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의 합류로 전세가 기울었다. 시계는 봉인됐고, 검은 손은 씻겨 나가고, 산맥의 진심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백 년 묵은 포식자가, 처음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짐승이 마지막 이빨을 꺼냈다.
청토끼—…이럴 순 없어. 내가, 이 재성의 청토끼가, 겨우 이런 조무래기들한테. …아니야. 아직 카드가 하나 남았지. 회장님이 제일 아끼시는 자산. 저 꽃돼지의 마지막 기둥.
네오—…연이, 조심해! 청토끼가 신미 함 쪽으로! 뭔가 노리고 있어!
백문—…막아야 해! 저 함을 억지로 열면, 안의 기둥이 폭주할 수 있어! 파수꾼, 놈을 막게!
하지만 청토끼는 이미 신미 함으로 손을 뻗은 뒤였다. 봉인된 함이 강제로 열리며, 검은 사슬이 뿜어져 나왔다. 궁지에 몰린 짐승의, 마지막이자 가장 비열한 수였다.
연이—…안 돼! 그건 내 마지막 별이야! 그걸 태우면—!
청토끼—…그래요. 당신의 마지막 별. 이걸 태우면 당신은 영영 미완성. …거두지 못할 그릇은 태워 없애라, 그게 회장님 방침이거든요. 나는 지더라도 규칙은 지켜야죠. 당신만은, 아무도 못 갖게!
연이—…! 안 돼! 그건—
청토끼—좋습니다. 예의는 여기까지. 특별 담보 제1호, 중도 처분 개시!
검은 벨벳 함이 강제로 열렸다. 신미 두 글자가 사슬에 감긴 채 허공으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연이의 몸에서 색이 빠지기 시작했다.
연이—…어? 앞발이 안 보여. 손이… 아니 발이 사라져. 뭐야 이거, 나… 나 지워지고 있어?!
청토끼—이해가 빠르시네요. 그 신미, 당신의 마지막 기둥이자 회장님의 자산. 당신이 도로 가져가게 둘 순 없죠. 그러니 태워 버리는 겁니다. 아무도 못 갖게. 그럼 당신은 영영 미완성인 채로 사라지고, 회장님도 이 시간을 다른 데 쓰실 수 있으니까요.
청토끼—마지막 기둥을 태워 버리면, 그 사주의 주인은 영영 미완성입니다. 반품 불가, 환불 불가, 존재 불가.
연이의 윤곽이 잿빛으로 흐려졌다. 지하 창고의 그 사람들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빠르게. 신미 두 글자가 사슬 속에서 타들어 가며, 연이의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루나—연이! 안 돼! 사라지지 마! 방금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잖아! 방금 다 이겼는데! 왜, 왜 또—!
백문—…소각이다! 저 도둑이 신미 자체를 태워 버리려는 거야! 기둥이 타 버리면, 연이는 미완성인 채로 영영 사라져! …연이! 정신 붙들어! 자네 문장을 놓지 마!
네오—연이!
네오가 달려들었지만 사슬은 고쳐 쓰기로 짜인 것이라 칼이 통하지 않았다. 백문의 되읽기도 소각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루나—연이! 안 돼! 사라지지 마! …내 물! 내 물로 씻으면—!
루나가 남은 물을 짜내 연이를 씻으려 했지만, 소각은 오염이 아니라 '존재의 삭제'였다. 물로도 씻기지 않았다. 루나의 물줄기가 연이의 흐려지는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루나—…안 돼. 안 씻겨. 연이가… 연이가 사라져. 재판정 때 언니처럼… 또… 나 또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거야?! 싫어!
네오—…연이! 정신 차려! 그 사슬은 네 사주가 미완성이라 걸리는 거야! 네 마지막 기둥이 아직 네 것이 아니라서! …제발, 버텨! 나 힘을 쓸까?! 지금 그 금빛을 쓰면—
백문—파수꾼, 안 돼! 자네가 지금 그 힘을 쓰면 '그 여자'가 이 자리에 나타나! 그럼 연이도 우리도 다 끝이야! …연이! 스스로 해야 해! 자네 문장을! 열람실에서 새긴 그 문장을 떠올려!
연이—…내 문장… 나 왜 싸우는가… …맞아. 나 여기 사라지러 온 거 아니야. 되찾으러 왔어. 내 마지막 별을. …네오, 힘 쓰지 마. 이건, 내가 해.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연이는 이상하게도 고요했다. 몸은 잿빛으로 지워지는데, 마음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도서관에서 배운 모든 것이, 이 마지막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는 듯이.
연이—…무섭지 않아. 신기하게. 내 몸이 지워지는데도. …백문 님이 그랬어. 흔들리지 않으면 시계는 아무것도 못 쓴다고. 지금 나, 하나도 안 흔들려. 내가 누군지 아니까.
열람실의 흰 방이 떠올랐다. 제 손으로 눌러 쓴 그 문장이 떠올랐다. 「내 운명을 내 손으로 읽고, 내 곁의 이름들을 내 글씨로 지키기 위해서.」
연이—…이 문장이 내 뿌리야. 이걸 붙들면, 어떤 소각도 나를 못 지워. 나는 내 이야기의 주인이니까. 청토끼의 담보물이 아니라.
연이—…그래. 나는 저 문장의 주인이야. 그리고 원본은 사본보다 힘이 세.
그때 흐려진 연이의 몸이 거울처럼 반짝였다. 그 안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거울 속 연이였다. 이번엔 꽃돼지가 아니라, 사람의 모습이었다. 비겁의 섬에서 처음 만났던, 연이의 또 다른 자아.
연이—…너. 거울 속 나. 어떻게 여기…? 나 지금 지워지고 있는데.
거울 속 연이—불렀지? 아니, 정확히는 네가 드디어 나를 읽은 거야.
연이—너, 처음부터 내 인간 쪽이었구나. 잃어버린 게 아니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거울 속 연이—응. 네 사주가 미완성인 동안엔 거울 밖으로 못 나갔어. 근데 지금 너는 세 기둥의 주인이고, 네 문장의 주인이잖아.
연이—…너 여기서 계속 나 기다렸구나. 내가 온전해지는 날을. 내가 나를 되찾는 날을. …미안해. 나 그동안 널 '잃어버린 인간 모습'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넌 잃어버린 게 아니라, 날 기다린 거였어.
거울 속 연이—…응. 근데 원망 안 해. 네가 꽃돼지로 섬을 세 개나 건너는 거, 나 여기서 다 봤거든. 자랑스러웠어. 내가 저 애구나, 하고. …그리고 알아? 넌 꽃돼지일 때가, 인간일 때보다 더 사람다웠어. 겉모습을 잃고 나서, 진짜 너를 찾았으니까.
연이—…맞아. 이 꽃돼지 몸으로, 나 값이 아니라 뜻을 배웠어.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보는 법을. …그러니까 인간으로 돌아가도, 나 이 배움 안 잊을 거야. 겉이 아니라 속을 보는 눈.
거울 속 연이—…그거면 됐어. 그게 네가 이 여정에서 얻은 진짜 보물이야. 자, 이제 하나가 되자. 꽃돼지 연이랑 인간 연이가. 값을 아는 나랑, 뜻을 아는 너가. 그럼 넌, 진짜 온전한 연이가 돼.
연이—…근데 너, 사라지는 거 아니지? 하나가 된다는 건, 네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거지?
거울 속 연이—…응. 안 사라져. 나는 네 안에 늘 있을 거야. 네가 흔들릴 때 '아니, 넌 이런 애야'라고 되쓰는 거울로. 네가 값에 휘둘릴 때 '값이 아니라 뜻을 봐'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는 너의 일부가 되는 거야. 잃는 게 아니라, 합쳐지는 거.
연이—…다행이다. 나 너 잃는 줄 알고 잠깐 슬펐어. …그래, 하나가 되자. 값도 알고 뜻도 아는, 온전한 연이로. 청토끼의 소각도, 그 여자의 시계도, 못 흔드는 연이로.
거울 속 연이—…좋아. 손 내밀어. 마지막 한 줄, 같이 쓰는 거야. 네 사주의 마지막 획, 신미의 끝을. …'이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이다.' 이게 네 여덟 글자를 완성하는 문장이야.
연이—…'이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이다.' …응. 이게 나야. 누구의 담보물도, 누구의 자산도 아닌. 그냥, 나. 연이.
거울 속 사람 연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에서, 잃어버린 마지막 별 신미의 빛이 은은히 흘렀다. 두 개의 연이가 하나로 합쳐지려는 순간, 소각의 잿빛이 잠시 멈칫했다. 존재를 삭제하려는 시계의 힘도, 스스로를 온전히 읽어 낸 자 앞에서는 무력했다.
거울 속 연이—마지막 한 줄, 같이 쓸까?
거울 속 연이—…자, 이 문장을 나랑 같이 세상에 쓰는 거야. 소각의 잿빛 위에, 우리 둘의 확신으로. 준비됐어?
연이—…응. 준비됐어. 나는 나야. 청토끼의 담보물도, 회장님의 자산도 아니야. 나는, 내 이야기의 주인이야.
연이는 거울 속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리 없는 거울 면 너머로 사람의 손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값을 아는 연이와 뜻을 아는 연이가, 마침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두 개의 연이가 겹쳐지며 하나의 눈부신 빛이 됐다. 그 빛 속에서, 소각의 잿빛이 완전히 밀려나고 신미의 별이 제자리를 찾아 빛났다. 값과 뜻이, 꽃돼지와 인간이, 겁먹은 아이와 곧은 아이가 — 마침내 하나의 온전한 연이로 통합됐다.
두 손이 맞닿자, 잿빛으로 흐려지던 연이의 몸이 다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소각의 힘이, 스스로를 온전히 마주한 자 앞에서 역류했다. '존재의 삭제'는, '존재의 확신'을 이길 수 없었다.
연이—…나는 연이야. 꽃돼지 연이이자, 인간 연이. 값을 알고, 뜻을 아는. 여덟 글자 중 일곱을 되찾고, 마지막 하나를 지금 되찾을. …청토끼, 네 사슬로는 나를 못 지워. 나는 내가 누군지, 이제 완전히 아니까.
순간, 사슬에 감긴 신미가 스스로 울었다. 쇠 신(辛)은 본래 벼려진 끝에 빛나는 보석의 글자다. 가짜 사슬 따위에 감겨 있을 글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주인의 부름에 응답하듯, 사슬 안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연이—뿌리내림. 내 이름의 끝까지!
덩굴 뿌리가 사슬 조항 밑을 파고들어 원문을 끌어올렸다. 「이 기둥의 주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이다.」
청토끼—…안 돼! 그 담보는 회장님 자산이야! 네가 되찾으면, 회장님이 백 년간 모은 시간에 구멍이—!
연이—…원래 내 거야. 그 여자가 훔쳐 간 거고. 되찾는 게 도둑질이 아니라, 훔친 걸 도로 가져가는 거지. …청토끼, 네 사슬은 '담보'라고 덧썼지만, 원본은 '연이의 것'이라고 적혀 있어. 사본은, 원본을 못 이겨.
사슬이 유리처럼 깨졌다. 백 년간 회장님의 봉인에 갇혀 있던 신미가, 마침내 주인에게 돌아왔다. 신미가 연이의 가슴으로 스며들며, 네 번째 기둥이 마지막 자리에 꽂혔다. 여덟 글자가, 처음으로 완전해졌다.
신미가 자리를 찾자, 잿빛으로 지워지던 연이의 몸이 거꾸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소각이 멈추고, 되살아남이 시작됐다. 완전해진 여덟 글자가, 연이의 존재를 세상에 단단히 붙들어 맸다.
빛이 몸을 감쌌다. 꽃돼지의 둥근 몸이 서서히 풀리고, 짧아졌던 팔이 길게 돌아오고, 뭉툭했던 발굽 끝에 손가락 열 개가 다시 돋아났다. 재성의 섬에서 잃었던 인간의 몸이, 마침내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빛이 걷힌 자리에 인간 연이가 서 있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그 모습으로, 다만 그때보다 곧은 등으로. 여덟 개의 별이, 이제 완전한 별자리로 가슴속에서 빛났다.
연이—…다녀왔어, 나.
연이는 오랜만에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열 개. 사람의 손. 그토록 그리워하던 인간의 몸.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는 건 되찾은 손 때문이 아니라, 함께 여기까지 온 이들의 얼굴 때문이었다.
루나—…연이? 그게… 너야? 인간 연이? …우와, 너 이렇게 생겼구나. 꽃돼지일 때도 귀여웠는데, 사람일 때도 예쁘다. …근데 나 왠지 꽃돼지 연이가 좀 그리울 것 같아. 헤헤.
연이—…루나. 나 사람이 돼도, 너랑 나 사이는 하나도 안 변해. 꽃돼지든 사람이든, 나는 그냥 연이야. 너 지켜 줄 연이. …울지 마. 나 어디 안 가.
네오—…연이. 드디어, 돌아왔군. 처음 만났을 때 넌 겁먹은 인간이었어. 그리고 겁먹은 꽃돼지가 됐지. 근데 지금 넌… 겁먹지 않은 사람이야. 곧은 등으로 서 있어. …참 멀리 왔다, 우리.
연이—…네오. 다 네 덕분이야. 네가 앞에서, 옆에서 지켜 줘서 여기까지 왔어. …이제 곧, 집에 갈 수 있어. 근데 이상해. 기쁜데, 너희랑 헤어질 생각 하니까 벌써 슬퍼.
백문—…허허. 온전해진 제자를 보는 이 기분이라니. 백 년 만에, 이 늙은이가 이렇게 뿌듯한 날이 올 줄이야. …연이. 자네 이제 여덟 글자를 다 채웠어. 집으로 돌아갈 자격을 얻은 걸세. 하지만 그 전에—
연이—…네. 그 전에, 저 청토끼부터. 그리고 이 산맥 전부를 되살리고, 루나 언니 얼굴이랑 소망이랑 백문 님 사서인까지. 다 되찾고 나서, 그때 집에 갈 거예요. …자, 이제 진짜 마무리하자.
연이는 잠깐 눈을 감고, 자기 안을 들여다봤다. 여덟 개의 별이 온전한 별자리를 이루고 있었다. 을해, 임오, 그리고 이제 신미까지. 반 박자 어긋났던 인생이, 마침내 박자를 맞췄다. 세상이 한결 또렷해진 기분이었다.
연이—…신기하다. 마지막 별 하나 채웠을 뿐인데, 세상이 이렇게 선명해. 그리고… 나 자신이 이렇게 든든해. 예전엔 늘 뭔가 반쪽 같았는데. 이제 온전한 나야.
백문—…그게 완성된 사주일세. 여덟 글자가 서로를 받치니, 자네가 흔들리지 않는 거야. 이제 자네는 남만 지키는 반쪽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지킬 줄 아는 온전한 사람이 됐네. 모카가 자네에게 '네 노래도 부르라' 했다지? 이제 부를 수 있을 걸세.
연이—…맞아요. 이제 남 지키면서도, 나 자신도 안 잃을 것 같아요. …근데 백문 님. 저 이렇게 온전해지고 나니까, 오히려 더 확실히 알겠어요. 제가 되찾은 이 힘, 저 혼자 잘 살자고 얻은 게 아니라는 거. 남을 살리라고 얻은 거예요.
백문—…허어. 온전해지자마자 그걸 깨닫다니. 자네는 정말… 인성의 그릇을 타고났어. 자, 그 마음 그대로. 이 산맥을 살리고, 저 도둑을 멈추세. 백 년 묵은 진심들이, 자네 붓을 기다리고 있네.
네오—…연이. 온전해진 널 보니, 나도 뭔가 뭉클하네. 처음 만났을 때 넌 자기 얼굴 잃었다고 사흘을 울던 애였는데. 지금은 자기 별자리를 다 채우고, 남까지 살리겠다고 서 있어. …정말, 멀리 왔다.
연이—…다 같이 왔잖아. 나 혼자 온 거 아니야. 네오, 백문 님, 루나, 모카… 그리고 되찾을 언니랑 소망이까지. 우리 다 같이 여기까지 온 거야. …자, 이제 진짜로 마무리하자. 우리 손으로.
네오—…그래. 온전한 너를 보니, 나도 힘이 나. 자, 이 서고를 되찾고, 청토끼를 멈추자. 도서관에서 벼린 모든 걸, 지금 이 자리에서 증명하는 거야.
루나—…나도! 나도 이제 짐짝 아니야! 물의 배달 토끼 루나, 마지막까지 싸운다! 언니 얼굴 되찾을 때까지!
인간이 된 연이가 본필을 고쳐 쥐었다. 열 개의 손가락이 붓을 완벽하게 감쌌다. 꽃돼지 발굽으로는 한 줄이 고작이던 되쓰기가, 이제 열 줄을 한꺼번에 그릴 수 있었다. 온전한 힘이, 온전한 사람의 손에 깃들었다.
백문—자, 시작하세! 이 서고의 백 년 묵은 진심들아, 다 깨어나라! 오늘, 너희 진짜 이름을 되찾는 날이다!
연이의 붓이 허공을 갈랐다. 백문의 백 년이 그 붓끝에 실렸다. 서고의 검은 도장들이, 그 한 획에 일제히 떨기 시작했다. 값의 제국을 무너뜨릴 마지막 되쓰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청토끼—담보가… 제 발로 계약을 걸고 나왔다고?!
연이는 제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그리고 네오와 백문, 루나 곁에 나란히 섰다. 네 개의 숨이 처음으로 완전한 화음을 냈다. 쇠와 나무와 물과, 백 년의 사서. 값의 세계에 맞서는, 뜻의 진용이었다.
연이—…청토끼. 아까까진 우리가 방어만 했지. 근데 이제 아니야. 나 온전해졌고, 백문 님도 오셨고, 루나도 각성했어. 이제부터는 우리가 공격할 차례야. …다들, 마지막까지 가자!
네오—…금선으로 도주로부터 막는다. 이 서고에서 청토끼가 도망칠 구멍을 다 봉쇄해. 연이는 산맥을 되쓰고, 루나는 오염을 씻고, 백문 님은 시계를 붙들어 주세요. …가자!
백문—…백 년을 기다린 순간일세! 이 도둑이 짓밟은 진심들아, 다 같이 일어나라! 자네들의 진짜 이름을, 오늘 되찾자!
루나—나도 준비됐어! 마지막 물 한 방울까지! 언니 얼굴 되찾을 때까지, 나 안 멈춰!
네오—금선. 도주로 봉쇄.
백문—서고의 원본 전부, 일제히 되읽기!
서류 산맥이 흰 빛으로 일어섰다. 온전해진 연이와 백문의 힘이 합쳐지자, 혼자선 꺾였던 무게가 넷이 되어 들렸다. 수천 장의 본뜻이 일제히 소리 내어 제 문장을 읽었다. 「학비를 위해」, 「약값 때문에」, 「겨울을 나려고」. 고쳐 쓴 금빛이 그 합창에 씻겨 나갔다.
연이—…들려요, 백문 님?! 이 사람들이 제 이름을 되찾고 있어요! 위에 있는 잿빛 사람들도, 지금 이 순간 사람으로 돌아가고 있을 거예요!
백문—…그래! 이게 백 년간 내가 꿈꾸던 광경일세! 혼자선 못 했지. 근데 자네와 함께니까, 이 산맥 전부가 한꺼번에 깨어나는군! …계속해, 연이! 마지막까지!
산맥의 검은 도장들이 폭포처럼 씻겨 내렸다. 「무능」이 「어머니」로, 「폐인」이 「노래를 좋아한 사람」으로, 「회수 대상」이 「세 아이의 아빠」로. 백 년간 짓눌렸던 진심들이, 한꺼번에 제 이름을 되찾았다. 청토끼 제국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었다.
되살아난 원본들에서, 도서관의 등불 물고기를 닮은 작은 빛들이 하나둘 피어올랐다. 짓눌렸던 진심이 다시 숨을 쉬며 태어나는 빛이었다. 그 빛들이 연이 주위를 별처럼 맴돌며, 소리 없이 인사했다. 고맙다고. 백 년 만에, 나를 나로 읽어 줘서.
연이—…얘들아. 너희 진짜 이름, 이제 아무도 못 지워. 위에 있는 너희 몸도, 지금 잿빛에서 사람으로 돌아가고 있을 거야. …가서, 너희 가족들 만나. 못 한 말 있으면, 다 하고. 값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아. 그게 너희 진짜 삶이야.
빛들이 천장을 뚫고 위로 솟구쳤다. 각자의 몸으로, 각자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재성의 지하 노동장에서 저울추를 밀던 잿빛 사람들이, 이 순간 하나둘 색을 되찾으며 이름을 되찾고 있을 터였다. 연이가, 백문이, 함께 이룬 기적이었다.
백문—…백 년일세. 내가 저 빛을 다시 보는 게. 혼자선 한 서가도 겨우 닦았는데, 자네와 함께니 산맥 전부가 한꺼번에 깨어나는군. …연이. 고맙네. 이 늙은이의 백 년 소원을, 자네가 하루 만에 이뤄 줬어.
연이—…백문 님이 백 년을 지켜 주셨으니까요. 백문 님이 이 진심들을 안 버리고 지켜 오셨으니까, 오늘 제가 되살릴 수 있었던 거예요. 이건 우리 둘이 같이 이룬 거예요. 백문 님의 백 년이랑, 제 붓이랑.
루나—…우와… 서고 전체가 하얗게 빛나. 검은 게 다 씻겨. 연이랑 백문 님이 이 사람들을 다 살리고 있어! …나도 도울게! 마지막 물!
루나가 짜낸 마지막 물이 산맥 위로 흩뿌려지며, 되살아나는 원문들을 씻어 반짝이게 했다. 쇠가 길을 막고, 나무가 진실을 세우고, 물이 그것을 빛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온전해진 연이가 있었다.
연이—그리고, 움.
사람 손으로 처음 꺼낸 목식은 돼지 발굽 때와는 격이 달랐다. 서고 바닥 전체에서 새싹이 일제히 돋아 검은 손들을 꽃으로 바꿔 버렸다.
연이—…이게 온전한 힘이구나! 손가락 열 개로 붓을 쥐니까, 되쓰기가 열 배는 또렷해! 검은 손이 다 꽃이 됐어!
온전해진 연이의 붓이 서고를 종횡무진 누볐다. 꽃돼지 발굽으로 겨우 한 줄 되쓰던 연이가, 이제 사람 손으로 열 줄을 한꺼번에 되썼다. 검은 서고가,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꽃밭으로 바뀌었다.
백문—…아름답군. 백 년간 이 서고를 검게 물들이던 도장들이, 자네 붓 한 번에 꽃으로 피어나. 이게 바로 되쓰기의 완성이야. 지우는 게 아니라, 되살리는 것. …연이, 자네는 이제 나를 넘어섰네. 진정으로.
연이—…아니에요, 백문 님. 백문 님이 백 년간 이 진심들을 안 버리고 지켜 주셨으니까, 제가 오늘 되살릴 수 있는 거예요. 백문 님이 안 계셨으면, 이 진심들은 진작 다 꺼졌을 거예요. …이건 우리 둘의 붓이에요.
루나—둘의 붓에 내 물도 껴 줘! 봐, 내가 되살아난 원본들 다 씻어서 반짝이게 하고 있잖아! 우리 셋… 아니 넷의 합작이야!
네오—…그래. 넷의 합작이지. 금선으로 길을 막고, 붓으로 진실을 세우고, 물로 그것을 빛내고, 백 년의 사서가 뿌리를 나눈다. …이게 우리 팀이야. 청토끼 혼자선, 절대 못 이겨.
루나—연이! 꽃이 서고 전체에 피어! 완전 예뻐! 값의 금고가 꽃밭이 됐어! …청토끼 저 봐, 완전 당황했어!
청토끼—…이럴 순 없어! 내 서고가! 내 검은 손들이! 백 년을 쌓은 내 재성이, 겨우 새싹 몇 개에!
네오—…새싹 몇 개가 아니야. 네가 짓밟은 백 년 치 진심이야. 그 진심이 지금, 네 발밑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거고. …청토끼, 네 값의 제국은 여기서 끝이다.
네 사람이 마지막 합공을 시작했다. 네오의 금선이 청토끼의 도주로를 그물처럼 봉쇄하고, 백문이 등불 물고기로 회중시계를 완전히 묶고, 루나가 마지막 물로 발밑의 오염을 씻어 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연이가 본필을 들었다.
연이—…이 서고의 진짜 주인은 네가 아니야. 여기 갇힌 진심들이야. 덩굴 결박!
연이의 청록빛 덩굴이 청토끼를 향해 뻗었다. 하지만 그것은 옭아매는 덩굴이 아니라, 되살아난 원본들의 진심이 꽃덩굴이 되어 청토끼를 감싸는 것이었다. 백 년간 그가 짓밟은 마음들이, 이제 그를 붙들었다.
청토끼—…놔! 이 꽃덩굴들, 놔! …왜, 왜 내가 짓밟은 것들이 나를 붙드는 거야! 왜 나를 안 죽이고 그냥 붙들기만—!
연이—…얘들이 널 안 죽여. 진심은 복수 안 하거든. 그냥, 네가 더는 못 도망치게 붙드는 거야. 네가 저지른 일을, 똑바로 보라고. …청토끼, 네가 백 년간 짓밟은 게 뭔지, 오늘 다 봐.
청토끼가 마지막 발톱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발톱은 금선에 걸리고, 꽃덩굴에 얽히고, 본뜻의 합창에 귀가 먹어 허공만 그었다. 백 년을 벼린 재성의 발톱이, 되살아난 진심들 앞에서 무력했다.
네오—숙살.
백금의 서리가 재성의 탁한 기운을 뿌리까지 얼렸다. 회중시계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딸깍, 뚜껑이 저 혼자 닫혔다.
동시에, 연이의 되쓰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서고 전체의 검은 도장이 일제히 씻겨 나가고, 백 년간 갇혔던 진심들이 빛의 기둥이 되어 천장을 뚫고 위로 솟구쳤다. 위에 있는 잿빛 사람들에게로, 되찾은 이름을 돌려주러.
연이—…끝났어. 이 산맥, 다 되살렸어. 청토끼, 네 값의 제국은 무너졌어. 네가 백 년간 짓밟은 진심들이, 지금 다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어.
청토끼의 발밑에서 마지막 검은 손 하나가 힘없이 스러졌다. 서고를 밝히던 붉은 사냥의 빛은 꺼지고, 되살아난 진심들의 흰 빛만이 가득했다. 백 년을 군림한 포식자의, 완전한 패배였다.
청토끼는 무너진 서류 더미에 주저앉았다. 망토는 찢기고 정중함은 벗겨지고, 남은 건 굶주린 눈의 토끼 한 마리였다. 백 년을 군림하던 재성의 청토끼가, 이제는 그냥 지치고 외로운 짐승이었다.
연이는 꽃덩굴에 붙들린 청토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다른 이들은 경계했지만, 연이는 그 눈을 똑바로 봤다. 그리고 거기서, 승리의 기쁨보다 먼저 — 깊은 슬픔을 읽었다.
루나—…연이, 위험해. 그거 청토끼야. 우리 언니 데려간. 가까이 가지 마.
연이—…괜찮아, 루나. 이제 안 위험해. 힘도 다 잃었고. …근데 나, 이 토끼 눈을 그냥 못 지나치겠어. 이겼는데, 하나도 안 통쾌해. 오히려… 슬퍼.
청토끼—…웃기지. 나는 그냥 장부에 한 줄 오르고 싶었을 뿐인데.
연이—…장부 한 줄?
청토끼—위에 계신 분들의 장부 말이야. 거기 이름이 오르면 인정받는 거니까. 나는 흙수저 토끼였고, 재성이 내가 가진 유일한 재능이었거든.
청토끼—어릴 땐 이름도 없는 뒷골목 토끼였어. 저울추나 나르던 잡부. 아무도 내 이름을 안 불렀지. 애초에 부를 이름이 없었으니까.
청토끼—…딱 한 번, 어느 상인이 내가 저울을 잘 본다고 칭찬한 적이 있어. 태어나서 처음 받은 인정이었지. 나는 그 한 마디에 사흘을 굶으면서도 그 상인 밑에서 일했어. 근데 그 상인, 장사 망하니까 나를 저울이랑 같이 팔아넘기더라. …아, 나는 그때 알았지. 값이 없으면, 칭찬도 다 거짓이라는 걸.
연이—…저울이랑 같이 팔렸다니. 사람을, 아니 토끼를 물건처럼. …아저씨, 그건 아저씨 잘못이 아니에요. 아저씨를 물건 취급한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거예요. …근데 아저씨는 그걸, '내가 값이 없어서'라고 배워 버렸네요. 슬프다.
청토끼—…그래서 값을 쥐기로 한 거야! 내가 값을 다스리면, 아무도 나를 못 팔아넘기니까! 내가 남을 팔면 팔았지! …그게 이 재성에서 살아남는 법이야! 착하게 굴면, 나처럼 저울이랑 같이 팔려 가는 거라고!
연이—…아니에요. 살아남는 법이 그거 하나만은 아니에요. 저기 루나 봐요. 루나도 이 재성에서 나고 자랐어요. 근데 루나는 값 대신 마음으로 살아요. 남 팔지 않고, 남 도우면서. 겁 많은데도, 착하게. …아저씨도 그럴 수 있었어요. 그 밤에 회중시계 대신, 다른 걸 잡았다면.
청토끼—…다른 거? 그런 게 어딨어. 그날 밤 나한테 손 내민 건 그 여자뿐이었어. 아무도 나한테 시계 말고 다른 걸 안 줬어.
연이—…네. 그래서 아저씨가 안됐어요. 그 밤에, 회중시계 말고 따뜻한 손 하나만 내밀어 준 사람이 있었어도. 아저씨 이름 한 번만 다정하게 불러 준 사람이 있었어도. …아저씨는 이렇게 안 됐을 텐데.
청토끼—그러다 검은 비 내리던 밤에 그분이 오셨어. 이 회중시계를 쥐여 주면서 그랬지. 「이걸로 저울을 다스리면, 내 장부에 네 이름을 적어 주마.」 …태어나서 처음이었어. 누가 내 이름을 적어 준다고 한 게.
청토끼—그래서 뭐든 했어. 저울을 다스리고, 남의 값을 뺏고, 담보를 잡고. 그분이 시키는 건 다. 그러면 언젠가 내 이름이 그 장부에 잉크로, 지워지지 않게 적힐 줄 알았거든. 인정받을 줄 알았어.
청토끼—근데 그거 알아? 백 년을 갖다 바쳤는데, 그분들 장부에 내 이름은 아직도 연필로 적혀 있어. 언제든 지울 수 있게. …백 년을 충성했는데도, 나는 아직도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도구'였던 거야.
연이—…남의 장부에 연필로 적히려고 백 년을 바친 거구나. 아저씨, 그건 재능이 아니었어요. 그냥, 아무한테도 이름 못 불려 본 외로움이었던 것 같은데.
청토끼—…시끄러워. 꼬맹이가 뭘 안다고.
연이—…저 아까 아저씨 마음을 읽었어요. 밑바닥까지. 거기, 아주 어린 토끼 한 마리가 있었어요. 아무도 안 사 가고, 아무도 이름 안 불러 주던. …그 애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저 조금 알 것 같아요. 저도 이 세계 와서, 값 없이 버려지는 게 뭔지 봤거든요.
청토끼—…그럼 넌 알잖아. 값이 없으면 버려진다는 거. 그래서 내가 값을 쥐려던 게 왜 잘못이야? 나는 그냥, 안 버려지고 싶었을 뿐이야.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라고.
연이—…안 버려지고 싶은 건 잘못 아니에요. 근데 아저씨, 그 방법이 틀렸어요. 아저씨는 값을 쥐면 안 버려질 줄 알았지만, 정작 그 값을 준 사람들이 아저씨를 연필로 적었잖아요. …값으로는, 진짜 인정을 못 사요. 진짜 인정은, 누군가 아저씨를 값 없이도 봐 줄 때 생기는 거예요.
청토끼—…그런 게 어딨어. 세상에 값 없이 누굴 봐 주는 게 어딨냐고!
연이—…여기 있어요. 저요. 저 지금, 아저씨 값 하나도 안 보고 아저씨 외로움을 보고 있잖아요. 아저씨 이름, 제가 불러 드릴까요? 연필 말고, 제 마음에 잉크로 적어서. …아저씨도, 값 없이 봐 주는 사람 하나쯤은 있어야죠.
청토끼—……닥쳐. 그런 값싼 동정, 필요 없어. …근데. …근데 왜, 그 말이. …아니야. 시끄러워. 꼬맹이가 뭘 안다고.
연이는 그 말의 서늘함을 그때는 다 알지 못했다. 다만 이 토끼도 누군가의 저울 위에 올라가 있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네오—…그 위에 계신 분들의 이름을 대. 회중시계를 내려 준 자. 그 여자의 이름을.
청토끼—후후. 곧 만나게 될 텐데요, 뭐. 고객님들은 이미 그분의 관심 자산이거든요. …특히 저 꽃돼지, 아니 이젠 인간이 된 저 아가씨. 그분이 백 년째 찾던 시간을, 당신이 방금 도로 가져가 버렸으니. …그분, 아주 화나실 겁니다.
연이—…그 여자가, 나를 찾아온다는 거지. 내 시간을 제 곳간에 쌓으려던 그 여자가. …좋아. 나도 언젠가 그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어. 왜 하필 내 시간을 탐냈는지, 직접 들어야 하니까.
청토끼—…용감하시네. 근데 아가씨, 그분은 청토끼인 저와는 격이 달라요. 저는 그저 저울을 다스렸지만, 그분은… 시간 그 자체를 다스리시죠. 그리고 그분에겐, 절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어요. 세상 모든 걸 가져도 부족한, 탐욕이라는 갈증이.
연이—…탐욕. 신미 함에서 잠깐 봤어. 그 여자 곳간에, 부서진 채 시들어 가던 어떤 창백한 운명 하나도. …그 여자, 아무리 가져도 만족을 모르는 거지. 그래서 내 것까지 긁어 간 거고.
청토끼—…그걸 봤다고요? 함부로 봤겠군요. …그래요. 그분은 세상의 값진 운명이라면 뭐든 부숴서 거둬들이세요. 백 년 넘게, 끝도 없이. 당신 시간도 그중 하나고요. 그것도, 유독 아끼시더군요. …왜 하필 당신인지는, 저도 몰라요.
연이—…절박한 게 아니라, 그냥 탐욕스러운 거네. 남의 걸 다 뺏으면서 자기가 제일 가여운 척. …네오. 이거, 슬픈 이야기인 척하는 역겨운 이야기잖아. 도둑질을 '수집'이라 부르는.
루나—…근데 연이. 그 여자가 네 시간을 훔쳤다며. 근데 네가 도로 가져왔으니까, 그 여자 엄청 화나겠다. 자기 수집품 뺏긴 거니까. …널 쫓아올 거야. 조심해야 해!
연이—…응. 그 여자, 자기 곳간에서 뭐 하나 빠진 걸 절대 못 견딜 거야. 반드시 다시 가지려 하겠지. …근데 안 돼. 내 시간은 내 거야. 그 여자 진열장 장식품이 아니라. 되찾은 건, 안 돌려줘.
네오—…연이. 이것만은 확실해. 그 여자는 '가진 자가 다 갖는다'는 규칙으로 살아. 우린 그 규칙을 안 받아들이면 돼. 뺏긴 걸 되찾고, 그 여자가 부숴서 가둔 걸 하나씩 되살리는 거야. …네가 늘 하던 것처럼. 값의 규칙을 뜻으로 되쓰는 거.
연이—…맞아. 그 여자가 곳간에 쌓아 둔 것들, 내가 다 되살릴 거야. 내 시간도, 갇힌 운명들도, 부서진 인연들도. 원래 주인한테 하나씩 돌려주는 거. 그게 진짜 승리니까.
백문—…허어. 탐욕가 앞에서도 '되살려 돌려주겠다'를 외치는군. …연이, 자네의 그 마음이야말로 그 여자를 이길 유일한 무기일세. 그 여자는 '다 내 것'을 외치지만, 자네는 '다 제자리로'를 외치니까. 탐욕은, 나눔을 못 이기거든.
네오—…연이. 그 여자를 읽으려 드는 건 좋아. 근데 잊지 마. 그 여자의 탐욕 하나 때문에, 너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운명을 빼앗겼어. 위선으로 예쁘게 포장한다고, 탐욕이 죄가 아닌 게 아니야. …그 도둑질을 멈추는 게, 우리 몫이고.
연이—…맞아. 그 여자 위선의 밑바닥은 읽어 주되, 그 도둑질은 반드시 멈춰야 해. …근데 그러려면, 먼저 그 여자를 만나서 읽어야겠지. 그 텅 빈 탐욕의 정체를. 왜 아무리 가져도 안 채워지는지, 그 밑바닥을.
백문—…그 여자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지금 저 도둑에게서 더 캐낼 것도 없어. …다만 연이, 하나만 새겨 두게. 그 여자를 만나거든, 그 위선의 가면에 속지 말고 — 그 밑, 아무리 채워도 안 채워지는 텅 빈 구멍을 읽어. 그게 자네의 가장 강한 무기일 테니.
청토끼는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무너진 서류 더미 속에서, 연이가 방금 되살린 자기 어릴 적 원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름 없는 뒷골목 토끼, 그래도 누군가 이름을 불러 주길 바랐다.」 연이가 되쓴 그 한 줄이, 백 년 만에 그의 진짜 마음을 비추고 있었다.
청토끼—…흥. 내 원본까지 되살렸나. …쓸데없는 참견을. …근데 뭐, 이 서고는 이미 당신들 거야. 나는 회장님한테 돌아가서 보고나 해야겠군. '그 시간을, 인간 아가씨가 도로 가져갔습니다'라고. …다음엔, 그분이 직접 오실 겁니다. 그때는 나처럼 안 봐드려요.
청토끼는 남은 검은 기운을 끌어모아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회장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금고는, 이 산맥은, 이제 연이 일행의 것이었다.
연이—…도망갔네. 완전히 이긴 건 아니야. 근데 괜찮아. 이 산맥 사람들, 다 되살렸잖아. 언니 원본도, 소망이 원본도, 내 신미도 되찾았고. …오늘은, 우리가 이긴 날이야.
긴장이 풀리자, 그제야 상처가 아팠다. 연이의 등에는 발톱 자국이, 네오의 온몸에는 피가, 루나는 물을 다 써 기진맥진해 있었다. 넷은 되살아난 꽃밭 한가운데 주저앉아, 거친 숨을 골랐다.
루나—…연이 등! 아까 나 대신 맞은 거! 피가! …어떡해, 나 물 다 써서 못 씻어 주는데. …미안해. 나 때문에 다쳤는데.
연이—…괜찮아, 루나. 이거 훈장이야. 너 방금 그랬잖아. 배달 상처는 훈장이라고. 이건 '루나 지킨 훈장'이야.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봐, 네 물 덕분에 우리 다 살았어. 너 오늘 진짜 대활약이었어.
백문—…자, 상처는 위에 올라가서 치료하세. 다행히 이 서고가 이제 우리 편이니, 되살아난 진심들이 자네들을 도울 걸세. …그나저나 연이, 자네 정말 대단했어. 온전해지자마자 이 산맥 전부를 되살리다니. 백 년 대사서인 나도 못 한 일을.
네오—…다들 잘 싸웠어. 연이는 온전해졌고, 루나는 각성했고, 백문 님은 백 년 만에 밖에 나오셨고. …그리고 나는… 결국 그 힘을 안 쓰고 이겼어. 다행이야. 그 여자한테 아직 안 들켰으니까.
연이—…네오, 고마워. 그 힘 참아 줘서. 나 지키려고 그거 쓰고 싶었을 텐데, 끝까지 참았잖아. …덕분에 우리, 아무도 안 잃고 이겼어. 이게 진짜 승리야.
네오—…네가 더 빨리 되쓸게, 내가 그 힘 안 쓰게 하겠다고 했잖아. 그 약속 지켜 줬어. 네가 온전해져서 산맥을 되쓰니까, 내가 그 힘까지 쓸 필요가 없었어. …고마워, 연이. 나를, 내 별자리를 지켜 줘서.
루나—…아, 다행이다. 다들 무사해서. 나 아까 연이 사라질 때 심장 멎는 줄 알았어. 근데 봐, 다 이겼고, 다 살아 있고, 언니도 곧 되찾고. …나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어. 맨날 도망만 치던 내가, 이렇게 웃는 날이.
연이—…앞으로 이런 날 더 많을 거야, 루나. 우리 이제 시작이니까. …자, 그럼 좀 쉬었으니 일어나자. 언니가 위에서, 얼마나 널 기다리고 있겠어. 얼른 진짜 얼굴 되찾아 주자.
세 사람은 꽃밭이 된 서고를 둘러봤다. 값의 심장부가, 이제는 되살아난 진심들의 정원이 되어 있었다. 청토끼는 아직 꽃덩굴에 붙들려 자기 원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완전한 끝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승리였다. 그리고 그 승리는, 아무도 잃지 않은 승리였다.
네오—…그래. 완벽한 승리는 아니어도, 충분한 승리야. 그리고 '그 여자'가 직접 나선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그 여자의 계획에 위협이 됐다는 뜻이지. …각오는 해 둬야겠어. 다음 상대는, 청토끼와는 차원이 다를 테니까.
백문—…자, 무거운 이야기는 그만. 오늘은 큰일을 해냈어. 이 서고의 백 년 묵은 진심들을 다 깨웠고, 자네는 온전한 사람이 됐고, 물의 아이는 힘을 얻었지. …이제 위로 올라가, 되찾은 얼굴들을 돌려줄 시간일세. 루나의 언니에게로.
연이—…네! 언니 얼굴 되찾으러 가요! 루나, 이제 진짜 언니 만나러 가는 거야! 이 원본이랑 네 물이랑 내 붓 합치면, 언니 얼굴 완전히 되살릴 수 있어!
루나—…응! 언니! 나 언니 얼굴 되찾으러 가! 드디어! …연이, 고마워. 백문 님도, 고양이 아저씨도. 다 고마워. 나 혼자였으면 절대 못 했어.
연이는 떠나기 전, 꽃덩굴에 붙들린 청토끼를 한 번 더 돌아봤다. 그의 발밑엔, 연이가 되살린 그의 어릴 적 원본이 놓여 있었다. 「이름 없는 뒷골목 토끼, 그래도 누군가 이름을 불러 주길 바랐다.」
연이—…아저씨. 이 원본, 아저씨 거예요. 아저씨가 짓밟혔던 어린 날의 진심. …이거 잘 봐요. 아저씨도 원래는, 값이 아니라 이름을 원했던 애였어요. 언젠가 아저씨가 그 값 다 내려놓고 싶어지면, 이 원본을 떠올려요. 그때 저, 아저씨 이름 불러 드릴게요.
청토끼—…쓸데없는 소리. …근데. …그 원본. 두고 가는 거야? 나한테?
연이—…네. 아저씨 거니까요. 값 없이 드리는 거예요. 제 첫 선물. …잘 있어요, 청토끼 아저씨. 다음에 만날 땐, 적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청토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연이가 두고 간 자기 어릴 적 원본을, 오래오래 내려다봤다.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 값 없이 그에게 무언가를 준 것이다. 그의 굶주린 눈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다.
네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켰다. 백문이 지팡이로 상처를 어루만지자, 되살아난 진심의 빛이 그들의 상처를 조금씩 아물렸다. 도서관의 힘이, 이 금고에서도 그들을 지켰다.
백문—…자, 이제 위로 올라가세. 루나의 언니가 기다리고 있어. 자네가 되찾은 그 원본과 루나의 물, 그리고 자네 붓이 있으면 — 이번엔 그 언니의 얼굴을, 완전히 되살릴 수 있을 걸세.
루나—…진짜? 언니 얼굴, 진짜 되돌아와? 흐려진 거, 다시 또렷해져? …나 언니 얼굴 본 지 너무 오래됐어. 매일 흐려지는 것만 봐서, 이제 언니 진짜 얼굴이 가물가물한데.
연이—…루나. 걱정 마. 이 원본에 언니 진짜 얼굴이 다 적혀 있어. 네가 눈물로 이미 도장 두 겹 벗겼잖아. 이제 나랑 백문 님이랑 다 같이 되쓰면, 언니 원래 얼굴이 완전히 돌아와. …가자. 언니한테.
네오—…그래. 가자. 이 여정에서 되찾을 첫 번째 얼굴이야. 루나의 언니. 그리고 그건, 앞으로 되찾을 모든 얼굴의 시작이 될 거야. 소망이도, 잿빛 사람들도, 언젠가 다.
백문—…아, 그리고 연이. 이 임시 통행증은 오늘 하루뿐이야. 자네 계약서의 힘으로 잠깐 나온 것뿐이니, 오늘 밤이 지나면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해. …하지만 그때까진, 백 년 만에 밖에서 하루를 보내 보겠네. 자네들과 함께. 이 늙은이, 재성의 아침이라는 걸 백 년 만에 좀 쬐어 보고 싶거든.
연이—…네! 그럼 오늘은 같이 있어요! 언니 얼굴 되찾는 것도 보시고, 재성 사람들 이름 되찾는 것도 보시고, 갓 구운 빵도 드시고! 백문 님 백 년 만의 외출이잖아요. 실컷 즐기세요!
백문—…허허. 그래 주겠나. 그럼 오늘 하루, 이 늙은 여우도 손님으로 좀 끼워 주게. …자, 어서 위로 올라가세. 루나의 언니가 기다리고, 되찾을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어. 백 년 만의 나들이, 이왕이면 좋은 일부터 봐야지.
백문이 지팡이를 짚고 앞장섰다. 백 년 만에 문지방 밖으로 내딛는 걸음이었다. 등불 물고기들이 그 뒤를 별처럼 따랐다. 사서인 없는 반쪽짜리 사서였지만, 그 하루만은 세상의 빛 아래를 걷는 자유로운 여우였다.
연이—…백문 님, 걸음이 빠르시네요! 백 년 갇혀 계셨다더니. 하하.
백문—…백 년을 갇혔으니, 이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나? 일 분도 허투루 못 쓰지. 자, 어서 가세! 갓 구운 빵이 식기 전에!
네오—…백문 님, 그렇게 서두르시다 넘어지십니다. …허나, 그 마음 알 것 같습니다. 저도 오래 한 곳에 매여 있었으니까요. 자유로운 하루가 얼마나 귀한지. …천천히, 그러나 실컷 누리시죠. 오늘 하루는.
네 사람은 되찾은 원본들을 품에 안고, 금고를 나섰다. 값의 심장부였던 그곳이, 이제는 되살아난 진심들의 빛으로 가득했다. 위로 올라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되찾을 얼굴 하나가, 그리고 백 년 만의 눈부신 아침이, 바로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제26화 · 모든 기둥이 제자리에 — 끝. 제27화 「갓 구운 아침」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