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 DESTINY꿀꿀 운세

EP.21A · 27 / 70

기억하지 못한 이름

네오 시점. 이름을 말하면 사라진다는 규칙과, 우산을 든 손의 조각 기억.

한글 약 1,840자 · 읽는 시간 약 4분

네오는 잠든 방을 소리 없이 빠져나왔다. 문을 닫기 전에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연이는 이불을 차 낸 채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다.

네오—이불은 덮고 자라. 감기 걸리면 또 고객센터 탓을 하겠지.

그는 앞발로 이불 끝을 물어 연이의 어깨까지 끌어 올렸다. 연이가 뒤척이며 그 앞발을 베개처럼 끌어안았다.

네오—놔라. 나는 베개가 아니다.

연이는 놓지 않았다. 네오는 한참을 그렇게 엎드려 있다가, 아주 천천히 앞발을 빼냈다. 그 자리에 책 한 권을 대신 밀어 넣었다.

네오—미안하다. 오늘은 그 책이 대신 고객센터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연이가 잠꼬대로 별 하나, 하고 중얼거렸다. 네오는 아주 작게 웃었다.

계단을 오르다 그는 벽에 어깨를 기댔다. 왼발이 또 말을 듣지 않았다.

앞발을 들어 보았다. 그을린 자국 위로 붉은 녹이 번져 있었다. 물에 빠진 뒤로 녹은 하루에 한 마디씩 자랐다.

네오—불에 그을리고, 물에 녹슬고. 쇠는 참 다치는 방법도 많군.

그는 녹을 갈기로 덮었다. 내일 아침에도 연이가 보지 못하게. 모카와 윤달에게는 이미 들켰지만, 그 둘은 입이 무거웠다.

아니, 수달은 무겁지 않았다. 오늘 오후 그 꼬리가 다 말해 버렸을 것이다.

계단 창으로 비 냄새가 흘러들었다.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네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덜컥 열렸다가 닫혔다.

비 오는 정류장. 낡은 지붕 아래로 빗물이 줄을 이어 떨어졌다.

누군가의 손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작은 손이었다. 우산은 반쯤 기울어 옆 사람 쪽으로 가 있었다.

우산 아래에서 누군가 웃었다. 비를 맞으면서, 바보처럼, 아주 즐겁게.

같이 쓰자. 기억 속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네오는 그 목소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빗물뿐이었다.

네오는 이마를 차가운 벽에 댔다. 기억은 언제나 거기까지였다. 우산을 든 손. 그 손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그 옆에 누가 서 있었는지.

네오—이름만 알면 될 텐데.

[ 계약 조항 제1조 · 수호자는 자기 이름을 말할 수 없다 · 이름이 불리는 순간 계약은 끝난다 ]

눈앞에 금빛 글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고객센터의 규칙이었다. 처음 이 일을 맡을 때 그가 직접 서명한 규칙이었다.

네오—알고 있다. 잊은 적 없다.

자기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잊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버리고 무엇을 얻기로 했는지는 잊지 않았다.

네오—한 번만 더. 이번에는 끝까지 옆에서.

그는 계단 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 하얀 갈기, 금빛 눈, 녹슨 앞발. 사자의 얼굴이었다.

네오—이 얼굴로 처음 눈을 떴을 때, 그 애는 나를 보고 고양이냐고 물었지.

그리고 별점을 매겼다. 하나. 네오는 그날 받은 별 하나를 아직도 정확히 기억했다. 자기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면서.

지붕 위는 바람이 셌다. 반쯤 먹힌 해가 밤하늘에 걸려 있었다. 낮도 밤도 아닌 하늘이었다.

지붕 끝에 검은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를 기다린 것처럼.

검은 호랑이—늦었네, 사자.

네오—비 냄새가 나서 와 봤다. 이번엔 누구 책을 훔치러 왔지.

검은 호랑이—오늘은 일하러 온 거 아니야.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네오—돼지한테는 반말, 나한테도 반말. 존댓말은 누구한테 쓰지.

검은 호랑이—쓸데없는 질문 하지 마.

네오—장부 주인한테 쓰나. 그 목소리한테.

검은 호랑이—입 다물어. 그 목소리는 지금도 듣고 있어.

호랑이가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반쯤 먹힌 해의 검은 쪽이 아주 느리게 꿈틀거렸다.

호랑이의 붉은 눈이 네오의 왼발로 내려갔다. 갈기로 덮어 둔 녹을 정확히 찾아냈다.

검은 호랑이—그 발. 하루에 한 마디씩 번지지.

네오—어떻게 알지.

검은 호랑이—장부에 다 적혀. 네가 그 애 옆에서 다칠 때마다, 그 애 쪽 칸이 한 줄씩 무거워져.

네오—그 애 칸은 건드리지 마라.

검은 호랑이—건드리는 건 내가 아니야. 너야. 그 애 불이 커질수록 넌 녹고, 네가 버틸수록 그 애는 작아져.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검은 호랑이—떠나. 지금 떠나면 그 애는 일곱 칸으로 살 수 있어.

네오—일곱 칸이면 그릇이 된다. 너도 알 텐데.

검은 호랑이—너, 그걸 어떻게.

네오—나도 장부는 못 봐도 하늘은 본다. 저 먹힌 해가 원하는 게 뭔지쯤은.

빗방울이 둘 사이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맑은데 둘이 선 자리에만 비가 내렸다.

네오—그런데 이상하군. 네 비 냄새는 처음 맡는 냄새가 아니다.

검은 호랑이—착각이야.

네오—우산. 정류장. 같이 쓰자는 말.

호랑이의 꼬리가 바닥을 세게 쳤다. 빗물이 튀어 올랐다.

검은 호랑이—그 얘기 하지 마. 너는 그 봄 얘기 할 자격 없어.

네오—그럼 맞군.

네오—우린 같은 봄에서 왔지.

호랑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발을 들어 목의 고리를 꽉 쥐었다. 고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검은 호랑이—기억 안 나면서 아는 척하지 마. 그게 제일 잔인해.

네오—기억 안 난다. 그래서 묻는 거다.

검은 호랑이—나는 다 기억나. 하나도 안 빼고. 그래서 이렇게 사는 거야.

네오—그 봄에 무슨 일이 있었지.

검은 호랑이—네가 지키겠다던 사람이 사라졌어. 그게 다야.

네오의 앞발이 움찔했다. 녹이 번진 자리가 갑자기 화끈거렸다. 기억은 없는데 몸이 먼저 아파했다.

네오—그랬군. 그래서 이번엔 내가 이 일을 맡았나 보다.

검은 호랑이—이번에도 똑같이 끝날 거야. 너는 또 늦고, 나는 또 혼자 남고.

검은 호랑이—묻지 마. 이름도 모르는 사자한테 내가 왜 대답해.

네오—그건 피차일반이군. 나도 네 이름을 모른다.

바람이 불었다. 네오의 눈 깊은 곳에서 금빛이 번쩍 일었다가 사라졌다. 자기도 모르게 일어난 빛이었다.

검은 호랑이—너 지금 그 눈.

네오—신경 쓰지 마라.

검은 호랑이—빈칸 앞에서도 그 눈이었지. 너 스스로도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네오—고객센터는 사적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때 아래쪽에서 창문 여는 소리가 났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돼지답게 조금 시끄럽게.

하얀 사자와 검은 호랑이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창틀에 분홍색 앞발 하나가 걸려 있었다.

전체 목차십성 해석 가이드비주얼 노벨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