 가는 건 너무 오버 아니냐고!
거울 속 연이—괜찮은 척은 원래, 물에 제일 잘 가라앉아.
연이—명언 만들지 마.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어록까지 만들지 말라고.
그때 멀리서, 수면 위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네오—연이!
검은 물 위쪽에 금빛이 아득하게 어른거렸다. 네오였다. 그는 물속에 들어오지 못하고 수면 위에서 발톱으로 물결을 긁어내리고만 있었다. 해수의 심연은 닫힌 물이라, 바깥의 힘은 이 안까지 쉽게 닿지 못했다.
연이—네오! 나 지금 완전 물에 잠겼거든?! 지하 몇 층인지도 모르겠어!
네오—물을 밀어내려고 하지 마라!
연이—그럼 뭐 어떡해! 물한테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인사라도 해?!
네오—인사는 필요 없다.
네오—乙은 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다!
연이—그 말 아까도 했잖아! 재방송 그만하고!
네오—이번엔, 머리 말고 몸으로 이해해야 한다!
검은 물이 여전히 연이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 바닥에 거대한 문양이 어렴풋이 보였다. 둥글게 감기는 물결.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 숨어 있는 글자 하나.
[ 亥 ]
해. 하지만 그 글자는 아직, 손이 닿지 않는 바닥에 있었다.
거울 속 연이—못 가.
연이—너 진짜 그 말밖에 못 하냐?
거울 속 연이—못 하니까 못 한다고 하지.
연이—아, 내 얼굴로 팩폭 치니까 두 배로 킹받네.
연이—내 얼굴로, 내 목소리로, 내 말투로. 풀세트로 팩트를 두들겨 맞는 기분, 너는 모르지.
거울 속 연이—그럼 증명해.
거울 속 연이가 손을 뻗었다. 앞발 안에 쥔 [乙]의 빛이 촛불처럼 흔들렸다.
거울 속 연이—네가 乙을 아무리 붙잡아도, 亥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을해는 완성되지 않아.
거울 속 연이—꽃은 물 없이 못 살아. 그런데 너는, 네 물을 싫어하잖아.
연이—내 물?
거울 속 연이—네 깊은 마음. 네가 매번 커서만 깜빡이다 지워버린 그 문장들.
검은 물속에 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불 꺼진 방. 연이가 혼자 앉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화면은 꺼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냥 검은 액정에 비친 자기 얼굴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장면 속 연이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어떤 비명보다 아팠다.
연이—나 저때…….
말이 목에 걸려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거울 속 연이—외로웠지.
검은 물이 한 번 출렁였다.
거울 속 연이—무서웠고.
또 한 번 출렁였다.
거울 속 연이—근데 아무한테도, 단 한 명한테도 말 안 했지.
기포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연이를 통째로 감쌌다. 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 괜찮아. ] [ 나 혼자 해도 돼. ] [ 아무렇지 않아. ] [ 원래 다 이런 거지. ]
연이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물속인데도 숨은 들어왔지만 가슴 한복판이 콱 막혔다. 그 답답함은 물의 무게가 아니었다. 오래 참아온 것의 무게였다.
연이—…그래.
기포들이 뚝 멈췄다. 거울 속 연이도 돌던 걸음을 멈췄다. 연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젖은 앞발로 가슴을 짚었다. 심장이 거기서 뛰고 있었다.
연이—나 안 괜찮았어.
그 말이 물결을 타고 동그랗게 퍼졌다. 그러자 기포 하나가 터졌다. 퐁.
[ 괜찮아. ] …사라짐
연이—별일 아니라고 했는데. 나한테는, 진짜 별일이었어.
또 하나가 터졌다. 퐁.
[ 별일 아냐. ] …사라짐
연이—신경 안 쓴다고 했는데. 사실 밤마다 그 생각만 했어.
퐁. 검은 물이,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어깨를 누르던 무게가 한 겹 벗겨졌다.
[ 신경 안 써. ] …사라짐
연이는 눈을 감았다. 이 다음 한마디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입 밖에 내는 순간 진짜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그런데 삼키면, 영영 이 바닥에 남을 것 같아서. 연이는 눈을 떴다.
연이—무서웠어.
그 순간 검은 물 전체가 크게 요동쳤다. 거울 속 연이가 처음으로, 표정을 잃었다.
연이—계속 안 풀릴까 봐 무서웠고, 내가 뭔가 크게 잘못한 건가 싶어서 무서웠고,
연이—웃고 넘기면 진짜로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안 괜찮아서 더 무서웠어.
기포들이 사방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퐁. 퐁. 퐁. 그때마다 물이 한 뼘씩 맑아졌다.
바닥에 잠겨 있던 [亥] 글자가, 흐린 유리를 닦아낸 것처럼 선명해졌다.
거울 속 연이—그만해.
연이—싫어.
앞발 안쪽의 [乙]이 손난로처럼 따뜻하게 빛났다. 초록빛 덩굴이 다시 자라났다.
이번엔 물을 밀어내지 않았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덩굴은 검은 물 아래로 천천히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아주 작게 파르르 떨었다. 마치, 물을 처음으로 마셔보는 것처럼.
연이는 그 감각을 온몸으로 느꼈다. 차가운 물이 전부 적은 아니었다. 그 안엔 외로움도, 무서움도, 끝내 못 보낸 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기를 죽이려는 물만은 아니었다. 그 물이 있었기에, 이 작은 새싹도 목을 축이며 자랄 수 있었다.
네오—그래. …그거다.
네오—亥는 너를 가라앉히는 물이 아니다. 네 뿌리를 몰래 숨겨둔 물이다.
연이—내 뿌리…….
그 말이 이상하게도 명치 아래에 콕 박혔다. 그녀는 늘 밝은 척, 가벼운 척,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그런데 그 밑엔 늘 깊은 물이 고여 있었다. 귀찮고 무겁고 차가운 물. 그래도 그 안에, 뿌리가 있었다.
연이는 앞발을 쭉 뻗었다. [乙]의 덩굴이 바닥의 [亥]를 향해 곧게 뻗어갔다.
거울 속 연이—안 돼! 네가 그걸 받아들이면—
연이—내가 너보다 더 진짜 같아지나?
거울 속 연이가 입을 다물었다. 연이는 그 침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연이—오케이. 반응 없는 거 보니 정답이네.
덩굴 끝이 [亥]에 닿았다. 그 순간 검은 물속에서 거대한 파문이 원을 그리며 퍼졌다.
차가운 물이 연이를 감쌌다. 그런데 이번엔 끌어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처럼 그녀를 받쳐 올렸다.
[亥] 글자가 천천히 떠올랐다. 검은 물이 깊은 밤바다 남색으로 물들었다. 그 속에서 작은 별빛들이 하나둘 켜졌다.
연이—…예쁘다.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무섭기만 하던 물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차갑지만 맑았고, 어둡지만 비어 있지 않았다. 그 안엔 기억이, 감정이, 상처가,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은 마음이 가득했다.
연이의 머리 위 꽃이 활짝 피어났다. 두 글자가 그녀 앞에 나란히 떠서 빛났다.
[ 乙 ] [ 亥 ]
연이—…을해일주.
그 말이 떨어지자 두 글자가 하나의 빛으로 이어졌다. 초록 새싹이 깊은 물 위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작은 꽃이 피었다. 검은 심연 한복판에서. 말도 안 되게 작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꽃이었다.
연이는 그 꽃을 보며 숨을 멈췄다. 그건 꼭 자기 같았다. 아직 약하고, 아직 작고, 아직도 많이 무섭지만—그래도 살아 있는 것.
위에서 네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금빛 발톱이 수면을 갈랐다. 빛이 폭포처럼 밀려들었다. 연이는 위로 떠올랐다. 이번엔 물이 끌어내리지 않고, 등을 밀어 올려주었다.
거울 속 연이—네가 亥를 찾았다고, 다 끝난 줄 알아?
연이—끝은 아니겠지. 뭐, 그럴 줄 알았어.
거울 속 연이—비겁의 섬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뿌리를 찾은 거랑, 네 자리를 지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야.
연이—그럼 올라가서 또 하면 되지. 나 이제 튜토리얼 좀 손에 익었거든.
큰소리치는 말끝에, 작은 콧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꿀.
연이—…아, 이건 진짜 아직도 적응 안 돼.
그 순간 빛이 터졌다. 쏴아아아! 연이는 해수의 심연을 뚫고 솟구쳐, 비겁의 섬 바닥 위로 데굴데굴 굴렀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연이—아야…… 착지 점수 빵점이네.
네오—…살아는 있나?
연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 위 꽃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선명하게 빛났다. 꽃 아래로 푸른 물결 문양이 잔잔히 감돌았다.
네오—乙亥가 연결됐다.
[ 乙亥 · 을해 ]
그건 이제 단순한 글자 두 개가 아니었다. 작은 꽃과 깊은 물. 흔들리지만 죽지 않는 마음. 밝게 웃지만, 속 깊은 곳에 많은 걸 품은 자기 자신.
연이—나 생각보다 되게 복잡한 타입이었네.
네오—이제야 알았나.
연이—응. 근데 복잡하다고 해서, 저 가짜한테 내 자리 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그때 섬 전체의 거울들이 일제히 빛났다. 거울 속 연이가 물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번엔 공기가 달랐다. 발밑으로 검은 거울 조각들이 스르륵 모여들었다. 눈빛은 더 차가워졌고, 목소리는 더 낮게 가라앉았다.
거울 속 연이—좋아. …그럼 이제, 진짜 시험을 시작하자.
연이—뭐? 아직도 시험이 남았다고?
연이—야, 이 게임 엔딩 크레딧은 대체 언제 떠? 스테이지마다 유료 DLC 팔듯이 시험을 계속 꽂아 넣네.
네오—乙亥는 찾았다. 하지만 비겁의 섬은, 네가 그 글자를 지켜낼 수 있는지까지 확인하려 든다.
거울 속 연이가 손을 치켜들었다. 수많은 거울 조각이 그녀 뒤로 병풍처럼 떠올랐다. 조각마다 다른 연이의 얼굴이 비쳤다. 질투하는 연이. 포기하는 연이. 남과 비교하는 연이. 억지로 웃는 연이.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연이.
거울 속 연이—어서 와. 이번엔, 네가 이긴 줄 아는 저 너희들 전부랑 싸워야 하니까.
연이는 숨을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였다면 겁부터 났을 것이다. 지금도 겁은 났다. 하지만 아까와 똑같은 겁은 아니었다. 앞발 안쪽엔 乙의 온기가, 가슴 깊은 곳엔 亥의 물이 고여 있었다.
연이—오케이.
연이는 거울 속 자신을 똑바로 마주 봤다. 머리 위 꽃이 환하게 빛났다.
연이—나 방금 심연까지 다녀온 사람이거든? 멘탈 패치 한 번 크게 돌렸어.
거울 속 연이가, 소리 없이 웃었다.
[ 비겁의 섬 · 마지막 시험 시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