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26 · 32 / 73

밀어

텅 빈 연이가 잡아당기지 말고 밀라는 말을 떠올린다. 검은 호랑이가 처음으로 명령을 어긴다.

한글 약 2,739자 · 읽는 시간 약 7분

검은 손들이 비처럼 내려왔다. 하나, 둘, 열, 백. 손가락마다 검은 실이 달려 있었고, 실 끝은 모두 한 아이를 향해 있었다.

영냥이—연이야, 일어나! 거기서 비켜!

연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고개만 들어, 내려오는 손들을 구경하듯 올려다보았다.

연이—손이 많네.

영냥이—연이야.

영냥이가 몸을 날렸다. 목덜미의 검은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그를 허공에 붙들었다. 앞발이 연이의 코앞에서 멈췄다. 한 뼘이 모자랐다.

모카—사기꾼, 일어나! 돼지가 먹힌다고!

윤달—일어나고 있어요. 다리가 안 일어나서 그렇지.

윤달은 피 묻은 손목을 셔츠로 동여매고 있었다. 구멍은 손목을 넘어 팔꿈치 쪽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첫 번째 손이 연이의 어깨에 닿았다. 손은 붙잡지 않았다. 스며들었다. 물에 잉크가 번지듯, 잿빛 털 속으로 검은 것이 천천히 번져 들어갔다.

흑월—그래. 그렇게. 비어 있는 곳은 채워지기 마련이다.

연이의 안쪽은 조용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좋아하던 것들이 놓여 있던 자리에, 이름표만 남아 있었다. 꼬치. 노래. 빵. 별 하나.

연이—다 비었네.

그런데 한쪽 구석에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운이 아니었다. 장부가 가져갈 수 없는 것. 몸에 붙은 버릇 같은 것.

젖은 연잎의 감촉. 흔들리는 나룻배. 검은 털 위에서 조여들던 금장 고리. 그리고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

지금. 잡아당기지 말고 밀어. 발이 빠져나갈 틈을 만드는 거다.

연이—밀어.

연이는 그 말을 따라 했다. 뜻은 아직 몰랐다. 그런데 이마가 먼저 기억했다. 그날 호랑이의 어깨를 밀던 감촉을.

연이가 일어섰다. 어깨로 스며들던 검은 손이 멈칫했다. 그릇이 움직일 줄은 몰랐다는 듯이.

연이는 손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영냥이 쪽이 아니었다. 친구들 쪽도 아니었다. 장부를 든 채 굳어 있는 검은 호랑이 쪽이었다.

검은 호랑이—오지 마세요. 저한테 볼일은 끝났잖아요.

연이—응. 근데 너 아파 보여.

검은 호랑이—네?

연이의 눈은 여전히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 눈이 정확히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호랑이의 오른 앞발. 장부를 쥘 때마다 한 칸씩 조여들던 금장 고리.

고리 아래 검은 털이 벗겨져 있었다. 그 밑으로 오래된 상처가 둥글게 패어 있었다. 몇 번이고 아물었다가 다시 조여진 자국이었다.

연이—그거, 저번에도 조여 있었지.

검은 호랑이—상관없는 일이에요. 물러나세요. 다치기 싫으면.

연이—다칠 운도 없어. 네가 다 가져갔잖아.

호랑이가 숨을 삼켰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얼굴이었다.

연이가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날처럼, 제 이마로 호랑이의 앞발을 밀었다. 고리를 당기지 않고, 고리와 발 사이에 틈을 만들 듯이.

검은 호랑이—무슨.

고리가 한 칸 헐거워졌다.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날 이후 처음, 고리 안에서 발이 조금 움직였다.

연이—아프면 아프다고 해. 자꾸 가격표 붙이지 말고.

호랑이의 붉은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도.

검은 호랑이—왜요. 아무것도 없으면서, 왜 남을 밀어요.

연이—몰라. 그냥, 몸이 그러래.

흑월—호랑이야.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릇을 붙잡아라. 내가 담는 동안 흔들리지 않게.

검은 호랑이—네.

호랑이는 대답했다. 그리고 앞발을 들었다. 연이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검은 손들이 만족한 듯 일제히 내려앉았다.

앞발은 연이를 붙잡지 않았다. 연이의 등을 감싸 안고, 몸 전체로 덮었다. 검은 손들이 연이 대신 호랑이의 등에 꽂혔다.

검은 호랑이—크읏.

흑월—무엇을. 하는 거냐.

검은 호랑이—저도 몰라요. 장부에 없는 일이에요.

흑월—수금원 주제에. 네 고리가 누구 손에 있는지 잊었느냐.

검은 호랑이—안 잊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아픈 거죠.

망토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호랑이는 연이를 품에 안은 채 굴렀다. 구르는 자리마다 차가운 물이 튀었다. 검은 손들이 물에 닿자 쉿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영냥이—너.

검은 호랑이—보지 마세요. 저도 지금 제가 싫으니까.

호랑이의 발에 힘이 빠졌다. 등에 박힌 손들이 아직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른 앞발의 고리가 벌을 내리듯 다시 조여들었다.

그 순간, 영냥이의 목덜미를 감은 실이 흔들렸다. 흑월의 손이 모두 호랑이에게 몰린 탓이었다. 실 한 가닥이 느슨해졌다.

영냥이가 녹슨 앞발을 휘둘렀다. 금빛은 반쯤 바래 있었지만 실 한 가닥을 끊기에는 충분했다. 하얀 고양이가 땅에 내려섰다.

영냥이—연이야. 내 말 들려?

연이—응. 들려.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아.

영냥이—흑월은 널 그릇이라고 불렀지. 담을 수 있다면 밀어낼 수도 있어. 네 안에 든 게 전부 네 것은 아니잖아.

연이—밀어.

영냥이—그래. 다들 숨을 줘라. 이 애한테.

모카—숨? 숨을 어떻게 줘!

윤달—수달 씨, 숨 수련 때 고양이님이 하던 거요. 등에 손 대고, 같이 쉬어요.

윤달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연이의 등에 손을 얹었다. 구멍 난 손이었다. 그런데 그 손에서 빨아들이는 바람 대신 따뜻한 바람이 나왔다.

모카—아, 몰라! 돼지, 내 불 가져가. 대신 나중에 꼬치 열 개야!

모카가 연이의 옆구리에 이마를 박았다. 작은 불씨가 연이의 털 속으로 옮겨 붙었다. 이번에는 꺼지지 않았다.

영냥이가 마지막으로 연이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녹 냄새와 쇠 냄새 사이로, 아주 오래된 봄 냄새가 났다.

영냥이—내 금도 가져가라. 빌린 칸이니까, 네 마음대로 써도 된다.

연이의 덩굴이 비로소 움직였다. 친구들의 숨을 한 가닥씩 받아 감았다. 불, 바람, 쇠. 텅 빈 그릇에 가장 먼저 담긴 것은 흑월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 가닥 더. 호랑이가 쓰러진 자리에서, 차갑고 축축한 숨이 흘러와 덩굴 끝에 걸렸다. 비 냄새가 났다. 호랑이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

흑월—그만둬라. 그 그릇은 내 것이다!

연이—아니. 내 거야.

연이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아주 작은 빛이었다. 운이 아니었다. 빌려 받은 숨이 비추는 빛이었다.

연이가 덩굴을 하늘로 뻗었다. 담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갔다. 불은 위로, 쇠는 앞으로, 바람은 옆으로, 비는 아래로. 다섯 갈래의 숨이 검은 원을 밀어 올렸다.

흑월—이 작은 것이 감히.

검은 원이 밀려났다. 하늘에 금이 갔던 자리, 그 틈 쪽으로. 원의 가장자리가 틈에 걸려 일그러졌다.

연이—잡아당기지 말고, 밀어!

검은 원이 틈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틈 너머에는 처음 보는 하늘이 있었다. 별이 열두 줄로 늘어선, 낯선 하늘이었다.

흑월—기억해 둬라, 그릇아. 하늘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너는, 다시 비게 된다.

틈이 닫혔다. 마지막 목소리가 꼬리처럼 끊겼다. 검은 손들이 모래처럼 흩어져 바닥에 쌓였다가 사라졌다.

해가 돌아왔다. 강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물안개 사이로 아침 같은 빛이 쏟아졌다.

연이는 강가에 주저앉았다. 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비었던 자리에 무언가가 가득 차 있는 무게였다.

[ 年 壬午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庚辰 ] 8/8

[ 時干 庚 · 빌린 칸 · 재연결 ]

글자판이 연이 앞에 떠올랐다. 여덟 칸 모두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맨 앞의 壬 자만이 여전히 검게 얼어 있었다.

글자판의 빛이 연이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분홍 털이 꽃잎처럼 흩어졌다. 앞발이 손가락이 되었다. 짧은 다리가 길어졌다.

빛이 걷혔을 때, 강가에는 스물셋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붙어 있었다. 연이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연이—손가락. 다섯 개야.

연이—잠깐, 나 돌아온 거야? 사람이야? 꿀악, 아니 꿀악 안 나와! 진짜 사람이야!

모카—돼지가 사람이었어? 왜 말 안 했어!

연이—말했잖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했잖아!

모카—돼지가 하는 말을 누가 믿어!

연이—너는 수달이잖아! 나는 수달 말도 다 믿었거든!

윤달—역시. 생년월일시를 물어보길 잘했네요. 돼지의 명식치고는 너무 사람 같더라니.

영냥이는 연이를 한 번 보고, 바로 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 귀 끝이 붉었다.

영냥이—어디 다친 덴 없어? 갑자기 바뀌어서 놀랐겠다.

연이—그걸 왜 강만 보고 물어봐. 나 여기 있는데.

영냥이—알아. 그냥… 나도 좀 놀라서.

윤달—숙녀분, 사람 된 기념으로 궁합 한 번 다시 볼까요. 이번엔 사람 대 사람으로.

영냥이—영업 종료다.

그때 볕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햇빛 속의 비였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강 건너편 바위 위에 검은 호랑이가 서 있었다. 망토는 갈가리 찢겨 있었다. 오른 앞발의 고리가 다시 꽉 조여 있었다.

연이—저기. 아까, 고마워.

검은 호랑이—고맙다는 말은 장부에 못 적어요. 적을 칸이 없거든요.

연이—그럼 적지 마. 그냥 들어.

호랑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잠깐, 사람이 된 연이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빗속에서 검은 형체가 흐려졌다. 비가 그쳤을 때, 바위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젖은 바위에 붉은 발자국 하나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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