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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운명 노벨4부 · 인성의 도서관

EP.23 · 24 / 44

안 도망가는 물고기

사서 백문의 오래된 상처가 드러나고, 이야기는 개인에서 관계로 넘어간다.

한글 약 10,515자 · 읽는 시간 약 25분

약속한 날 아침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백문이 부르기 전에 연이가 먼저 갔다.

오염 서가가 가장 짙게 앓는 구역. 백문은 이미 거기 낡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백 년간 아무에게도 못 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사람의, 무거운 자세로.

연이—백문 님. 오늘이 그 「내일」이에요. 어제 약속하셨잖아요. 이야기 대신 제 붓을 빌리시겠다고.

백문—…그랬지. 그런데 밤새 생각해 보니, 역시 안 되겠네. 오늘은 그냥 이 늙은이가 입으로 말하지. 자네가 그걸 직접 볼 이유는 없어.

연이—백문 님이 입으로 말하시면, 백문 님 듣기 좋게 다듬어질 거라고 어제 그러셨잖아요. 그거 백문 님이 하신 말이에요.

백문—…허허. 제자한테 제 말로 발목을 잡히는군. 연이. 이건 다듬어져야 하는 이야기일세. 다듬지 않으면, 듣는 사람이 다쳐.

연이는 대답 대신, 품에서 본필을 꺼내 두 손으로 쥐었다. 붓끝의 청록빛이 조용히 깨어났다.

연이—백문 님. 저 다치는 거 무섭지 않아요. 백문 님이 백 년 동안 혼자 다치신 게 더 무서워요. 이야기로 안 하셔도 돼요. 제가 읽을게요.

백문—!

백문은 오래 망설이다, 떨리는 손으로 로브 깊은 곳에서 그 찢기고 그슬린 반쪽을 꺼냈다. 탄 자리에 한 번 접혔다 펴진 자국이 있는, 백 년째 다 못 읽은 계약서였다.

백문—…그럼 미리 일러 두겠네. 이 반쪽엔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게 아니야. 그날이 통째로 들어 있어. 뿌리를 내리면, 자네가 읽는 게 아니라 자네가 그리로 가게 될 걸세.

연이—알아요. 그래서 뿌리로 갈게요. 눈으로 보면 도망칠 수 있지만, 뿌리는 도망 못 가니까. …뿌리내림!

본필 끝에서 청록빛 잔뿌리가 뻗어 나가, 그슬린 반쪽의 탄 자리로 파고들었다. 재가 부스러지며, 그 밑에 눌려 있던 문장이 처음으로 숨을 쉬었다.

그런데 문장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 연이를 붙들었다. 종이가 아니라 종이 속에서, 무언가가 연이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연이—어? 백문 님, 이거 읽히는 게 아니라… 빨려 들어가요! 손이 안 떨어져요!

백문—붙들게! 본필을 놓지 말게! 그 붓이 자네 이름을 붙들고 있는 한, 자네는 반드시 돌아올 수 있어!

네오—연이! …백문 님, 저는 못 들어갑니다. 저 종이엔 제 이름이 없어요. 여기서 붙들고 있겠습니다. 저 아이가 나올 자리를.

도서관 전체가, 아주 크게 한 장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연이는 — 백 년 전의 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 * *

첫 페이지. 잉크 냄새가 지금보다 짙은 도서관이었다. 서가는 아직 한 권도 검지 않았고, 천장은 훨씬 낮아 보였다. 백 년 전의 인성의 도서관.

지상에서 떨어진 문서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반납구 아래, 종이가 녹아 만든 얕은 물이 고여 있었다. 그 물 위로, 그날 밤 처음 빛이 들었다.

등불 물고기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흩어져 헤엄치는 법밖에 모르던 것들이, 그날은 이상하게 빛을 한 자리로 밀어 모으고 있었다.

그 빛의 한가운데에, 갓난아기 하나가 있었다. 반쯤 젖고, 반쯤 부서진 채로. 아이는 울지 않았다. 다만 작은 왼손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자꾸 쥐었다 폈다.

백문—…이게 무슨. 반납구로 아이가 떨어지다니. 수백 년 여기 있었지만 이런 일은 없었네. 물길이 어디서부터 흘려보낸 게야. 이 아이는, 대체 얼마나 위에서.

젊은 백문이 물을 헤치고 들어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는 이야기의 강 상류에서, 아주 먼 곳에서 흘러온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시작이 보이지 않는 물길에서.

연이—(백문 님이다. 저렇게 젊으실 때가 있었구나. …근데 왜 나, 저 물빛을 보는데 목이 메지.)

백문—너, 이름이 없구나. 하기야 반납된 것들엔 이름이 없지. …그럼 내가 지어 주마. 소망(所望). 바랄 소, 바랄 망. 누가 널 여기로 흘려보냈든, 그 사람이 바란 게 있었을 테니.

수백 년을 홀로 책만 지켜 온 늙은 여우에게, 세상이 처음으로 준 혈육이었다. 그날 밤 도서관의 등불 물고기들은, 아무도 서가로 돌아가지 않고 아이 곁에서 밤을 새웠다.

연이—(백문 님. 이거였구나. 이걸 백 년 동안 혼자 안고 계셨구나. 이건 이야기로 하면 안 되는 거였어. 이야기로 하면, 이 밤이 너무 짧아지잖아.)

* * *

페이지가 넘어갔다. 물빛이 걷히고, 몇 해가 지난 열람대의 오후가 나타났다.

대여섯 살쯤 된 아이가 서가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등불 물고기를 한 마리 잡겠다고 온 도서관을 헤집다가, 결국 못 잡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백문—허허. 울지 마라, 소망아. 등불 물고기는 원래 안 잡히는 것이란다. …그래, 그럼 이 아비가 안 도망가는 걸로 하나 접어 주마. 잘 보렴.

백문이 대출증 한 장을 접어 물고기 한 마리를 만들어 주었다. 아이가 그것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자 — 소맷자락이 팔꿈치까지 흘러내렸다. 왼쪽 손목에, 등불 물고기를 꼭 닮은 작은 점이 있었다.

연이—(손목에 점. 등불 물고기 모양. …도서관에서 자란 아이라 저런 점이 생긴 걸까. 아니면 저 점 때문에 저 아이가 여기로 흘러온 걸까.)

백문—이건 「안 도망가는 물고기」란다. 아비가 접어 준 거니, 네가 놓지 않는 한 절대 도망 안 가. …그래, 이제 웃는구나. 소망아, 넌 슬플 때 웃는 버릇을 어디서 배웠니. 아비는 그걸 가르친 적이 없는데.

아이는 그랬다. 무릎이 까져도, 혼이 나도, 남 앞에서는 먼저 웃었다. 자기가 웃으면 아비의 얼굴이 펴진다는 걸, 그 작은 것이 어느새 알아 버린 것이다.

아이는 그 종이 물고기를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품에서 놓지 않았다. 종이는 몇 해가 지나며 닳고 부드러워졌지만, 물고기 모양만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다.

* * *

페이지가 넘어갔다. 계약법 서가였다. 그리고 그 서가 앞에, 푸른 토끼 한 마리가 서 있었다.

토끼는 겸손했다. 문 앞에서 신을 털고 들어왔고, 책을 두 손으로 받았고, 다 읽은 자리를 제 손으로 정리하고 나갔다. 사서가 미워할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청토끼—사서장님. 제 고객님께서 이 도서관에 관심이 아주 많으십니다. 세상 모든 문장의 원문이 여기 다 있다지요. 그분은 원문이라는 걸, 아주 각별히 여기시는 분이라서요.

백문—고객이라. 손님이 손님을 대신해 오는 건 처음일세. 뭐, 책을 사랑하는 자에게 어찌 악의가 있으랴. 읽고 싶은 만큼 읽고 가게.

토끼의 조끼 주머니에서 금빛 회중시계가 나왔다. 백문이 그것을 흘긋 보자, 토끼는 웃으며 시계를 도로 넣었다.

청토끼—아, 이거요? 제 것이 아닙니다. 제 고객님께 빌려 온 거예요. 저 같은 심부름꾼이 이런 걸 어찌 갖겠습니까.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오갈 뿐인 놈입니다.

연이—(고객님. 빌려 왔다. …청토끼한테 시키는 사람이 있었어. 백 년 전부터. 백문 님, 저 말 들으셨어요? 저 토끼는 처음부터 심부름꾼이었어요.)

토끼는 그렇게 반년을 드나들었다. 매일, 성실하게, 겸손하게. 계약법 서가와 판례 서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권도 빠짐없이.

연이—(악한 얼굴로 왔으면 백문 님이 안 속으셨을 텐데. 제일 무서운 건, 착한 얼굴로 오래 참는 악이야.)

부정 계약의 첫 번째 무기는 시계가 아니라 신뢰다. 반년어치 신뢰를 사 두면, 상대는 계약서를 안 읽고 도장을 찍는다. 토끼는 그 반년 동안, 딱 그만큼을 산 것이다.

* * *

페이지가 넘어갔다. 반년째 되는 날의 열람대였다.

청토끼—사서장님, 오래 신세를 졌으니 이제 제가 갚을 차례지요. 「도서관 운영 효율화 협약」입니다. 사서장님 일손을 덜어 드리고 싶습니다. 잡무는 제가 맡죠. 여기, 여기에만 인장을.

백문—…허허. 반년 만에 처음으로 자네가 안 읽고 넘기라 하는군. 잠깐 보세. …아니야. 이건 못 찍겠네. 겉뜻은 일손이라 하는데, 밑뜻이 새까매. 자네, 이걸 나한테 내밀 셈이었나.

청토끼—역시 본뜻 읽기의 대가시군요. 존경합니다, 진심으로. …그럼 이건 어떠십니까.

토끼가 조끼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열람대 위에 올렸다. 닳고 부드러워진 종이 한 조각. 물고기 꼬리였다. 누군가의 손에서 억지로 뜯겨 나온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백문—…소망이. 소망이 어디 있나.

청토끼—문지방 밖에 계십니다. 아주 얌전히요. 담보 시장에 넘기기 전에 사서장님께 먼저 여쭙는 게 도리다 싶어서. 값을 치르시겠습니까? 사서인으로.

백문은 함정을 이미 읽었다. 읽고도, 망설이지 않았다. 지팡이 끝이 서명란에 닿았다.

그 순간 문장이 뒤집혔다. 「사서의 인장은 본 협약에 따라 채권단이 보관한다.」 일손이라는 글자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문의 손목에 금빛 글자가 수갑처럼 감겼다. 「사서인 회수 완료 — 잔여 직무: 무기한.」 도서관의 등불 물고기들이 일제히 서가 뒤로 숨었다.

* * *

페이지가 넘어갔다. 도서관 문지방 밖,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다.

백문은 기어 나갔다. 인장을 잃은 몸은 문지방을 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벽에 손톱이 부러지도록 손을 뻗었지만, 손끝은 늘 반 뼘이 모자랐다.

백문—그 아이만은 안 된다! 사서인이든 뭐든 다 가져가라. 도서관도 가져가! 그 아이만은, 그 아이만은 안 돼!

청토끼—사서장님, 계약서를 안 읽으신 건 사서장님이십니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다만 두 손으로, 꼬리가 뜯겨 나간 종이 물고기를 가슴에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아비 쪽을 보며 — 웃으려고 애썼다.

* * *

그때, 토끼의 뒤에서 어둠이 한 겹 더 접혔다. 새벽보다 짙은 검은 것이, 토끼의 그림자 위로 천천히 겹쳐 섰다.

그림자의 팔이 아이를 받아 들었다. 토끼는 건네주고, 두 걸음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값을 받은 자의 자세가 아니라, 물건을 배달한 자의 자세였다.

연이—(잠깐. 잠깐만. 토끼가 데려간 게 아니야. 넘겨준 거야. 사 간 건 저 뒤에 있는 쪽이야!)

그림자의 손에 시계가 하나 들려 있었다. 토끼의 회중시계와 같은 금빛인데, 훨씬 크고 훨씬 낡았다. 세상 모든 시계의 원문 같은 시계였다.

연이—(저 여자다. 열람실에서 본 그 여자. 얼굴은 또 안 보이는데, 저 시계는 확실해. 내 태어난 시를 훔쳐 간 그 시계랑 같아.)

* * *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 뒤 사흘 밤낮이었다.

인장을 잃기 전 마지막 힘으로, 백문은 도서관의 모든 책을 불렀다. 계약법 서가가, 판례 서가가, 세상 모든 문장이 문지방을 향해 날아갔다.

토끼가 회중시계를 들었다. 날아가던 문장들이 공중에서 하나씩 덧쓰였다. 「이 책은 폐기되었음」 「이 판례는 소멸되었음」 「이 문장은 애초에 없었음」.

던지는 족족 지워졌다. 사흘째 새벽, 백문은 제 무릎 높이까지 쌓인 종잇조각 위에 주저앉았다. 인장 잃은 사서의 문장은 뿌리가 없었다.

연이—(백 권을 던지셨구나. 백 권을 다. …백문 님, 그래서 저한테 한 문장만 쓰라고 하신 거예요? 백 권을 던져 보셨으니까?)

그날 이후, 지상에서 값에 진 문서들이 반납구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백문이 지켜야 했던 원문들로, 토끼가 위에서 사람을 사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 * *

페이지가 아주 여러 장, 한꺼번에 넘어갔다.

검은 책을 한 권 닦고, 또 한 권 닦았다. 등불이 스무 번 어두워지고 스무 번 밝아졌다. 반납구로 떨어지는 문서를 매일 뒤졌다. 혹시나 그 아이의 흔적이 있을까 해서. 백 년을.

검은 책 하나를 되살릴 때마다, 백문은 소망이를 되살리는 상상을 했다. 언젠가 그중 하나가 정말 그 아이이길 바라면서.

그리고 매일, 맨 마지막에 닦는 책이 한 권 있었다. 유난히 얇은 책. 백문은 그 한 권만은 백 년 동안 한 번도 펼치지 않았다. 겉표지만 닦고, 늘 제자리에 도로 꽂았다.

연이—(저 책이 뭔데. 백 년을 닦기만 하고 안 펼치는 책이 뭔데요, 백문 님.)

연이가 손을 뻗었지만, 마지막 페이지가 스스로 닫혔다. 여기까지가, 이 종이가 품고 있던 전부였다.

* * *

연이는 튕겨 나오듯 현재로 돌아왔다. 무릎이 그대로 꺾였다. 바닥에 닿기 전에, 커다란 앞발이 등을 받쳤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네오였다.

네오—연이! …숨 쉬어. 들이쉬고, 내쉬고. 그래. 한 번 더.

연이—(못 하겠어. 새벽 공기가 아직 목에 걸려 있어. 그 애가, 그 애가 웃으려고 했어. 끌려가면서.)

네오—천천히. 여기야. 백 년 전이 아니라 지금이야. 네 앞에 있는 건 나고, 네 손에 있는 건 백문 님 붓이야. 하나씩 세어 봐. 다 세면, 돌아온 거다.

백문—미안하네, 연이. 그래서 안 된다고 한 걸세. 그 반쪽은 읽는 종이가 아니라, 사람을 데려가는 종이였어. 백 년간 나조차 다 못 펼친 이유가 그거야.

연이—…백문 님. 저 다 봤어요. 반납구도, 종이 물고기도, 문지방도. 백문 님이 손톱이 부러지도록 손 뻗으신 것도요.

백문—그래. 그게 다일세.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어. …이제 물어볼 것이 있으면 물어보게. 한 번은 대답하겠네. 딱 한 번만.

연이—아뇨. 여쭐 게 아니라, 알려 드릴 게 있어요. 백문 님이 못 보신 게 하나 있어요. 백문 님은 그때 문지방 안쪽에 계셨으니까, 각도상 절대 못 보셨을 거예요.

백문—…내가, 못 본 것이.

연이—청토끼가 소망이를 데려간 게 아니에요. 넘겨준 거예요. 문지방 밖에 그림자가 하나 더 있었어요. 토끼는 아이를 건네고, 두 걸음 물러나서 고개를 숙였어요.

백문의 지팡이가 딸깍, 멈췄다. 며칠 전 연이가 반쪽을 읽어 냈을 때와 똑같은 소리였다. 다만 이번엔, 안경 너머의 눈이 흔들리는 정도가 달랐다.

백문—…두 번째 그림자. 백 년을, 나는 그 토끼 하나만 미워했네. 그 뒤에 누가 서 있었는지는 생각조차 못 했어. 값을 치른 자가 따로 있다는 건 알았으면서도.

연이—그 여자예요. 열람실에서 제 태어난 시를 훔쳐 간 그 여자. 얼굴은 이번에도 못 봤는데, 시계가 같았어요. 회중시계보다 훨씬 크고 낡은, 그 시계요.

네오—(…백 년 전에도 그 여자였군. 그럼 소망이라는 아이는 담보 시장에 안 갔다. 그 여자가 직접 값을 치르고 가져간 것은, 파는 물건이 아니야.)

백문—…그럼 나는 백 년 동안 엉뚱한 자를 미워한 셈이군. 토끼는 배달부였고, 나는 배달부에게 이를 갈았어. 이 늙은 사서가, 백 년을 잘못 읽은 걸세.

연이—아니에요. 그거 백문 님 잘못 아니에요. 친절한 얼굴로 들어온 칼을 어떻게 다 막아요. 소망이 지키려던 그 마음이, 어떻게 잘못이에요. 저 진짜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그 토끼도, 그 뒤에 선 것도.

백문—…화내 줘서 고맙네. 백 년간 아무도 나 대신 화내 준 사람이 없었거든. 다들 「어쩔 수 없었다」 했지. 헌데 자네는 「너무하다」고 해 주는군. 그 한마디가, 백 년 묵은 체증을 쓸어내리네.

네오—백문 님. …저도, 마저 못 한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 꼭 해야 할 말이. 그래서 방금 그 문지방이 남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연이—너도? …그럼 이건 못 한 말들을 위한 싸움이네. 루나가 언니한테 못 한 「고맙다」, 백문 님이 소망이한테 못 한 「미안하다」, 그리고 네오 네가 나한테 못 한 그게 뭐든.

못다 한 말은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다. 세 사람은 그 사실을 각자 다른 무게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무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연이—백문 님. 제가 본 걸 지금 이름 붙여 둘게요. 위에서 소망이를 알아보려면 이름이 있어야 하니까요. 본 것만, 정확하게. 넷이에요.

백문—그래 주겠나. 백 년을 흐릿한 채로 뒀더니, 이제 나조차 그 아이 얼굴이 떠오르지 않네. 자네가 붙여 주게. 사서가 못 한 색인을, 제자가 하는 셈이군.

연이—하나. 왼쪽 손목에 등불 물고기 모양의 작은 점. 제가 봤어요. 아이가 물고기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릴 때, 소맷자락이 흘러내리면서요.

연이—둘. 품속의 종이 물고기. 이름은 「안 도망가는 물고기」. 백문 님이 대출증으로 접어 주신 거요. 꼬리 한쪽이 뜯겨 나갔어요.

백문—…그 꼬리는 토끼가 뜯어 왔네. 값을 치르라며 내 열람대에 올려놓은 게 그것일세. 그 아이는 끌려가던 그날도, 꼬리 없는 그 물고기를 두 손으로 쥐고 있었어. 그게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이야.

연이—셋. 슬퍼도 남 앞에선 웃으려 애쓰는 아이. …끌려가면서도 백문 님 쪽을 보고 웃으려고 했어요. 그게 제일 오래 남아요.

백문—…그랬지. 그 아이가 그랬어. 꼭… 자네가 말하던 그 루나라는 아이의 언니처럼.

연이—네. 똑같아요. 루나 언니도 그래요. 자기는 새 앞치마 한 장을 안 사면서 루나 학교는 보내고, 담보로 잡혀 잿빛이 되면서도 뒤에서 우는 루나를 보고 웃었어요. 「괜찮아, 너만 무사하면 돼」 하는 얼굴로.

백문—사랑은 늘 그렇게, 자기를 뒤로 미루지. …그래서 자네가 남의 일에 제 일처럼 우는 거군.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들을 다 제 사람이라 부르는 아이라니. 참 이상한 제자를 뒀어.

연이—넷. 청토끼가 소망이를 담보 시장에 넘기겠다고 했고, 백문 님 사서인이랑 소망이 원본 계약서는 놈의 금고에 있다. 여기까지가 백문 님이 아시던 거예요.

연이—근데 이제 하나 고쳐야 해요. 토끼는 값을 받았지, 물건을 가진 게 아니에요. 값을 치른 쪽이 따로 있어요. 그러니까 소망이는… 담보 시장에 없을 거예요.

백문—…그렇다면 그 아이는 팔린 게 아니라, 어딘가에 간직된 게로군. 시장은 물건을 돌리는 곳이지만, 수집가는 물건을 안 내놓지. 그럼 내가 백 년을 뒤진 곳은, 처음부터 틀린 곳이었네.

백문—연이. 만약 정말 그 아이를 만나거든, 이 말만 전해 주게. 「아비는 너를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너를 지킨 그 선택을, 그 세월이 지나도 다시 할 거라」고.

연이—네. 꼭 전할게요. 한 글자도 안 틀리고요. 백문 님, 소망이 정말 행복할 거예요.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아빠가 있는데. 아직 못 만났을 뿐이지, 그 사랑이 어디 안 가잖아요.

백문—고맙네. 하지만 사서는 그런 위로만 받으려고 사서가 된 게 아니거든. 그러니 부탁 말고 계약을 하지. 정당한, 본뜻이 훤히 보이는 계약을.

백문이 열람대 위에 새 종이를 펼쳤다. 손수 쓴 반듯한 문장이었다.

「의뢰: 금고에서 사서인을 되찾아 올 것. 보수: 사서의 전력을 다한 도움. 그리고 이 도서관은 언제까지나 그대들의 편이 된다.」

연이—백문 님. 이 계약서, 제가 본뜻 읽기로 한번 읽어 볼게요. 밑에 함정 없나. 청토끼한테 배운 게 있어서, 이제 계약서는 꼭 읽고 도장 찍거든요.

백문—허허. 좋은 습관일세. 그래, 읽어 보게. 사서의 계약서를, 사서의 제자가 검증하는 셈이군.

연이가 계약서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연이가 빙긋 웃었다. 밑바닥까지 훤히 맑은, 함정 하나 없는 계약이었다. 오직 서로를 돕겠다는 진심만이 깔려 있었다.

연이—깨끗해요. 밑에 아무 함정도 없어요. 그냥 「서로 돕자」는 마음만 있어요. 이런 계약서는 처음 봐요. 청토끼 것들은 다 밑이 새까맸는데.

백문—그게 정당한 계약일세. 본뜻과 겉뜻이 같은 계약. 세상 모든 약속이 이래야 하는데, 값이 뜻을 이기면서 다들 밑이 검어졌지.

그런데 백문이 붓을 도로 들었다. 그리고 계약서 맨 아래에, 처음엔 없던 한 줄을 천천히 더 적었다.

백문—「그리고 소망이를 찾거든, 아비를 대신해 이 한마디를 전할 것. 아비는 너를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이건 의뢰가 아니라 유언에 가깝네. 그래도 계약서에 적어야, 백 년이 지나도 안 지워지거든.

연이—…백문 님. 이런 건 계약서에 안 적으셔도 제가 해요. 그냥 할 거예요. …근데 적으셨으니까, 이제 저 이거 못 어겨요. 알고 적으신 거죠. 사서가 백 년 만에 부린 잔꾀네요.

연이—서명할게요. 아니, 도장 찍을게요. 앞발 도장으로. 제 인생 최초로, 밑까지 다 읽고 찍는 계약서예요!

꽝. 인주도 없이 찍은 앞발 자국이 이상하게도 청록빛으로 빛났다. 함정 없는 계약에, 함정 없는 마음이 도장을 찍자 — 계약서 전체가 은은한 초록으로 물들었다.

백문—이걸로 됐네. 이 계약이 살아 있는 한, 이 도서관은 언제나 자네 편일세. 위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자네에겐 돌아올 자리가 하나 더 생긴 거야. 여기, 이 늙은 여우의 도서관이.

연이—돌아올 자리. 고마워요, 백문 님. 저 이제 무섭지 않아요. 이기든 지든, 돌아올 곳이 있으니까. 그게 얼마나 든든한지, 백문 님은 아실 거예요.

네오—…저도 한 장 받고 싶군요, 사서장. 돌아올 자리가 적힌 종이는, 제 쪽에도 한 번도 없었거든요.

* * *

백문—자, 그럼 이제 실전 준비일세. 금고에 대해 알려 줄 게 있어. 앉게. 청토끼 본사 지하, 대저울의 추가 내려가는 우물 밑바닥. 거기에 금고가 있네. 놈이 담보로 잡은 세상 모든 원본이 그 안에 있어.

연이—거기 제 마지막 기둥 신미도, 언니 계약서 원본도, 백문 님 사서인도, 그리고 소망이 계약서도 다 있는 거죠?

백문—그렇다네. 다만 명심하게. 금고를 지키는 건 자물쇠가 아니라 회중시계야. 놈은 금고 앞에서 그 시계를 들고 자네를 맞을 걸세. 그 시계가 째깍이기 시작하면—

연이——흔들리지 않기. 셋째 원칙. 알아요. 내가 왜 이 숨을 쓰는지, 그 답만 붙들면 시계는 저한테 아무것도 못 써요. 열람실에서 배웠어요.

백문—좋아. 그리고 하나 더. 그 회중시계는 청토끼 것이 아니야. 오늘 자네가 직접 봤듯이, 빌려 온 거지. 진짜 주인은 따로 있네. 놈이 궁지에 몰리면, 어쩌면 그 진짜 주인을 부를지도 몰라.

연이—그 여자. 백문 님, 저 그 여자가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자기 탐욕을 슬픔으로 포장한다는 거예요. 남의 걸 다 뺏으면서, 자기가 제일 불쌍한 척. 그 위선이, 나쁜 것보다 더 무서웠어요.

백문—자네는 벌써 그 여자의 밑바닥까지 읽었군. 그래. 그 여자는 악(惡)이 아니라 상(傷)일세. 상처. 사랑이 상처가 되고, 상처가 저주가 된 존재지. 그러니 만약 그 여자를 마주하거든, 미워하지 말고 읽게. 자네의 그 눈으로.

연이—미워하지 말고 읽기. …백문 님, 그거 딸을 뺏긴 사람이 할 말은 아니잖아요. 어려운 숙제지만, 해 볼게요. 근데 그러려면 먼저 청토끼부터 이겨야 하니까. 한 걸음씩.

네오—맞아. 그 여자 이야기는 나중이야. 지금 우리가 넘어야 할 건 청토끼와 회중시계. 연이, 우린 이미 한 번 그 앞에서 졌어. 하지만 그때의 우리랑 지금의 우리는 달라. 이번엔, 반드시 이긴다.

백문—든든한 파수꾼일세. 그래, 한 걸음씩. 우선 청토끼를 이기고 마지막 기둥을 되찾게. 오늘은 푹 쉬게. 내일 아침, 반납구로 올려 보내 주겠네.

* * *

백문—자네 말일세. 어제 훈련에서 자네 숨을 정면으로 봤네. 금식, 그것도 아주 오래된 금식이야. 한데 이상하단 말이지.

백문—이 도서관엔 세상 모든 숨의 원문이 꽂혀 있는데, 자네 숨은 색인에 없어. 마치 아직 쓰이지 않은 책 같단 말이야. 어디서 본 숨 같은데, 기억이 아니라 예감으로 아는 느낌이랄까.

네오는 오래 침묵했다. 등불 물고기가 두 사람 사이를 세 번 지나갔다.

네오—사서장. 색인에 없는 책은 어떻게 되지?

백문—둘 중 하나지. 아직 쓰이는 중이거나, 아니면 다른 서고의 책이거나.

네오—답이 되는군. 양쪽 다.

백문—파수꾼. 하나만 더 묻겠네. 자네가 차고 있는 그 금빛 힘 — 그건 청토끼의 회중시계와, 같은 시계에서 나온 힘이지? 냄새가 같아. 아주 오래된 시간의 냄새.

네오—역시 아셨군요. 네. 청토끼의 회중시계도, 제 힘도, 근원은 하나입니다. 「그 여자」가 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 오늘 연이가 문지방 밖에서 본 그 시계요.

네오—청토끼는 그걸 빌려 남의 운명을 고쳐 쓰고, 저는 그 조각을 훔쳐 시간을 거슬렀습니다. 청토끼는 그 여자의 하수인이고, 저는 그 여자에게서 도망친 자죠. 대가로 제 별자리를 태우면서.

백문—같은 시계에서, 하나는 남의 운명을 고쳐 쓰는 데 쓰이고, 하나는 시간을 거스르는 데 쓰였다. …그 여자가 벌이려는 일. 그게 저 아이와 관련이 있나?

네오—…있습니다. 아주 깊이. 그 여자가 백 년째 탐내는 것이, 실은 연이와 얽혀 있어요. 하지만 그건, 아직 말할 수 없습니다. 연이가 알면 흔들릴 테니까요.

백문—알겠네. 사서는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를 미리 읽지 않아. 다만 파수꾼, 이것만은 기억하게. 마지막엔 반드시, 자네가 감춘 그 이름을 저 아이에게 말해야 할 순간이 와. 진실을 모르는 채로는, 아무도 제 운명을 되쓸 수 없거든.

네오—압니다. 그날이 오면, 다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웃을 수 있게 해 주고 싶습니다. 진실은 무겁고, 저 아이의 웃음은 아직 여리니까요.

백문은 더 묻지 않았다. 사서는 대출 기한을 어기는 책을 다그치지 않는다. 돌아올 자리를 비워 둘 뿐이었다. 다만 이 은빛 파수꾼이 짊어진 것이, 자기가 백 년간 짊어진 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 오래 산 여우는 알아보았다.

그날 밤, 연이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내일이면 다시 위로. 다시 청토끼 앞으로. 한 번 졌던 그 자리로.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연이—(무섭긴 무섭다. 근데 예전이랑은 달라. 그땐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떠밀렸는데, 지금은 알아. 언니, 루나, 백문 님, 소망이. 내가 되찾을 이름들. 그리고 온전해질 나.)

연이는 머리맡의 본필을 가만히 쥐어 봤다. 백문의 백 년이 담긴 붓. 오늘 그 백 년을 통째로 밟고 온 붓이었다.

그리고 가슴속 일곱 개의 별. 하나씩 되찾아 온 자기 조각들이, 이불 속에서 조용히 빛났다. 무섭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연이—(루나 언니가 루나 지키려고 담보 된 거랑, 백문 님이 소망이 지키려고 사서인 잃은 거랑, 똑같아. 이 세계는 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지키려다 다치는 걸까.)

연이—(그러니까 내가 끊을 거야. 그 고리를. 되찾을 거야. 언니도, 소망이도, 백문 님 사서인도. 사랑이 상처로 끝나지 않게. 이번엔, 사랑이 이기게 만들 거야.)

눈을 감자 자꾸 그 물빛이 떠올랐다. 반납구 아래 얕게 고인 물, 그 위로 소망이가 처음 떠 있던 밤의 첫 빛. 낯설지 않은 물빛이었다. 오늘 종일 그 안에 있었으니 당연하겠지, 하고 연이는 생각했다.

그렇게 다짐하고 나니, 두려움이 조금 가벼워졌다. 연이는 본필을 꼭 품고, 마침내 눈을 감았다. 도서관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깊어 갔다.

* * *

이튿날 아침. 떠나기 전, 연이는 도서관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며칠 사이 정든 곳이었다. 등불 물고기들이 아쉬운 듯 연이의 어깨에 앉았고, 되살린 책들이 지나가는 연이에게 페이지를 팔랑여 인사했다.

연이는 처음 떨어졌던 책 산도, 첫 수업을 받은 본뜻의 서가도, 자기를 증명한 열람실도 하나씩 눈에 담았다. 무섭게 시작한 곳이었는데, 이제는 집처럼 정겨웠다.

연이—여기서 참 많이 배웠다. 처음엔 「왜 하필 도서관에 떨어졌지」 했는데, 이제 알겠어. 재성에서 값에 진 내가, 여기서 뜻을 배워야 했던 거야. 그래야 다시 위로 올라가서 이길 수 있으니까.

네오—이 도서관이 널 부른 거야, 연이. 우연히 떨어진 게 아니라. 네가 배워야 할 걸, 이곳이 알고 있었어. 이제 다 배웠으니, 돌아갈 시간이다.

연이는 열람실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거울 속 자신, 무대의 모카, 담보가 된 언니, 그림자 여인. 그 모든 얼굴이 이제 연이의 힘이 되어 있었다. 연이는 문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연이—고마웠어, 내 지나온 페이지들아. 너희 덕에 나, 왜 싸우는지 알게 됐어. 등불 물고기들아, 잘 있어. 백문 님 외롭지 않게, 너희가 곁에 있어 줘.

* * *

연이는 마지막으로 오염 서가로 갔다. 맨 끝, 백문이 백 년째 겉표지만 닦는 그 얇은 책은 그대로 두었다. 대신 그 옆에서 오래 앓아 온 검은 책 하나에, 연이는 본필을 얹었다.

연이—혹시 네가 소망이일까 봐. 아니어도 괜찮아. 누구든, 네 진짜 이름을 되찾아 줄게.

연이의 청록빛이 번지자, 검은 도장 아래에서 원문이 떠올랐다. 「나는 한때, 누군가의 자랑스러운 아이였다.」 소망이는 아니었지만, 또 한 사람의 눌린 진실이 등불빛을 되찾았다.

* * *

백문—연이. 떠나는 마당까지 남의 진실을 되살리는군. 자네는 정말… 이 도서관이 백 년을 기다린 아이가 맞아. 소망이는, 위에서 자네가 꼭 찾아 주게. 눌린 진실을 알아보는 그 눈으로.

연이—네. 꼭 찾을게요. 그리고 백문 님 사서인도. 그때 이 도서관 문 활짝 열고, 다 같이 밖에 나가서 밥 먹어요. 다섯 그릇, 아니 여섯 그릇으로. 소망이 것까지.

백문—자, 무거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떠나는 제자를 빈속으로 보낼 순 없지. 마지막으로 이 늙은이가 아침을 차렸네. 오늘은 특별히, 등불 물고기 전병에 도서관 정원 열매까지. 배부르게 먹고 가게.

네오—파수꾼의 검식은 동료의 안전을 위한 숭고한 의무입니다. 오늘은 마지막이니, 전병 딱 세 개까지만 검식하겠습니다.

연이—세 개가 무슨 검식이야! 그냥 먹는 거지! 백문 님, 파수꾼이 또 검식 사기 치려고 해요!

백문—허허허. 많이들 먹게. 백 년 만에 이 도서관 식탁이 이렇게 꽉 찼는데, 남으면 서운하지. 파수꾼, 오늘은 검식 열 개까지 허락하네.

세 사람은 마지막 아침을 오래 나눠 먹었다. 무거운 이야기 끝의, 따뜻한 식탁이었다. 연이는 이 온기를 오래 기억하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도, 이 아침의 볕을 떠올릴 수 있게.

식사가 끝나자, 백문은 등불 물고기 종이로 곱게 싼 꾸러미 하나를 연이 손에 쥐여 주었다. 안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백문—전병을 좀 싸 뒀네. 위에서 힘들 때, 하나씩 꺼내 먹게. 배가 든든해야 문장도 또렷해지는 법이야. 그리고… 그 종이 포장, 등불 물고기 모양으로 접었네. 소망이한테 접어 줬던, 그 「안 도망가는 물고기」 모양으로.

연이—백문 님. 이거… 이 물고기 접기. 저 이거 소망이 만나면 보여 줄게요. 「너희 아빠가 나한테도 접어 줬어」 하고. 그럼 소망이가 백문 님 바로 알아볼 거예요.

백문—그래 주겠나. 그럼 그 물고기가, 백 년을 건너 그 아이한테 닿는 셈이군. 자, 어서 넣어 두게. 눈물 나기 전에. …아, 몰라 몰라. 자네가 가르쳐 준 주문일세. 자네 없는 도서관에서, 외로울 때마다 외우지.

아침을 다 먹고, 볕이 가장 좋을 때였다. 지상의 문서가 도서관으로 떨어지는 좁은 수직 통로, 반납구 앞에 세 사람이 섰다. 백 년 전 어느 밤, 갓난아기 하나가 흘러들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백문—거슬러 오르게. 떨어지는 것들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면 그 길 끝이 놈의 금고 바닥일세. 도서관의 바람이 등을 밀어 줄 거야.

연이—백문 님. 저 진짜 갈게요. 고마웠어요. 되쓰기도, 본필도, 그리고… 이 며칠 동안 저 진짜 많이 웃었어요. 저도 이 세계 와서, 여기서 제일 많이 웃었어요.

백문—나도일세, 연이. 나도야. 잘 가게, 나의 첫 제자.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게. 이 문지방 안에서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으마.

백문—가기 전에, 사서의 축문(祝文) 하나를 새겨 주겠네. 이 도서관의 가장 오래된 축복일세. 「이 아이가 읽는 모든 것이 진실을 드러내고, 이 아이가 쓰는 모든 것이 사랑을 지키게 하라.」

백문이 지팡이로 허공에 축문을 쓰자, 청록빛 글자가 연이의 이마에 잠깐 머물다 스며들었다. 사서가 제자에게 주는, 백 년에 한 번의 축복이었다.

연이—따뜻해요, 이마가. 고마워요, 백문 님. 이 축복, 절대 안 잊을게요. 읽는 건 진실을 드러내고, 쓰는 건 사랑을 지키게. 딱 제가 하고 싶은 거예요.

네오—백문 님. 저 아이, 잘 데려가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다시 데려오죠. 사서인이랑 소망이 소식이랑, 좋은 것들 잔뜩 들고서요.

백문—믿네, 파수꾼. 자네 등이라면. 그리고 자네도, 자네 별자리를 꼭 되찾게. 남의 하늘만 지키다 자네 하늘을 비워 두지 말고. 이 늙은이의, 마지막 참견일세.

네오—명심하겠습니다. 언젠가, 제 하늘에도 별이 뜬다면. 그날이 오면, 이 도서관에 제일 먼저 알리러 오죠.

백문—연이! 마지막으로 하나만! 저 시계가 아무리 크게 째깍여도, 자네 문장 한 줄이 그보다 크다는 걸 잊지 말게! 자네는 이 도서관의 자랑이야! 가서, 증명하게!

연이—네! 문장 한 줄이 시계보다 크다! 절대 안 잊을게요! 백문 님, 여섯 그릇 꼭 준비해 두세요! 우리 금방 돌아올 거니까요!

백문이 지팡이를 들어 반납구의 바람을 거꾸로 돌렸다. 두 사람의 몸이 청록빛 바람에 실려 솟구치고, 저 아래에서 손을 흔드는 백문이 점점 작아졌다. 거슬러 오르는 통로는 떨어지는 문서들의 폭포였다. 지는 것들의 강을, 거꾸로 헤치며.

연이—네오, 봐. 이 문서들 전부 위에서 값에 진 사람들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많이 떨어지고 있어. 백문 님이 백 년을 혼자 감당한 게, 이 폭포였구나.

연이는 떨어지는 문서 하나에 손끝을 스쳤다. 순간, 그 문서의 본뜻이 읽혔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값에 졌지만, 마음만은 지지 않은 누군가의 문장. 연이는 그것을 가슴에 새겼다.

네오—근원을 막지 않으면 이 폭포는 영영 안 그쳐. 연이, 순서를 정하자. 금고 앞엔 청토끼가 회중시계를 들고 있을 거야. 내가 먼저 그 시계의 사슬을 끊는다. 그 틈에 네가 금고를 열고, 신미부터 되쓰는 거야.

연이—응. 근데 무리하지 마. 너 그 시계랑 근원이 같은 힘이라며. 정면으로 부딪히면 너한테도 대가가 오는 거 아니야? 나 이번엔 아무도 안 잃을 거야. 전부 데리고 돌아갈 거야.

네오—걱정 마. 사슬을 끊는 정도로는 큰 대가가 안 와. 진짜 대가는 시간을 되돌릴 때만이야. 그건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에만 쓸 거니까. …그리고 연이. 위에서 내가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아도, 조금만 믿어 줘.

통로 끝이 보였다. 가슴속 일곱 개의 별과 손에 쥔 본필과 이마에 스민 축복을 하나씩 확인하며, 연이는 마지막 바람에 실려 솟구쳤다. 지는 것들의 폭포를 다 거슬러 오른 곳 — 그 끝에 청토끼의 금고 밑바닥이, 그리고 예언에 없던 반가운 얼굴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23화 · 안 도망가는 물고기 — 끝. 제24화 「원본 계약서」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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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무대는 사주 명리학의 십성, 자미두수의 열두 궁, 숙요 27수라는 실제 전통 체계에서 가져왔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서사에 맞게 각색했으므로, 작품 속 묘사를 그대로 점술 지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 주세요. 각 체계의 실제 해석 규칙은 별도의 기능 가이드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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