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24 · 30 / 73

물이 없어서

관인상생에는 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연이의 물은 얼어 있고, 흩어진 틈에 검은 손이 영냥이를 붙잡는다.

한글 약 3,235자 · 읽는 시간 약 8분

새벽 강가에는 물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젖은 돌 위에 분홍 돼지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앞발에는 하얀 털 한 가닥이 감겨 있었다. 밤새 몇 번이나 고쳐 감았는지, 매듭이 세 겹이었다.

모카—찾았다. 여기서 잤냐, 진짜.

연이—모카. 영냥이는?

모카—아직.

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울지는 않았다. 밤새 울 만큼 울어서, 더 나올 것이 없는 얼굴이었다.

윤달—숙녀분, 일단 들어가요. 찬 돌에서 자면 乙목은 뿌리부터 상해요.

연이—들어가서 뭐 해요. 여기 있다가 오면 바로 보게.

모카—들어가서 밥 먹어. 고양이가 와서 네 꼴 보면 나한테 화낼 거야. 그건 내가 싫어.

모카가 연이의 뒷덜미를 물고 끌었다. 연이는 끌려가면서도 자꾸 강 쪽을 돌아보았다.

강물 위로 안개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그 사이로 검은 물결 하나가 소리 없이 지나갔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열람실의 긴 탁자 위에 낯선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주전자, 쇠 숟가락, 화분 하나, 그리고 촛불 하나.

윤달—자, 수업 시작할게요. 오늘 수강료는 숙녀분 생년월일시.

연이—이미 알잖아요.

윤달—알아도 한 번 더 듣고 싶은 게 있어요.

모카—사기꾼, 지금 그럴 때야?

윤달—그럴 때예요. 숙녀분 얼굴에 웃음 하나 붙이는 데 이것보다 싼 방법이 없거든요.

연이는 웃지 않았다. 그래도 고개를 조금 들었다. 윤달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쇠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윤달—이게 고양이님. 庚금이에요. 단단하고, 날이 서 있고, 나무를 벨 수 있어요.

윤달이 숟가락 끝으로 화분의 작은 나무를 툭 건드렸다. 잎사귀 하나가 떨어졌다.

연이—하지 마요.

윤달—네. 그래서 고양이님은 숙녀분 옆에 있으면 늘 조심했어요. 金克木. 금은 나무를 이겨요.

연이—그럼 처음부터 안 맞는 거잖아요. 영냥이랑 나.

윤달—아뇨. 여기서부터가 진짜 수업이에요.

윤달은 주전자를 들어 숟가락 위로 물을 부었다. 물은 숟가락을 타고 흘러 화분 흙으로 스며들었다.

윤달—금은 물을 낳아요. 물은 나무를 키워요. 사이에 물이 있으면, 금은 나무를 베지 않고 나무를 먹여요.

[ 庚 관성 → 壬 인성 → 乙 일간 · 관인상생 ]

윤달—관인상생이라고 해요. 관은 인을 낳고, 인은 나를 낳는다. 고양이님이 칼이 아니라 우물이 되는 길이에요.

화분의 나무가 물을 마시고 잎을 조금 펼쳤다. 연이는 그 잎사귀를 한참 바라보았다.

연이—그럼, 영냥이가 안 아파도 돼요?

윤달—물만 있으면요.

모카—그리고 불은? 돼지 불 때문에 고양이 녹는다며.

윤달—그것도 물이에요.

윤달이 촛불 위에 손바닥을 가볍게 덮었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다만 흔들림이 멎고, 크기가 알맞게 줄었다.

윤달—인은 상관을 다스려요. 상관패인. 불을 끄는 게 아니라, 불에 길을 내 주는 거예요.

연이—(불을 안 꺼도 된다. 끄지 않아도, 영냥이가 안 다친다.)

연이의 눈에 처음으로 빛이 돌아왔다. 연이는 탁자를 짚고 벌떡 일어섰다.

연이—물. 물이면 돼. 물 어디 있어요? 강에 잔뜩 있잖아요!

모카—그 물은 아닐걸.

연이—왜!

모카—그 물이면 내가 벌써 고양이를 강에 담갔지.

윤달—수달 씨 말이 맞아요. 강물은 그냥 물이고, 필요한 건 숙녀분 명식 안의 물이에요.

윤달—숙녀분 年간. 壬수. 그게 숙녀분 인성이에요.

세 사람은 기억 금고로 내려갔다. 금고 한가운데에 연이의 글자판이 떠 있었다. 여덟 칸 가운데 일곱 칸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 年 壬午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辰 ] 7/8

맨 앞의 壬 자는 글자라기보다 얼음덩어리 같았다. 검게 얼어서, 안쪽에서 무언가가 갇힌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연이—이게 왜 이래요. 도서관에서 찾았을 때부터 이랬어요.

윤달—호랑이한테서 되찾은 글자니까요. 그 호랑이 물은 차고 검어요. 숙녀분 물을 얼려 버린 거예요.

모카—그 줄무늬 진짜. 볼 때마다 뭘 하나씩 망가뜨려 놓고 가.

연이—그럼 녹이면 되잖아.

윤달—숙녀분, 잠깐만요.

연이는 이미 앞발을 들고 있었다. 손톱 끝에 丙화의 불씨가 맺혔다.

연이—얼음은 불로 녹이는 거야. 나 불은 많아.

윤달—그게 문제예요!

불길이 壬 자를 감쌌다. 얼음 표면에서 하얀 김이 솟았다. 그리고 연이의 가슴 안쪽이 쩍 갈라지는 것처럼 아팠다.

연이—아, 아파!

연이는 불을 거두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앞발을 더 앞으로 밀었다. 얼음에 가는 금이 하나 갔다.

갈라진 틈으로 다른 장면이 쏟아져 들어왔다. 비가 오고 있었다. 정류장 지붕 끝에서 빗물이 줄처럼 떨어졌다.

누군가 정류장 구석에 혼자 서 있었다. 우산이 없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우산 하나가 반쯤 기울었다. 우산을 든 손은 작고, 낯이 익었다. 연이 자신의 손이었다.

빗소리 너머로 웃음소리가 났다. 누구의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따뜻하고, 조금 쑥스러운 웃음이었다.

장면이 끊겼다. 연이는 불을 놓쳤다. 김이 가라앉은 자리에, 壬 자는 그대로 얼어 있었다. 오히려 금 간 자리가 더 검어졌다.

연이—방금 그거 뭐야. 정류장. 비. 나 저기 간 적 없어.

윤달—얼음 안에 갇힌 기억이에요. 숙녀분 것인데, 숙녀분이 모르는 기억.

모카—돼지, 너 코피 나.

연이는 코를 문질렀다. 앞발에 붉은 것이 묻어 나왔다. 가슴 안쪽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윤달—불로 얼음을 녹이면 물은 끓어서 날아가요. 녹은 물이 숙녀분을 먹이기 전에 다 타 버려요.

연이—그럼 어떻게 녹여요. 불 말고 나한테 뭐가 있어요.

윤달—그건 저도 아직 몰라요. 얼음은 원래, 얼린 사람이 풀어야 제일 쉽게 풀리거든요.

모카—그 호랑이가 풀어 줄 리가 없잖아.

윤달—그러니까요.

금고 안이 조용해졌다. 얼어붙은 壬 자 안에서, 비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났다.

오후가 되자 연이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열람실 안을 빙빙 돌다가 탁자 모서리에 세 번 부딪쳤다.

연이—나눠서 찾자. 영냥이도, 물도. 앉아만 있으면 미칠 것 같아.

윤달—좋아요. 저는 아래층 서가요. 물에 관한 책이 거기 많아요.

모카—나는 시장. 고양이 같은 거 지나갔는지 물어볼게. 하얗고 동그랗고 무뚝뚝한 거. 모자 쓴 거.

연이—나는 강. 거기서 마지막으로 봤으니까.

윤달—숙녀분. 해 지기 전에 여기로 다시 모여요. 오늘 하늘이 이상해요.

윤달은 창밖을 가리켰다. 어제 금이 갔던 하늘이 오늘은 이상하게 어두웠다. 해 한쪽 귀퉁이가 무언가에 베어 먹힌 것처럼 보였다.

모카—해가 왜 저래. 축제 섬 때랑 똑같은데.

윤달—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혼자 오래 있지 마요.

같은 시각, 강 하류. 안개가 가장 짙은 곳에 하얀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영냥이는 녹슨 앞발을 강물에 담그고 있었다. 물이 닿은 자리의 녹이 아주 조금씩 풀려 흘러갔다. 아주 조금씩.

영냥이—금은 물을 낳는다. 물이 있으면, 칼이 아니어도 된다.

윤달이 오전에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다. 영냥이는 그것을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었다. 그냥 알고 있었다.

영냥이—그 애 물은 아직 얼어 있어. 금인 내가 직접 녹일 수는 없어.

영냥이는 강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보랏빛 눈이 잠깐 금빛으로 일렁였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영냥이—비키라고 했지.

영냥이는 그 말을 곱씹듯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영냥이—그래도 불은 남아 있었네. 다행이야.

강물이 검게 뒤집혔다. 물속에서 검은 손 수십 개가 한꺼번에 솟구쳤다. 영냥이의 앞발이 담겨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목소리—물이 그리웠나, 고양이야. 물은 여기 있다. 네가 가장 약할 때, 가장 가까이.

영냥이—너구나. 도서관 하늘에 금을 낸 게.

목소리—금은 네가 낸 거다. 그 애 옆에 있겠다고, 남의 명식에 칼을 꽂아 넣었지.

영냥이가 일어섰다. 녹슨 앞발에서 금빛 칼날이 솟았다. 그러나 칼날은 어제보다 반쯤 짧았다. 날 끝에 녹이 번져 있었다.

칼날이 검은 손 셋을 베었다. 손은 여섯이 되어 돌아왔다. 여섯은 열둘이 되었다.

목소리—너는 빌린 칸이다. 빌린 것은 돌려줘야지. 그 애한테서 빠져나와, 내게 꽂혀라.

영냥이—싫어. 내 담당은 그 애 하나야.

검은 손 하나가 영냥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또 하나가 왼발을, 또 하나가 꼬리를 잡았다. 작은 몸이 물 쪽으로 끌려갔다.

영냥이—연이야.

영냥이는 그 이름을 부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부르면 그 애가 올 것이다. 오면, 그 애가 이 손들 앞에 서게 된다.

하얀 고양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검은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물결이 한 번 크게 일었다가, 거짓말처럼 잔잔해졌다.

강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안개가 다시 내려앉았다.

해 질 녘, 모카가 시장에서 돌아오다 강가로 방향을 틀었다. 시장에서 들은 말 때문이었다. 하얗고 동그란 게 강 하류로 내려가더라는 말.

모카—고양이? 야, 고객센터. 있으면 대답해. 돼지가 밤새 울었다고 고자질하러 왔어.

대답이 없었다. 모카는 코를 킁킁거리며 젖은 돌을 하나씩 밟아 나갔다. 쇠 녹는 냄새와, 처음 맡아 보는 차가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물가의 진흙 위에 커다란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사람 손보다 훨씬 컸고, 손가락이 너무 길었다. 그 손자국 한가운데에 하얀 털 한 가닥이 박혀 있었다.

모카—이거.

모카는 털을 집어 들었다. 영냥이의 털이었다. 연이가 앞발에 감고 다니는 것과 똑같은 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차가웠다. 강물보다 차가웠다.

연이—모카! 너도 여기 왔어? 나 하류 끝까지 갔다 왔는데 아무것도.

연이는 말을 멈추었다. 모카의 발에 들린 하얀 털을 보았다. 그 아래 진흙 위의 커다란 손자국을 보았다.

연이—그거 어디서 났어.

모카—돼지. 앉아. 일단 앉아서 들어.

연이—어디서 났냐고!

윤달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장갑을 벗은 손바닥의 구멍이 저 혼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무언가 큰 것이 가까이 왔다 갔다는 듯이.

윤달—늦었네요. 이 손, 방금까지 여기 있었어요. 아주 많이.

[ 時干 庚 · 빌린 칸 · 연결 끊김 ]

연이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무도 못 들었다. 연이만 들었다.

연이—영냥이가 잡혀갔어.

하늘의 해가 마지막 귀퉁이까지 먹혀 들어갔다. 둥근 검은 원 하나가 강 위에 떴다. 그 둘레로 붉은 빛이 고리처럼 타올랐다.

모카—해가. 해가 없어졌어.

윤달—일식이에요. 이제야 몸을 드러내네요.

목소리—고양이는 잘 받았다, 꼬마 돼지. 칼집이 비어 있어서 마침 쓸 데가 있었지.

연이—돌려줘. 영냥이 돌려줘!

목소리—돌려주마. 대신, 네가 오너라. 빈 그릇이 되어서.

검은 원이 천천히 깜빡였다. 눈꺼풀처럼. 그리고 강 위의 모든 그림자가 연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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