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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운명 노벨4부 · 인성의 도서관

EP.23 · 24 / 44

사서의 오래된 상처

사서 백문의 오래된 상처가 드러나고, 이야기는 개인에서 관계로 넘어간다.

한글 약 12,224자 · 읽는 시간 약 29분

약속대로, 백문은 낮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도 이야기는 밤처럼 어두웠다.

백문은 두 사람을 오염 서가가 가장 짙게 앓는 구역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검은 서가를 등진 채, 낡은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백 년간 아무에게도 못 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의, 무거운 자세였다.

연이—…백문 님. 편하게 하세요. 급할 거 없어요. 저희 여기 하루 종일이라도 들을게요.

네오—…네. 백 년을 삼킨 이야기라면, 반나절쯤 걸려도 괜찮습니다. 천천히 하시죠.

백문—…고맙네. 이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이 늙은이는 벌써 반쯤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야. …그럼, 시작하지. 아주 오래된, 이 손목의 사서인에 얽힌 이야기를.

백문—백 년 전일세. 그 토끼가 처음 이 도서관에 내려왔지. 나는 손님인 줄 알았네. 책 좋아하는 손님. …놈은 그때도 회중시계를 차고 있었어. 그 시계의 진짜 주인에게 빌려 왔다면서.

백문—놈은 매일 와서 계약법 서가를 읽었어. 성실하게, 겸손하게. 반년을 그렇게 드나들었지. 나는 그 성실함에 그만 마음을 놓았네. 책을 사랑하는 자에게 어찌 악의가 있으랴 싶어서. …그게 첫 실수였어.

연이—…반년을요. 악한 얼굴로 왔으면 백문 님이 안 속으셨을 텐데. 제일 무서운 건, 착한 얼굴로 오래 참는 악이네요.

백문—바로 그걸세. 부정 계약의 첫 번째 무기는 시계가 아니라, '신뢰'야. 오래 신뢰를 쌓아 두면, 상대는 계약서를 안 읽고 도장을 찍거든. 놈은 그 반년 동안, 내가 계약서를 안 읽을 만큼의 신뢰를 산 거지. …참으로, 무서운 장사꾼이야.

백문—그러다 어느 날 대출증 한 장을 내밀더군. 「도서관 운영 효율화 협약」이라고 적힌 거였네. '사서장님 일손을 덜어 드리고 싶습니다. 잡무는 제가 맡죠.' …그럴싸했어. 나는 반년의 신뢰를 믿고, 그 서명란을 제대로 안 읽었네.

연이—…그 순간을, 청토끼가 기다린 거군요. 백문 님이 딱 한 번, 안 읽고 도장 찍을 그 순간을.

그때 백문은 몰랐다. 그 대출증이 놈의 첫 부정 계약 실험이었다는 것을. 서명란에 지팡이를 댄 순간 문장이 뒤집혔다.

백문—「사서의 인장은 본 협약에 따라 채권단이 보관한다.」 …그렇게 내 사서인을 놈이 가져갔네.

연이—…근데 백문 님. 왜 그런 협약에 도장을 찍으셨어요? 본뜻 읽기의 대가이신데. 그 계약서 밑에 함정이 있는 거, 백문 님이라면 읽으셨을 거잖아요.

백문—…읽었지. 함정인 줄 알았어. 그런데도 찍었네. …놈이, 인질을 잡고 있었거든.

연이—…인질이요? 누구를.

백문—…오래전, 이 도서관 가장 깊은 서가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네. 반납구의 빛과 등불 물고기가 모여든 자리에, 갓난아기 하나가 있었어. 수백 년 홀로 책을 지켜 온 이 늙은 여우에게, 세상이 처음으로 준 혈육이었지. 이야기의 강 상류에서 흘러온 아이. 나는 그 아이를 내 딸로 품었네. 이름을 '소망'이라 지었지. 이 늙은 여우의, 처음이자 유일한 가족이었어.

연이—…소망. 예쁜 이름이에요. …그럼 청토끼가, 그 소망이를.

백문—…놈은 어느 날 소망이를 제 손아귀에 넣고 찾아왔네. 도서관 문지방 밖에서 아이를 붙든 채, '이 아이를 담보 시장에 넘기기 전에, 네 사서인으로 값을 치러라.' …나는, 망설이지 않았어. 사서인이든 뭐든, 그 아이를 지킬 수만 있다면.

연이는 문득, 백문이 백 년째 못 읽던 그 찢긴 계약서를 떠올렸다. 「내가 무엇을 내주더라도, 저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 달라.」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 백문 자신이 쓴, 소망이를 지키려던 계약서였던 것이다.

연이—…그 찢긴 계약서. 백문 님이 소망이를 위해 쓴 거였어요. 그래서 백 년째 못 읽으신 거예요. 너무 아파서.

백문—…그래. 그런데 놈은, 사서인을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소망이를 담보 시장에 넘겨 버렸네. 부정 계약은 원래 그런 거야. 지키는 척하며 전부 빼앗지. …나는 사서인도, 자유도, 그리고 소망이도 — 전부 잃었네. 한꺼번에.

백문—…놈이 소망이를 끌고 가던 날, 나는 이 문지방까지 기어 나갔네. 사서인을 잃어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는데도, 손을 뻗었지. '그 아이만은 안 된다'고. 하지만 놈은 웃으며 이러더군. '사서장님, 계약서를 안 읽으신 건 사서장님이십니다.' …그 말이, 백 년째 귓가에 맴도네.

연이—…너무해. 진짜 너무해. 사람의 신뢰를 반년이나 사서, 그걸로 딸을 빼앗아 가고, 심지어 '네가 안 읽은 탓'이라고. …청토끼 그거, 제가 위에서 만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그 회중시계, 제가 꼭 되쓰기로 무너뜨릴 거예요.

백문—…연이. 화내 줘서 고맙네. 백 년간 아무도 나 대신 화내 준 사람이 없었거든. 다들 '어쩔 수 없었다' 했지. 하지만 자네는 '너무하다'고 해 주는군. …그 한마디가, 백 년 묵은 체증을 쓸어내리네.

네오—…청토끼의 수법이 늘 그렇습니다. 재판정에서 루나 언니를 담보로 잡을 때도 똑같았죠. '계약이니 어쩔 수 없다.' 놈은 사람의 정당한 분노마저 '계약'으로 덮어 버려요. …그러니 우리가 그 계약을 무효로 만들어야 합니다. 근본부터.

연이—…맞아. 원본 계약서를 되쓰면, 청토끼가 덧쓴 모든 '어쩔 수 없음'이 다 무효가 돼. 소망이도, 언니도, 잿빛 사람들도 전부. …백문 님, 저 이제 왜 위로 올라가야 하는지 하나 더 생겼어요. 청토끼한테 '어쩔 수 없는 건 없다'고 알려 주려고요.

백문—…허허. 무서운 제자를 뒀군. 그래, 세상에 '어쩔 수 없는' 부정 계약은 없어. 원본만 살아 있으면, 전부 되쓸 수 있지. 자네가 그걸 증명해 주게. 이 늙은 사서가 백 년간 못 한 걸, 자네 손으로.

연이—…그럼 소망이는 지금, 위의 담보 시장에… 잿빛으로 변한 그 사람들처럼.

백문—…모르네. 백 년이 지났으니, 잿빛이 됐을 수도, 어느 계약에 묶여 있을 수도. 나는 도서관 밖으로 못 나가니, 찾을 수조차 없었어. 다만 매일, 반납구로 떨어지는 문서를 뒤지며 혹시나 그 아이의 흔적이 있을까 살폈지. 백 년을. 헛되이.

연이—…그래서 백문 님이 오염 서가를 그렇게 못 지나치셨구나. 저 검은 책들 하나하나가, 다 소망이일 수도 있어서. 담보로 잡힌 누군가일 수도 있어서.

백문—…그래. 저 검은 책 하나를 되살릴 때마다, 나는 소망이를 되살리는 상상을 했네. 언젠가 그중 하나가 정말 그 아이이길 바라면서. …허나 이 묶인 몸으로는, 되읽어 줄 힘조차 온전치 못했지.

연이—싸우지… 않으셨어요?

백문—싸웠지. 사흘 밤낮을. 사서인을 잃기 전, 마지막 힘으로 도서관의 모든 책을 불러 놈에게 던졌네. 계약법 서가가, 판례 서가가, 세상 모든 문장이 놈을 향해 날아갔어. …하지만.

백문—…놈이 회중시계를 들자, 날아가던 문장들이 공중에서 하나씩 '무효'로 덧쓰였네. 「이 책은 폐기되었음」 「이 판례는 소멸되었음」. 내가 던지는 족족, 놈이 되받아 지워 버렸어. 인장 잃은 사서의 문장은, 놈의 시계 앞에서 다 종잇조각이었지.

연이—…그게 회중시계의 힘이구나. 아무리 강한 문장도, 시계가 '무효'라고 덧쓰면 그냥 사라지는. …근데 백문 님, 저도 위에서 그 시계를 상대해야 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이겨요?

백문—…내가 진 건, 인장을 잃은 뒤였기 때문일세. 인장 없는 사서의 문장은 뿌리가 없거든. 하지만 자네는 달라. 자네 문장엔 자네 숨이 실려 있어. '왜 싸우는가'에 답한 숨. 그건 놈의 시계로도 '무효'라 못 덧쓰네. 뿌리가 있는 문장이니까.

백문—…그러니 자네는 나처럼 싸우지 말게. 많은 책을 던지지 말고, 딱 한 문장만. 흔들림 없는 자네만의 한 문장. 그거면 충분해. 나는 백 권을 던져 졌지만, 자네는 한 문장으로 이길 걸세.

백문—패배의 값은 컸어. 나는 이 문지방 안에 묶였고, 놈은 그날부터 위에서 내가 지켜야 했던 문서들로 사람을 사냥하기 시작했지.

연이—…백문 님. 그 백 년 동안, 어떻게 버티셨어요? 소망이도 잃고, 자유도 잃고, 매일 검은 서가는 늘어나고. 저 같으면… 포기했을 것 같아요.

백문—…포기하고 싶은 밤이 셀 수 없이 많았네. 하지만 검은 서가 하나를 닦으면, 그 밑에서 누군가의 진짜 이름이 아주 희미하게라도 보였어. '아, 이 사람은 아직 안 죽었구나' 싶었지. 그 희미한 한 줄이, 나를 백 년 버티게 했네. 남의 안 꺼진 진심이, 내 안 꺼진 이유가 된 걸세.

연이—…남을 살리는 게, 자기가 사는 이유가 됐구나. …백문 님,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언니 지키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지나고 보니 그 덕에 제가 자랐어요. 남을 지키려다, 제가 강해졌어요.

백문—…그래. 그게 인성의 마지막 비밀일세. 남을 살리는 자는, 그 살림으로 자기도 산다. 값의 세계는 '뺏어야 산다'지만, 뜻의 세계는 '살려야 산다'거든. 자네는 이미 그 이치를 몸으로 아는 아이야.

긴 이야기에, 연이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백문의 백 년 그리움이, 재성에 두고 온 루나와 그 언니를 향한 마음과 자꾸 겹쳤다. 그때, 네오가 조용히 연이 곁으로 다가와 커다란 앞발을 그 어깨에 살며시 얹었다.

네오—…괜찮아, 연이? 무거운 이야기였지. 잠깐 쉴래? 다 한 번에 안아 들려고 하지 마. 백문 님의 백 년도, 언니 일도, 소망이도. 한 번에 다 짊어지면, 네가 먼저 무너져.

연이—…괜찮아. 근데 자꾸 겹쳐서. 소망이 지키려던 백문 님이랑, 루나 지키려던 그 언니가. 다들 사랑하는 사람 지키려다 이렇게 아프고. …나 이거 꼭 끊고 싶어. 사랑이 아픔으로만 끝나는 거.

네오—…끊을 수 있어. 너라면. 넌 이미 재성에서, 인성에서, 사랑이 값이 아니라 뜻이라는 걸 배웠잖아. 위에 올라가면, 그걸 증명하면 돼. 사랑이 이길 수 있다는 걸. …나도 옆에서, 아니 나란히서 도울게.

연이—…응. 나란히. …고마워, 네오. 너 이제 위로할 줄도 아네. 도서관 오더니 많이 부드러워졌어.

네오—…파수꾼도 진화하는 거야. 다만 이 진화, 백문 님한텐 비밀로 해 줘. 위엄이 좀 깎이니까.

백문—…이미 다 들었네만. 허허. 걱정 말게, 파수꾼. 무서운 얼굴로 다정한 사자라니, 위엄이 깎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멋진 거야. …자, 무거운 이야기는 이쯤 하지. 이제 실전 준비를 하세.

연이는 검게 앓는 서가를 떠올렸다. 백 년 치의 앓음이었다.

연이—…백문 님 잘못이 아니에요. 친절한 얼굴로 들어온 칼을 어떻게 다 막아요. 소망이를 지키려던 그 마음이, 어떻게 잘못이에요.

연이—…백문 님. 그 찢긴 계약서, 지금 저한테 다시 보여 주실래요? 백 년째 못 읽으신 그 반쪽. …저 이제 되쓰기도 배웠고, 본필도 있어요. 어쩌면, 그 탄 반쪽을 읽어 드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백문—…! 그 반쪽을. …자네가.

백문은 오래 망설이다, 떨리는 손으로 로브 깊은 곳에서 그 찢기고 그슬린 반쪽을 꺼냈다. 백 년간 차마 다 읽지 못한, 소망이를 지키려던 그의 계약서. 연이는 본필을 쥐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연이—…읽을게요. 겁 안 먹고, 천천히. …이 밑에, 백문 님이 정말 하려던 말이 있어요. …'설령 내가 이 도서관에 영영 갇히더라도—'

연이의 청록빛이 그슬린 반쪽으로 번지자, 타 버려 안 보이던 아랫부분의 글자가 하나씩 되살아났다. 백 년간 재에 묻혀 있던 백문의 진심이, 처음으로 온전히 드러났다.

연이—「…설령 내가 이 도서관에 영영 갇히더라도, 소망이 너만은 부디 살아서, 어디선가 웃고 있어 다오. 네가 웃고 있다면, 이 늙은 아비의 백 년은 헛되지 않다.」 …이게, 백문 님이 그때 쓰신 진짜 마음이에요.

백문—…아아. …백 년을, 나는 그 문장을 차마 못 읽었네.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 도장을 찍었는지,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고맙네, 연이. 자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 마음을 영영 재 속에 묻어 뒀을 걸세.

연이—…백문 님. 소망이는 분명 어디선가 살아 있을 거예요. 그리고 백문 님이 이렇게까지 자기를 사랑한 걸, 언젠가 알게 될 거예요. 제가 위에 올라가서, 소망이 흔적도 꼭 찾아볼게요. 담보 시장이든, 어느 계약서 밑이든.

백문—…자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군. 언니에, 자네 기둥에, 내 사서인에, 이제 소망이까지. …하지만 이 늙은이는, 백 년 만에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걸 품어 보네. 자네 덕에.

백문은 되살아난 계약서 반쪽을 두 손으로 소중히 감쌌다. 백 년간 재에 묻혔던 자기 진심이, 마침내 빛을 되찾았다. 연이는 그 모습을 보며, 반드시 소망이의 진짜 이름도 되살려 주겠다고 다짐했다.

연이—…백문 님. 제가 위에서 소망이를 찾으려면, 뭐라도 단서가 있어야 해요. 소망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뭐 특별한 게 있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다 말씀해 주세요.

백문—…백 년이 지나 얼굴은 흐릿하네. 하지만 이건 기억해. 그 아이 왼쪽 손목에, 작은 등불 물고기 모양 점이 있었어. 이 도서관에서 자란 아이라, 등불 물고기를 꼭 닮은 점이. …그리고 그 아이는, 아무리 슬퍼도 남 앞에선 웃으려 애쓰는 아이였네. 꼭… 자네 언니처럼.

연이—…왼쪽 손목에 등불 물고기 점. 슬퍼도 웃는 아이. …기억할게요. 담보 시장이든, 어느 계약서 밑이든, 그 점을 가진 사람을 찾으면 그게 소망이인 거죠. 꼭 찾을게요.

백문—…설령 못 찾더라도 괜찮네. 자네가 찾아 주겠다고 마음먹은 것만으로, 백 년 외로움이 반은 녹았어. 다만… 만약 정말 그 아이를 만나거든, 이 말만 전해 주게. '아비는 너를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너를 지킨 그 선택을, 백 년이 지나도 다시 할 거라'고.

연이—…네. 꼭 전할게요.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백문 님, 소망이 정말 행복할 거예요.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아빠가 있는데. 아직 못 만났을 뿐이지, 그 사랑이 어디 안 가잖아요.

백문의 안경 너머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백 년을 삼켜 온 그리움이, 처음으로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연이는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말없이, 오래.

백문—…허허. 미안하네. 손님 앞에서 이 늙은이가. …실은 말이야, 소망이가 아주 어릴 적에, 이 도서관 등불 물고기를 하나 잡겠다고 온 서가를 뛰어다닌 적이 있어. 결국 못 잡고 엉엉 울더군. 그래서 내가 종이로 물고기 한 마리를 접어 줬네. '이건 안 도망가는 물고기란다' 하고.

연이—…종이 물고기. 소망이 좋아했겠다.

백문—…그 아이, 그 종이 물고기를 늘 품에 넣고 다녔어.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아빠가 준 안 도망가는 물고기'라면서. …청토끼에게 끌려가던 그날도, 그 아이 손에 그 종이 물고기가 쥐어져 있었네. 그게, 내가 본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일세.

연이—…그럼 그 종이 물고기가, 소망이를 찾는 또 하나의 단서네요. 손목의 등불 물고기 점이랑, 품속의 종이 물고기. …백문 님, 저 이거 다 기억할게요. 꼭 그 애를 알아볼게요.

백문—…백 년이 지났으니, 그 종이 물고기는 진작 삭아 없어졌겠지. 하지만 그 아이 마음속엔 아직 헤엄치고 있을지도 몰라. '안 도망가는 물고기'가. …그 마음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 아이는 아직 자기를 안 놓은 걸세. 부디, 그러하기를.

네오—…백문 님. 그 소망이라는 아이, 아버지가 준 종이 물고기 하나를 백 년 품을 만큼 사랑을 아는 아이라면, 분명 어딘가서 버티고 있을 겁니다. 사랑받은 기억은, 사람을 끝까지 살게 하니까요. …제가 압니다. 저도, 저 아이 곁에서 그걸 배웠거든요.

연이—…네오. …너 방금, 되게 따뜻한 말 했어. …그래, 소망이도 분명 버티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 꼭 찾자. 백문 님, 걱정 마세요. 사랑받은 아이는 안 죽어요. 루나가 산 증인이잖아요. 언니한테 그렇게 사랑받아서, 이 험한 섬에서도 밝게 자란 애니까요.

백문—…그 루나라는 아이와 그 언니 이야기를, 좀 들려주겠나? 백 년간 딸 이야기만 삼켜 온 늙은이에게, 누군가의 자매 이야기는 큰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연이—…루나요? 재성에서 만난 배달 토끼예요. 물빛 머리에, 겁은 많은데 정은 더 많은 애. 그 애 언니가 빵집을 하는데, 엄마 아빠가 없어서 언니가 루나를 거의 키웠대요. 빵 구우면서, 루나 학교 보내면서, 정작 자기는 새 앞치마 한 장을 안 사면서요.

백문—…자기는 아끼면서, 동생은 아끼지 않았군. …이 늙은이가 소망이한테 그랬듯이. 사랑은 늘 그렇게, 자기를 뒤로 미루지.

연이—…네. 근데 루나는 철없을 때 그게 당연한 줄 알았대요. 언니가 해 주는 게 당연한 줄. …근데 청토끼가 그 언니를 담보로 잡으면서, 언니 얼굴이 값으로 지워지기 시작했어요. 저 그거 눈앞에서 봤어요. 재판정에서.

연이—…그 언니가 잿빛으로 변하면서도, 뒤에서 우는 루나를 보고 웃었어요. '괜찮아, 너만 무사하면 돼' 하는 얼굴로. …그때 저, 아무것도 못 했어요. 그 착한 사람이 눈앞에서 지워지는데. 그래서 지금 이렇게 간절한 거예요. 이번엔 꼭 구하려고.

백문—…그래서 자네가 남의 일에 그렇게 제 일처럼 우는 거군. 그 언니 얼굴을 되찾아, 루나 품에 돌려주려는 거야. …연이. 자네는 참 이상한 아이일세. 자기 언니도 아닌데, 남의 언니를 되찾으려고 섬을 넷이나 건너다니.

연이—…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요. 루나가 언니 잃는 거, 백문 님이 소망이 잃은 거. …그리고 그 여자가 텅 빈 마음을 남의 걸로 채우려는 거. 다 남 얘긴데 다 제 얘기 같아요. …그리고 저, 이 세계 와서 그 사람들이 다 제 사람이 됐어요. 루나도, 그 언니도, 백문 님도. 그러니까 제 사람들, 제가 다 지킬 거예요.

백문—…허허. 그거 참, 자네다운 말이군.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들을 다 제 사람이라 부르는 아이라니. …그래, 나도 소망이를 만나면 백 번쯤 미안하다고 할 걸세.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우리 둘 다, 마저 못 한 말이 있는 사람들이군. 그러니 더더욱, 자네는 꼭 이겨야 해. 우리 둘의 못다 한 말을 위해서라도.

네오—…저도, 마저 못 한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 꼭 해야 할 말이. …연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게 하려면, 우린 반드시 이겨야 해. 그러니 이건 우리 셋 모두의 싸움이야.

연이—…네오 너도? 다들 못 한 말을 하나씩 품고 있구나. 좋아, 그럼 이건 못 한 말들을 위한 싸움이네. 루나가 언니한테 못 한 '고맙다', 백문 님이 소망이한테 못 한 '미안하다', 그리고 네오 네가 나한테 못 한… 그게 뭐든.

네오—…그게 뭐든이라. …언젠가, 꼭 말할게. 지금은 아니지만.

연이—응. 기다릴게. 대신 그때까지 우리 둘 다 무사해야 해. 못 한 말은, 살아 있어야 할 수 있으니까.

세 사람 사이에, 못다 한 말들이 조용히 오갔다. 각자의 가슴속에 품은, 아직 하지 못한 사랑의 말들. 그 말들을 마저 하기 위해서라도 — 이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했다.

백문—…자, 이제 정말 말은 그만하지. 못 한 말은 아껴 뒀다, 이기고 나서 하세. 그게 더 값지니까. 그때까지,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야.

연이—…네. 이기고 나서. 다 같이 여섯 그릇 식탁에서. …좋아요, 그때 다 말해요. 그럼 이제, 진짜 준비할게요.

백문의 오래된 상처는 이제 세 사람의 것이 되었다. 소망이도, 사서인도, 못다 한 말들도. 짐이 늘었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은 가벼웠다. 나눠 든 짐은, 혼자 든 짐보다 늘 가벼운 법이니까. 이튿날 새벽, 세 사람은 반납구 앞에 섰다.

백문—고맙네. 하지만 사서는 그런 위로만 받으려고 사서가 된 게 아니거든. 그러니 부탁 말고 계약을 하지. 정당한, 본뜻이 훤히 보이는 계약을.

백문이 열람대 위에 새 종이를 펼쳤다. 손수 쓴 반듯한 문장이었다.

「의뢰: 금고에서 사서인을 되찾아 올 것. 보수: 사서의 전력을 다한 도움. 그리고 이 도서관은 언제까지나 그대들의 편이 된다.」

연이—…백문 님. 이 계약서, 제가 본뜻 읽기로 한번 읽어 볼게요. 밑에 함정 없나. 청토끼한테 배운 게 있어서, 이제 계약서는 꼭 읽고 도장 찍거든요.

백문—…허허. 좋은 습관일세. 그래, 읽어 보게. 사서의 계약서를, 사서의 제자가 검증하는 셈이군.

연이가 계약서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연이가 빙긋 웃었다. 밑바닥까지 훤히 맑은, 함정 하나 없는 계약이었다. 오직 서로를 돕겠다는 진심만이 깔려 있었다.

연이—…깨끗해요. 밑에 아무 함정도 없어요. 그냥 '서로 돕자'는 마음만 있어요. 이런 계약서는 처음 봐요. 청토끼 것들은 다 밑이 새까맸는데.

백문—그게 정당한 계약일세. 본뜻과 겉뜻이 같은 계약. 세상 모든 약속이 이래야 하는데, 값이 뜻을 이기면서 다들 밑이 검어졌지. …자, 이제 믿고 도장을 찍게. 이건 자네를 옭아매는 게 아니라, 자네 편이 되겠다는 약속이니까.

연이—서명할게요. 아니, 도장 찍을게요. 앞발 도장으로. 제 인생 최초로, 밑까지 다 읽고 찍는 계약서예요!

꽝. 인주도 없이 찍은 앞발 자국이 이상하게도 청록빛으로 빛났다. 함정 없는 계약에, 함정 없는 마음이 도장을 찍자 — 계약서 전체가 은은한 초록으로 물들었다. 백문과 연이 사이에, 처음으로 정당한 약속 하나가 세워졌다.

백문—…이걸로 됐네. 이 계약이 살아 있는 한, 이 도서관은 언제나 자네 편일세. 위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자네에겐 돌아올 자리가 하나 더 생긴 거야. 여기, 이 늙은 여우의 도서관이.

연이—…돌아올 자리. …고마워요, 백문 님. 저 이제 무섭지 않아요. 이기든 지든, 돌아올 곳이 있으니까. 그게 얼마나 든든한지, 백문 님은 아실 거예요.

백문—자, 그럼 이제 실전 준비일세. 금고에 대해 알려 줄 게 있어. 앉게. …청토끼 본사 지하, 대저울의 추가 내려가는 우물 밑바닥. 거기에 금고가 있네. 놈이 담보로 잡은 세상 모든 원본이 그 안에 있어.

연이—거기 제 마지막 기둥 신미도, 언니 계약서 원본도, 백문 님 사서인도, 그리고 소망이 계약서도 다 있는 거죠?

백문—그렇다네. 다만 명심하게. 금고를 지키는 건 자물쇠가 아니라 회중시계야. 놈은 금고 앞에서 그 시계를 들고 자네를 맞을 걸세. 그 시계가 째깍이기 시작하면—

연이——흔들리지 않기. 셋째 원칙. 알아요. 내가 왜 이 숨을 쓰는지, 그 답만 붙들면 시계는 저한테 아무것도 못 써요. 열람실에서 배웠어요.

백문—…좋아. 그리고 하나 더. 그 회중시계는 청토끼 것이 아니야. 아까 말했듯, 빌려 온 거지. 진짜 주인은 따로 있네. 놈이 궁지에 몰리면, 어쩌면 그 진짜 주인을 부를지도 몰라. 그때는… 조심하게. 그 여자는, 청토끼와는 격이 다른 존재니까.

연이—…그 여자. 제 태어난 시간을 훔쳐 간 그림자 여인. …백문 님. 저 그 여자, 열람실에서 봤어요. 얼굴은 못 봤지만. …그 여자가 진짜 무서운 건, 자기 탐욕을 슬픔으로 포장한다는 거예요. 남의 걸 다 뺏으면서, 자기가 제일 불쌍한 척. …그 위선이, 나쁜 것보다 더 무서웠어요.

백문—…자네는 벌써 그 여자의 밑바닥까지 읽었군. 그래. 그 여자는 악(惡)이 아니라 상(傷)일세. 상처. 사랑이 상처가 되고, 상처가 저주가 된 존재지. …그러니 만약 그 여자를 마주하거든, 미워하지 말고 읽게. 자네의 그 눈으로. 어쩌면 그게, 그 여자를 멈출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네.

연이—…미워하지 말고 읽기. …어려운 숙제지만, 해 볼게요. 근데 백문 님, 그러려면 먼저 청토끼부터 이겨야 하잖아요. 한 걸음씩. 우선 금고 가서, 마지막 기둥부터 되찾을게요.

네오—…맞아. 그 여자 이야기는 나중이야. 지금 우리가 넘어야 할 건 청토끼와 회중시계. 연이, 우린 이미 한 번 그 앞에서 졌어. 하지만 그때의 우리랑 지금의 우리는 달라. 이번엔, 반드시 이긴다.

백문—…든든한 파수꾼일세. 그래, 한 걸음씩. 우선 청토끼를 이기고 마지막 기둥을 되찾게. 그 여자는 그다음 이야기야. …오늘은 푹 쉬게. 내일 새벽, 반납구로 올려 보내 주겠네.

백문—자네 말일세. 어제 훈련에서 자네 숨을 정면으로 봤네. 금식, 그것도 아주 오래된 금식이야. 한데 이상하단 말이지.

백문—이 도서관엔 세상 모든 숨의 원문이 꽂혀 있는데, 자네 숨은 색인에 없어. 마치 아직 쓰이지 않은 책 같단 말이야. 어디서 본 숨 같은데, 기억이 아니라 예감으로 아는 느낌이랄까.

네오는 오래 침묵했다. 등불 물고기가 두 사람 사이를 세 번 지나갔다.

네오—…사서장. 색인에 없는 책은 어떻게 되지?

백문—둘 중 하나지. 아직 쓰이는 중이거나, 아니면 다른 서고의 책이거나.

네오—…답이 되는군. 양쪽 다.

백문—…파수꾼. 하나만 더 묻겠네. 자네가 차고 있는 그 금빛 힘 — 그건 청토끼의 회중시계와, 같은 시계에서 나온 힘이지? 냄새가 같아. 아주 오래된 시간의 냄새.

네오—…역시 아셨군요. …네. 청토끼의 회중시계도, 제 힘도, 근원은 하나입니다. '그 여자'가 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 청토끼는 그걸 빌려 남의 운명을 고쳐 쓰고, 저는 그 조각을 훔쳐 시간을 거슬렀죠.

백문—…같은 시계에서, 하나는 남의 운명을 고쳐 쓰는 데 쓰이고, 하나는 시간을 거스르는 데 쓰였다. …그럼 자네와 청토끼는, 같은 주인을 둔 셈이군. 그 여자.

네오—…청토끼는 그 여자의 하수인이고, 저는… 그 여자에게서 도망친 자입니다. 그 여자가 벌이려는 일을 막으려고, 시간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어요. 대가로 제 별자리를 태우면서.

백문—…그 여자가 벌이려는 일. 그게 저 아이와 관련이 있나? 어제 연이가 열람실에서, 자기 태어난 시(時)를 훔쳐 간 그림자 여인을 봤다더군. '원래 내 것이어야 했다'고 했다지.

네오—…!! …연이가, 그걸 봤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 그림자 여인이 바로 그 여자예요. 그리고 그 여자가 백 년째 탐내는 것이… 실은 연이 당신과 아주 깊이 얽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직 말할 수 없습니다. 연이가 알면, 흔들릴 테니까요.

백문—…알겠네. 사서는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를 미리 읽지 않아. 다만 파수꾼, 이것만은 기억하게. 자네가 그 여자에게서 저 아이를 지키려 한다면 — 마지막엔 반드시, 자네가 감춘 그 이름을 저 아이에게 말해야 할 순간이 와. 진실을 모르는 채로는, 아무도 제 운명을 되쓸 수 없거든.

네오—…압니다. 그날이 오면, 다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웃을 수 있게 해 주고 싶습니다. 진실은 무겁고, 저 아이의 웃음은 아직 여리니까요.

백문은 더 묻지 않았다. 사서는 대출 기한을 어기는 책을 다그치지 않는다. 돌아올 자리를 비워 둘 뿐이었다. 다만 이 은빛 파수꾼이 짊어진 것이, 자기가 백 년간 짊어진 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 오래 산 여우는 알아보았다.

백문—…파수꾼. 자네도 어깨가 무겁겠군. 나만큼이나. …그러니 우리, 저 아이 하나는 꼭 지키세. 자네는 위에서, 나는 이 아래서. 각자의 자리에서.

네오—…네. 그러죠, 사서장. …고맙습니다. 백 년 만에, 제 짐을 조금 나눠 든 기분입니다.

그날 밤, 연이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내일이면 다시 위로. 다시 청토끼 앞으로. 한 번 졌던 그 자리로.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연이—(…무섭긴 무섭다. 근데 예전이랑은 달라. 그땐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떠밀렸는데, 지금은 알아. 언니, 루나, 백문 님, 소망이. 내가 되찾을 이름들. 그리고 온전해질 나.)

연이는 머리맡의 본필을 가만히 쥐어 봤다. 백문의 백 년이 담긴 붓. 그리고 가슴속 일곱 개의 별. 하나씩 되찾아 온 자기 조각들. 무섭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연이—(…소망이. 백문 님이 백 년을 찾은 아이. 루나 언니가 루나 지키려고 담보 된 거랑, 백문 님이 소망이 지키려고 사서인 잃은 거랑, 똑같아. 이 세계는 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지키려다 다치는 걸까.)

연이—(…그러니까 내가 끊을 거야. 그 고리를. 되찾을 거야. 언니도, 소망이도, 백문 님 사서인도. 사랑이 상처로 끝나지 않게. 이번엔, 사랑이 이기게 만들 거야.)

그렇게 다짐하고 나니, 두려움이 조금 가벼워졌다. 연이는 본필을 꼭 품고, 마침내 눈을 감았다. 도서관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깊어 갔다.

* * *

이튿날 아침. 떠나기 전, 연이는 도서관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며칠 사이 정든 곳이었다. 등불 물고기들이 아쉬운 듯 연이의 어깨에 앉았고, 되살린 책들이 지나가는 연이에게 페이지를 팔랑여 인사했다.

연이는 처음 떨어졌던 책 산도, 첫 수업을 받은 본뜻의 서가도, 자기를 증명한 열람실도 하나씩 눈에 담았다. 무섭게 시작한 곳이었는데, 이제는 집처럼 정겨웠다. 이곳에서 연이는, 값이 아니라 뜻으로 사는 법을 배웠다.

연이—…여기서 참 많이 배웠다. 처음엔 '왜 하필 도서관에 떨어졌지' 했는데, 이제 알겠어. 재성에서 값에 진 내가, 여기서 뜻을 배워야 했던 거야. 그래야 다시 위로 올라가서 이길 수 있으니까.

네오—…이 도서관이 널 부른 거야, 연이. 우연히 떨어진 게 아니라. 네가 배워야 할 걸, 이곳이 알고 있었어. …이제 다 배웠으니, 돌아갈 시간이다.

연이는 열람실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저 안에서 만났던 거울 속 자신, 무대의 모카, 담보가 된 언니, 그리고 그림자 여인. 그 모든 얼굴이 이제 연이의 힘이 되어 있었다. 연이는 문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연이—…고마웠어. 내 지나온 페이지들아. 너희 덕에 나, 왜 싸우는지 알게 됐어. 이제 그 답을 들고, 위로 올라갈게.

연이—…이 도서관, 처음엔 무서운 데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떠나려니까 되게 아쉽다. 등불 물고기들아, 잘 있어. 백문 님 외롭지 않게, 너희가 곁에 있어 줘.

연이는 마지막으로 오염 서가로 갔다. 아직 되살리지 못한 검은 책 몇 권이 남아 있었다. 그중 유난히 오래 앓아 온 얇은 책 하나에, 연이는 본필을 얹었다.

연이—…혹시 네가 소망이일까 봐. 아니어도 괜찮아. 누구든, 네 진짜 이름을 되찾아 줄게.

연이의 청록빛이 번지자, 검은 도장 아래에서 원문이 떠올랐다. 「나는 한때, 누군가의 자랑스러운 아이였다.」 소망이는 아니었지만, 또 한 사람의 눌린 진실이 등불빛을 되찾았다.

백문—…연이. 떠나는 마당까지 남의 진실을 되살리는군. 자네는 정말… 이 도서관이 백 년을 기다린 아이가 맞아. 소망이는, 위에서 자네가 꼭 찾아 주게. 나는 그 아이 얼굴조차 이제 흐릿하지만, 자네라면 알아볼 걸세. 눌린 진실을 알아보는 눈으로.

연이—…네. 꼭 찾을게요. 그리고 백문 님 사서인도. 그때 이 도서관 문 활짝 열고, 다 같이 밖에 나가서 밥 먹어요. 다섯 그릇, 아니 여섯 그릇으로. 소망이 것까지.

백문—…자, 무거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떠나는 제자를 빈속으로 보낼 순 없지. 마지막으로 이 늙은이가 아침을 차렸네. 오늘은 특별히, 등불 물고기 전병에 도서관 정원 열매까지. 배부르게 먹고 가게.

연이—우와, 백문 님 요리! 저 이거 진짜 그리울 거예요. …근데 네오, 오늘은 검식한다고 다 먹으면 안 된다? 나 이거 마지막으로 실컷 먹고 갈 거니까.

네오—…파수꾼의 검식은 동료의 안전을 위한 숭고한 의무야. 다만… 오늘은 양보하지. 마지막이니까. 대신 전병 딱 세 개까지만 검식하겠어.

연이—세 개가 무슨 검식이야! 그냥 먹는 거지! 백문 님, 파수꾼이 또 검식 사기 치려고 해요!

백문—허허허. 많이들 먹게. 백 년 만에 이 도서관 식탁이 이렇게 꽉 찼는데, 남으면 서운하지. …파수꾼, 자네도 사양 말고. 오늘은 검식 열 개까지 허락하네.

네오—…열 개까지요. …백문 님, 통이 크시군요. 그럼 사양 않고. …흠. …이거, 마지막이라 그런가. 유난히 맛있군요.

세 사람은 마지막 아침을 오래 나눠 먹었다. 무거운 이야기 끝의, 따뜻한 식탁이었다. 연이는 이 온기를 오래 기억하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도, 이 아침의 볕을 떠올릴 수 있게.

식사가 끝나자, 백문은 등불 물고기 종이로 곱게 싼 꾸러미 하나를 연이 손에 쥐여 주었다. 안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백문—…전병을 좀 싸 뒀네. 위에서 힘들 때, 하나씩 꺼내 먹게. 배가 든든해야 문장도 또렷해지는 법이야. 그리고… 그 종이 포장, 등불 물고기 모양으로 접었네. 소망이한테 접어 줬던, 그 '안 도망가는 물고기' 모양으로.

연이—…백문 님. 이거… 이 물고기 접기. …저 이거 소망이 만나면 보여 줄게요. '너희 아빠가 나한테도 접어 줬어' 하고. 그럼 소망이가 백문 님 바로 알아볼 거예요.

백문—…그래 주겠나. …그럼 그 물고기가, 백 년을 건너 그 아이한테 닿는 셈이군. 자, 어서 넣어 두게. 눈물 나기 전에. …아, 몰라 몰라. 늙은이가 왜 이리 물러졌는지.

연이—어? 백문 님 그 주문 쓰셨다! '아, 몰라 몰라!' 제가 가르쳐 드린 거! 잘 쓰시네요!

백문—허허. 자네가 남기고 가는 주문일세. 자네 없는 도서관에서, 이 늙은이가 외로울 때마다 외우지. '아, 몰라 몰라' 하고. …그럼 자네가 곁에 있는 것 같겠지.

네오—…연이는 참, 가는 곳마다 뭔가를 남기는군요. 재성엔 되찾은 이름들을, 여기엔 웃음과 주문을. …자, 백문 님.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입니다.

연이—…백문 님. 이 전병 맛, 위에서도 안 잊을게요. 그리고 다 끝나면 꼭 다시 와서, 이 식탁에 여섯 그릇 채울게요. 언니, 루나, 소망이까지 다 데리고.

백문—…여섯 그릇이라. …허허. 그 말을 붙들고, 이 늙은이는 또 얼마든 기다리겠네. 자, 이제 가게. 볕이 좋을 때 떠나야, 어둠 속에서도 그 볕을 기억하는 법이야.

이튿날 새벽. 지상의 문서가 도서관으로 떨어지는 좁은 수직 통로, 반납구 앞에 세 사람이 섰다.

백문—거슬러 오르게. 떨어지는 것들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면 그 길 끝이 놈의 금고 바닥일세. 도서관의 바람이 등을 밀어 줄 거야.

연이—…백문 님. 저 진짜 갈게요. …고마웠어요. 되쓰기도, 본필도, 그리고… 이 며칠 동안 저 진짜 많이 웃었어요. 백 년 만에 이 도서관이 시끌벅적했다고 하셨죠. 저도, 이 세계 와서 여기서 제일 많이 웃었어요.

백문—…나도일세, 연이. 나도야. …자, 어서 가. 늙은이 눈물 보이기 전에. 사서는 손님을 웃으며 배웅하는 법이거든. 잘 가게, 나의 첫 제자.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게.

백문—…가기 전에, 사서의 축문(祝文) 하나를 새겨 주겠네. 이 도서관의 가장 오래된 축복일세. 「이 아이가 읽는 모든 것이 진실을 드러내고, 이 아이가 쓰는 모든 것이 사랑을 지키게 하라.」

백문이 지팡이로 허공에 축문을 쓰자, 청록빛 글자가 연이의 이마에 잠깐 머물다 스며들었다. 사서가 제자에게 주는, 백 년에 한 번의 축복이었다.

연이—…따뜻해요. 이마가. …고마워요, 백문 님. 이 축복, 절대 안 잊을게요. 읽는 건 진실을 드러내고, 쓰는 건 사랑을 지키게. …딱 제가 하고 싶은 거예요.

네오—…백문 님. 저 아이, 잘 데려가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다시 데려오죠. 사서인이랑 소망이 소식이랑, 좋은 것들 잔뜩 들고서요.

백문—…믿네, 파수꾼. 자네 등이라면. …그리고 자네도, 자네 별자리를 꼭 되찾게. 남의 하늘만 지키다, 자네 하늘을 비워 두지 말고. 이 늙은이의, 마지막 참견일세.

네오—…명심하겠습니다. 언젠가, 제 하늘에도 별이 뜬다면. …그날이 오면, 이 도서관에 제일 먼저 알리러 오죠.

연이—자, 그럼 진짜 갈게요! 백문 님, 여섯 그릇 식탁 꼭 준비해 두세요! 우리 금방 돌아올 거니까!

백문이 지팡이를 들어 반납구의 바람을 거꾸로 돌렸다. 떨어지던 문서들이 거슬러 솟구치기 시작했다. 연이와 네오, 두 사람의 발밑에서 청록빛 바람이 소용돌이쳤다.

연이—가자, 네오! 언니 얼굴 찾으러, 내 마지막 기둥 찾으러, 그리고 백문 님 사서인이랑 소망이까지 전부 되찾으러!

백문—연이! 마지막으로 하나만! 저 시계가 아무리 크게 째깍여도, 자네 문장 한 줄이 그보다 크다는 걸 잊지 말게! 자네는 이 도서관의 자랑이야! 가서, 증명하게!

연이—네! 문장 한 줄이 시계보다 크다! 절대 안 잊을게요! 백문 님, 여섯 그릇 준비해 두세요! 저 진짜 금방 돌아올 거예요!

백문—…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이 문지방 안에서, 얼마든지. …잘 가거라, 연이. 그리고 파수꾼. 부디 둘 다, 무사히.

네오—…꽉 잡아, 연이. 위로 올라가면, 바로 청토끼 금고다. 이번엔 지지 않아. 우린 준비가 됐으니까.

두 사람의 몸이 청록빛 바람에 실려 위로, 위로 솟구쳤다. 도서관의 등불 물고기들이 배웅하듯 함께 떠올랐다. 저 아래, 백문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인성의 도서관에서의 배움이 끝나고, 마지막 결전이 기다리는 위를 향해 — 연이와 네오는 날아올랐다.

거슬러 오르는 통로는, 떨어지는 문서들의 폭포였다. 위에서 값에 진 문서들이 끝없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고, 연이와 네오는 그 흐름을 거꾸로 헤치며 올라갔다. 지는 것들의 강을, 거슬러 오르는 두 사람.

연이—…네오, 봐. 이 문서들 전부, 위에서 값에 진 사람들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많이 떨어지고 있어. 백문 님이 백 년을 혼자 감당한 게, 이 폭포였구나.

네오—…그래. 그러니 우리가 청토끼를 이겨야 해. 근원을 막지 않으면, 이 폭포는 영영 안 그쳐. 백문 님 혼자선 못 막아. …잡아, 연이. 위쪽 흐름이 거세진다.

연이는 떨어지는 문서 하나에 손끝을 스쳤다. 순간, 그 문서의 본뜻이 읽혔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값에 졌지만, 마음만은 지지 않은 누군가의 문장. 연이는 그것을 가슴에 새겼다. 위에서, 이런 이들을 구하겠다고.

연이—…기다려요, 여러분. 지금은 지나쳐야 하지만, 제가 저 위에서 근원을 끊을게요. 그럼 더는 아무도 값에 져서 이렇게 떨어지지 않아도 돼요.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요.

네오—…연이, 올라가면 순서를 정하자. 금고 앞엔 청토끼가 회중시계를 들고 있을 거야. 내가 먼저 그 시계의 사슬을 끊어서 시간을 벌게. 그 틈에 네가 금고를 열고, 원본 계약서들을 되쓰는 거야. 네 마지막 기둥 신미부터.

연이—…응. 근데 네오, 무리하지 마. 너 회중시계랑 근원이 같은 힘이라며. 그거 정면으로 부딪히면 너한테도 대가가 오는 거 아니야?

네오—…걱정 마. 사슬을 끊는 정도로는 큰 대가가 안 와. 진짜 대가는… 시간을 되돌릴 때만이야. 그건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에만 쓸 거니까. 오늘은 안 써.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마.

연이—…약속해. 오늘 그 힘 안 쓴다고. 나 너 잃기 싫어. 언니도, 소망이도, 너도. 나 이번엔 아무도 안 잃을 거야. 전부 데리고 돌아갈 거야.

네오—…약속하지. 오늘은 안 써. …그리고 연이, 하나만. 만약 위에서 내가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아도, 조금만 믿어 줘. 다 널 위한 거니까. …언젠가, 다 말할게.

연이—…응. 믿어. 너 지금까지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 없으니까. …자, 다 왔다! 저 위에 빛이 보여! 준비됐지, 네오? 우리 이번엔, 반드시 이긴다!

네오—…그래. 이번엔 이긴다. 도서관에서 배운 모든 걸, 저 시계 앞에서 증명하자. 가자, 연이!

오르는 동안, 연이는 가슴속 일곱 개의 별과 손에 쥔 본필과 이마에 스민 백문의 축복을 하나씩 확인했다. 값에 밀려 떨어졌던 재성의 재판정에서, 이제 뜻을 배워 거슬러 오르는 지금까지. 연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연이—…예전엔 이 폭포에 휩쓸려 떨어지기만 했는데. 이젠 거꾸로 오르네. 무섭지 않아. 나 이제, 흔들리지 않는 문장이 하나 있으니까.

네오—…많이 컸어, 연이. 처음 만났을 때 넌 겁먹은 꽃돼지였는데. 지금은, 지는 것들의 강을 거슬러 오르는 독자야. …백문 님이 왜 그렇게 널 아꼈는지, 알 것 같아.

연이—…다 네 덕분이기도 해, 네오. 네가 늘 앞에서, 이젠 옆에서 지켜 줬으니까. …자, 이제 진짜 위야. 저 위에서 뭐가 기다리든, 우리 같이 마주하자.

통로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청록빛 바람이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힘껏 밀어 올렸다. 지는 것들의 폭포를 다 거슬러 오른 곳 — 그 끝에, 청토끼의 금고 밑바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예언에 없던 반가운 얼굴 하나도.

제23화 · 사서의 오래된 상처 — 끝. 제24화 「원본 계약서」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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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필 안내

『연이의 운명 노벨』은 Code Destiny가 직접 쓰고 그린 창작 소설입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재하는 인물·단체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사주 명리학의 십성, 자미두수의 열두 궁, 숙요 27수라는 실제 전통 체계에서 가져왔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서사에 맞게 각색했으므로, 작품 속 묘사를 그대로 점술 지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 주세요. 각 체계의 실제 해석 규칙은 별도의 기능 가이드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본문은 게시 전 편집자가 문장과 흐름을 다듬습니다. 오탈자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면 문의로 알려 주시면 확인 후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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