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23 · 29 / 73

상관견관

숨겨 온 상처가 드러난다. 왜 말 안 했어. 첫 큰 싸움 끝에 영냥이가 떠난다.

한글 약 2,776자 · 읽는 시간 약 7분

하늘의 틈에서 검은 손이 쏟아져 내렸다. 둥근 유리창이 깨지고, 손들이 비처럼 열람실 안으로 떨어졌다.

모카—비보다 나쁜 거 맞네! 사기꾼, 이럴 땐 사기 좀 쳐 봐!

윤달—수달 씨, 숙녀분 왼쪽 맡아 주세요. 저는 오른쪽을 먹을게요.

윤달이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의 구멍이 소용돌이치며 가장 가까운 검은 손 셋을 빨아들였다. 구멍 가장자리가 손톱만큼 넓어졌다.

연이—윤달, 손! 구멍 커지잖아요!

윤달—지금은 커지는 것보다 숙녀분이 작아지는 게 더 무서워요.

모카가 불씨를 공처럼 던졌다. 검은 손 하나가 불에 데어 움찔 물러났다. 그러나 손들은 연이를 지나쳐 갔다.

모카—어? 얘네 돼지한테 안 오는데?

연이—나 말고 누구한테.

연이는 덩굴을 뻗어 가장 가까운 손 하나를 붙잡았다. 덩굴은 손에 닿자마자 검게 시들었다. 붙잡는 것이 아니라 먹히고 있었다.

연이—내 덩굴을 먹어. 얘네 왜 이렇게 배가 고파.

윤달—굶은 지 오래된 손이에요. 그리고 오늘은 숙녀분보다 더 맛있는 게 보이나 봐요.

손들은 한 방향으로만 몰려갔다. 창가에 선 하얀 고양이에게로.

영냥이—연이야, 엎드려!

영냥이가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앞발에서 금빛 칼날이 솟아 검은 손 여럿을 한꺼번에 베어 냈다. 그러나 베인 손은 둘로 갈라져 다시 달려들었다.

목소리—고양이야. 너는 칼이지. 칼은 칼집에 꽂혀야 한다.

검은 손 하나가 영냥이의 녹슨 왼발을 움켜쥐었다. 영냥이의 무릎이 꺾였다.

영냥이—놔라. 이건 네 것이 아니다.

손은 놓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사이로 검은 실이 뻗어 나와 영냥이의 다리를 칭칭 감기 시작했다. 하얀 털끝이 잿빛으로 변했다.

연이—그 발 놔!

연이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한낮의 해 같은 불길이 앞발에서 쏟아져 나왔다. 丙 자가 글자판에서 붉게 타올랐다.

불길은 검은 손을 태웠다. 그리고 멈추지 않았다. 손을 태운 불이 그대로 손이 쥐고 있던 하얀 앞발까지 덮쳤다.

영냥이—크윽.

검은 손들이 비명처럼 흩어졌다. 하늘의 틈이 천천히 닫혔다. 열람실에는 타는 냄새와 쇠 녹는 냄새만 남았다.

모카—끝났어? 끝난 거지? 돼지, 방금 그거 너야? 축제 섬 해보다 뜨거웠어.

윤달—숙녀분, 불 좀 낮춰 주세요. 책들이 땀을 흘려요.

연이는 자기 앞발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불씨가 손톱 끝에서 타닥거리고 있었다. 연이는 서둘러 앞발을 털었다.

연이—나 이렇게까지 해 본 적 없어. 그냥, 영냥이 발을 잡길래.

그때 창가 쪽에서 낮은 신음이 들렸다.

영냥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왼발을 덮던 망토 자락이 다 타 버려서, 그 아래 숨겨 두었던 것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연이—영냥아.

그을린 자국은 앞발에서 어깨까지 번져 있었다. 그 위를 붉은 녹이 덮고 있었다. 하루 이틀에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연이—이거 언제부터야. 오늘 생긴 거 아니잖아.

영냥이—별것 아니다.

연이—별것 아닌 게 어깨까지 와?

대답보다 먼저 연이의 앞발이 움직였다. 연이는 덩굴을 가늘게 뽑아 영냥이의 앞발에 감기 시작했다. 감을수록 덩굴 끝이 그을음에 닿아 바스러졌다.

영냥이—그만해. 지금은 소용없어.

연이—가만있어. 소용없는지 아닌지는 내가 정해.

윤달—숙녀분. 앉으세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연이—윤달도 알았어요?

윤달—네. 고양이님이 숨 수련 시켜 주시던 날부터요.

연이—모카 너도?

모카—나는 축제 섬에서부터. 재판정에서 네가 처음 소리 지른 날. 고양이 앞발에서 연기 났어.

모카—내가 물어보니까 고양이가 그러더라. 돼지한테 말하면 꼬치에 독 넣는다고.

영냥이—그런 말 안 했어. 꼬치를 다 먹어 버린다고 했지.

모카—그게 더 잔인하거든!

연이—그때부터? 그 많은 날 동안, 다들 나만 빼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카는 꼬리를 내렸고, 윤달은 장갑 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연이—나만 몰랐구나. 나만 신나서 불 내고 다녔구나.

윤달—숙녀분 월간이 丙화예요. 상관이에요.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하고, 틀을 깨게 하는 불.

윤달—그리고 고양이님은 庚금, 정관이에요. 틀이고 규칙이고 이름표예요.

윤달—상관이 정관을 보면 정관이 다쳐요. 상관견관이라고 해요. 숙녀분 불이 커질수록, 고양이님이 녹아요.

[ 丙 상관 → 庚 정관 · 상관견관 ]

글자판의 丙 자가 아직 붉게 달아 있었다. 그 열기가 닿는 庚 자 모서리마다 검은 그을음이 번져 있었다.

연이—그러니까. 내가 한 거야? 재판정에서도, 정오 무대에서도, 지금도?

영냥이—네 잘못은 아니야. 이 명식에선 그렇게 부딪히는 거야.

연이—그런 명식이면 말해 줬어야지!

연이—왜 말 안 했어?

영냥이—말하면 너는 불을 끌 거니까.

연이—당연하지! 내 불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되는데!

영냥이—그래서 말 안 한 거다. 불을 끈 너는 너가 아니다. 노래 못 하는 축제, 맛없는 꼬치. 너도 봤잖아.

연이—그럼 너는? 너는 녹아도 돼?

영냥이—그러려고 네 옆에 있는 거야.

연이—그런 말 하지 마. 그런 말 하는 거, 하나도 멋있지 않아.

영냥이는 입을 다물었다. 연이는 앞발로 눈을 문질렀다. 눈물이 그을음과 섞여 검게 번졌다.

연이—너는 맨날 나중이야. 끝나면 말해 준다며. 이게 끝나면이야? 네 어깨까지 녹이 올라와야 끝이야?

영냥이—미안하다.

연이—미안하다는 말 듣고 싶은 거 아니야!

영냥이—그럼 무슨 말을 듣고 싶지.

연이—몰라! 그냥, 그냥 아프면 아프다고 해. 그게 그렇게 어려워?

열람실이 조용해졌다. 모카는 꼬치 접시를 든 채 굳어 있었고, 윤달은 장갑을 다시 끼는 손을 멈추고 있었다.

영냥이—아프다.

연이—어?

영냥이—아프다. 네가 불을 낼 때마다. 그런데 네가 불을 못 내면, 그게 더 아프다.

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냥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녹슨 앞발이 바닥에 끌렸다.

영냥이—내가 옆에 있으면 너는 작아지고, 네가 커지면 나는 녹는다. 그게 우리 명식이다.

연이—그럼 어떡하라고. 둘 중 하나는 계속 아파야 해?

영냥이—아니. 하나가 비켜 주면 된다.

연이—영냥아.

그 순간 연이의 입에서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불처럼, 막을 틈도 없이.

연이—그럼 비켜! 다치면서 옆에 있지 마! 그런 거 하나도 고맙지 않아!

말이 끝나자마자 연이는 후회했다. 그러나 말은 이미 열람실 바닥에 떨어져 굴러가고 있었다.

영냥이—그래. 그게 맞다.

연이—아니, 그게 아니라.

영냥이는 등을 돌렸다. 하얀 꼬리가 문틈으로 사라졌다. 문은 조용히 닫혔다. 이번에는 큰 소리도 나지 않았다.

[ 年 壬午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辰 ] 7/8

글자판의 庚 자가 꺼졌다. 빈칸이 다시 비었다. 연이의 앞발에 감겨 있던 덩굴이 힘없이 바닥으로 늘어졌다.

연이—내가 비키라고 했어. 진짜로 간 거야.

모카—야. 돼지.

연이—왜.

모카—울지 말고 가서 잡아. 너 원래 그런 애잖아. 말 먼저 하고 뛰는 애.

윤달—고양이님 걸음이면 지금쯤 계단 끝이에요. 녹슨 발로는 빨리 못 가요.

연이—잡아서 뭐라고 해. 내가 옆에 있으면 또 녹을 텐데.

윤달—그건 나중에 같이 풀어요. 명식은 문제지 판결이 아니에요. 풀 방법이 없는 문제는 제가 아직 못 봤어요.

모카—사기꾼 말 처음으로 믿어 본다. 빨리 가!

연이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그리고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동안 연이의 머릿속으로 장면들이 지나갔다. 별 하나를 받고도 고개만 끄덕이던 고양이. 재판정에서 앞을 막아서던 등.

정오 무대가 끝나고 혼자 강가로 가던 뒷모습. 물에 빠진 뒤 이상하게 걷던 왼발. 전부 봤는데, 전부 못 본 척했다.

연이—(나도 알았어. 다들 말 안 한 게 아니라, 내가 안 물어본 거야.)

도서관 밖은 강이었다. 별빛이 흐르는 강 위에 빈 나룻배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연이—영냥아! 영냥아, 내가 잘못 말했어! 돌아와!

목소리가 강물에 떨어져 흘러갔다. 나룻배가 한 번 흔들렸다. 연이는 배 쪽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비어 있었다.

연이—비키라고 해서 진짜 비키는 고양이가 어디 있어. 평소엔 내 말 하나도 안 들으면서.

배 바닥에 하얀 털 한 가닥이 떨어져 있었다. 연이는 그것을 앞발에 감았다. 아직 따뜻했다.

대답은 없었다. 강가 돌 위에 붉은 녹 자국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발자국은 강 하류 쪽으로 이어지다가 안개 속에서 끊겼다.

안개가 짙었다. 연이는 앞발을 들어 올렸다. 불을 조금만 피우면 길이 보일 것 같았다.

손톱 끝에 불씨가 맺혔다. 연이는 그 불씨를 한참 바라보다가, 앞발을 꼭 쥐어 껐다.

연이—이 불 켜면, 너 어딘가에서 또 아프겠지.

연이는 불 없이 안개 속으로 걸었다. 녹 자국을 하나씩 손으로 더듬으며 따라갔다. 차가운 돌에 앞발이 자꾸 미끄러졌다.

넘어질 때마다 앞발에 감은 하얀 털을 먼저 확인했다. 털은 그때마다 조금씩 식어 가고 있었다.

연이—별 하나 준 거 취소할게. 다섯 개 줄게. 그러니까 대답 좀 해.

안개 저편에서 물소리만 대답했다. 발자국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끊긴 발자국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사람 손 모양의 그림자였다.

연이—안 돼.

그림자는 안개 속으로 미끄러져 사라졌다. 녹 냄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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