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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운명 노벨5부 · 계약의 끝과 귀환

EP.25 · 26 / 44

재성의 발톱

재성의 발톱. 가진 것을 지키려는 힘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본다.

한글 약 10,619자 · 읽는 시간 약 25분

금고 서고가 전장으로 바뀌는 데는 숨 세 번이면 충분했다. 금화 등불이 사냥의 빛으로 붉어지고, 서류 산맥의 그림자마다 검은 손이 돋아났다.

연이—…네오, 루나. 우리 계획대로. 나는 원본 지키고, 네오는 앞에서 길 열고, 루나는—

루나—…나, 나는… 무서워서 다리가. …미, 미안. 나 아직.

연이—…괜찮아, 루나. 무서우면 처음엔 숨어 있어도 돼. 대신 준비만 해 둬. 진짜 위험한 순간이 오면, 그때 네 물이 필요할 거야. 억지로 안 해도 돼.

청토끼—지하에서 뭘 배워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수업료는 꽤 비쌉니다! 그 원본들, 우리 회장님 자산이거든요. 손 하나 까딱하면, 세트로 회수해 드리죠!

검은 손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루나가 반사적으로 서류 산맥 뒤로 몸을 숨겼고, 연이와 네오가 앞으로 나섰다. 오랜 습관이었다. 위험하면 숨는다. 배달원이 살아남는 법.

네오—단금.

연이—덩굴 결박!

백금의 참격이 손들의 물결을 갈랐고, 청록의 덩굴이 갈라진 틈을 묶었다. 도서관에 다녀오기 전과는 숨의 깊이부터 달랐다.

연이는 문득 깨달았다. 며칠 전, 바로 이 자리 위의 재판정에서는 청토끼의 저울 앞에 숨도 못 쉬고 주저앉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검은 손의 파도 한복판에서도 심장이 고르게 뛰고 있었다. 호흡이 흔들리지 않았다.

연이—…이상하다. 하나도 안 무서워. 예전엔 저 검은 손만 봐도 다리가 풀렸는데. …백문 님 말이 맞았어. 왜 싸우는지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더니. 진짜네.

네오—…네가 그만큼 자란 거야, 연이. 이 자리, 네가 처음 진 자리야. 근데 지금 넌 여기서 반격하고 있어. …같은 곳에서 지고, 같은 곳에서 이기는 거. 이게 성장이지.

연이—…응. 이번엔 안 져. 이 자리에서, 우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청토끼한테 똑똑히 보여 줄 거야. 자, 네오. 도서관에서 벼린 거, 지금부터 전부!

쇠가 길을 열면 나무가 뒤를 묶었다. 백문의 마당에서 수없이 맞춰 본 호흡이었다. 네오의 참격이 검은 손을 가르는 순간, 그 틈으로 연이의 덩굴이 정확히 파고들어 원문을 끌어올렸다. 완벽한 합이었다.

청토끼—…호오. 지난번 재판정에선 제 저울 앞에서 벌벌 떨더니. 지하 도서관에서 뭘 좀 배워 오셨나 봐요? 촌스러운 나무 뿌리 장난 말입니다.

연이—…촌스럽다고? 이 뿌리가 방금 네 검은 손 밑에서 원래 문장을 끌어올렸어. 「이 손은 원래 누군가에게 빵을 건네던 손이었다.」 …네가 오염으로 덮은 손도, 원래는 다 착한 손이었어.

연이가 되읽은 검은 손 하나가, 순간 사람의 손으로 되돌아가 스르르 흩어졌다. 청토끼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기 무기가, 적의 손에서 무력화되고 있었다.

네오—…연이, 잘한다! 이 손들은 청토끼가 사람 마음을 오염시켜 만든 거야. 네가 원래 마음을 읽으면, 무기가 아니라 사람으로 돌아가! 계속 읽어!

연이—됐어! 네오, 우리 수련한 대로야! 네가 열고 내가 묶고! 이대로 가면—

하지만 청토끼의 서고는 넓었고, 검은 손은 끝없이 솟았다. 하나를 베면 둘이 솟고, 둘을 묶으면 넷이 밀려왔다. 두 사람의 등이 점점 붙었다. 포위가 좁혀지고 있었다.

루나—(…연이랑 고양이 아저씨가 밀리고 있어. 검은 손이 너무 많아. …나… 나는 숨어 있기만 하면 돼? 또? 재판정 때처럼, 또 보고만 있을 거야?)

루나는 산맥 뒤에서 떨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이번엔, 그 떨림 아래에서 무언가 다른 것이 끓어올랐다. 연이가 아래에서 배워 온 말. '넌 겁이 많은 게 아니라, 아직 네 힘을 모르는 것뿐이야.'

루나—(…아니. 이번엔 안 숨어. 연이가 그랬어. 나도 싸울 수 있다고. 나 안에 물이 있다고. …언니를 위해서. 연이를 위해서. 나, 이번엔 안 도망쳐!)

루나가 산맥 뒤에서 뛰쳐나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겁먹은 배달 토끼가, 처음으로 도망 대신 맞섬을 택한 순간이었다.

루나—…저리 가! 연이 건드리지 마! 이 더러운 손들아!

루나의 두 손에서, 맑은 물줄기가 터져 나왔다. 서툴고 가늘었지만, 그건 분명 정화의 물이었다. 물줄기가 검은 손에 닿자, 오염된 손들이 지지직 씻겨 내리며 힘을 잃었다.

연이—루나?! 너 물을! 진짜 물을 썼어! 봤지, 네오?! 루나가 물을 썼어!

네오—…각성했군. 진심이 극에 달하니 힘이 깨어난 거야. …루나! 잘했어! 네 물은 오염을 씻는다! 검은 손은 청토끼의 오염이니, 네 물이 천적이야!

루나—…나, 나 진짜 했어! 검은 손이 내 물에 녹아! …히히, 나 이제 짐짝 아니야! 나도 싸운다!

쇠와 나무에, 물이 더해졌다. 네오가 길을 열고, 연이가 진실을 세우고, 루나가 오염을 씻었다. 세 갈래의 힘이 처음으로 하나로 맞물리자, 밀려오던 검은 손의 파도가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네오—…좋아! 이 진용이면 검은 손은 막을 수 있어! 루나, 왼쪽! 오염이 짙어지는 쪽을 씻어! 연이, 오른쪽 원본 지켜! 내가 가운데 뚫는다!

루나—응! 왼쪽! …저리 가! 씻어 버릴 거야!

루나의 물이 왼쪽 파도를 씻어 내고, 연이의 덩굴이 오른쪽 원본을 감싸 지켰다. 네오의 참격이 정면을 갈랐다. 백문의 마당에서 다진 호흡이, 실전에서 빛을 냈다. 잠깐, 아주 잠깐, 세 사람이 우위를 점했다.

연이—…되고 있어! 우리 진짜 할 수 있어! 이대로 청토끼까지—

청토끼—…제법이네요. 호흡이 아주 잘 맞아요. 하지만 말입니다, 고객님들. 여긴 제 서고예요. 검은 손이 아무리 씻겨도, 이 서고가 있는 한 무한히 다시 돋아나죠. 당신들은 지치지만, 저는 안 지쳐요.

청토끼의 말대로였다. 씻어 낸 검은 손자리에서, 다시 두 배의 손이 돋아났다. 서고 자체가 청토끼의 힘의 원천이었다. 세 사람의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물량 앞에서, 진용의 우위가 서서히 깎여 나갔다.

연이—…맞아. 이 서고가 놈의 힘줄이야. 검은 손을 아무리 막아도 끝이 없어. …근본을 쳐야 해. 이 서고를, 놈의 것에서 우리 것으로 되쓰지 않으면.

네오—…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해. 이 산맥 전체를 되쓰는 건, 지금 이 난전에선 불가능해. …버티자. 방법을 찾을 때까지.

청토끼—…배달 토끼까지 물장난을 배워 왔군요. 아주 성가신 조합이에요. 쇠, 나무, 물이라. …하지만 잊으셨나요? 이 서고의 주인은 접니다. 그리고 저에겐, 시계가 있죠.

청토끼—…호오. 글자에 뿌리가 생겼네요. 어디서 그런 촌스러운 공부를 하셨답니까.

청토끼가 회중시계를 꺼냈다. 딸깍, 두 번째 고쳐 쓰기였다.

「본 서고의 침입자는 서고의 자산으로 한다.」 금빛 조항이 공중에 쓰이며, 연이의 덩굴에 다시 값이 매겨지기 시작했다.

연이—한 번 통한 수가 두 번은 안 통하지!

연이—뿌리내림!

덩굴이 조항 밑으로 뿌리를 박았다. 덧쓰인 금빛 아래에서 원래 문장이 끌려 올라왔다. 「이 서고의 종이는 전부 누군가의 마음이다.」

금빛 조항이 제 무게를 못 이기고 바스러졌다. 청토끼의 귀가 처음으로 뒤로 꺾였다.

연이—…봤지? 네 시계는 덧쓸 뿐이야. 근데 나는 그 밑의 원래 문장을 끌어올려. 사본은 원본을 못 이겨. 백문 님이 백 년 전에 알아낸 그 이치, 오늘 네가 몸으로 배우게 될 거야.

청토끼—…건방진! 그럼 아예 너를 고쳐 쓰지! 「이 침입자는 겁에 질려 도망친다!」

청토끼의 회중시계가 이번엔 연이 자신에게 조항을 덧썼다. 재판정에서 연이를 숨도 못 쉬게 만들었던, 바로 그 수법. 금빛 글자가 연이의 온몸을 감쌌다. 「너는 겁에 질렸다. 너는 도망친다.」

예전의 연이라면, 그 순간 정말로 겁에 질려 굳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연이는 눈을 감고, 열람실에서 새긴 자기 문장을 떠올렸다. 흔들림 없는, 자기만의 한 줄을.

연이—…안 통해. 내가 왜 이걸 쓰는지 아는 한, 네 거짓 조항은 내 숨에 못 써져. …겁먹지 않아. 도망치지 않아. 이게 내 문장이니까.

연이의 몸을 감쌌던 금빛 조항이, 청록빛 숨에 닿아 스르르 흘러내렸다. '왜 싸우는가'에 답한 자의 숨은, 회중시계로도 덧쓸 수 없었다. 셋째 원칙이, 실전에서 증명된 순간이었다.

청토끼—…뭐? 왜 안 써져. 왜 이 꽃돼지한테는 시계가 안 통해! 재판정에선 그렇게 벌벌 떨더니!

연이—…그땐 내가 왜 싸우는지 몰랐으니까. 지금은 알아. 그래서 안 흔들려. 네 시계는 흔들리는 마음만 덧쓸 수 있어. 안 흔들리는 숨은, 네가 백 날 째깍여도 못 건드려.

청토끼—…감히. 감히 내 장부에 뿌리를 박아? 감히 내 시계를 무력화해?

청토끼의 정중함이 무너지자 그 밑에 있던 게 드러났다. 굶주림이었다. 금화보다 오래된, 인정받고 싶다는 굶주림.

연이—…읽혀. 저 굶주림. 청토끼 너, 원래는 인정받고 싶었던 거구나. 근데 아무도 널 값어치 있게 안 봐 주니까, 남의 값을 뺏어서 채우려는 거야. 텅 빈 걸, 남의 걸로 메우려고.

청토끼—…닥쳐! 그 눈으로 나를 읽지 마! 그 재수 없는 눈, 백문 그 여우랑 똑같아! 다들 그 잘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지! …그래서 내가 다 뺏은 거야! 나를 무시한 세상의 값을, 전부!

청토끼가 폭주하는 사이, 연이의 손끝은 그 광기 밑바닥까지 읽어 내렸다. 그리고 거기서, 아주 오래된 상처 하나를 보았다. 값이 하나도 없던, 버려진 어린 토끼 한 마리를.

연이—…너, 원래 값이 하나도 없던 애였구나. 아무도 안 사 가는, 버려진 토끼. 그래서 '값'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값이 없으면 버려진다는 걸, 어릴 때 몸으로 배워서.

청토끼—…그만! 그만 읽어! …그래, 맞아! 나는 값이 없어서 버려졌어! 아무도 나를 안 원했어! 그래서 결심했지. 세상의 모든 값을 내가 쥐겠다고. 그럼 아무도 나를 못 버릴 테니까! …근데 그게 뭐가 잘못이야! 살아남으려고 한 건데!

연이—…살아남으려던 건 잘못 아니야. 근데 너, 방법이 틀렸어. 넌 값을 쌓아서 안 버려지려 했지만, 정작 네 안은 백 년째 텅 비었잖아. 값으로는 그 구멍을 못 메워. …너한테 필요했던 건 값이 아니라, 널 값없이도 봐 줄 누군가였어.

청토끼—…시끄러워! 동정 따위 필요 없어! 나는 이제 이 섬에서 제일 부자야! 아무도 나를 못 버려! 그거면 됐어! …그 잘난 이해심, 너나 실컷 가져! 나는 값으로 살 거야, 죽을 때까지!

네오—…연이, 저 자를 불쌍히 여기는 건 좋지만, 방심하지 마. 저 상처가 저 자를 괴물로 만들었어. 이해하는 것과 막는 건 별개야. …백문 님이 그러셨지. 미워하기 전에 읽되, 읽었다고 봐주진 말라고.

연이—…알아. 이해는 하지만, 멈추게는 해야지. 이대로 두면 저 애는 더 많은 사람을 값으로 짓누를 테니까. …청토끼, 네 상처는 안됐어. 근데 그 상처로 남을 아프게 하는 건, 여기서 끝이야.

연이의 본뜻 읽기가, 청토끼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다. 놈은 이성을 잃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주한 짐승은, 가장 약한 먹잇감부터 노렸다.

청토끼—…그럼 저 물장난 치는 배달 토끼부터! 저 애 언니도 담보로 잡았으니, 저 애도 세트로 회수해 주지!

청토끼의 발톱이 방향을 틀어, 산맥 앞에 나선 루나를 노렸다. 아직 물의 힘이 서툰 루나는, 그 속도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루나—…악!

연이—루나!!

연이가 몸을 날렸다. 짧은 다리로, 있는 힘껏. 그리고 청록빛 덩굴을 뻗어 루나를 감싸 안으며, 발톱 앞을 대신 막아섰다. 등에 발톱이 스치며 붉은 자국이 그였다.

연이—…괜찮아, 루나? 다친 데 없어? …다행이다. 늦지 않아서.

루나—…연이! 너 등! 나 때문에 너가! 왜 나 대신—

연이—…내가 지킨다고 했잖아. 네가 날 숨겨 준 것처럼, 이번엔 내가.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 무사하면 됐어.

청토끼—…이런, 이런. 남 대신 몸을 던지다니. 그 다정함, 참 아름답네요. 근데 아세요? 그 다정함이 당신을 죽일 겁니다. 값의 세계에선, 남 챙기는 자가 제일 먼저 회수당하거든요.

연이—…그럼 나 제일 먼저 회수해 봐. 대신, 그 전에 이 산맥 전부를 되쓸 거야. 네가 나 하나 회수하는 사이에, 나는 백 년 치 진심을 되살릴 거고. …누가 더 남는 장사인지, 곧 알게 될걸.

연이의 대꾸에 청토끼가 잠깐 말문이 막혔다. 값으로 위협했는데, 그 위협조차 뜻으로 되받아친 것이다. 놈이 백 년간 만난 어떤 상대와도 다른, 이상한 아이였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루나—…연이 너 진짜 겁도 없다. 청토끼한테 그렇게 대드는 거. …근데 그게 너무 멋있어. 나도 너처럼 될래.

연이—…겁 없는 거 아니야, 루나. 겁나. 근데 겁난다고 안 하면, 아무것도 안 바뀌잖아. 겁나도 하는 거. 그게 용기래. 백문 님이 그랬어.

루나—…겁나도 하는 거. …그거 나도 방금 했어! 무서웠는데 물 썼잖아! 그럼 나도 용기 낸 거네! 헤헤.

네오—…둘 다 용기 냈어. 이제 그 용기, 이 싸움 끝까지 가져가자. …온다, 청토끼의 다음 수가. 집중해.

루나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자기 대신 다친 연이. 자기를 숨겨 주기만 하던 그 애가, 이제 자기를 위해 발톱 앞에 서 주었다. 그 순간, 루나 안의 물이 — 슬픔이 아니라 분노로, 처음으로 크게 요동쳤다.

루나—…연이 다치게 하지 마!! 너 같은 거! 사람 마음 값으로 팔아먹는 너 같은 거!!

루나의 두 손에서,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센 물줄기가 폭발하듯 뿜어졌다. 분노와 사랑이 담긴 정화의 물이, 청토끼의 발톱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오염된 발톱이 그 맑은 물에 닿아, 지지직 소리를 내며 절반이 씻겨 내렸다.

그것은 루나가 처음으로, 도망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낸 힘이었다. 겁 많던 배달 토끼의 눈에, 처음으로 전사의 빛이 어렸다. 재성에서 나고 자라 늘 값에 쫓기던 아이가, 마침내 자기 안의 맑은 물을 깨운 것이다.

루나—…연이 대신 내가 막을 거야! 나도 이제 지킬 수 있어! 숨어 있기만 하던 나 아니야! …언니가 나 지켰던 것처럼, 나도 소중한 사람들 지킬 거야!

네오—…훌륭해, 루나. 그 물, 진짜 무기가 됐어. …연이가 아래서 배운 걸, 넌 위에서 몸으로 깨우는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마음이, 힘이 되는 거야.

청토끼—…뭐?! 내 발톱이! 저 배달 토끼의 물이, 내 오염을 씻어 내?!

루나의 물이 청토끼의 발톱에 스미자, 검게 물들었던 발톱이 제 빛을 잃고 주춤했다. 진심이 담긴 물에는, 더러운 것을 씻어 내는 힘이 있는 모양이었다.

연이—루나! 너 방금 청토끼 발톱을 씻었어! 네 물이 저 오염을 이겨! …봤지? 넌 짐짝이 아니야. 넌 이 싸움의 열쇠야!

루나—…나, 나 진짜 도움이 되는구나! 좋아! 연이, 네오! 나 계속할게! 검은 손이든 발톱이든, 오염된 거면 다 씻어 버릴게!

네오—…루나, 나랑 합을 맞추자! 내가 발톱을 쳐낼 테니, 넌 그 뒤를 씻어! 두 번 못 쓰게! 연이는 그 틈에 원본을 되쓰고!

네오의 참격이 발톱을 쳐내고, 그 자리를 루나의 물이 씻고, 연이의 덩굴이 원본을 되살렸다. 쇠-물-나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렸다. 며칠 전 재판정에서 무력하게 지던 세 사람이, 이제 청토끼를 상대로 반격하고 있었다.

연이—…돼! 우리 합이 맞아! 청토끼, 봤어? 이게 우리야! 값이 아니라 뜻으로 뭉친 우리라고!

루나—히히! 나 완전 물 잘 쓰지! 배달 토끼 인생 삼 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연이, 우리 진짜 팀 같지 않아?

네오—…팀 맞아. 쇠, 나무, 물. 백문 님이 봤으면 흐뭇해했을 진용이야. …다만 방심은 금물이야. 청토끼는 아직 반도 안 꺼냈어. 저 여유로운 얼굴이, 그 증거고.

연이—…맞아. 너무 술술 풀려. 청토끼가 우릴 갖고 놀면서, 진짜 힘은 숨기고 있는 것 같아. …긴장 놓지 말자. 이제 시작일 뿐이야.

연이의 예감은 옳았다. 청토끼는 세 사람의 성장을 지켜보며,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었다. 잠깐의 우세는, 놈이 허락한 우세일 뿐이었다. 진짜 사냥은, 이제부터였다.

청토끼—…이 조무래기들이! 잠깐 합이 맞는다고 이긴 줄 아나 본데. …좋아요. 그럼 진심으로 상대해 드리죠. 이 서고 전부를 걸고!

청토끼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여유롭던 사냥꾼이, 처음으로 진짜 위협을 느낀 얼굴이었다. 세 사람의 성장이, 백 년 묵은 포식자를 긴장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놈에겐 아직, 서고라는 무한한 밑천이 있었다.

하지만 청토끼는 물러서지 않았다. 씻긴 발톱을 재성의 탁한 기운으로 다시 채우며, 놈의 손톱이 금빛으로 길어졌다. 재성의 탁한 기운이 발톱이 되어 서류 산맥을 통째로 후려쳤다.

종이 폭풍이 일어 시야가 하얗게 덮였다. 그 흰 폭풍 너머에서 발톱이 연이를 노렸다.

챙. 소리보다 빛이 먼저였다.

네오가 발톱을 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은빛 갈기 사이로 발톱이 파고들어, 붉은 피가 번졌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연이 앞을 온몸으로 막아섰다. 그리고 그 갈기가 금빛으로, 타오르듯 일렁이고 있었다.

연이—네오?! 다쳤어! 그리고 갈기가 왜 금빛으로— 안 돼, 그거 쓰지 마! 너 오늘 그 힘 안 쓴다고 약속했잖아!

네오—(…안다. 안 써. …하지만 이 아이가 위험하면, 나도 모르게 힘이 새어 나와. 저 아이를 지키려는 본능이, 봉인보다 강해.)

금빛 일렁임이 네오의 온몸으로 번지려 했다. 그 순간, 아주 멀리서 — 시간의 저편에서, 누군가 서늘하게 고개를 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여자'가 그 빛을 알아채려는 순간이었다.

네오—(…아직이야. 이 힘을 쓰면, 시간이 나를 알아본다. 그 여자가 나를 찾아내면, 연이가 위험해져. …참아라. 참아. 이 아이를 위해서.)

네오는 금빛을 이를 악물고 몸 안으로 눌러 삼켰다. 마치 보여서는 안 될 것을 숨기듯이. 갈기의 빛이 사그라들자, 시간 저편의 기척도 다시 잠들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네오의 몸은 청토끼의 발톱에 그대로 노출됐다.

연이—네오! 너 왜 힘을 안 써! 그 발톱 다 맞으면서! …나 지키려고 그러는 거지. 근데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거, 나 그거 더 싫어!

연이는 그 순간, 손끝으로 네오의 마음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읽지 말라던 백문의 말이 떠올랐지만, 상처투성이가 된 네오의 등이 자꾸 마음에 밟혔다. 그리고 아주 잠깐, 연이는 그 마음의 밑바닥을 보고 말았다.

연이—…네오. 너, 저 금빛 힘을 쓰면 '그 여자'가 널 찾아낸다며. 그럼 네가 위험해지고. 근데 너, 그 힘을 쓰는 순간이 오면… 그게 나를 위해서 쓰는 순간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나 지키려다, 너 자신을 잃을 각오를 하고 있어.

네오—…읽지 마, 연이. 그건… 아직 네가 몰라도 되는 거야.

연이—…어떻게 몰라. 네가 나 지키려고, 별자리도 태우고, 이제 목숨까지 걸잖아. …네오, 나 그거 싫어. 나 하나 지키자고 네가 사라지는 거. 그런 승리는 필요 없어. 우리 다 같이 살아야 이기는 거야.

네오—…연이. …나는 이미 한 번 모든 걸 잃은 사람이야. 별자리도, 돌아갈 곳도, 이름도. 근데 이 여정에서, 너를 만나서… 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게 생겼어. 그러니 이건 희생이 아니야. 내가 처음으로, 내 의지로 지키고 싶은 거야.

연이—…그럼 나도 널 지킬 거야. 네가 날 지키는 만큼. …그러니까 그 힘 쓰지 마. 대신 내가 더 빨리 되쓸게. 내가 더 강해질게. 네가 그 힘 안 써도 되게. 그게 내가 널 지키는 방법이야.

네오—…그래. …그럼 우리 서로 지키자. 너는 되쓰기로, 나는 이 몸으로. …자, 각자의 자리에서. 기억나지?

연이—…응. 근데 네오, 너 무리하지 마. 약속. 위험하면 그냥 뒤로 빠져. 나 너 잃으면서 이기는 거, 그건 지는 거야.

네오—…알아. 나도 죽을 생각 없어. 너랑 삼각김밥 먹기로 했잖아. 크루아상도. …그러니 걱정 마. 나 안 죽어. 우리 다 같이 돌아간다.

루나—…나도 도울게! 고양이 아저씨 혼자 다 막지 마! 내 물로 검은 손 씻을게! 아저씨는 발톱만 막아!

세 사람이 다시 진용을 짰다. 네오가 발톱을 받아 내고, 루나가 검은 손을 씻고, 연이가 그 사이 원본을 지키며 되쓰기를 준비했다. 상처 입은 채로도, 셋의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청토끼—…끈질기시네요. 좋습니다. 그럼 진짜를 보여 드리죠. 이 서고의 진정한 힘을.

청토끼가 회중시계를 서고 전체에 겨눴다. 그러자 산맥의 모든 원본에 동시에 검은 조항이 덧쓰였다. 「이 서고의 모든 종이는 침입자를 공격한다.」 수만 장의 종이가 칼날처럼 날아올랐다.

연이—…원본들이! 청토끼가 이 사람들 원본을 무기로 써?! 이 종이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진심인데, 그걸 칼로 만들다니!

네오—…비겁한 수다! 인질을 방패이자 무기로 쓰는 거야! 연이, 이건 못 벤다! 이 종이를 베면, 이 사람들 원본이 찢겨! 그럼 위의 잿빛 사람들이—

연이—…안 벨 거야. 되쓸 거야! 이 종이들한테 '너희는 무기가 아니라 진심이다'라고 읽어 줄 거야!

연이—…너희는 칼이 아니야! 너희는, 누군가의 사랑이야!

연이의 청록빛이 날아오는 종이들에 번지자, 칼날 같던 종이들이 순간 멈칫했다. 자기들이 원래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린 것이다. 몇 장은 힘을 잃고 나풀나풀 떨어졌다. 하지만 수만 장을 다 되읽기엔, 연이 혼자는 역부족이었다.

멈추지 못한 종이 칼날들이 세 사람에게 쏟아졌다. 네오가 몸으로 막고, 루나가 물로 흩고, 연이가 되읽었지만 — 상처가 늘어 갔다. 셋의 숨이 다시 가빠졌다. 청토끼의 무한한 서고 앞에서, 셋은 조금씩 밀렸다.

연이—…이 종이들, 다 누군가의 진심인데. 청토끼가 진심을 칼로 만들어서, 우리한테 던져. 이걸 베면 그 사람 원본이 찢기고, 안 베면 우리가 다치고. …너무 비열해.

청토끼—비열하다뇨. 이게 값의 세계 방식이에요. 남의 진심조차 무기가 되는 곳. 자, 어떡하실래요? 저 착한 마음들을 베고 살아남을래요, 아니면 안 베고 죽을래요? 당신 그 다정함이, 지금은 족쇄가 됐네요.

루나—…연이! 종이가 너무 많아! 나 이제 물이 안 나와! 다 써 버렸어! 어떡해!

네오—…연이, 나도 한계야. 이 종이들을 다 막을 순 없어. …너의 다정함이 약점이라고? 아니. 저 자가 틀렸어. 네 다정함이 저 종이들을 무기에서 사람으로 되돌리잖아. 계속 읽어! 하나라도 더!

연이—…맞아. 다정함은 약점이 아니야. …근데 나 혼자선 수만 장을 다 못 읽어. 이대로면 우리 다 다쳐. …방법을 찾아야 해. 이 서고 자체를 멈출 방법을. 청토끼의 시계를 멈출 방법을.

연이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백문의 가르침이 스쳤다. '많은 책을 던지지 말고, 딱 한 문장만.' 그리고 '시계는 흔들리는 마음만 덧쓸 수 있다.' …근본을 쳐야 했다. 이 서고의 심장, 청토끼의 회중시계를. 하지만 그러기엔, 지금 셋은 너무 지쳐 있었다.

연이—…백문 님. 지금 정말, 백문 님이 필요해요. 저 시계를 멈춰 줄 누군가가. 저 산맥을 같이 되써 줄 누군가가. …제발, 와 주세요.

청토끼—방금 그 금빛, 보셨죠? 역시 고객님, 대체 어느 시대에서 연체 중이신 겁니까? 그 힘… 우리 회장님이 아주 반가워하실 텐데요. 어디, 한 번 더 새어 나오게 해 드릴까요?

청토끼가 연이를 노렸다. 네오가 그걸 막게 하면, 또 금빛이 새어 나올 것을 알고서. 교활한 수였다. 발톱과 고쳐 쓰기를 오가는 청토끼는 영악했고, 전장은 놈의 금고였다. 균형이 천천히 무너졌다.

루나—…어떡해. 고양이 아저씨가 계속 다쳐. 청토끼가 일부러 연이를 노려서, 아저씨가 힘 쓰게 만들려고 해. …내 물로는 검은 손밖에 못 씻어. 저 발톱은 너무 강해서…

연이—…이대로면 안 돼. 네오가 계속 다쳐. 청토끼가 우릴 갖고 놀아. 여긴 놈의 홈그라운드고, 우린 셋뿐이고. …백문 님이 계셨으면. 백문 님 힘이 필요해.

연이—…안 되겠어. 계속 막기만 해선 못 이겨. 이 서고를 통째로 되쓸 거야. 본필로. 청토끼 것에서, 이 사람들 것으로!

네오—연이, 안 돼! 이 산맥 전부를 되쓰는 건 너 혼자 감당 못 해! 아까 도서관에서 일곱 겹 책 하나에도 진땀 뺐잖아! 여긴 수만 장이야!

연이—…그래도 해야 해! 뿌리내림!

연이의 청록빛 덩굴이 서고 바닥 전체로 뿌리를 뻗었다. 수만 장 원본의 본뜻을 한꺼번에 끌어올리려는 시도. 하지만 그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다. 수만 개의 눌린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들자, 연이의 무릎이 꺾였다.

연이—…크윽! 너무… 무거워! 다들 한꺼번에… 마음이 밀려와서… 나 하나로는… 이걸 다…

수만 장의 검은 도장이 역류해 연이에게 덧쓰이려 했다. 「무능」 「실패」 「너는 못 한다」. 도서관에서 한 번 겪었던 그 위험이, 이번엔 수만 배로. 연이의 청록빛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네오—연이! 눈 마주치지 마! 놔! 지금은 무리야!

루나—연이! 정신 차려! 너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마! 우리 있잖아!

연이는 이를 악물고 뿌리를 거뒀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백문의 경고가 옳았다. 이 산맥은, 연이 혼자 되쓰기엔 너무 컸다. 누군가의 도움이 — 백 년을 이 문서들과 함께한 누군가의 힘이 필요했다.

연이—…못 하겠어. 나 혼자선. …백문 님. 이 산맥은, 백문 님이랑 같이가 아니면 못 되써요. …백문 님, 어디 계세요. 지금, 백문 님이 필요해요.

청토끼—…이제 아셨나요? 여긴 제 세계예요. 값의 세계.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값 앞에서 뜻은 결국 무릎을 꿇죠. 그 착한 마음, 그 예쁜 문장, 다 좋아요. 근데 그거, 여기선 아무 값어치도 없어요. …자, 이제 곱게 회수당하시죠.

검은 손들이 세 사람의 팔다리를 옭아맸다. 종이 칼날이 목을 겨눴다. 네오는 상처투성이였고, 루나는 물이 바닥났고, 연이는 무릎이 꺾여 있었다. 도서관에서 벼린 모든 것이, 청토끼의 무한한 서고 앞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루나—…어떡해. 우리 지는 거야? 이렇게? 언니 얼굴도 못 되찾고? …싫어. 나 또 아무것도 못 하고 언니 잃는 거, 싫어…

연이—…아니야, 루나. 안 져. …우리 넷이 약속했잖아. 못다 한 말들, 다 하고 나서 여섯 그릇 식탁에 앉기로. …그 약속 지킬 거야. 어떻게든.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청토끼의 발톱이 마지막 일격을 위해 높이 치켜올려졌다. 연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도서관에 두고 온 스승을 간절히 불렀다. …그때였다.

그때 서고의 모든 등불이 일제히 흔들렸다. 반납구 쪽에서 흰 빛이 계단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청토끼의 검은 손들이, 그 흰 빛 앞에서 일제히 움츠러들었다.

연이—…이 빛. 이거 도서관 등불 물고기 빛이야! 설마—

흰 빛이 계단을 거슬러 폭포처럼 쏟아져 올라왔다. 청토끼가 백 년간 아래로 떨어뜨린 진심들이, 마침내 위로 역류하는 광경이었다. 검은 손들이 그 빛에 닿아 비명 없이 흩어졌다.

루나—…뭐야 저거! 계단에서 빛이 올라와! 검은 손들이 무서워해!

네오—…이 기운. 대사서의 기운이다. 설마 백문 님이… 문지방을 넘어서? 사서인도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서인을 잃은 백문은 도서관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온다고 했다. 백 년을 그 문지방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흰 빛이 분명히 이 금고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무언가가, 그를 불러낸 것이다.

연이—…내 계약서. 백문 님이랑 앞발 도장으로 맺은 그 계약서. '이 도서관은 언제까지나 그대들의 편이 된다'는… 그 정당한 계약이, 백문 님을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진심으로 맺은 약속은, 문지방보다 강하니까!

책장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흰 여우가 서고에 내려섰다. 로브 자락에 등불 물고기들이 별처럼 따라붙어 있었다. 백 년간 문지방 안에 갇혀 있던 노(老)사서가, 마침내 밖으로 나온 것이다.

백문—늦어서 미안하네. 문지방 밖을 나오는 게 백 년 만이라, 신발 찾는 데 한참 걸렸어.

연이—백문 님?! 밖에 어떻게 나오셨어요?! 사서인 없이는 못 나온다고 하셨잖아요!

백문—자네가 앞발 도장을 찍어 줬잖나. 정당한 계약서는 사서에게 임시 통행증이 되거든. '이 도서관은 언제까지나 그대들의 편이 된다' — 그 문장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걸세. 본뜻이 훤한 문장은, 문지방보다 힘이 세니까.

연이—…저 위해서, 백 년 만에 밖에 나오신 거예요? 사서인도 없이, 그 위험을 무릅쓰고?

백문—…제자가 위험한데, 스승이 문지방 안에서 책이나 닦고 있을 순 없지 않나. …게다가 나도 저 도둑에게 받을 게 백 년 치나 밀려 있거든. 마침 잘 됐어.

백문은 상처투성이가 된 세 사람을 둘러봤다. 등에 발톱 자국이 그인 연이, 피 흘리는 네오, 지친 루나. 노(老)사서의 눈에,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이 아이들이, 자기를 위해 청토끼 금고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백문—…많이 다쳤군. 이 늙은이 사서인 하나 되찾겠다고, 소망이 하나 찾겠다고. …너희, 이렇게까지.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해. 그러니 갚으마. 지금부터, 이 대사서의 마지막 힘을 다해서.

연이—…백문 님. 저 아까 혼자선 이 산맥을 못 되썼어요. 무릎이 꺾였어요. 근데 백문 님이 오시니까… 이제 될 것 같아요. 우리 둘이면, 이 산맥 전부를 되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백문—…당연하지. 자네 붓과 내 백 년이 합쳐지는데. 혼자선 못 드는 무게도, 둘이면 든다. 그게 인성의 이치야. …자, 연이. 손 내밀게. 내 뿌리를 자네 붓에 나눠 주지.

백문이 연이의 본필에 손을 얹었다. 노(老)사서의 백 년 세월이 청록빛으로 흘러들어, 본필이 눈부시게 빛났다. 스승의 힘과 제자의 진심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었다.

연이—…따뜻해요. 백문 님 백 년이, 제 붓으로 흘러들어와요. …이제 무섭지 않아요. 혼자가 아니니까. 백문 님이랑 같이면, 뭐든 되쓸 수 있어요.

백문이 로브 소매를 걷었다. 손목의 금빛 수갑 「사서인 회수 완료」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사서인 없는 사서. 온전한 힘은 못 쓴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백 년 전 세상을 떠돌던 그 대사서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곁엔, 온전한 별을 되찾아 가는 제자가 있었다.

청토끼—……백문. 그 낡은 여우가, 어떻게 여길. 사서인도 없는 반쪽짜리 주제에!

백문—…백 년 만이군. 자네가 반년을 성실히 드나들며 내 신뢰를 사던 그 얼굴, 아직도 기억하네. 그 얼굴로 내 소망이를 데려갔지. …그날 이후로, 나는 이 얼굴을 다시 보는 날만을 백 년 동안 기다렸어.

청토끼—…소망이? 아, 그 계집애. 백 년 전 담보로 잡은. 아직도 그거 붙들고 있나? 참 미련하기도. 값도 안 되는 애 하나 때문에 백 년을.

백문—…그래, 값도 안 됐지. 자네 저울로는.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전부였어. 자네가 평생 이해 못 할 그 '전부'라는 값. …오늘, 그 값이 얼마나 무서운지 가르쳐 주지. 백 년을 벼려서.

백문—오랜만이군, 도둑 손님. 백 년 치 연체료, 오늘 다 받아 내지. …반쪽짜리라고? 그래. 나는 반쪽이야. 하지만 저 아이는 온전하지. 그리고 반쪽인 나와 온전한 저 아이가 합치면 — 자네 같은 사기꾼 하나쯤은, 충분해.

백문이 지팡이를 들자, 등불 물고기들이 서고 전체로 흩어져 어둠을 밝혔다. 청토끼의 사냥 조명이 도서관의 빛에 밀려났다. 검은 손들이 그 빛에 닿아 움츠러들었다. 백 년 만에, 대사서의 빛이 청토끼의 금고를 침범했다.

연이—…백문 님이 오셨어! 네오, 루나! 이제 우리 넷이야! 백문 님, 저 되쓰기 배운 대로 다 할 수 있어요! 같이 이겨요!

백문—그래! 자네는 원본을 되쓰게. 나는 저 도둑의 시계를 묶겠네. 파수꾼은 앞을, 물의 아이는 오염을. …자, 백 년 묵은 빚, 오늘 다 청산하세!

백문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등불 물고기들이 청토끼의 회중시계를 에워쌌다. 째깍거리던 시계가, 도서관의 빛에 감싸여 순간 멈칫했다. 백 년간 남의 운명을 고쳐 써 온 그 시계가, 처음으로 힘을 잃었다.

백문—…자네 시계, 오랜만이군. 백 년 전 내 사서인을 빼앗던 그 시계. 오늘은 내가 자네를 묶겠네. 사서인은 없지만, 이 도서관 등불 물고기 백 년 치 원한이 여기 다 모였거든!

청토끼—…이럴 수가! 시계가 안 움직여! 그 등불 물고기 따위가 내 회중시계를—!

백문—…등불 물고기 '따위'라. 저 물고기들이 뭔 줄 아나? 자네가 백 년간 값으로 짓눌러 이리로 떨어뜨린 문서들의, 안 꺼진 진심이 물고기가 된 걸세. 자네가 짓밟은 마음들이 모여, 지금 자네 시계를 묶고 있어. 이게 바로 인과응보라는 거야, 도둑 손님.

청토끼—…말도 안 돼! 값이 없는 것들이! 내가 폐기한 쓰레기들이! 어떻게 감히 내 시계를!

백문—…값이 없는 게 아니라, 자네가 못 알아본 걸세. 세상에 값어치 없는 진심은 없어. 자네가 그걸 백 년째 모르니, 오늘 그 진심들 손에 묶이는 게지. …연이! 시계가 멈췄다! 지금이 기회야!

청토끼의 회중시계가 등불 물고기 떼에 감싸여 째깍거림을 멈췄다. 백 년간 세상의 운명을 고쳐 써 온 그 시계가, 자기가 짓밟은 진심들에게 붙들린 것이다. 고쳐 쓰기를 잃은 청토끼는, 이제 발톱뿐이었다.

연이—…지금이야! 백문 님이 시계를 묶었어! 시계가 멈추면 청토끼는 고쳐 쓰기를 못 해! 이제 원본 되쓰기, 나 혼자가 아니야! 백문 님, 같이 해요!

백문—그래! 자, 이 산맥을 되쓰자! 나는 시계를 붙들고 뿌리를 나눠 줄 테니, 자네가 문장을 읽게! 백 년간 이 문서들과 함께한 이 늙은이의 힘이, 자네 붓에 실릴 걸세!

백문의 합류로, 기울던 저울이 다시 균형을 잡았다. 궁지에 몰린 것은 이제 청토끼였다. 놈의 정중한 미소가 완전히 벗겨지고, 그 밑의 굶주림이 발톱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엔, 세 사람 뒤에 백 년의 사서가 있었다.

연이—…청토끼. 아까 나 혼자선 이 산맥을 못 되썼어. 근데 지금은 달라. 백문 님이랑, 네오랑, 루나랑. 우리 넷이야. 그리고 이 산맥 전부의 진심이 우리 편이고. …자, 이제 진짜로. 이 서고를, 너한테서 되찾을게.

청토끼—…시계가 없어도, 나한텐 발톱이 있어! 재성의 발톱은 백 년을 벼린 거다! 그깟 붓 장난, 종이 쪼가리 되살리기 따위—!

네오—…그 발톱은 내가 막는다. 연이가 산맥을 되쓰는 동안, 네 발톱은 나한테서 한 발짝도 못 지나가. …루나, 넌 연이 곁을 지켜. 네 물로 오염을 막아. 연이가 온전히 되쓰기에 집중하게.

루나—응! 연이는 내가 지킬게! 물 다 썼지만,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서라도! …연이, 넌 걱정 말고 되써! 이 산맥 사람들, 다 살려 줘!

백문—…좋은 진용일세. 파수꾼이 앞을 막고, 물의 아이가 곁을 지키고, 나와 연이가 산맥을 되쓴다. …자, 청토끼. 백 년간 자네가 짓밟은 진심들이, 오늘 전부 되살아날 걸세. 그리고 그게, 자네 제국의 끝이야.

연이가 본필을 높이 들었다. 백문의 백 년이 실린 붓끝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 뒤로 네오가 발톱을 막아서고, 루나가 마지막 물을 그러모았다. 넷이 하나가 되어, 재성의 심장부를 향해 마지막 반격을 시작했다. 값의 제국이, 뜻 앞에서 무너지려는 순간이었다.

제25화 · 재성의 발톱 — 끝. 제26화 「모든 기둥이 제자리에」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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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필 안내

『연이의 운명 노벨』은 Code Destiny가 직접 쓰고 그린 창작 소설입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재하는 인물·단체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사주 명리학의 십성, 자미두수의 열두 궁, 숙요 27수라는 실제 전통 체계에서 가져왔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서사에 맞게 각색했으므로, 작품 속 묘사를 그대로 점술 지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 주세요. 각 체계의 실제 해석 규칙은 별도의 기능 가이드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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