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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운명 노벨4부 · 인성의 도서관

EP.22 · 23 / 44

네 번째 기둥

네 번째 기둥이 모습을 드러낸다. 명식이 비로소 완성된다.

한글 약 11,341자 · 읽는 시간 약 27분

본인 확인을 통과한 자에게, 도서관은 문 하나를 더 열어 주었다.

열람실을 나선 이튿날 아침, 백문은 두 사람을 서가 깊은 곳의 낡은 문 앞으로 데려갔다. 다른 문과 달리, 이 문에는 손잡이도 열쇠 구멍도 없었다. 다만 문 위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자기를 증명한 자만 들어올 것.」

연이—손잡이가 없는 문이네요. 어떻게 열어요?

백문—자네가 이미 열었네. 어제 열람실에서 자기를 증명했으니까. 손으로 여는 문이 아니라, 자격으로 여는 문일세. …자, 대 보게. 손을.

연이가 문에 손을 대자, 손끝에서 어제 새긴 청록빛이 번졌다. 그러자 손잡이 없던 문이 스르르 안으로 열리며, 그 너머로 별빛이 쏟아져 나왔다.

연이—…열렸어! 진짜 제 빛으로 열렸어요! 우와, 이 안은—

기둥의 방이었다. 서가가 아니라, 밤하늘을 실내에 들여놓은 것 같은 방. 허공에 글자들이 별자리처럼 떠 있었다.

연이—…우와. 여긴 도서관이 아니라 하늘이잖아요. 별처럼 떠 있는 저 글자들, 전부 누군가의 사주예요?

백문—그렇다네. 세상 모든 이의 여덟 글자가, 저마다 하나의 별자리가 되어 여기 떠 있지. 태어남이 곧 하나의 별자리를 세우는 일이거든. 자네 것도 저 어딘가에 있어. 찾아보겠나?

백문이 지팡이를 휘젓자, 무수한 별자리 중 하나가 두 사람 앞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여덟 개의 자리 중 여섯이 또렷이 빛나고, 두 자리가 텅 비어 어둡게 뚫려 있는 별자리.

연이—…이게 제 별자리예요? 근데 두 자리가 까맣게 비어 있어요. 별이 있어야 할 곳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백문—저 두 빈자리가, 자네가 이 세계로 끌려온 이유일세. 여덟 별 중 둘이 빠졌으니, 자네 별자리는 미완성이야. 하나는 여기 도서관에 잠들어 있고, 나머지 하나는 — 토끼의 금고에.

연이—…여섯 개는 제자리에 있네요. 비겁도, 식상도, 재성도 다 되찾았으니까. 남은 두 개 중 하나가 여기 있다는 거죠? 지금 되찾을 수 있는.

백문—바로 그걸세. 이 방은 본인 확인을 통과한 자에게만 열려. 자네가 열람실에서 스스로를 증명했으니, 이제 이 방이 자네 것을 돌려줄 자격을 인정한 거야. …자, 저 먼지 쌓인 자리를 보게.

기둥의 방이었다. 자네 사주의 원문이 별자리로 걸린 곳. 백문이 그 빈자리 중 하나를 가리켰다.

백문—자네 사주의 원문 서가일세. 을해가 있고, 그리고 여기,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던 게 하나 있군.

백문이 지팡이를 들자 허공에서 두 글자가 내려왔다. 물처럼 검고 불처럼 따뜻한, 임오였다.

백문—임오. 큰 물이 말의 불을 품은 기둥이지. 남을 살리는 물이자, 제 열기를 아는 물이야. 받게. 본인 확인이 끝난 원문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는 법이니.

임오 두 글자가 연이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빈 별자리의 한 자리에, 잃었던 별 하나가 다시 켜졌다. 미완성이던 별자리가, 이제 일곱 개의 별로 빛났다.

연이—…따뜻하다. 신기해, 물인데 따뜻해. 이게 원래 내 안에 있던 거구나. 이걸 되찾으니까… 가슴 한구석이 꽉 찬 느낌이야. 오랫동안 뭔가 허전했는데, 그게 뭔지 이제 알겠어.

연이는 새로 켜진 별의 온기를 가만히 느꼈다. 잃어버린 한 조각이 돌아오자, 세상이 반 박자 더 또렷해진 것 같았다. 자기가 조금 더 '자기'가 된 기분이었다.

연이—…이게 온전해진다는 거구나. 남의 글자가 아니라, 원래 내 글자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거. 백문 님, 이거 되찾고 나니까 신기해요. 아까보다 손끝이 더 선명하게 느껴져요.

백문—당연하지. 기둥 하나가 채워졌으니, 자네의 읽는 힘도 그만큼 또렷해진 거야. 별자리는 별이 많을수록 밝게 빛나거든. 마지막 한 자리까지 채우면, 자네는 지금보다 훨씬 강한 독자가 될 걸세.

네오—임오는 원래 그런 기둥이야. 큰 물이 불을 품어서, 차갑지 않고 따뜻하지. 남을 살리는 물. …딱 너 같은 기둥이네, 연이. 이제 남은 건 하나, 신미뿐이야.

연이—신미. 그게 토끼 금고에 있는 마지막 별이구나. 그것만 되찾으면, 내 별자리가 완성되고… 나 집에 갈 수 있는 거지.

백문—…자네, 이왕 임오를 되찾은 김에, 자네 별자리를 한번 제대로 읽어 줄까? 사서가 손님 사주를 읽어 주는 건, 이 도서관의 오래된 대접이거든. 을해년에, 임오까지. 일곱 별이 이루는 이 그림을 보게.

연이—어, 좋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요. 백문 님 눈으로 보면 저 어때요?

백문—…을(乙)목. 자네의 본질은 여린 새싹이자 넝쿨일세. 큰 나무처럼 뻣뻣하지 않고, 부드럽게 휘면서 끝까지 자라는 목(木)이야. 밟히고 눌려도 죽지 않고, 틈만 있으면 다시 뻗어 오르지. …자네가 섬 세 개를 건넌 그 끈질김이, 다 이 을목에서 나온 걸세.

연이—…넝쿨이요? 어쩐지. 저 진짜 잘 안 꺾이긴 해요. 넘어져도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고. 그게 제 타고난 거였구나.

백문—그리고 이번에 되찾은 임오(壬午). 큰 물이 말의 불을 품은 기둥. 이게 자네에게 아주 특별해. 보통 물과 불은 서로 극하는데, 자네 안에선 그 둘이 싸우지 않고 껴안았어. 그래서 자네 물은 차갑지 않고 따뜻하고, 자네 불은 사납지 않고 은은하지. …남을 살리면서도 자기를 태우지 않는 균형. 아주 드문 그릇일세.

연이—…남을 살리면서도 자기를 안 태우는. …근데 저 사실, 남 챙기다 저 자신은 자꾸 뒷전이 되던데요. 모카도 그랬어요, 제 노래도 부르라고.

백문—…그게 자네가 아직 채워야 할 마지막 기둥, 신미(辛未) 때문일세. 그 별이 빠져 있어서, 자네는 남은 잘 지키면서 자기 자신은 못 지키는 거야. 마지막 기둥을 되찾으면, 비로소 자네도 자네를 지킬 줄 알게 될 걸세. 온전한 균형이 완성되는 거지.

연이—…아. 그래서 마지막 기둥이 그렇게 중요한 거였네요. 남만 지키는 반쪽짜리가 아니라, 저까지 지키는 온전한 저로. …되찾을게요.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꼭.

네오—…좋은 이유야. 지금까지 넌 늘 남을 위해 싸웠어. 이번엔, 너 자신을 위해서도 싸워. 그게 균형이니까.

백문—마지막 기둥은 토끼의 금고에 있네. 되찾는 건 힘이 아니라 순서야. 오늘부터 그 순서를 가르쳐 주지.

기둥의 방을 나서기 전, 네오가 문득 별자리들이 떠 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수한 별자리 중에서, 자기 것을 찾으려는 듯. 백문이 그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백문—…파수꾼. 자네 별자리를 찾나? …소용없을 걸세. 자네 것은, 여기 없어.

네오—…역시. 이 방에 세상 모든 이의 사주가 있는데, 제 것만 없군요. …당연한 겁니다. 저는 이 시간에 속한 존재가 아니니까요.

연이—…네오 별자리가 없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태어난 사람은 다 별자리가 있다며.

백문—…이 방에 별자리가 없다는 건 두 가지 중 하나일세.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 혹은, 자기 시간을 이미 한 번 지워 버렸거나. 파수꾼, 자네는 후자로군. 시간을 거스르면서, 자네 자신의 별자리를 스스로 태워 버린 게야.

네오—…맞습니다. 시간을 거스른 대가로, 저는 제 별자리를 잃었습니다. 이 세계 어디에도 제 자리는 없어요. 저는… 이미 한 번, 제 운명을 지운 자입니다.

연이—…그럼 넌, 사주도 없이, 돌아갈 별자리도 없이 나를 지키고 있는 거야? 네 자리를 태워 가면서? …네오, 그건 너무하잖아. 왜 그렇게까지…

네오—…괜찮아, 연이. 별자리가 없다는 건, 어떤 운명에도 묶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해. 나는 정해진 운명이 없으니까, 오히려 자유롭게 널 지킬 수 있는 거야.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마. 나는 이 자유가, 싫지 않아.

백문—…별자리 없는 자의 자유라. …허. 그것도 하나의 답이겠지. 다만 파수꾼, 언젠가 자네도 자네 별자리를 되찾을 날이 오길 바라네. 남의 운명만 지키다, 정작 자기 하늘은 텅 빈 채로 두지 말게.

연이는 그 대화를 다 이해하진 못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았다. 네오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상상도 못 할 만큼 큰 것을 이미 내던졌다는 것. 언젠가 반드시, 저 텅 빈 하늘에 네오의 별자리를 되찾아 주겠다고 — 연이는 조용히 마음에 새겼다.

그날부터 도서관은 도장(道場)이 되었다. 며칠에 걸친 혹독한 수련이 시작됐다.

첫째 날 아침. 백문은 연이를 등불 물고기가 가장 낮게 흐르는 연못가에 앉혔다. 호흡 수련이었다.

백문—되쓰기의 첫걸음은 호흡일세. 자네 숨이 흔들리면 글씨도 흔들려. 저 물고기의 헤엄처럼, 느리고 고르게. 들이쉬며 원문을 떠올리고, 내쉬며 거짓 도장을 밀어내는 걸세.

연이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처음엔 자꾸 조급해져 숨이 얕아졌지만, 백문의 낮은 목소리를 따라 조금씩 깊어졌다. 들이쉬고, '나는 나를 지킨다.' 내쉬고, '거짓은 나를 못 덮는다.'

연이—…신기해요. 숨만 골랐는데, 마음이 단단해져요. 아까 검은 글자가 팔로 기어오르던 그 무서움이, 이제 좀 견딜 만해요.

백문—그게 뿌리일세. 되쓰기는 손이 아니라 호흡에서 나오거든. 급한 마음으로 되쓰면 아까처럼 삼켜지지만, 고른 숨으로 되쓰면 어떤 거짓 도장도 못 이겨. 좋아, 됐네. 오후엔 읽기다.

낮이 되자 백문은 오염된 책들을 한 아름 가져와 열람대에 쌓았다. 연이가 되살려야 할 실전 교재였다.

연이—…'이 사람은 게으른 게 아니라 지쳤던 거야.' …'이 아이는 나쁜 게 아니라 외로웠던 거야.' …'이분은 실패한 게 아니라, 그냥 운이 나빴을 뿐이야.'

연이가 원문을 하나씩 읽어 낼 때마다, 검은 도장들이 옅어지고 눌렸던 진짜 문장이 되살아났다. 하루에 다섯 권, 열 권. 연이의 읽는 속도가 날마다 빨라졌다.

백문—좋아! 이제 읽기는 몸에 붙었네. 남은 건 셋째 문턱, 되쓰기야. 읽는 것과 되쓰는 것은 달라. 읽기는 남의 문장을 밝히는 거고, 되쓰기는 그 문장을 세상에 다시 새기는 거지. 되쓰기는 자네 숨을 실어야 하거든.

연이—뿌리내림!

연이의 청록빛 덩굴이 검은 문장 밑으로 파고들었다. 이번엔 원문을 '읽어 밝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문장을 붙들어 검은 도장을 통째로 밀어내며 세상에 다시 새겨 넣었다. 되쓰기의 첫 성공이었다.

백문—…되쓰기가 됐어! 그것도 흔들림 없이! 호흡이 받쳐 주니, 아까처럼 삼켜지지 않는군. 나무의 뿌리는 흙만 뚫는 게 아니라 거짓도 뚫는다네. 다시!

연이—됐다! 이번엔 안 무서웠어요! 숨이 안 흔들리니까, 검은 글자가 저한테 못 옮겨붙어요! 이게 되쓰기구나!

둘째 날, 셋째 날. 연이의 되쓰기는 날마다 깊어졌다. 처음엔 한 권에 반나절이 걸렸지만, 나중엔 검은 서가 한 칸을 하루에 되살렸다. 앓던 책들이 하나씩 등불빛을 되찾을 때마다, 연이의 청록빛도 짙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연이는 유난히 무거운 책 한 권과 마주했다. 검은 도장이 일곱 겹이나 눌린, 서가에서 가장 오래 앓아 온 책. 백문조차 오래 손대지 못한 것이었다.

연이—…이 책, 도장이 너무 많아요. 일곱 겹이나 눌려서, 밑에 원문이 뭔지 손끝으로도 잘 안 잡혀요. 아무리 읽으려 해도, 자꾸 미끄러져요.

백문—…그건 이 서가에서 제일 깊이 병든 책일세. 오래 눌린 도장은 원문을 아주 밑바닥까지 가라앉히거든. 무리하지 말게. 그건 자네가 마지막 기둥까지 다 채운 뒤에나—

연이—…아니요. 지금 해 볼래요. 겁먹어서 미끄러지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셋째 원칙, 흔들리지 않기. 저 이제 그거 할 수 있잖아요. 호흡 고르고, 천천히.

연이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들이쉬며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내쉬며 '이 밑에 진짜가 있다.' 조급함을 버리고, 일곱 겹 도장 아래로 아주 천천히 손끝을 밀어 넣었다. 한 겹, 두 겹, 세 겹…

연이—…잡혔어. 맨 밑바닥에, 아주 작게. …'나는, 그래도 살고 싶었다.' …이 사람, 일곱 번이나 무너졌는데도, 맨 밑엔 '살고 싶다'가 남아 있었어. 일곱 겹 빚 밑에서도, 안 꺼진 거야.

백문—…일곱 겹을 뚫었어. 그 밑바닥의 한 줄을 잡아냈군. …나도 백 년간 못 뚫은 책을.

연이—…살고 싶었던 그 마음, 내가 다시 써 줄게. 뿌리내림!

연이의 청록빛 덩굴이 일곱 겹 도장을 한 겹씩 밀어 올렸다. 「무능」 「파산」 「폐인」… 검은 글자들이 차례로 부서지고, 맨 밑바닥에서 「나는 그래도 살고 싶었다」가 금빛으로 솟아올랐다. 가장 오래 앓던 책이, 마침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연이—…됐다. 이 사람, 이제 '폐인'이 아니라 '살고 싶었던 사람'이야. 일곱 번 무너져도 안 죽은 사람.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백문—…연이. 자네는 이제 나를 넘어섰네. 나는 이 책을 백 년간 못 뚫었는데, 자네는 며칠 만에 뚫었어. …자네의 되쓰기엔, 내게 없는 게 있어. 남의 밑바닥을 제 밑바닥처럼 아파하는 마음. 그게 자네를 나보다 강하게 만드는 걸세.

연이—…아니에요. 백문 님이 가르쳐 주셔서 된 거예요. 저 혼자였으면, 이 책 앞에서 그냥 겁먹고 도망쳤을 거예요. …백문 님, 고마워요. 이 힘, 위에 올라가서 꼭 제대로 쓸게요.

수련의 짬짬이, 연이는 도서관 생활에 제법 정이 들었다. 등불 물고기들은 이제 연이를 알아보고 어깨 위에 앉았고, 백문은 매 끼니 새로운 요리를 실험했다. 하지만 문득문득, 연이는 두고 온 것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연이—…아, 갑자기 삼각김밥 먹고 싶다. 매운 참치마요. 그리고 편의점 냉장고 앞에서 '오늘 뭐 먹지' 고민하던 그 평범한 저녁. 그때는 그게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는데.

네오—…삼각김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운 게 있다는 건, 돌아갈 곳이 있다는 뜻이야. 좋은 거다. 나는… 그리운 곳이 어딘지도 잘 모르거든.

연이—…네오 너, 돌아갈 곳이 없어? 그럼 이거 다 끝나면 넌 어디로 가?

네오—…글쎄.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봤어. 나는 널 집에 돌려보내는 것까지가 임무니까. 그 뒤는… 뭐, 그때 가서 생각하지.

연이—…그럼 우리 집으로 와. 삼각김밥 사 줄게. 아, 넌 사자라 큰 거 먹어야 하니까 열 개쯤. 그리고 언니가 하는 빵집도 있어. 크루아상 진짜 맛있어. 네오 너 크루아상 먹는 거 상상하니까 좀 웃기다.

네오—…사자가 크루아상을. …그림이 안 그려지는군. 하지만… 나쁘지 않네. 그런 미래도.

연이는 웃으며 그 말을 했지만, 네오에게는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돌아갈 곳. 함께 삼각김밥을 먹는 미래. 그건 시간을 훔친 대가를 치러야 하는 파수꾼에게는, 감히 그려서는 안 될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 밤만큼은, 네오도 그 그림을 잠깐 상상해 보았다.

연이—자, 그럼 그 크루아상 먹으러 가려면 빨리 이 훈련 끝내야지! 백문 님, 저 오늘 몫 다 했어요? 삼각김밥이 저를 부르고 있어요!

백문—허허. 삼각김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자네 동력이라면 좋은 거지. 그래, 오늘 몫은 충분하네. …자네가 이렇게 웃으니, 이 늙은 도서관이 다 환해지는군. 백 년간 이렇게 시끌벅적한 적이 없었어.

연이—그럼 백문 님도 좀 더 자주 웃으셔야겠다. 자, 제가 제 세계 유행어 하나 알려드릴게요. 힘들 때 이렇게 외치는 거예요. '아, 몰라 몰라! 될 대로 돼라!'

백문—…'될 대로 돼라'? 사서에게 그건 아주… 불경한 주문이군. 세상 모든 문서를 '되게' 하려고 백 년을 애쓴 늙은이한테.

연이—에이, 그러니까 더 필요하죠! 백 년 동안 혼자 다 짊어지셨잖아요. 가끔은 '몰라 몰라' 하고 어깨 힘 빼셔도 돼요. 자, 따라해 보세요. 아, 몰라 몰라!

백문—…허허. …아, 몰라 몰라. …흠. 생각보다, 어깨가 좀 가벼워지는 주문이군.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안 되게' 둬도 되는 게 있다는 걸 배웠어. 자네는 사주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늙은이 사는 법도 가르치는군.

네오—…백문 님, 그 주문 남발하시면 안 됩니다. 도서관 오염 서가가 '아 몰라 몰라' 하고 방치되면, 연이가 되쓸 게 산더미가 돼요.

연이—앗, 그건 그렇네. 백문 님, 오염 서가한테는 '몰라 몰라' 쓰지 마세요. 그건 제 밥줄이니까요!

세 사람은 또 한바탕 웃었다. 백 년을 홀로 침묵하던 도서관이, 이 며칠 사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백문은 이 시끌벅적함이, 자기가 백 년간 지켜 온 그 어떤 문서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아이들을 위로 올려보내는 게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위에는 회중시계가 있고, 청토끼가 있고, 그리고 더 무서운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웃음이, 그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기를. 백문은 조용히, 그렇게 빌었다.

백문의 수업은 혹독하면서도 다정했다. 아침엔 호흡, 낮엔 읽기, 밤엔 쓰기.

백문—첫째, 부정 계약은 원본을 이기지 못한다. 사본이 아무리 두꺼워도 원문 한 줄이면 무너지거든.

백문—둘째, 토끼의 시계는 문장을 덧쓸 뿐 지우지는 못하네. 지워진 것처럼 보여도 본뜻은 그 밑에 살아 있어. 그러니 싸움의 핵심은 베기가 아니라 되읽기일세.

연이—셋째도 있어요? 왠지 셋까지는 있을 것 같은데.

백문—…영리하군. 셋째가 가장 중요해. 셋째, 저 시계는 상대의 '흔들림'을 먹고 힘을 키운다. 자네가 두려워하면, 그 두려움을 읽어 자네 문장에 '너는 진다'를 덧쓰지. 그러니 시계 앞에서 절대 흔들리면 안 돼. 자네가 흔들리지 않는 한, 시계는 자네에게 아무것도 못 써.

연이—…그래서 열람실에서 '왜 싸우는가'에 답하게 하신 거군요. 흔들리지 않으려면, 내가 왜 여기 있는지가 확고해야 하니까. 답이 있는 사람은, 안 흔들리니까.

백문—바로 그걸세. 자, 정리하지. 하나, 원본은 사본을 이긴다. 둘, 시계는 덧쓸 뿐 못 지운다. 셋, 흔들리지 않으면 시계는 무력하다. 이 셋만 잊지 않으면, 자네는 반드시 이겨. …자, 몸으로 익히세. 다시 되쓰기다.

백문은 실전을 위해, 회중시계의 째깍거림을 흉내 낸 환영을 만들어 냈다. 시계 소리가 울리자, 연이의 숨이 순간 얕아졌다. 재판정의 그 무력함이 되살아나려 했다.

백문—흔들리는군! 그 소리에 지지 마! 호흡을 떠올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연이—…'내 곁의 이름들을, 내 글씨로 지키기 위해서!' …됐어. 소리가 안 무서워. 째깍거려도, 내 숨은 안 흔들려!

연이가 열람실에서 새긴 그 문장을 외자, 얕아졌던 숨이 다시 깊고 고르게 돌아왔다. 회중시계의 환영이 아무리 째깍거려도, 연이의 청록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셋째 원칙을 몸으로 익힌 것이다.

백문—…좋아. 아주 좋아. 이제 저 소리에도 안 흔들리는군. 위에서 진짜 시계를 만나도, 자네는 이제 준비가 됐네. …남은 건 되쓰기의 완성도뿐일세. 자, 계속.

수련이 이어지는 동안, 도서관의 오염 서가는 눈에 띄게 밝아졌다. 연이가 되살린 책이 백 권, 이백 권을 넘어가자, 한때 새까맣던 서가 한 구역 전체가 등불빛을 되찾았다. 백문이 백 년간 홀로 못 하던 일을, 연이는 며칠 만에 해내고 있었다.

백문—…놀랍군. 이 구역, 내가 오십 년 넘게 손도 못 대던 곳일세. 자네가 며칠 만에 다 되살렸어. …이러다 이 도서관, 자네 덕에 백 년 만에 처음으로 검은 서가가 하나도 없는 날이 오겠는데.

연이—그럼 좋죠! 다 되살리고 나서, 백문 님이랑 다 같이 새 등불빛 아래서 차 마시는 거예요. …아, 근데 저 이러다 진짜 사서 취직하는 거 아니에요? 백문 님 조수 연이.

백문—허허.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일세. 다만 자네에겐 돌아갈 집이 있지 않은가. 이 늙은이 조수 노릇보다, 자네 세계에서 자네 삶을 사는 게 먼저야. …그래도, 그 말 하나로 백 년 외로움이 다 녹는군.

연이는 되살린 책들이 나란히 빛나는 서가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저 책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되찾은 진실이었다. 이 힘이 이렇게 많은 이를 살릴 수 있다는 게, 연이는 자랑스러웠다. 위에 올라가면, 이 힘으로 더 많은 이를 구하겠다고 다짐하며.

네오—…넌 참, 남 살리는 데 재능이 있어. 재성에선 남의 값을 읽었고, 여기선 남의 진실을 되살리고. …이 힘이 네 손에 있어서 다행이야. 나쁜 자 손에 있었으면, 세상이 어떻게 됐을지.

연이—…그러게. 이 힘, 무섭기도 해. 남을 살릴 수도 있지만, 잘못 쓰면 남을 '무능'으로 덧쓸 수도 있는 거잖아. 청토끼가 딱 그렇게 쓰고 있고. …그러니까 나, 이 힘 꼭 바르게 쓸게. 살리는 데만.

연이—뿌리내림!

연이의 덩굴이 이번엔 바닥이 아니라 문장에 뿌리를 내렸다. 덧쓰인 검은 글자 밑으로 뿌리가 파고들어 원래 문장을 끌어올렸다.

검게 덧쓰인 글자가 밀려나고, 그 밑에 눌려 있던 진짜 글자가 금빛으로 다시 떠올랐다. 청토끼가 위조한 계약이, 연이의 뿌리 앞에서 제 본뜻을 되찾기 시작했다.

백문—좋아. 나무의 뿌리는 흙만 뚫는 게 아니라 거짓도 뚫는다네. 다시!

연이—백문 님, 손이 이제 제 손이 아닌 것 같아요. 붓이 손에 딱 붙어서 안 떨어져요.

백문—허허. 붓과 하나가 되는 경지일세. 대성할 상이야.

연이—…아니 그게 아니라, 먹이 말라붙어서 진짜로 안 떨어지는 건데요.

백문—…음. 그건 씻으면 되네.

연이—에이, 방금 완전 진지하게 '붓과 하나가 되는 경지'라고 하셨으면서. 백문 님도 은근 허당이시다.

백문—허당이 아니라, 제자의 손이 진짜로 붓과 하나가 됐길 바라는 스승의 희망 사항이었네. …자, 웃지 말고. 오늘 밤 필사 분량, 아직 절반 남았어. 붓 다 씻었으면 다시 앉게.

연이—…네에. (백문 님, 다정한데 숙제는 진짜 많이 주셔….)

밤마다 연이는 백문이 내준 필사 숙제와 씨름했다. 세상의 억울한 문장들을 손으로 옮겨 쓰며, 그 마음을 손끝에 새기는 훈련이었다. 손목이 저리고 눈이 감겨도, 연이는 멈추지 않았다. 이 한 획 한 획이, 언니를 되찾을 힘이 될 테니까.

연이—(…루나는 잘 있을까. 언니 얼굴은 안 더 흐려졌을까. 나 여기서 이렇게 붓글씨 쓰는 거, 게으름 피우는 거 아니겠지. …아니야. 이게 제일 빠른 길이야. 백문 님이 그랬어. 급하게 가면 또 진다고.)

연이의 필사 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처음엔 삐뚤삐뚤하던 글씨가, 이제는 백문의 것과 나란히 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단정해졌다. 무엇보다, 글씨에 마음이 실리기 시작했다. 같은 문장을 써도, 연이가 쓴 것에서는 온기가 배어났다.

백문—…허어. 이 필사, 자네가 쓴 건가? 글씨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군. 이건 기술로 되는 게 아니야. 문장 하나하나에 자네 마음을 담았다는 뜻일세. …자네, 정말 이 일에 타고난 아이로군.

연이—…그냥, 이 문장들 주인이 자꾸 떠올라서요. 이 억울한 사람들이, 언젠가 자기 문장을 다시 봤을 때 조금이라도 위로받았으면 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쓰니까, 저절로 정성이 들어가더라고요.

백문—…그게 바로 되쓰기의 마지막 비밀일세. 기술이 아니라 정성. 남의 문장을 제 것처럼 아끼는 마음. 자네는 이미 그걸 가졌어. 남은 건, 저 시계 앞에서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뿐이야.

연이가 되쓰기를 익히는 동안, 네오도 곁에서 홀로 단련했다. 도서관 뒤뜰, 등불 물고기도 잘 오지 않는 어두운 마당에서. 은빛 갈기 사이로 금빛 실이 뽑혀 나와, 허공을 소리 없이 갈랐다. 금선은 더 가늘게, 단금은 더 깊게.

연이는 필사 숙제를 하다 창 너머로 그 모습을 보곤 했다. 네오의 검술은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슬펐다. 무언가를 베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백문은 네오의 숨을 볼 때마다 묘한 얼굴을 했다. 오래 산 여우의 눈은, 그 은빛 파수꾼이 감춘 시간의 냄새를 놓치지 않았다.

백문—…자네 금식(金式)은 어째 벨수록 쓸쓸해지는군. 대체 뭘 베려고 그렇게 오래 벼려 온 건가. 그 칼끝이 향하는 곳이, 자꾸 자네 자신 쪽인 것 같아서 말이야.

네오—…벨 것이 오면, 베기 위해서.

백문—…허. 대답을 참 무디게도 하는군. 하지만 늙은 여우는 속지 않아. 자네가 벼리는 그 칼은, 누군가를 베기 위한 게 아니야. 오지 말았으면 하는 순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벼리는 칼이지. 그 순간이 오면, 자네가 가장 아플 칼.

네오—…백문 님은, 정말 너무 많이 읽으시는군요. …맞습니다. 이 칼이 쓰이는 날은, 제가 가장 잃고 싶지 않은 걸 잃는 날일 겁니다. 그러니 부디, 그날이 오지 않기를. 저는 매일 그것만 빌면서 벼립니다.

백문—…그런 칼을 오래 벼린 자의 숨은, 원래 그렇게 쓸쓸한 법이지. …파수꾼. 하나만 묻겠네. 자네가 그토록 지키려는 게, 저 아이인가?

네오—…네. 저 아이를 무사히 집에 돌려보내는 것. 그게 제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 뒤에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습니다.

백문—…'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다'라. …파수꾼, 그 말은 아껴 두게. 자네가 없으면 슬퍼할 사람이, 이미 자네 곁에 생겼으니까. 저 아이가 자네 얼굴을 제대로 본 적 없다고 아쉬워하는 거, 아나?

네오—…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백문—허허. 저 아이가 열람실에서 나올 때, 자네 등을 보는 눈빛이 그랬거든. …자, 늙은이 참견은 여기까지. 다만 이거 하나는 새겨 두게.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킨 뒤에 함께 있어 주는 것 — 그게 더 어렵고, 더 소중한 법일세.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금빛 칼을 거두고, 어두운 마당에 오래 서 있었다. 백문의 말이, 오래 벼려 온 각오에 처음으로 작은 균열을 냈다. …그 뒤에도 함께 있어 주는 것. 그건, 네오가 감히 바라 본 적 없는 미래였다.

넷째 날, 백문은 두 사람을 마당에 함께 세웠다. 이번엔 따로가 아니라, 같이 하는 수련이었다.

백문—자네들, 위에 올라가면 혼자 싸우는 게 아닐세. 연이의 나무와 파수꾼의 쇠, 둘이 어떻게 맞물리는지 배워 둬야 해. 나무는 쇠에 잘리지만, 쇠는 나무 없인 방향을 잃지. 오행은 서로 극(剋)하면서도 서로 살리거든.

연이—저랑 네오가 같이 싸우는 연습이요? 근데 백문 님, 나무는 쇠한테 잘린다면서요. 그럼 네오가 저를 이기는 거 아니에요?

백문—단순히 보면 그렇지. 하지만 잘 보게. 파수꾼의 쇠가 길을 열면, 자네의 나무가 그 길로 뿌리를 뻗어 적을 붙든다. 파수꾼이 베고, 자네가 붙들어 되쓴다. 쇠가 문을 부수고, 나무가 그 안의 진실을 끌어올리는 거야. 따로면 반쪽, 같이면 완성일세.

백문이 허공에 검은 도장이 잔뜩 박힌 허수아비 하나를 세웠다. 네오의 금선이 먼저 날아가 도장들을 베어 흩고, 그 갈라진 틈으로 연이의 청록빛 덩굴이 파고들어 원문을 끌어올렸다. 쇠와 나무가, 처음으로 하나처럼 움직였다.

연이—됐다! 네오가 검은 도장 갈라 주니까, 제가 그 밑에 원문까지 확 끌어올렸어요! 우리 이거 완전 짝꿍이잖아!

네오—…호흡이 맞는군. 내가 벤 틈으로 네 뿌리가 정확히 들어왔어. …나쁘지 않아. 아니, 꽤… 든든하네.

백문—좋아! 그거야. 파수꾼, 자네 혼자 다 베려 하지 말게. 자네가 못 베는 '마음의 도장'은 저 아이가 읽어 내니까. 그리고 연이, 자네가 못 뚫는 '단단한 껍질'은 파수꾼이 열어 주고. 서로의 반쪽을 믿게.

연이—네오, 우리 콤비 이름 정하자. 음… '쇠나무단'? 아니면 '금목콤보'? 아, '파수꾼과 꽃돼지' 어때?

네오—…마지막 건 절대 안 돼. 어감이 무슨 옛날 동화책 제목 같잖아.

연이—어? 그거 좋은데? '파수꾼과 꽃돼지'. 완전 베스트셀러 감이야. 백문 님, 이거 도서관에 한 권 꽂아 주세요!

백문—허허. 그거 좋군. 이 이야기가 잘 끝나면, 내가 직접 써서 이 도서관 제일 좋은 자리에 꽂아 주지. 「파수꾼과 꽃돼지」. …그러니 반드시, 좋은 결말을 만들어 오게. 제목값을 하려면 말이야.

연이와 네오는 마주 보고 웃었다. 며칠간의 수련이, 둘을 단순한 동행에서 진짜 전우로 만들고 있었다. 쇠는 나무의 방향이 되어 주고, 나무는 쇠의 이유가 되어 주었다. 위에서 벌어질 마지막 싸움을 향해, 둘의 호흡이 하나로 맞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수련이 길어질수록, 연이의 마음 한구석엔 초조함이 자라났다. 도서관의 시간과 위의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흐른다면, 지금쯤 루나와 언니는 벌써 며칠째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연이—…백문 님. 저 이렇게 며칠씩 여기서 훈련하는 동안, 위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어요? 루나랑 언니, 저 기다리다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에요?

백문—…걱정 말게. 인성의 도서관은 재성의 섬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 여기서 며칠이 위에선 하루 남짓일세. 자네가 여기서 힘을 기르는 동안, 위의 시간은 자네를 기다려 주고 있어. 이 도서관이 자네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지.

연이—…다행이다. 그래도, 너무 오래는 안 끌래요. 언니 얼굴이 더 흐려지기 전에, 루나가 더 외로워지기 전에. 저 이제 되쓰기도 되고, 시계 소리에도 안 흔들리고, 임오도 되찾았어요. …이 정도면, 슬슬 올라갈 때 아니에요?

네오—…나도 그렇게 생각해. 연이는 준비가 됐어. 남은 마지막 기둥 신미는, 어차피 토끼 금고에 있으니 위에서 되찾아야 하고. 더 미룰 이유가 없어.

백문—…그래. 자네들 말이 맞네. 이제 자네에게 가르칠 건 거의 다 가르쳤어. 남은 건 실전뿐이야. 다만… 올라가기 전에, 자네에게 꼭 해 줘야 할 이야기가 하나 있네. 이 손목의 사서인에 얽힌,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연이—…아, 그거요. 며칠 전에 여쭤봤는데 '내일 이야기해 주지' 하시고 계속 미루셨잖아요. 이제 들려주시는 거예요?

백문—…그래. 자네가 위로 올라가면, 청토끼 금고에서 그걸 마주하게 될 테니까. 미리 알아 둬야 할 이야기일세. …하지만 그건, 내일. 오래된 상처는, 볕 좋은 낮에 꺼내야 덜 아프거든. 오늘 밤은 푹 자 두게. 내일, 다 이야기해 주겠네.

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문의 목소리에 밴 오래된 아픔이, 내일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를 짐작하게 했다. 도서관에서의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문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낡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그 안에는 아주 오래돼 보이는 붓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손잡이에 은은한 청록빛이 감도는, 예사롭지 않은 붓이었다.

백문—…이걸 자네에게 주겠네. 내가 떠도는 사서였던 시절, 세상의 억울한 문장을 되쓰던 붓일세. '본필(本筆)'이라 하지. 원래 뜻만 쓰고, 거짓은 못 쓰는 붓이야. 사서인을 잃은 뒤로는 나도 못 썼는데… 자네라면, 이 붓이 다시 깨어날 걸세.

연이—…이렇게 소중한 걸 저한테요? 백문 님 거잖아요. 이거 받아도 돼요?

백문—붓은 쓰는 사람이 주인일세. 내 손에선 백 년째 잠들어 있었지만, 자네 손에 가면 다시 세상의 진실을 쓸 걸세. …가져가게. 청토끼 금고에서 원본 계약서를 되쓸 때, 이 붓이 자네를 도울 거야. 늙은 사서가 제자에게 주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선물일세.

연이가 본필을 손에 쥐자, 백 년간 잠들어 있던 붓끝에 청록빛이 스르르 돌아왔다. 붓이 주인을 알아본 것이다. 연이의 손과 붓이, 오래 기다린 것처럼 딱 맞아떨어졌다.

연이—…깨어났어요. 붓끝에 빛이 돌아왔어요. …백문 님, 이거 꼭 소중히 쓸게요. 그리고 다 끝나면, 백문 님 사서인 되찾아서 이 붓이랑 같이 돌려드릴게요. 그때 백문 님이 다시 세상의 억울한 문장을 되쓰실 수 있게.

백문—…허허. 그때가 오면, 우리 둘이 나란히 앉아 세상의 억울한 문장을 되쓰세. 자네 붓과 내 붓으로. …그 그림 하나로, 이 늙은이는 앞으로 백 년도 더 버틸 수 있겠군.

네오—…좋은 스승과 좋은 제자군요. 연이, 그 붓 잘 간수해. 그건 무기이자, 백문 님의 백 년이 담긴 물건이니까.

연이—응! 한번 시험해 봐도 돼요? 여기, 이 빈 종이에… 아무 거짓말이나 써 볼게요. '연이는 겁쟁이다.'

연이가 본필로 거짓 문장을 쓰려 하자, 붓끝이 종이에 닿기도 전에 스르르 미끄러지며 글자가 써지지 않았다. 반대로 '연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를 쓰자, 붓이 술술 나가며 금빛으로 빛났다.

연이—…진짜네! 거짓말은 안 써지고, 진실만 써져요! 이 붓, 완전 정직한 붓이잖아요. 저랑 잘 맞겠다. 저도 거짓말 진짜 못하거든요.

백문—허허. 붓과 주인이 닮았군. 그래, 그 붓은 오직 본뜻만 쓴다네. 그러니 청토끼의 어떤 거짓 계약 앞에서도, 그 붓은 흔들리지 않고 원본만 되쓸 걸세. 자네의 정직함과, 그 붓의 정직함이 만났으니 — 이제 무서울 게 없어.

연이—…고마워요, 백문 님. 이 붓, 제 목숨처럼 지킬게요. 그리고 이걸로, 언니도 루나도 백문 님도, 전부 되쓸게요. 진짜 이름으로, 진짜 얼굴로.

연이는 본필을 가슴에 꼭 품었다. 백문의 백 년이 담긴 붓, 그리고 자신의 되찾은 일곱 별. 이제 위로 올라갈 준비가, 거의 다 갖춰지고 있었다. 남은 건 백문의 오래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결전뿐이었다.

수련이 끝난 늦은 밤, 연이는 마당에 홀로 남은 네오를 찾아갔다. 낮의 합동 수련 이후로,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생긴 참이었다.

연이—네오. 안 자? …있잖아. 나 낮에 열람실에서 거울 속 나를 만났는데, 걔가 그러더라. 나는 너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대. 항상 등만 봤대. 너 늘 내 앞에 서 있으니까.

네오—…얼굴을.

연이—응. 그래서 나, 지금 네 얼굴 좀 제대로 보려고. …가만 있어 봐. 음… 너 눈이 이렇게 생겼구나. 늘 무섭게만 봤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되게… 다정한 눈이네. 왜 이걸 몰랐지.

네오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려다, 참았다. 연이의 눈이 자기 얼굴을 찬찬히 읽고 있었다. 남의 밑바닥을 읽는 그 눈이, 지금은 네오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파수꾼은,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얼굴을 온전히 보여 주는 기분이었다.

네오—…뭘 그렇게 봐. 닳겠다.

연이—안 닳아. 그리고 나 이제 알았어. 너 항상 등을 보이는 건, 나 지키느라 앞에 서 있어서였잖아. 근데 네오, 이제 가끔은 옆에 서. 그럼 나도 네 얼굴 보면서 같이 갈 수 있잖아. 등만 보고 따라가는 거, 나 이제 싫어.

네오—…옆에 서라. …그건, 내가 널 지키기 더 어려워지는 자리인데.

연이—괜찮아. 지키는 건 이제 나도 같이 할 거니까. 낮에 봤잖아. 너 베고, 내가 붙들고. 우리 짝꿍이라며. 짝꿍은 앞뒤가 아니라 나란히 서는 거야.

네오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연이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와 섰다. 앞이 아니라, 나란히. 그 작은 한 걸음이, 백 년 넘게 굳어 있던 파수꾼의 무언가를 아주 조금 녹였다.

네오—…이 정도면, 옆인가.

연이—응. 딱 좋아. …고마워, 네오. 나란히 서 줘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등불 물고기가 흐르는 밤하늘을 나란히 올려다봤다. 굳이 말이 필요 없는 밤이었다. 연이는 문득, 이 낯선 세계에서 가장 든든한 게 바로 이 옆자리의 온기라는 걸 느꼈다.

그렇게 나란히 앉아 있다가, 연이는 필사 숙제를 마저 하러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붓을 놀리다 문득,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걸 백문에게 물었다.

연이—백문 님. 손목의 그 금빛 글자, 사서인이 뭐예요? 그것 때문에 못 나가시는 거예요?

백문의 펜이 잉크병 위에서 잠깐 멈췄다.

백문—…내일. 내일 이야기해 주지. 오래된 이야기는 밤에 하면 자꾸 길어지거든.

연이—…네. 근데 백문 님. 억지로 안 하셔도 돼요. 아프면, 안 꺼내셔도 되고요. 저는 그냥, 백문 님이 너무 오래 혼자 그거 안고 계신 게 마음 아파서요.

백문—…아니야. 이제는 꺼낼 때가 됐네. 자네가 위로 올라가면, 그 이야기의 마지막 조각을 자네가 청토끼 금고에서 마주하게 될 테니까. 백 년을 삼킨 이야기를, 이제 자네에게 물려줄 때가 온 걸세. 다만,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자네가 푹 자야 하는 날이니.

백문은 잉크가 마른 펜을 내려놓고, 창밖의 등불 물고기들을 오래 바라봤다. 그 눈에 백 년의 세월이 고여 있었다. 연이는 더 캐묻지 않고, 다만 백문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한 잔 새로 따라 드렸다. 말 대신의 위로였다.

연이—…내일 이야기, 잘 들을게요. 그리고 백문 님. 그 이야기 끝에 백문 님을 아프게 한 게 뭐든, 제가 위에 올라가서 꼭 되찾아 올게요. 사서인도, 백문 님이 지키려던 그 사람도요.

백문은 대답 대신, 아주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이 오래된 이야기를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도서관에서의 마지막 며칠이,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날 밤, 연이는 되찾은 임오의 온기를 가슴에 품고 잠들었다. 일곱 개의 별이 마음속에서 은은히 빛났다. 마지막 하나만 채우면, 온전한 별자리. 내일이면 백문의 오래된 상처를 듣고, 그리고 곧, 다시 위로 올라갈 것이다. 언니에게로, 루나에게로, 그리고 마지막 기둥에게로.

머리맡엔 백문이 준 본필이 청록빛을 은은히 뿜으며 놓여 있었다. 붓과 별과 각오가, 잠든 연이를 조용히 지켰다. 도서관에서의 배움은 이제 거의 끝나 가고, 진짜 시험은 저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22화 · 네 번째 기둥 — 끝. 제23화 「사서의 오래된 상처」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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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필 안내

『연이의 운명 노벨』은 Code Destiny가 직접 쓰고 그린 창작 소설입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재하는 인물·단체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사주 명리학의 십성, 자미두수의 열두 궁, 숙요 27수라는 실제 전통 체계에서 가져왔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서사에 맞게 각색했으므로, 작품 속 묘사를 그대로 점술 지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 주세요. 각 체계의 실제 해석 규칙은 별도의 기능 가이드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본문은 게시 전 편집자가 문장과 흐름을 다듬습니다. 오탈자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면 문의로 알려 주시면 확인 후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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