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는 창틀을 넘어 지붕으로 기어 올라갔다. 기와가 미끄러웠다. 돼지 앞발로 붙잡기엔 너무 둥근 지붕이었다.
연이—둘이 여기서 뭐 해. 밤에. 몰래. 비 맞으면서.
영냥이—연이야. 들어가. 여긴 위험해.
연이—위험한 데 너 혼자 와 있는 게 더 위험하거든!
호랑이가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비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내쉬었다.
검은 호랑이—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장부에 적을 일은 없었으니까.
연이—기다려. 너 지금 영냥이한테 무슨 말 했어.
검은 호랑이—궁금하면 고양이한테 물어봐. 그 눈이 왜 가끔 금색이 되는지.
호랑이는 지붕 끝에서 뛰어내렸다. 떨어지는 소리는 없었다. 빗소리만 한 번 커졌다가 잦아들었다.
연이—물어볼게. 네 눈, 왜 금색이 돼?
영냥이—달빛이 반사된 거다.
연이—저 해는 반쪽이고 달은 없어. 반사될 게 없잖아.
영냥이—연이야. 오늘은 그냥 들어가자. 내일 말할게.
연이—너는 맨날 내일이야. 맨날 나중이고, 맨날 끝나면이야.
연이는 앞발을 펼쳤다. 글자판이 떠올랐다. 마지막 빈칸이 벌써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연이—그럼 내가 확인할게.
연이가 한 걸음 다가갔다. 빈칸이 밝아졌다. 영냥이가 한 걸음 물러났다.
다시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영냥이의 뒷발이 지붕 끝에 닿았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영냥이—연이야, 멈춰.
연이—싫어.
연이의 앞발이 영냥이의 복슬복슬한 가슴 털에 닿는 순간, 빈칸에서 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쇠를 두드리는 맑은 소리가 하늘에 울렸다.
빛은 칼날처럼 곧게 섰다가 글자 하나로 모였다. 차갑고 단단하고 곧은 글자였다.
[ 年 壬午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庚辰 ] 8/8
연이—찼어! 여덟 칸 다 찼어! 영냥아, 봐 봐!
[ 時干 庚 · 빌린 칸 · 주인 확인 불가 ]
연이—빌린 칸? 주인 확인 불가? 이게 무슨 뜻이야.
庚 자는 빛나다가 깜빡였다. 영냥이가 숨을 들이쉴 때 밝아지고, 내쉴 때 흐려졌다. 꼭 영냥이와 같이 숨을 쉬는 것처럼.
연이—영냥아. 이거 너야?
영냥이—아니다.
연이—너랑 같이 숨 쉬잖아!
영냥이—우연히 그렇게 된 거야.
그 말을 하는 영냥이의 털이 아주 잠깐 빛을 잃었다. 하얀 털끝이 재처럼 흐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연이—너 방금 털. 색이 빠졌어.
영냥이—밤이라 그렇다.
연이—너 오늘 핑계를 몇 개째 대는지 알아? 달빛, 털, 밤. 다음은 뭔데.
영냥이—날씨.
그때 지붕의 작은 창이 벌컥 열렸다. 모카가 불씨를 든 채 튀어나왔다. 그 뒤로 윤달이 하품하며 따라 올라왔다.
모카—뭐야! 지붕에서 왜 종이 울려! 불난 줄 알았잖아!
윤달—아, 숙녀분. 그 칸. 드디어 차셨네요.
연이—윤달. 이 칸이 영냥이랑 같이 숨을 쉬어요.
윤달은 글자판과 영냥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장갑 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웃음을 참는 손이었다.
윤달—그렇군요. 그래서 생일을 모르셨구나.
연이—그게 무슨 말이에요? 생일이랑 이 칸이 무슨 상관인데요.
윤달—내일 말씀드릴게요. 지금 말하면 숙녀분이 지붕에서 굴러떨어지실 것 같아서요.
모카—사기꾼 너 그 말 어제도 했어. 내일 내일 하다가 고양이 될라.
영냥이—윤달.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마.
다음 날 아침. 열람실 책상 하나를 가운데 두고 네 명이 둘러앉았다. 분위기가 재판정 같았다.
정확히는 세 명과 한 마리였다. 아기 용은 연이의 손목에서 내려와 책상 한가운데에 판사처럼 똬리를 틀었다.
모카—아침 먹으면서 하자. 내가 꼬치 구웠다. 재판에는 원래 간식이 있어야 돼.
모카가 꼬치 접시를 내려놓았다. 연이와 영냥이가 동시에 같은 꼬치로 앞발을 뻗었다. 두 앞발이 꼬치 위에서 딱 멈췄다.
연이—너 먹어.
영냥이—아니다. 네가 먹어라.
연이—아니야, 너 먹으라니까.
모카—그 꼬치 하나 가지고 뭔 양보야! 열두 개 있어! 열두 개!
윤달—어젯밤 지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꼬치가 다 말해 주네요.
연이—아무 일도 없었거든요! 칸 하나 켜진 것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연이의 코끝이 분홍색보다 조금 더 진해졌다. 영냥이는 꼬치를 집지도 않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이—자, 윤달. 어제 하려다 만 얘기 해 주세요. 여자 명식에서 관성은 뜻이 하나 더 있다면서요.
윤달—정말 지금 들으실 거예요? 책상 단단한 거 확인하셨어요?
연이—빨리요.
윤달—乙목 일간에게 庚금은 정관이에요. 나를 바르게 세워 주는 기운이요. 그리고 여자 명식에서 정관은.
모카—정관은. 뜸 들이지 마. 고기 탄다.
윤달—남편성이에요.
연이의 이마가 책상에 쿵 떨어졌다. 윤달이 미리 받쳐 둔 책 한 권이 그 이마를 받았다.
윤달—그래서 단단한 거 확인하시라고 했잖아요.
연이—남, 남, 남편?
모카—켁. 쿨럭. 잠깐만. 나 꼬치 넘어갔어.
영냥이—오해다.
연이—오해가 아니면 뭔데! 칸에 네 숨이 붙어 있는데!
영냥이—나는 고객센터다. 남편이 아니다.
연이—누가 너랑 결혼한대! 나도 싫거든!
영냥이—나도 싫다.
연이—왜 너도 싫은데!
모카—와. 둘이 동시에 싫대. 이거 완전 결혼한 사이 아니냐.
윤달—수달 씨 말이 궁합 보는 저보다 정확하네요.
연이—윤달. 남편성이라는 게, 진짜 남편이라는 뜻은 아니죠? 그냥 별 이름이죠?
윤달—별 이름이에요. 명식에서 나를 지키고, 나를 다스리고, 내가 책임지고 싶어지는 자리요.
윤달—꼭 결혼할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그냥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이 있다는 거죠.
연이—(그 자리에 앉는 사람. 처음 눈 떴을 때부터 계속 옆에 있던 고양이.)
연이는 고개를 들어 영냥이를 보았다. 영냥이는 창밖만 보고 있었다. 귀 끝이 아주 조금 붉었다.
연이—(고양이도 귀가 빨개지는구나.)
윤달—그런데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요. 숙녀분, 칸을 다시 띄워 보시겠어요?
연이가 앞발을 펼쳤다. 庚 자는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영냥이가 창가로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해졌다.
윤달—빌린 칸이라는 건, 이 글자가 원래 숙녀분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고양이님이 자기 걸 빌려주고 있는 거죠.
연이—빌려준다고요? 빌려주면 영냥이는요?
윤달—그만큼 비겠죠. 빌려준 만큼.
모카—그럼 고양이가 멀리 가면 칸이 꺼지고, 가까이 오면 고양이가 비고. 뭐 이런 엉망진창 계약이 다 있냐.
영냥이—계약이 원래 좀 엉망이야.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고.
연이—신경을 어떻게 안 써! 너 지금 나한테 너를 빌려주고 있다는 거잖아.
영냥이—내가 빌려준 건 아니야. 네가 다가오니까 켜졌어.
윤달—그럼 확인해 보죠. 숙녀분, 덩굴 하나만 꺼내 보시겠어요?
연이는 영문도 모른 채 앞발을 내밀었다. 책상 위로 가느다란 덩굴 하나가 자라났다. 덩굴은 힘없이 휘어지며 책상 모서리에 늘어졌다.
윤달—이번엔 고양이님, 숙녀분 옆에 서 주세요.
영냥이—싫다.
모카—싫으면 내가 밀어 준다. 꼬리로.
모카에게 등을 떠밀린 영냥이가 마지못해 연이 옆에 섰다. 글자판의 庚 자가 환하게 켜졌다.
그 순간, 늘어져 있던 덩굴이 꼿꼿하게 일어섰다. 기둥처럼 곧게 천장 쪽으로 뻗어 올라갔다. 잎이 단단하고 반짝였다.
연이—뭐야. 내 덩굴이 이렇게 곧은 거 처음 봐.
윤달—乙목은 혼자서는 휘어져요. 庚금이 옆에 있으면 똑바로 서요. 그게 정관이에요. 나를 세워 주는 기운.
연이는 덩굴을 보다가 옆을 보았다. 영냥이가 이를 악물고 있었다. 왼발이 바닥에서 아주 조금 떠 있었다.
연이—영냥아. 아파?
영냥이—안 아프다.
연이가 한 걸음 떨어지자 덩굴이 다시 힘없이 휘어졌다. 영냥이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숨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연이—그럼 내가 안 다가가면 되는 거야?
영냥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그때 천장의 둥근 유리창이 어두워졌다. 아침인데 해가 지는 것처럼 열람실 전체가 빠르게 그늘에 잠겼다.
모카—뭐야. 또 비야?
윤달—아니에요. 비보다 나쁜 거예요.
윤달은 장갑 낀 오른손을 품에 끌어안았다. 장갑 안쪽에서 무언가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공망이 저 혼자 숨을 들이켜고 있었다.
윤달—이 손이 이렇게 배고파하는 건 처음이에요. 저 위에 있는 게, 뭘 먹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아요.
모카—뭘 먹고 싶은데. 돌려 말하지 마. 나 지금 무서워서 꼬리 섰어.
유리창 너머 하늘에 금이 갔다. 반쯤 먹힌 해에서 시작된 검은 금이 하늘을 가로질러 길게 뻗어 나갔다.
쩍, 하는 소리가 났다. 소리는 하늘이 아니라 연이의 글자판에서 났다. 庚 자의 모서리에 가는 금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연이—내 칸에 금이 갔어. 영냥아, 너 괜찮아?
영냥이—괜찮다.
모카—거짓말. 고양이 너 지금 이빨 덜덜 떨고 있어. 여기까지 다 들려.
윤달—고양이님. 이제는 숨기는 게 숙녀분을 더 다치게 해요.
영냥이는 그렇게 말하며 왼발을 등 뒤로 숨겼다. 연이는 그 움직임을 보았다. 이번에는 못 본 척하지 않았다.
연이—그 발. 보여 줘.
영냥이—연이야.
연이—보여 달라고.
영냥이는 한참 연이를 보다가, 천천히 앞발을 내밀려 했다. 그러나 그 앞발이 다 나오기도 전에 유리창이 크게 떨렸다.
목소리—찾았다.
목소리는 사방에서 동시에 들렸다. 책장 사이에서, 유리창 너머에서, 연이의 글자판 속 금 간 자리에서.
목소리—숨어 있던 다섯 번째 빛. 그 아이 옆에 있었구나.
하늘의 금이 한 뼘 더 벌어졌다. 그 틈 너머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