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카는 달렸다. 정확히는 달리는 척하면서, 세 걸음마다 뒤를 돌아봤다.
모카—빨리요! 늦으면 사전 이벤트 다 끝난다니까요!
연이는 짧은 다리로 열심히 따라갔다. 통딩. 통딩. 통딩. 식신·상관의 섬 바닥은 밟을 때마다 리듬이 튀었다.
연이—네오. 나 지금 진지하게 뛰는 중인데, 발소리가 너무 귀여워.
네오는 뛰지도 않으면서 옆에서 연이를 따라잡고 있었다.
네오—네 몸과 섬의 기운이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연이—그 말 은근 기분 나빠. 나는 긴박하고 싶은데 바닥이 자꾸 통딩거리잖아.
모카—괜찮아요! 식신·상관의 섬에서는 귀여운 것도 엄연한 장르예요!
연이—그거 위로야 추가 공격이야. 경계가 애매하네.
그렇게 커브 하나를 돌자마자, 노바 스테이지 전야제가 눈앞에 확 펼쳐졌다. 연이는 걸음을 멈췄다. 발밑의 통딩 소리마저 멎었다.
연이—와.
노바 스테이지는 거대한 원형 광장이었다.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광장 전체가 하나의 축제로 숨 쉬고 있었다.
하늘엔 별 모양 조명이 떠 있었고, 그 사이로 색색의 천이 파도처럼 넘실댔다. 공중엔 작은 무대들이 떠다니며 춤과 냄비 박자를 쏟아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냄새가 엄청났다. 달콤한 크림빵, 끓는 매콤 소스, 버터 녹은 옥수수, 반짝이며 굳는 과일 시럽, 그리고 어디선가 풍겨오는 따뜻한 수프.
연이는 앞발을 배에 얹었다.
연이—여기 진짜 위험하다.
네오가 곧장 몸을 낮추고 자세를 잡았다.
네오—위험한 기운이 느껴지나.
연이—아니. 다 먹고 싶어.
네오는 잡았던 자세를 조용히 풀고 도로 일어섰다.
네오—그런 위험인가.
연이—코가 먼저 별점 매겼어. 다섯 개 만점. 이 냄새는 환불도 안 될 것 같아.
모카—이게 바로 노바 스테이지 전야제예요! DEST1NOVA 본공연 전에 열리는, 식신·상관의 섬 최대 축제!
연이—공연 하나 앞두고 이렇게까지 해?
모카—당연하죠! DEST1NOVA는 그냥 노래만 하는 그룹이 아니에요. 먹는 즐거움, 말하는 용기, 노래하는 마음, 춤추는 몸, 그 전부를 깨우는 그룹이라고요!
연이—팬심이 너무 강해서 해설이 살짝 종교 같아졌어.
네오—섬 중심부라 그런지 식상 기운이 가장 진하다. 표현 에너지가 순환하는 구조지.
연이—그러니까 많이 먹고 많이 떠들고 많이 놀면 된다는 거지? 내 번역이 더 쉽네.
그때 모카가 연이 앞에 작은 종이 팔찌를 쓱 내밀었다.
모카—이거 차세요. 전야제 체험 팔찌요. 이걸 차면 네 개 멤버 구역을 다 돌 수 있어요.
연이는 앞발엔 손목이 없어 그냥 발목에 걸쳤다. 팔찌엔 네 칸이 있었다. 늑대. 판다. 토끼. 흑표범.
연이—손목도 없는 돼지한테 팔찌를 팔다니. 이 앱, 착용감 테스트는 하고 출시한 거야?
모카—SOLV 존, BAMBI 존, LUNE 존, RAVEN 존. 처음 온 팬들을 위한 입덕 코스죠.
연이—입덕 코스까지 있어? 팬덤 운영 진짜 탄탄하네.
모카—참고로 DEST1NOVA 팬덤 이름은 OUR CODE예요. 운명 코드 속에서 함께 빛난다는 뜻이죠.
연이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연이—어라. 좀 멋있는데?
모카—그렇죠!
네오—먼저 섬 중심 구조를 파악하는 편이 좋다.
연이—그래. 멤버 구역 돌면서 파악하자.
네오—그건 덕질이다.
연이—현장 조사야.
모카—덕질은 최고의 현장 조사입니다.
연이가 앞발로 모카를 가리켰다. 봐, 전문가가 그렇대. 네오는 포기한 듯 짧게 한숨을 쉬었다.
[ 전야제 체험 팔찌 획득 ] [ 네 멤버 구역을 돌아 입덕 코스를 완성하라. ]
첫 번째는 SOLV 존. 입구엔 은빛 늑대의 거대한 깃발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 말은 칼이 될 수도 있고, 길이 될 수도 있다. ]
연이—오. 래퍼답네.
온통 어두운 은색과 검정. 바닥엔 랩 가사 같은 문장들이 빛줄기로 흘렀다. 방문객들이 자기만의 한 줄을 적으면, 그 문장이 은빛 늑대 그림자로 변해 짧게 울렸다.
모카—여긴 마음을 좀 정갈하게 하고 들어가야 해요.
연이—정갈하게 들어가랬는데, 코가 먼저 꿀 하고 김을 뿜었어. 미안, 얘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해.
연이—나 아직 빵 봉투 들고 있는데, 이 상태로 들어가도 돼?
모카—괜찮아요. SOLV 형도 야식 좋아한다는 소문 있어요.
연이—갑자기 인간미 확 생기네.
부스 한가운데선 한 줄 랩 챌린지가 열리고 있었다. 다람쥐가 외쳤다. '오늘도 늦잠 잤지만, 그래도 출근은 했다!' 둥. 박수.
고슴도치가 이었다. '가시는 많아도 마음은 말랑합니다!' 둥. 더 큰 박수.
연이—여기 뭐야, 되게 귀엽다.
모카가 조심스럽게 마이크 앞에 섰다. 손엔 낡은 가사 노트가 들려 있었다. 그가 숨을 들이켰다.
모카—나는 모카.
둥.
모카—아직 무명. 하지만 오늘도 줄 서는 중.
둥.
모카—언젠가 무대 앞이 아니라, 위로 가는 중.
마이크가 잠깐 조용해졌다. 그리고 은빛 늑대 그림자가 모카 뒤로 스윽 솟아올랐다.
[ 가능성 있음 ]
모카—가, 가능성 있음?
연이—오! 시스템이 인정했네!
모카—저 이거 평생 기억할래요.
네오—아직 가능성이다. 완성은 아니다.
연이—오늘만큼은 입 좀 닫아.
네오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 SOLV 존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능성은 적어두고 끝내는 게 아니라, 다음 줄로 증명하는 거지.'
모카가 그대로 굳었다. 연이가 고개를 돌리자, 은빛 늑대가 서 있었다. SOLV. 검은 재킷, 은빛으로 흐르는 목털, 목엔 마이크 모양 펜던트. 포스터보다 실물이 훨씬 셌다.
연이—야. 네 최애 왔다.
모카—소, 소, 소…….
SOLV가 모카의 노트를 힐끗 봤다. '많이 썼군. 손때가 많다. 버리지 않았다는 뜻이지.'
모카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툭 떨어졌다.
모카—감사합니다…….
SOLV의 시선이 연이에게 옮겨오더니 잠깐 멈칫했다. '꽃돼지.'
연이—여기도?
'실례. 특이한 리듬이 있어서 봤다. 걸음에 박자가 있다.'
연이—이거 그냥 바닥이 지 마음대로 통딩거리는 건데.
SOLV의 입가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그래도 네 박자다.' 그 말은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SOLV는 더 말하지 않고 은빛 문장들 속으로 사라졌다. 모카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모카—가셨다…….
연이—야. 살아 있어?
모카—아마요.
SOLV 존을 나온 두 사람은 은빛 골목 끝, 조명이 낮게 깔린 벤치에 잠깐 걸터앉았다. 네오는 먹거리 구경을 핑계로 저만치 떨어졌다.
모카는 아직 젖은 노트를 앞발로 소중히 문질러 말리고 있었다. 페이지마다 지운 자국이 덧칠처럼 쌓여 있었다.
연이—너 아까 그 노트. 얼마나 쓴 거야?
모카—세는 걸 포기한 지 오래됐어요. 저 사실, 무대에 처음 선 날 완전 망했거든요.
연이—망했어?
모카—가사를 통째로 까먹었어요. 앞줄에서 누가 웃었고, 그 소리가 마이크로 들어와서 스피커로 나왔어요.
모카는 그때가 다시 보이는 듯 잠깐 눈을 감았다.
모카—그다음부터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넌 무대 앞에서 응원봉 흔드는 게 어울린다고. 위는 아니라고.
연이는 아무 말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벤치 조명이 모카의 젖은 눈가에 얇게 걸렸다.
모카—그래서 노트를 샀어요. 까먹지 않으려고. 근데 쓰다 보니까, 안 까먹으려고 쓰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자꾸 생겨서 쓰게 되더라고요.
연이—……그래서 아직도 줄 서는 중이구나.
모카—네. 무대 앞에 줄 서면서, 언젠가는 저 위에 선다고. 매일 스스로한테 라임 맞춰요.
연이는 문득 자기 앞발을 봤다. 사람이었을 땐 걸크러시 소리 듣고 싶어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매번 삼켰던 게 떠올랐다.
연이—나는 반대였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멋없어 보일까 봐 자꾸 삼켰거든. 근데 너 보니까 알겠다. 삼킨 말은 라임이 안 붙어. 뱉어야 훅이 되는 거였어.
모카가 눈물을 훔치다 말고 픽 웃었다.
모카—그거 방금 좀 SOLV 형 같았어요.
연이—어? 나 방금 입덕 성공한 사람 앞에서 랩 훔친 거야?
모카—샘플링이라고 해두죠.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웃음이 벤치 조명 아래에서 통딩, 하고 튀는 것 같았다.
연이—모카. 네가 위로 올라가는 날, 나 맨 앞줄에서 응원봉 부러지게 흔들어줄게.
모카가 노트를 가슴에 꽉 끌어안았다.
모카—그거…… 노트에 적어도 돼요?
연이—적어. 대신 라임 맞춰서.
모카는 그 자리에서 연필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지운 자국투성이 페이지 위에, 이번엔 지우지 않을 한 줄이 생겼다.
멀리서 네오가 옥수수를 하나 들고 돌아왔다. '…무슨 일이지.'
연이—우정 결성.
네오—그런 것도 결성하나.
모카—방금 했습니다.
두 번째는 BAMBI 존. SOLV 존이 날카롭고 어두운 리듬의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완전히 달랐다. 따뜻하고 둥글었다. 크림색 천이 하늘에 걸리고, 곳곳에서 작은 수프 냄비가 김을 올렸다.
[ 노래는 배고픈 마음을 데우는 수프 같은 것. ]
연이—여긴 들어오자마자 위로받는 느낌이네.
네오—위로는 감정이다. 이 구역이 실제로 내보내는 건 수증기와 냄새다.
모카—BAMBI 님은 메인 보컬이에요. 듣고 있으면 내가 조금 괜찮은 존재가 된 것 같아요.
BAMBI 존엔 마음 수프 부스가 있었다. 오늘의 기분을 말하면 그에 맞는 수프를 내주는 곳. 연이는 호기심에 줄을 섰다. 판다 직원이 물었다. '오늘의 기분은?'
연이—배고팠다가, 맛있어서 행복했다가, 갑자기 내가 왜 돼지인지 생각나서 좀 복잡해졌고, 방금 래퍼 늑대한테 박자 칭찬 들어서 애매하게 좋아졌어요.
직원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합 감정이군요.'
연이—그걸 한 단어로요?
직원이 작은 그릇을 내밀었다. '달빛 감자 수프입니다. 복잡하지만 따뜻한 분께 드립니다.'
연이는 한 입 떠먹었다. 부드러운 감자 맛과 은은한 허브 향이 퍼지자, 마음속에 엉켜 있던 실이 한 매듭 스르르 풀렸다.
연이—와.
네오—어떤가.
연이—말하기 싫어. 혼자 느낄래. …응, 조금 감동.
그때 곁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감동은 천천히 먹어야 오래가요.' 하얀 판다가 웃고 있었다. BAMBI. 둥근 인상에 푸른 리본, 무대 위 사람다운 묘한 힘이 있는 눈빛.
모카—BAMBI 님…….
BAMBI가 웃었다. '아, SOLV 존에서 가능성 받은 그 친구죠? 노바 스테이지 소식은 빨라요.'
모카—소문이…… 벌써……?
'계속 써요. 목소리는 쓰다 보면 자기 온도를 찾아요.'
모카—네!
BAMBI의 시선이 연이에게 닿았다. '그리고 당신은. 먹을 때 표정이 아주 솔직하네요.'
연이—그게 칭찬인가요?
'최고의 칭찬이에요. 맛있다고 느끼는 마음은, 좋은 노래의 시작이거든요.'
연이는 수프 그릇을 내려다봤다. 식신. 먹고, 느끼고, 나누는 힘. BAMBI의 목소리가 그걸 그대로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세 번째는 LUNE 존. 멀리서부터 기타 소리가 들렸다. 딩. 딩딩. 딩. 천막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기울었고 조명도 제멋대로 반짝였다. 바닥엔 누군가 낙서한 코드들이 가득했다.
[ 틀린 코드? 다음 박자에 살리면 돼. ]
연이—이거 좋은데.
모카—LUNE 님은 실수를 무대로 바꾸는 천재예요.
LUNE 존에선 망한 멜로디 살리기 이벤트가 한창이었다. 돼지 아이가 삐익 소리치자, 기타와 드럼이 곧장 그걸 경쾌한 후렴으로 받아쳤다.
연이—이거 재밌겠다.
네오—하지 마라. 네가 할 것 같아서.
연이—정확하네.
연이는 결국 무대 위로 올라갔다. 마이크 앞에 서자 관객 몇이 기대 어린 눈으로 봤다. 연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외쳤다.
연이—꿀!
정적. 그리고 기타가 바로 치고 들어왔다. 딩! 드럼이 받았다. 쿵짝. 신시사이저가 꿀 소리를 귀엽게 비틀었다. 꿀, 꿀, 꿀, 꿀딩!
관객석이 폭소로 뒤집혔다. 연이 얼굴이 홍당무처럼 확 달아올랐다.
연이—아니, 이걸 살리네?
그때 기타를 멘 토끼가 무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긴 귀, 별 모양 피어싱, 장난기 가득한 눈. LUNE이었다. '좋은 소스였어! 귀엽고 짧고 기억에 남아.'
연이—내 흑역사를 샘플링하지 마.
LUNE이 기타를 튕기며 웃었다. '흑역사도 리듬 타면 훅이 돼.'
연이—그 말 좀 위험하게 설득력 있다.
LUNE이 네오를 발견하곤 눈을 반짝였다. '오. 작은 사자 친구도 해볼래?'
네오—안 한다.
연이—해봐. 가디언 샘플링.
네오—말도 안 되는 표현이다.
LUNE이 기타를 번쩍 들었다. '자, 포효 한 번!' 네오는 눈을 감고 참는 듯하더니, 아주 낮게 읊었다.
네오—나는 사주의 강을 지키는 가디언이다.
LUNE이 그 말을 듣자마자 기타를 후려쳤다. 딩딩딩! 신시사이저가 네오의 낮은 목소리를 리듬으로 바꿨다. 가-디-언, 가-디-언, 사주의 강 가-디-언!
관객이 환호로 들썩였다. 네오의 얼굴은 돌처럼 굳었고, 연이는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연이—네오 테마곡 생겼어!
네오—지워라.
LUNE이 씩 웃었다. '좋은데? 나중에 무대에서 써도 돼?'
네오—절대 안 된다.
'생각해볼게!' 네오가 낮게 덧붙였다. 생각하지 마라.
연이—네오, 테마곡 삭제는 고객센터에 민원 넣어. 근데 이 세계 고객센터, 아직도 접수 확인 문자 한 통이 없다.
네 번째는 RAVEN 존. 앞의 세 구역과 달리 조용했다. 하지만 비겁의 섬 같은 침묵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게 만드는 긴장된 고요함이었다. 바닥은 검은 유리처럼 반짝였고 조명은 낮게 깔렸다.
[ 몸은 말보다 먼저 진실을 말한다. ]
연이—여긴 분위기가 확 다르네.
모카—RAVEN 님 구역은 퍼포먼스 체험장이에요. 말보다 움직임이 중요해요.
연이—나한테 제일 불리한 구역 같은데?
네오—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 네 몸에 익숙해져야 하니까.
연이—그 말 맞는데 듣기 싫다.
RAVEN 존에선 그림자 스텝이 진행 중이었다. 발을 디디면 그림자가 그 사람의 감정을 따라 움직였다. 기쁜 사람의 그림자는 튀어 오르고, 긴장한 사람의 그림자는 작아졌다.
연이가 조심스레 발을 디디자, 작은 꽃돼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림자는 연이보다 훨씬 당당했다. 가슴을 쫙 펴고, 앞발을 척 올리고 있었다.
연이—내 그림자가 나보다 자신감 있는데?
네오—네 안의 가능성이겠지.
연이—아니면 그림자가 과대평가 중이거나.
연이가 그림자를 따라 앞발을 척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균형을 잃고 코부터 바닥에 콩 박았다. 그림자는 혼자만 여전히 당당했다.
그때 검은 흑표범이 소리 없이 걸어 나왔다. RAVEN. 말이 많지 않은 타입이었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주변 공기가 스스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가 연이의 그림자를 보고 짧게 말했다. '나쁘지 않다.'
연이—뭐가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몸이다.'
연이—그게 칭찬이에요?
RAVEN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몸이다. 중심이 낮다. 잘 구르면 덜 다친다.'
연이—그건 좀 현실적인 장점이네요.
RAVEN이 조용히 말했다. '무대에서는 멋있는 것보다, 멈추지 않는 게 먼저다.'
연이는 그 말을 마음속 깊이 담았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몸. 오늘 들은 말 중에 제일 오래 남을 것 같았다.
네 구역을 다 돌자, 연이의 팔찌에 네 개의 빛이 차례로 켜졌다. 은빛 늑대. 하얀 판다. 달빛 토끼. 검은 흑표범.
연이—팔찌가 나보다 먼저 감동했어. 네 칸이 지들끼리 막 자랑하듯 빛나잖아.
모카—입덕 코스 완료예요.
연이—이 정도면 나도 OUR CODE 임시 회원인가?
모카—충분합니다.
연이—먹었고, 울었고, 방금은 응원봉을 지를 뻔했어. 이걸 조사라고 우기면 그게 더 수상해.
네오—우리는 조사를 한 것이다.
연이와 모카가 동시에 말했다. 입덕한 거야.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노바 스테이지 중앙에서 큰 종이 울렸다. 둥. 둥. 둥. 광장의 조명이 하나씩 꺼지고, 중앙 무대 위로 거대한 달 조명이 천천히 떠올랐다. 관객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모카—본공연 시작이에요.
연이도 무대를 올려다봤다. 조금 전 직접 만난 네 명이, 이제 하나의 그룹으로 오를 시간이었다. SOLV의 말, BAMBI의 온기, LUNE의 자유, RAVEN의 몸짓. 그 전부가 하나로 합쳐지면 어떤 무대가 될까.
연이—너도 기대하지?
네오—공연의 기운을 관찰하는 중이다.
연이—그게 기대야.
네오—아니다.
그 순간 관객들이 목청껏 외쳤다. DEST1NOVA! DEST1NOVA! DEST1NOVA!
모카—드디어…….
무대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첫 번째 조명, 은빛. 두 번째, 따뜻한 흰빛. 세 번째, 달빛. 네 번째, 검은 별빛.
DEST1NOVA의 네 실루엣이 무대 위에 동시에 솟아올랐다. 광장 전체가 함성으로 터졌다.
음악이 쏟아졌다. 바닥이 통딩거리던 그 박자가, 이번엔 수만 명의 발밑에서 하나로 쿵쿵 울렸다.
연이—뭐야 이거. 온몸이 떨려.
연이—꿀! ……방금 그거 내 의지 아니야. 몸이 음악한테 먼저 대답했어.
네오—이게 식상의 섬 중심 기운이다. 표현이 모여 하나로 터지는 순간.
연이—네오. 너 지금 발 까딱거리고 있어.
네오—…리듬을 측정하는 중이다.
연이—그게 떼창 직전이라는 거야.
SOLV의 랩이 은빛 칼처럼 날면, BAMBI의 목소리가 그 뒤를 수프처럼 데웠다. LUNE의 기타가 틈을 살렸고, RAVEN의 몸짓이 박자를 바닥까지 눌러 박았다.
연이가 문득 옆을 봤다. 모카가 노트를 가슴에 안은 채 소리 없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노래를 따라 부르지 못했다. 목이 잠겨서였다. 대신 눈에서 무언가 계속 흘렀다.
모카—저기 위에……. 언젠가 저기 위에…….
연이는 아무 말 없이, 앞발로 모카의 손을 꾹 잡았다.
연이—맨 앞줄에서 응원봉 부러지게 흔들어준다고 했지. 그 약속, 오늘부터 세는 거다.
모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눈물이 조명을 받아 별 조각처럼 튀었다.
수만 개의 응원봉이 동시에 흔들렸다. 광장 전체가 OUR CODE의 떼창으로 하나가 됐다. 그 합창 속엔, 방금 팔찌를 다 채운 임시 회원 하나와, 아직 무명인 지망생 하나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연이는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기로 했다. 배부르고, 시끄럽고, 조금 눈물 나는 밤이었다.
전야제는 끝났다. 이제 진짜 무대가, 데뷔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멀리, 아무도 올려다보지 않은 하늘 위에서.
검은 깃털 하나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 깃털은 함성에도, 조명에도, 달빛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재능이 처음으로 인정받은, 어느 무명 지망생의 뛰는 심장 소리.
[ 다음 화 · 제9화 ] [ DEST1NOVA 데뷔전. 그리고 재능을 갉아먹는 그림자가 노바 스테이지에 내려앉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