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성의 섬의 아침이 백 년 만에 저울 소리 없이 밝았다.
원본 계약서는 주인들에게 돌아갔다. 잿빛이던 사람들에게 얼굴이 돌아오고 이름이 돌아왔다. 지하 창고의 작업대는 장작이 되었다.
연이가 금고 서고에서 되살린 진심들이, 위의 잿빛 사람들에게 하나씩 닿았다. 저울추를 밀던 「무능한 채무자」가 「세 아이의 어머니」로 돌아왔고, 골목에서 굳어 있던 「폐인」이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으로 깨어났다. 재성의 섬 곳곳에서, 이름을 되찾은 이들의 울음과 웃음이 터졌다.
한 잿빛 노인이 굳었던 몸을 풀고, 오랜만에 자기 손자의 이름을 불렀다. 저울추가 될 뻔했던 젊은 어머니가, 잿빛에서 돌아와 아이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값에 지워졌던 백 년 치 이름들이, 그날 아침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연이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금고 산맥에서 손끝으로 들었던 그 수천의 목소리 — '내 이름 돌려줘', '살려 줘' — 가, 지금 하나하나 응답받고 있었다. 연이는 산맥에서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연이—…다 돌아왔네. 그 사람들, 다 자기 이름 되찾았어. …내가 금고에서 들었던 목소리들, 하나도 안 잊었어. 이제 다들, 값이 아니라 이름으로 살 거야.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네오—…네가 한 거야, 연이. 백문 님이 백 년간 지킨 진심을, 네가 되살렸어. 이 섬 전체가, 오늘 네 덕에 다시 사람의 섬이 됐어. …값의 섬에서, 뜻의 섬으로.
연이—…우리가 한 거야, 네오. 너랑, 루나랑, 백문 님이랑. 나 혼자였으면 아무것도 못 했어. …근데 있잖아. 나 이 광경 보면서 처음으로 생각했어.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거,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이걸 하려고 온 게 아닐까 하고.
네오—…우연이 아닐지도 모르지. 완성될 사주를 가진 아이가, 하필 이 세계로 끌려온 거. 그 여자가 네 시간을 훔친 것부터가, 이미 정해진 인연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연이, 정해진 운명이라도 되쓸 수 있는 게 너잖아. 그러니 겁먹지 마.
연이—…응. 정해진 운명도 되쓴다. 그게 나야. …그러니까 그 여자가 나를 어떤 운명에 가두려 해도, 나 그거 되쓸 거야. 나도 살고, 그 여자가 부순 것들도 되살고, 다 같이 사는 운명으로. …자, 그 얘긴 나중에. 지금은 이 잔치 즐기자!
청토끼 금융그룹의 금고는 백문의 감독 아래 반환 사무소로 바뀌었다. 되찾은 원본들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아직 못 되쓴 것들을 하나씩 되살리는 곳이었다.
청토끼 본인은 종적을 감췄다. 회장님에게 돌아가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어느 뒷골목에서 압수된 저울로 빵 반죽 무게나 달며 산다는 이야기도 돌았지만, 아무도 진실은 몰랐다. 다만 연이만은, 그가 남긴 어릴 적 원본을 떠올리며 조용히 바랐다. 언젠가 그가 값이 아닌 이름으로 살기를.
연이—…청토끼 아저씨, 어디로 갔을까. 회장님이 벌줬으려나. …나 그 아저씨 미워하고 싶은데, 자꾸 그 어린 토끼 얼굴이 떠올라. 아무도 이름 안 불러 주던.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땐 적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네오—…네가 두고 온 그 원본이, 언젠가 그 자를 바꿀지도 몰라. 백 년 만에 처음으로 값 없이 받은 거니까. …사람은, 아니 토끼는, 그런 걸로 변하기도 하거든. 너처럼 남을 읽어 주는 사람 하나 만나면.
그리고 빵가게에서는, 조금 전 기적이 일어났다.
금고에서 돌아온 연이 일행은, 곧장 빵가게로 향했다. 흐려진 얼굴로 오븐 앞에 서 있던 언니에게. 연이는 되찾은 언니의 원본 계약서를 펼치고, 루나의 손을 잡았다.
연이—…루나, 준비됐지? 네 눈물이랑 내 붓이랑 합치는 거야. 이 원본에 적힌 언니 진짜 마음을, 언니 얼굴 위에 다시 써 주는 거야. …언니 진짜 얼굴, 되찾자.
루나—…응. 언니. 나 왔어. 연이랑 같이. 언니 얼굴 되찾으러 왔어. …이제 나, 언니 안 잃어.
루나가 언니의 원본에 두 손을 얹고 눈물을 떨궜다. 정화의 물이 검은 도장을 씻어 냈다. 그 위로 연이의 본필이 원문을 되썼다. 「이 사람은 동생을 지키려 스스로 담보가 됐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한 번도 값으로 매겨진 적 없다.」
물과 붓이 만나자, 언니의 흐려졌던 얼굴이 안개 걷히듯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값으로 지워졌던 이목구비가 하나씩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루나와 꼭 닮은 얼굴이,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온전하게 드러났다. 값에 팔리기 전의, 다정하게 웃던 그 얼굴로.
루나 언니—…루나. …내 동생. 나 얼굴이… 돌아왔어. 너 얼굴이 이제 또렷하게 보여. …그동안 흐릿한 눈으로 너를 봐서, 미안했어.
루나—…언니! 언니 진짜 얼굴이다! 나 이거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매일 흐려지는 것만 봐서, 언니 원래 얼굴 잊어버릴까 봐 무서웠는데! …돌아왔어! 언니가 돌아왔어!
자매가 부둥켜안았다. 백 년을 짓눌렸던 얼굴이, 백 년을 기다린 동생의 품에서 마침내 웃었다. 연이는 그 광경을 보며, 이 여정에서 얻은 어떤 별보다 이 순간이 값지다고 생각했다. 되찾은 얼굴 하나. 그것이 이 모든 싸움의 이유였다.
연이—…됐다. 루나, 언니 되찾았어. 우리 해냈어. …이게 내가 도서관에서 배운 걸 처음으로 진짜 사람한테 쓴 거야. 값에 지워진 얼굴을, 사랑으로 되찾은 거.
그리고 빵가게에서는, 그 기적의 여운이 아직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
오븐 앞에 선 언니의 귀는 이제 머리띠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흰 털의 진짜 귀였다.
계약서가 불타던 순간부터, 담보로 잡혔던 형상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얼굴의 그늘이 걷히고,
눈가에 볕이 들고,
마침내 루나와 꼭 닮은 얼굴이 밀가루를 묻힌 채 활짝 웃었다.
루나 언니—자! 갓 구운 빵이에요! 오늘은 전부 공짜, 아니 전부 선불 완납! 여러분이 이미 값을 치르고도 남았으니까요!
루나—언니 얼굴 돌아왔다! 내 말 맞지, 나랑 똑같이 생겼지? 예쁘지?
연이—응, 둘이 완전 붕어빵이야. 아니, 토끼빵인가.
루나—토끼빵! 그거 좋다! 언니, 우리 신메뉴로 토끼빵 만들자! 자매 얼굴 모양으로! …근데 연이 너도 이제 인간이니까, 사람빵 만들어 줄게. 삼각김밥 모양으로? 히히.
연이—삼각김밥 모양 빵?! 그건 좀 이상한데… 아니, 근데 은근 먹고 싶다. 루나 너 천재야. …아, 맞다. 나 이제 손가락 열 개니까, 빵 만들기 도와줄 수 있어! 꽃돼지 발굽으론 반죽도 못 했잖아.
루나 언니—어머, 그럼 연이 씨 반죽 담당! 손가락 열 개로 조물조물! …오늘은 잔치니까 다 같이 만들어요. 되찾은 이름들이랑, 갓 구운 빵이랑, 다 같이.
연이는 오랜만에 사람 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조물거렸다. 꽃돼지였을 땐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열 손가락 사이로 반죽이 삐져나오는 감촉이, 이상하게도 눈물 나게 반가웠다. 인간으로 돌아온다는 건, 이런 작은 것들을 되찾는 거였다.
연이—…이상하다. 반죽 만지는데 왜 눈물이 나지. …아, 나 이거 그리웠구나. 손가락으로 뭔가 만드는 거. 꽃돼지 땐 못 했으니까. …사람으로 돌아온 게, 이렇게 실감 나네. 작은 거 하나하나가.
네오—…돌아온 걸 축하해, 연이. 근데 반죽은 좀 뭉쳤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맞아? …나도 앞발로는 못 하니까 잘 모르겠지만.
연이—야! 파수꾼이 반죽 훈수 두네! 너 앞발로 해 볼래? 못 하지? 그럼 조용히 해! …아, 근데 진짜 뭉쳤다. 언니, 이거 어떻게 풀어요?
골목이 다시 웃음으로 가득 찼다. 인간 연이의 서툰 반죽, 네오의 앞발 훈수, 루나의 토끼빵 아이디어. 값이 지배하던 섬이, 이제는 이런 소소한 웃음이 오가는 곳이 됐다. 연이는 이 평범한 행복이, 자기가 되찾은 가장 값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게 앞 골목에 긴 상이 차려졌다. 섬 사람들이 저마다 되찾은 이름으로 인사를 나눴다. 백문은 구석에서 빵을 아홉 개째 먹으며 백 년 치 식욕을 채우는 중이었다.
모카도 소식을 듣고 식상의 섬에서 한걸음에 달려왔다. 마이크 대신 빵을 손에 쥐고서.
모카—연이야! 해냈다며?! 재성의 청토끼를 잡았다며?! 우와, 내가 아는 그 겁쟁이 꽃돼지가 맞아? …아, 이제 사람이지. 히히, 인간 연이도 귀엽네!
연이—모카! 너 어떻게 알고 왔어! …아, 맞다. 나 이제 사람이야. 네가 '네 노래도 부르라'고 했던 거, 나 이제 부를 수 있을 것 같아. 온전해졌거든.
모카—오오! 그럼 언젠가 우리 같이 무대 서자! 인간 연이랑 수달 모카의 콜라보! …근데 그 전에, 이 빵 먹어 봤어? 언니가 구운 거, 진짜 미쳤어. 이거 랩으로 리뷰해야겠다. '갓 구운 아침, 입에서 녹는 사랑, 값을 못 매기는 이 맛!'
루나 언니—어머, 손님 랩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그럼 랩 값으로 빵 하나 더! 오늘은 전부 무료니까요!
모카—무료?! 언니 최고! …근데 무료면 나 열 개 먹을 건데 괜찮아요?
루나—백문 할아버지가 이미 아홉 개 드셨어요! 손님도 마음껏! 오늘은 값 안 매기는 날이니까!
골목은 웃음과 빵 냄새로 가득 찼다. 값이 지배하던 섬이, 하루 만에 나눔의 섬이 됐다. 되찾은 이름들이 서로를 부르고, 갓 구운 빵이 오갔다. 연이는 그 한복판에서, 이 세계에 와서 본 가장 따뜻한 광경을 눈에 담았다.
한 되살아난 노인이 연이의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저울추가 될 뻔했던 그였다. 「고맙습니다. 제 이름을 되찾아 줘서. 백 년 만에, 제 손자가 저를 '할아버지'라고 불러 줬어요.」 연이는 그 손을 마주 잡고, 함께 울었다.
연이—…할아버지. 그거예요. 값으로는 그 '할아버지' 한마디를 못 사요. 이제 그거, 매일 들으세요. 아무도 못 뺏어 가요. 제가 원본을 되쓸 때 확실히 못 박아 놨거든요. 「이 사람은, 누군가의 소중한 할아버지다」라고.
곳곳에서 비슷한 재회가 이어졌다. 잃었던 이름을 되찾은 이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백 년 만에 제 이름으로 불렸다. 연이는 문득 백문이 도서관에서 한 말을 떠올렸다. '남을 살리는 자는, 그 살림으로 자기도 산다.' 남을 살린 이 순간, 연이 자신도 어느 때보다 살아 있음을 느꼈다.
네오—…이 광경, 눈에 담아 둬, 연이. 앞으로 힘든 싸움이 올 거야. 그 여자를 만나고, 무서운 진실도 마주하게 되겠지. 근데 그때, 오늘 이 광경을 떠올려. 네가 왜 싸우는지, 이 얼굴들이 답해 줄 테니까.
연이—…응. 이게 내 답이야. 이 얼굴들. 되찾은 이름들. …백문 님이 물었잖아. 왜 싸우는가. 나 이제 확실히 알아. 이런 얼굴들을 더 많이 만들려고. 값에 지워진 이름들을, 하나라도 더 되살리려고. 그게 내가 싸우는 이유야.
그때, 되찾은 섬 사람들이 하나둘 잔을 들었다. 빵집 언니가 앞장서, 갓 구운 빵 하나를 높이 들어 올렸다.
루나 언니—…여러분! 오늘 이 아침이 있게 해 준 사람에게, 다 같이 감사를! 우리 이름을 되찾아 주고, 이 섬을 값에서 구해 준 여행자, 연이 씨에게!
골목 가득 함성이 터졌다. 「연이!」 「고마워요!」 「우리 이름 지켜 줘서!」 되찾은 백 년 치 이름들이, 일제히 연이의 이름을 불렀다. 연이는 그 소리에,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연이—…아니에요. 저 혼자 한 거 아니에요. 네오랑, 루나랑, 백문 님이랑, 여러분 원본에 담긴 진심이랑. 다 같이 한 거예요. …근데, 근데 고마워요. 제 이름을 이렇게 불러 줘서. 저야말로, 여러분 덕에 제가 누군지 알게 됐어요.
모카—자자, 그럼 이 감동을 랩으로! '값에 진 섬, 뜻으로 부활! 연이의 붓이 이름을 되살렸다! 재성은 이제 나눔의 섬! 예이!'
모두가 웃으며 박수를 쳤다. 값이 지배하던 재성의 섬이, 이제는 노래와 웃음이 흐르는 섬이 됐다. 연이는 이 광경을 마음 깊이 새겼다. 앞으로 어떤 어둠이 와도, 오늘 이 아침이 자기를 지켜 줄 등불이 될 거라고 믿으며.
연이—…이 아침, 절대 안 잊을게요. 여러분 이름도, 이 웃음도, 이 빵 냄새도. 다 품고 갈게요. 그리고 더 강해져서 돌아올게요. 아직 못 되찾은 이름들, 소망이랑, 백문 님 사서인이랑, 다 되찾으러.
연이—…아, 맞다! 나 이제 사람이니까 폰 쓸 수 있지! 다들 모여 봐요! 이 순간, 사진으로 남길게요! 하나, 둘, 셋—
연이가 폰을 들어 올리자, 되찾은 이름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빵집 언니와 루나, 모카, 그리고 저만치서 어색하게 서 있던 네오까지. 찰칵. 재성의 섬 백 년 역사상 처음으로, 웃는 얼굴들만 담긴 사진 한 장이 찍혔다.
연이—…봐, 다들 웃고 있어. 값에 지워졌던 얼굴들이, 이렇게 환하게. …이 사진, 집에 가서 힘들 때마다 볼 거예요. '내가 왜 싸우는지' 잊어버릴 때마다. 그럼 다시 힘이 날 거예요.
모카—오, 나 잘 나왔어? 다음 앨범 커버로 써도 돼? '재성의 부활 - feat. 연이'! 히히!
루나—나도! 나도 잘 나왔어? 연이, 그 사진 나한테도 보내 줘! 언니랑 나랑 같이 나온 거, 우리 집에 걸어 둘래!
연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세계를 잇는 우체통으로, 이 사진을 다 같이 나눠 갖기로 했다. 어느 세계에 있든, 이 아침의 웃음을 서로 간직할 수 있도록. 되찾은 이름들의, 되찾은 웃음이 담긴 한 장을.
네오—…나는 왜 저 구석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거지. …다음엔 좀 더 앞에서 찍어. 파수꾼의 위엄이 안 산다.
연이—파수꾼님, 사진에선 위엄보다 미소예요! 다음엔 웃어! 알았지? …자, 그럼 오늘은 이만. 내일 아침, 집으로 갈게요. 다들, 정말 고마웠어요.
루나—…연이. 내일 아침에 나 배웅하러 갈게. 부두로. …아, 벌써 눈물 나려고 해. 아니야, 안 울 거야. 잠깐 가는 거잖아. 금방 올 거잖아. …그치?
연이—…응. 금방 올게. 약속. 그러니까 울지 마, 루나. 우리 웃으면서 헤어지자. 어차피 앱으로 매일 볼 건데. …오늘 이 사진처럼, 웃는 얼굴로.
그렇게, 재성의 섬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갔다. 되찾은 이름들의 웃음소리가 골목에 오래 남았다. 백문은 도서관으로,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연이는 빵집 이 층 손님방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창밖으로, 별이 총총한 재성의 하늘이 평화롭게 빛났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별들 너머 아주 먼 곳에서는, 검은 명반이 소리 없이 돌기 시작했다. 별들의 궁이, 그 완성된 그릇을 향해 인력을 뻗고 있었다. 연이가 누린 이 따뜻한 밤은, 폭풍 전의 마지막 고요였다.
연이—(…이상하다. 이렇게 행복한데, 왜 자꾸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지. …아니야. 오늘은 그냥, 이 행복만 생각하자. 어둠은, 올 때 마주하면 되니까. 나 이제, 흔들리지 않으니까.)
연이는 갓 구운 빵의 온기를 품에 안고 잠들었다. 되찾은 이름들, 자매의 재회, 백문의 웃음, 노을 아래 네오의 옆얼굴. 이 모든 따뜻함을 마음 깊이 새긴 채. 그것이, 다가올 별들의 궁의 어둠 속에서 연이를 지켜 줄 마지막 등불이 될 것이었다.
연이—…이게 진짜 재성의 섬이었구나. 값이 아니라, 나눔의 섬. 청토끼가 백 년간 이걸 덮어 놨던 거야. …이제 이 섬 사람들, 다시 이렇게 살 거야. 서로 값 안 매기고, 이름 부르면서.
네오—…네가 되돌린 거야. 값의 규칙을 뜻으로 되쓴 거지. 백문 님이 백 년을 못 한 걸, 넌 며칠 만에. …참, 무서운 아이야. 좋은 의미로.
루나가 잔치 한켠에서, 새로 깨운 물의 힘을 연이에게 자랑스레 보여 줬다. 아까보다 훨씬 또렷한 물줄기가, 공중에서 작은 물고기 모양을 그렸다. 도서관의 등불 물고기를 닮은, 맑은 물의 조각이었다.
루나—연이, 이것 봐! 나 이제 물로 모양도 만들 수 있어! 아까 청토끼랑 싸우고 나서, 힘이 확 늘었어! …봐, 물고기야! 백문 할아버지 도서관 물고기 닮았지?
연이—…우와, 루나! 물로 물고기를 빚네! 너 진짜 재능 있다. …있잖아, 내가 도서관에서 배운 건데. 물은 정화하고, 흐르고, 유연하게 감싸는 힘이래. 무성이라는 존재는 오염된 물을 쓴다는데, 넌 정반대야. 맑은 물. 그러니까 너, 언젠가 그 무성이랑 만나면 천적일지도 몰라.
루나—…내가 누군가의 천적?! 겁 많은 배달 토끼 루나가?! 히히, 멋지다! 나 더 연습할게. 다음에 연이 너 올 때까지, 물의 힘 완전 마스터할 거야. 그래서 같이 싸우는 거야!
네오—…든든하군. 겁 많던 배달 토끼가, 이제 든든한 전우가 됐어. …루나, 그 힘 소중히 키워. 언젠가 그 맑은 물이, 아주 중요한 순간에 세상을 구할지도 모르니까.
연이는 물고기를 빚는 루나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재성에서 처음 만났을 때, 겁에 질려 골목에 숨어 있던 그 아이가. 이제는 물의 힘으로 물고기를 빚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 아이의 성장이, 연이에게는 그 어떤 승리보다 뿌듯했다.
백문—…도서관에도 오븐을 하나 들여야겠군. 지식은 아무리 읽어도 배가 안 부르더란 말이야. 통탄할 일일세.
루나—백문 할아버지, 그거 벌써 아홉 개째예요! 도서관에선 대체 뭘 드시고 사셨어요?
백문—…글자를 먹었지. 배는 안 부르고 눈만 밝아지더군. 그래서 이 늙은 여우가 눈만 반짝이고 배는 늘 홀쭉했던 걸세.
루나—불쌍해! 열 개째도 드세요, 이건 서비스!
백문—…허허. 백 년 만에 이런 대접이라니. 눈물 나는군. 실은 이 늙은이, 도서관에서 백 년간 등불 물고기가 떨군 종이 비늘로 부친 전병만 먹었거든. 종이 맛이었지. 근데 이 빵은… 이건, 살아 있는 맛이야. 밀가루에 사람 온기가 배어 있어.
연이—백문 님, 종이 비늘 전병 드시면서 백 년을. …이제 진짜 도서관에 오븐 하나 들여야겠어요. 제가 집에서 빵 레시피 찾아서 보내 드릴게요. 우체통으로.
백문—…허허, 그래 주겠나?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이 늙은이가 살아갈 낙이 생기는군. 제자가 보내 준 레시피로 빵을 굽는 사서라니. …나쁘지 않아. 아니, 아주 좋아.
모카—백문 할아버지, 빵 구우면 저도 초대하세요! 제가 무대에서 홍보해 드릴게요. '도서관 빵집, 백 년 묵은 사서의 손맛!' 대박 날 거예요!
백문—…허허, 홍보라. 자네들과 있으니 이 늙은이가 별 상상을 다 하는군. 도서관 빵집이라니. …좋아, 사서인을 되찾고 이 문지방을 나서는 날, 정말로 차려 보지. 자네들 다 초대하고.
백문은 잔치 내내, 백 년 만의 바깥 공기를 아이처럼 만끽했다. 햇볕을 손바닥으로 받아 보고, 바닷바람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고, 골목의 아이들이 뛰노는 걸 오래 바라봤다. 문지방 안에서 백 년을 갇혀 있던 사서에게, 이 평범한 하루는 기적 그 자체였다.
백문—…연이. 자네는 모를 걸세. 이 햇볕이, 이 바람이, 이 아이들 웃음소리가 얼마나 귀한지. 백 년을 잃고 나서야, 나는 이 평범한 것들의 값을 알았어. …자네도 잊지 말게.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한지.
연이—…네, 백문 님. 저도 이제 알아요. 꽃돼지 몸으로 섬을 세 개 건너고 나서야, 사람 손으로 반죽 만지는 게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됐거든요. …평범한 것들이, 사실은 제일 값진 거였어요.
백문—…그래. 그걸 아는 아이는 흔들리지 않아. 값에도, 시계에도. …자, 이 늙은이는 이 귀한 하루를 좀 더 즐겨야겠네. 저 아이들이랑 공놀이나 한판 해 볼까. 백 년 만에.
백문이 지팡이를 내려놓고 골목의 아이들 틈에 끼어 어색하게 공을 굴렸다. 백 년 묵은 대사서가, 아이처럼 웃었다. 연이는 그 광경을 보며, 이 여정이 백문에게 준 선물이 자기가 받은 것 못지않게 크다는 걸 알았다.
골목엔 웃음이 넘쳤다. 백 년을 혼자 침묵하던 노(老)사서가, 처음으로 미래를 상상하며 웃었다. 값에 짓눌렸던 섬이, 이제는 웃음과 상상으로 가득 찼다. 연이는 그 광경이, 자기가 되쓴 어떤 원본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제일 크고 둥근 빵 하나를 따로 싸서 연이의 품에 안겼다. 아직 온기가 남은, 회복의 맛이 나는 빵이었다.
루나 언니—가져가요. 여행자 몫이에요. 그리고… 동생을 지켜 줘서, 저를 다시 구워 줘서 고마웠어요.
루나 언니—이제 숨기는 것 없이 살 거예요. 주문서도 장부도 마음도, 전부 루나랑 같이 보면서요.
루나 언니—…그리고 연이 씨. 이 빵 레시피, 백문 할아버지 도서관에도 보내 드릴게요. 도서관에 오븐 들이신다면서요? 갓 구운 빵 냄새 나는 도서관이라니, 상상만 해도 좋네요.
연이—…네! 그거 좋겠다. 백문 님이 종이 비늘 전병만 백 년 드셨대요. 언니 빵 레시피면, 백문 님 인생이 바뀌실 거예요.
루나 언니—…어머, 백 년을 종이 전병만. 불쌍해라. 그럼 제가 특별히 '백 년 굶은 사서를 위한 든든 통밀빵' 레시피 개발해서 보내 드릴게요. 소망이라는 아이 찾으면, 그 애 몫도 꼭 챙기고요.
연이—…언니, 소망이 이야기 들으셨구나. …네. 꼭 찾을 거예요. 그 애도 언니처럼, 백 년을 갇혀 있었거든요. 찾으면, 언니가 갓 구운 빵 하나 쥐여 주세요. 그게 그 애한테 제일 필요한 걸 거예요.
루나 언니—…당연하죠. 갇혔던 아이한테는, 따뜻한 빵 하나가 백 마디 위로보다 나으니까요. 저도 그랬거든요. …찾으면 꼭 데려와요, 연이 씨. 이 빵집은, 갇혔던 이들이 돌아오는 집이 될 거예요.
루나 언니—…연이 씨. 앞으로 더 힘든 싸움이 온다고 들었어요. 그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제가 언니로서, 아니 백 년 산 사람으로서 하나만 말해도 될까요?
연이—…네, 언니. 말씀하세요. 저 언니 말이라면 다 들을게요.
루나 언니—…그 여자, 갖고 싶은 걸 위해서라면 세상도 다 적으로 돌린다면서요. …저는 그 마음, 잘 모르겠어요. 저도 루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했지만, 그건 제가 내주는 거였지 남의 걸 뺏는 게 아니었거든요. …사랑은 내주는 거고, 욕심은 뺏는 거예요. 그게 저랑 그 여자의 차이예요.
루나 언니—…사랑이 크면, 그 사랑으로 남을 해치고 싶은 유혹이 와요. '내 사람만 지킬 수 있다면 남이야 어떻든'이라는. …그 여자는 그 유혹에 졌고, 저는 이겼어요. 아슬아슬하게. …연이 씨, 그 여자를 만나면 미워하기보다, 그 갈림길을 보여 줘요. '당신도 멈출 수 있었다'고. 그게 그 여자를 구하는 길일지도 몰라요.
연이—…언니. …그 말, 백문 님도 비슷하게 하셨어요. 미워하기 전에 읽으라고. 근데 언니 말이 더 와닿아요. 언니도 같은 갈림길에 섰던 사람이니까. …고마워요, 언니. 그 여자를 만나면, 꼭 그 갈림길을 보여 줄게요. '당신도 다른 길을 갈 수 있었다'고.
루나 언니—…그래요. 연이 씨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남의 밑바닥을 읽는 눈을 가졌으니까. …자, 무거운 얘긴 여기까지. 오늘은 웃는 날이에요. 빵 더 드세요! 사랑은 배부를 때 더 잘 하는 거예요!
루나—당연하지! 회계 담당은 나! 배달도 나! 시식도 나!
연이—시식 담당은 원래 내 자린데. 아쉽다, 꽃돼지 은퇴하는 바람에.
웃음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연이는 사람의 손으로 빵을 받아 들고, 그 무게가 어떤 금화보다 묵직하다고 생각했다.
루나의 언니가 잠깐 연이를 조용한 곳으로 이끌었다. 백 년 만에 되찾은 눈으로, 연이를 찬찬히 바라봤다.
루나 언니—…연이 씨. 제가 흐려진 눈으로 있을 때도, 당신 목소리는 기억해요. 우리 루나를 지켜 주고, 저를 다시 구워 준 사람. …제가 담보로 잡힐 때, 제일 무서웠던 게 뭔지 알아요? 죽는 게 아니라, 루나가 이 섬에서 혼자 남는 거였어요.
연이—…알아요. 저 그 마음 읽었어요. 원본에 적혀 있었거든요. '동생만은 지키고 싶다'고. …언니가 루나 얼마나 사랑하는지, 저 다 봤어요.
루나 언니—…그런데 이제 안 무서워요. 루나 곁에 당신이 있으니까. 그리고 루나가 이렇게 강해졌으니까. …연이 씨. 우리 루나 좀,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그 애, 겉으론 씩씩한데 속은 아직 여려요.
연이—…네. 당연하죠. 루나는 이제 제 소중한 친구인걸요. 그리고 언니, 걱정 마세요. 루나 이제 안 여려요. 오늘 청토끼 앞에서 물의 힘으로 저 지켜 준 애예요. 언니 지키겠다고, 겁 하나도 안 내고.
루나 언니—…우리 루나가요? …그 겁 많던 애가. …아, 정말. 눈물 나네. 제가 없는 동안, 그 애가 이렇게 컸구나. …고마워요, 연이 씨. 우리 자매한테, 당신은 정말…
연이—…아니에요, 언니. 저야말로 고마워요. 언니랑 루나 덕분에, 저 이 세계에서 '지킬 사람'이 생겼어요. 그게 저를 여기까지 오게 했어요. …우리, 앞으로도 계속 봐요. 제가 집에 돌아가도, 꼭 다시 올게요.
연이—네오. 아까 금고에서 갈기가 금빛으로 빛났잖아. 그거 뭐야?
네오—…과식이야.
연이—과식하면 사람이 빛나? 그럼 우리 과 애들은 다 등대게? 됐어, 말 안 해도 돼. 대신 하나만 약속해.
연이—언젠가 말할 수 있게 되면, 제일 먼저 나한테 말해 줘. 늦어도 괜찮으니까. 그때까지 기다릴게.
네오—…연이. 오늘 청토끼가 그러더라. 다음엔 '그 여자'가 직접 온다고. …그 여자를 만나면, 아마 나에 대해서도 알게 될 거야.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내가 뭘 되돌리려 하는지. …그때가 오면, 네가 나를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연이—…내가 널 미워한다고? 왜? 네가 뭘 했든, 나 너 안 미워해. 넌 나를 여기까지 지켜 준 사람인데.
네오—…아니야. 넌 아직 몰라. 내가 감춘 게, 네 생각보다 훨씬 무거워. …하지만 이것만은 믿어 줘. 내가 한 모든 일은, 결국 너를 지키기 위한 거였다는 걸. 설령 그게, 너를 아프게 하는 진실이더라도.
연이—…네오. 나 이제 본뜻 읽는 사람이야. 겉이 아니라 속을 봐. 그러니까 네가 뭘 감췄든, 나 그 밑에 깔린 진짜 마음을 볼 거야. 그게 '연이를 지키려는 마음'이라면, 나 절대 널 미워 안 해. …약속할게. 무슨 진실이 나와도, 먼저 네 마음부터 읽을게.
네오—…고맙다, 연이. 그 말 하나로… 이 무거운 걸 조금 더 짊어질 수 있겠어. …자, 이제 곧 너는 집으로 돌아갈 거야. 사주도 완성됐으니, 돌아갈 문이 열릴 거고. …그 전에, 이 순간을 기억해 둬. 오늘 이 웃음을. 어떤 진실이 와도, 오늘은 진짜였으니까.
연이—…응. 기억할게. 오늘 이 아침. 갓 구운 빵 냄새랑, 되찾은 이름들이랑, 언니 웃음이랑, 네 옆얼굴이랑. 다. …근데 네오, 나 집에 돌아가도 너 자주 볼 거야. 앱으로든 뭐로든. 우리 이거 끝이 아니야.
네오는 한참 수평선을 보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얼굴이 어딘가 그리움을 닮아 있었다. 무언가 아주 소중한 것을, 곧 잃을 사람의 얼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이는 그때, 그 그리움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했다.
잔치 끝, 연이는 백문에게 소망이 원본을 꺼내 보였다. 금고에서 되찾은, 백 년 묵은 그 얇은 계약서를.
연이—백문 님. 이거요. 금고 산맥에서 찾았어요. 왼손목에 등불 물고기 점 있는 아이. …소망이 원본이에요. 아직 도장이 두꺼워서 지금 있는 곳까지는 안 읽히는데, 제가 천천히 되쓰면 나올 거예요.
백문—…! …소망이. …백 년을 찾은 그 아이 흔적을, 자네가. …고맙네, 연이. 백 년 만에 처음으로, 그 아이가 아직 이 세상 어딘가 있다는 증거를 손에 쥐어 보는군. …이 원본, 자네가 지녀 주게. 자네 붓이라야 이걸 완전히 되쓸 수 있으니.
연이—…네. 꼭 되쓸게요. 소망이가 어디 있는지 나오면, 제일 먼저 백문 님한테 알릴게요. 그리고 같이 데리러 가요. …백문 님 사서인도 아직 못 찾았잖아요. 그것도 꼭 되찾아 드릴게요.
백문—…사서인은 청토끼 금고에 없었지. 아마 그 여자, 회장님이 직접 가지고 있을 걸세. 청토끼에게 시계를 빌려줄 때, 내 사서인도 함께 담보로 챙겼을 테니. …그러니 내 사서인을 되찾으려면, 결국 그 여자를 마주해야 해. 위험한 길이야.
연이—…그럼 어차피 만나야 하네요, 그 여자를. 제 태어난 시간도 이미 되찾았으니, 그 여자가 절 찾아올 거고. 백문 님 사서인도 그 여자한테 있고. …좋아요. 도망 안 쳐요. 만나서, 그 여자 마음도 읽고, 사서인도 되찾고, 다 해결할게요.
백문—…무모하리만치 씩씩하군. 하지만 명심하게. 그 여자는 청토끼와는 격이 달라. 시간 그 자체를 다스리는 자야. 준비 없이 마주하면 위험해. …자네가 집으로 돌아가 잠깐 쉬면서 힘을 회복하는 게 좋겠어. 그 여자는, 자네가 준비됐을 때 어차피 찾아올 테니.
연이—…네. 저 사실, 집도 그리워요. 삼각김밥도, 자취방도. 잠깐 돌아가서 쉬고 싶어요. …근데 백문 님, 걱정 마세요. 저 집에 가도 이 세계 안 잊어요. 여기 제 사람들 다 있는데. 힘 회복하면, 꼭 다시 올게요.
백문—…그래. 사주가 완성됐으니, 이제 자네는 두 세계를 오갈 수 있어. 완성된 사주는 문이자 열쇠거든. …자,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하게. 이 아침을, 이 웃음을 품고. 어떤 어둠이 와도, 오늘을 기억하면 자네는 흔들리지 않을 걸세.
연이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루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물빛 머리를 흔들며, 애써 씩씩한 척했지만 눈가가 벌써 붉었다.
루나—…연이, 집에 가는 거야? 진짜? …아, 알아. 너 집 그리워했잖아. 삼각김밥이랑. …근데, 근데 나 벌써 보고 싶어질 것 같아. 너 없으면 나 심심할 텐데.
연이—…루나. 나 아주 가는 거 아니야. 잠깐 쉬러 가는 거야. 힘 회복하면 꼭 다시 올게. 그리고 앱으로 계속 연락할 수 있어. 백문 님 우체통이 두 세계를 이어 주니까. 매일 알림 보낼게. '오늘도 이상 없음'이라고.
루나—…진짜? 그럼 나도 매일 보낼게! '언니 빵 오늘도 맛있음'이라고! …그리고 연이, 다음에 올 땐 나 더 강해져 있을 거야. 물의 힘, 더 키워 놓을게. 그때 같이 그 여자랑 싸우자. 나도 이제 도망 안 쳐.
연이—…응. 약속. 그때 같이 싸우자. 물의 배달 토끼 루나랑, 인간 연이랑. …루나, 너 이번에 진짜 멋있었어. 겁 많던 애가, 나 지키겠다고 물의 힘까지 깨웠잖아. 나 너 진짜 자랑스러워.
루나—…히잉. 눈물 나. …고마워, 연이. 나 이 세계에서 나고 자라서 늘 값에 쫓기기만 했는데. 너 만나고, 처음으로 값 말고 다른 걸 배웠어. 지키는 거. 사랑하는 거. …너 아니었으면 나 아직도 도망만 쳤을 거야.
연이는 루나를 꼭 안아 줬다. 재성의 뒷골목에서 자기를 숨겨 준 겁 많은 배달 토끼가, 이제는 물의 힘을 깨운 든든한 전우가 되어 있었다. 이 아이를 위해 싸운 것이, 연이의 여정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였다.
모카—야야, 나도 껴 줘! 나도 작별 인사! …연이, 집 가서도 무대 잊지 마. 언젠가 우리 콜라보 하기로 한 거! 그리고 힘들면 랩으로 풀어. 삼킨 말은 체하고, 꺼낸 말은 무대가 되니까!
연이—…모카 너 진짜. 마지막까지 랩이네. 알겠어, 힘들면 꺼낼게. 다 꺼낼게. …다들 고마워. 재성에서, 나 진짜 많이 배우고 가. 값이 아니라 뜻으로 사는 법.
떠나기 전, 연이는 부두 끝에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비겁의 섬에서 거울 속 자신과 마주하고, 식상의 섬에서 삼킨 말을 꺼내고, 재성의 섬에서 값에 졌다가, 인성의 도서관에서 뜻을 배우고, 다시 재성으로 돌아와 이겼다. 겁먹은 인간에서 겁먹은 꽃돼지로, 그리고 곧은 사람으로.
연이—…처음엔 그냥 집에 가고 싶었어. 이 이상한 세계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어. 근데 지금은… 이 세계가, 이 사람들이, 다 소중해. 여기서 나 진짜 많이 자랐어. 남을 읽는 법도, 남을 지키는 법도,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네오—…처음 만났을 때 넌, 자기 얼굴 잃었다고 세상 무너진 듯 울던 애였어. 근데 지금 넌, 남의 얼굴을 되찾아 주는 사람이야. …멀리 왔다, 연이. 정말 멀리. 그리고 이 여정은, 아직 안 끝났고.
연이—…응. 아직 안 끝났어. 그 여자도 만나야 하고, 소망이도 찾아야 하고, 백문 님 사서인도 되찾아야 해. …근데 무섭지 않아. 나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너희가 다 여기 있으니까. …자, 그럼 잠깐 다녀올게. 집에. 금방 올게.
연이는 지나온 섬들을 향해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 세계가 자기에게 준 모든 것에 대한 감사였다. 그리고 그 감사를 품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잠깐의 쉼, 그리고 다시 시작될 더 큰 싸움을 위해.
해가 기울자, 백문의 몸에 다시 등불 물고기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임시 통행증의 하루가 저무는 것이었다. 백 년 만의 나들이가, 끝나 가고 있었다.
백문—…이제 돌아갈 시간이군. 하루가 참 짧았어. 백 년 만의 하루가, 이렇게 눈 깜짝할 새라니. …하지만 이 하루, 백 년보다 값졌네. 되찾은 얼굴들, 웃음소리, 갓 구운 빵. …고맙다, 연이. 이 늙은이에게 세상의 빛을 다시 보여 줘서.
연이—…백문 님. 벌써 가세요? …아, 통행증이 하루뿐이라고 하셨죠. …꼭 사서인 되찾아 드릴게요. 그럼 하루가 아니라, 영영 밖에 계실 수 있으니까. 그때 진짜로, 도서관 빵집 차려요.
백문—…그 약속, 품고 기다리겠네. 자네가 원본을 되쓸 때마다, 문지방 안에서도 내 힘이 자네 붓에 실릴 걸세. …그리고 소망이 원본, 천천히 되쓰다 그 아이 있는 곳이 나오면 꼭 알려 주게. …자, 잘 있게. 나의 첫 제자. 그리고 반드시, 몸조심하고.
백문의 몸이 빛으로 흩어지며 아래로 스며들었다.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사라지는 그의 얼굴엔, 백 년 만에 처음 짓는 평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세상의 빛을 하루나마 다시 본 자의,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연이—…백문 님, 도서관으로 돌아가셨네. 외롭지 않으실까. …얼른 사서인 되찾아 드려야지. 그리고 소망이도 꼭 찾아서, 두 분 다시 만나게 해 드릴 거야. …자, 나도 이제 집에 갈 준비 하자.
해가 완전히 지고, 잔치가 잦아들 무렵. 연이는 다시 부두 끝에서 네오를 찾았다. 붉게 물든 수평선을 배경으로, 은빛 사자가 홀로 서 있었다. 늘 그렇듯, 앞이 아니라 이번엔 옆에.
연이—…네오. 나 내일 아침에 집에 가. 사주 완성됐으니까, 앱으로 문이 열릴 거래. …잠깐 쉬고 올게. 근데 왠지, 다시 왔을 땐 지금이랑 많이 다를 것 같아. 그 여자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오—…그래. 아마 그럴 거야. 다음에 만나면, 우린 별들의 궁으로 가게 될 거야. 그 여자가 있는 곳. …연이. 거기서 넌, 내가 감춘 진실을 알게 될지도 몰라. 그때… 오늘 이 순간을 기억해 줘. 우리가 나란히 서서, 같은 노을을 본 이 순간을.
연이—…응. 기억할게. 근데 네오, 나 몇 번을 말해. 네가 무슨 진실을 감췄든, 나 너 안 미워해. 나 이제 남의 밑바닥 읽는 사람이야. 네 밑바닥엔 '연이를 지키려는 마음'뿐인 거, 나 다 봤어. 그러니까 그런 슬픈 얼굴 하지 마.
네오는 대답 대신, 아주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끝엔 여전히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 걸려 있었다. 연이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아, 함께 노을을 봤다. 굳이 말이 필요 없는 밤이었다. 다만 연이는 알지 못했다. 그 노을이, 이 평화로운 시간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연이—…네오. 우리 이거 다 끝나면, 진짜로 우리 집 와. 삼각김밥 사 줄게. 크루아상도. 그리고 이렇게 노을 같이 보자. 매일. …약속.
네오—…약속. …그런 날이, 정말 오면 좋겠다. 진심으로.
두 사람은 노을이 완전히 저물 때까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되찾은 재성의 섬이, 별빛 아래 평화롭게 잠들어 갔다. 연이의 여정에서, 가장 고요하고 따뜻한 밤이었다.
같은 시각, 어디도 아닌 곳.
장부가 펼쳐진 방이었다. 촛불 대신 검은 비가 창밖을 적시고 있었다. 방 한구석엔, 커다란 유리 진열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 아주 창백하고 시들어 가는 별빛 하나가 갇혀 있었다. 여자가 어느 미래에서 부숴다 가둔 전리품이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그저 그녀의 소장품으로만 파르르 깜빡이고 있었다.
여자는 그 진열장을 오래 바라봤다. 아끼는 보석을 감상하는 수집가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장부를 펼쳤다. 여자의 손가락이 연필로 적힌 이름 하나를 천천히 문질러 지웠다. 「청토끼.」
박지은—…쓸모가 다했구나, 청토끼. 시계 하나 쥐여 줬더니 겨우 이 정도라니. …됐어, 지운다. 내 곳간을 채우는 데 보탬이 안 되는 말은, 장부에 남길 이유가 없지.
진열장의 창백한 별빛이 파르르 떨며 꺼지려 했다. 여자가 손목의 시계에서 시간 한 줌을 덜어, 그 별빛에 흘려 넣었다. 죽게 두진 않았다. 완전히 꺼지면 전리품으로서의 값이 사라지니까. 딱 시들어 가는 그 상태로, 영원히 붙잡아 두는 것. 그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소유법이었다.
박지은—…이렇게 조금씩 붙잡아 두는 걸론 성에 안 차. 근본적인 걸 채워야지. 온전한 사주 하나를, 통째로. …저 아이. 연이. 방금 여덟 글자를 다 채운 그 아이. 그 완성된 그릇을 통째로 내 곳간에 거둬들이면, 내 컬렉션이 마침내 완성되지. 백 년을 기다린, 마지막 정점으로.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지운 자리를 내려다보며 우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박지은—청토끼? 내 도구들 중 제일 하찮은 말이었지.
박지은—겨우 빵집이나 뜯다가, 어린것 셋한테 진 거야? 후후, 귀엽기도 하지. 뭐, 그런 하찮은 말한테 기대를 건 내가 어리석었지.
여자의 손가락이 장부의 다른 이름들을 스쳤다. 아직 잉크로 또렷하게 적힌 이름들. 재성의 청토끼는 지워졌지만, 그 위엔 '별들의 궁'을 다스리는 자와 '식상의 하늘'을 다스리는 검은 자의 이름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박지은—…뭐, 청토끼가 진 것도 나쁘진 않아. 그 아이가 얼마나 컸는지 시험해 봤으니까. 사주를 완성하고, 청토끼를 이기고, 서고를 되쓰고. …생각보다 훨씬 잘 자랐네. 내 곳간에 넣어 둔 시간을, 그렇게 야무지게 도로 가져가다니. 값이 더 올랐어.
박지은—…하지만 아가야. 네가 아무리 커도, 넌 결국 내 곳간에서 빠져나간 물건이야. 네가 되찾은 그 시간, 원래 내 것이었어야 할 시간이거든. …그러니 미안하지만, 도로 내놔야겠어. 내 컬렉션을 위해서.
여자가 장부를 넘겼다. 다음 페이지에는 아주 정성스러운 필체로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연이.」 그 아래엔, 붉은 밑줄이 몇 겹으로 그어져 있었다. 백 년을 탐내 온 마지막 수집품에, 여자가 미리 찍어 둔 소유의 표식이었다.
박지은—기다렸어. 사주가 완성되기를, 그릇이 다 차기를. 이제야 거둘 맛이 나겠네. …그릇이 비어 있으면 가질 게 없지만, 가득 차 있으면 통째로 내 것으로 삼킬 수 있거든. 네가 되찾은 그 여덟 글자, 내가 하나도 안 남기고 내 곳간에 담을게. 내 컬렉션의 마지막 정점으로.
박지은—…그리고 파수꾼. 그 은빛 사자. 너도 곧 만나겠구나. 백 년 넘게 내 시계를 훔쳐 도망친 배신자. …네가 그 아이 곁에 있는 거, 다 봤어. 내가 탐내는 마지막 수집품이, 하필 네가 지키는 그 아이라니. …참, 얄궂은 일이지 않니?
여자가 창밖의 검은 비를 바라봤다. 그 눈에 광기와 공허가 반반씩 어려 있었다. 다 가지고도 늘 텅 빈 자의 눈이었다. 그의 명반(命盤)이 방 한가운데서 천천히 돌며, 별들의 궁을 향해 소환의 인력을 뻗기 시작했다.
박지은—…자, 오렴, 아가. 별들의 궁으로. 거기서 네 그릇을 비워 줄게. 아프지 않게, 아주 부드럽게. …그게 내가 너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니까.
여자가 명반을 돌리자, 방 안에 두 개의 그림자가 어렸다. 하나는 별자리가 새겨진 왕좌에 앉은 자 — '별들의 궁', 자미두수를 다스리는 존재. 다른 하나는, 검은 날개를 접은 채 스물일곱 개의 저택을 거느린 자 — '식상의 하늘', 스물일곱 별자리를 다스리는 무성이라는 이름의 새.
박지은—…내 도구들아. 재성의 청토끼는 졌다. 하지만 괜찮아. 그 아이를 별들의 궁으로 부를 테니. …자미두수의 왕이여, 네가 그 아이의 그릇을 시험해라. 그리고 식상의 검은 새 무성이여, 네가 그 마지막 문을 지켜라. …그 아이의 완성된 사주가 내 곳간에 들어올 때까지.
두 그림자가 소리 없이 고개를 숙였다. 박지은 — 시간을 다스리는 탐욕의 여왕의 명(命)은, 운명 세계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닿았다. 청토끼는 그 여자가 부린 가장 약한 말(馬)에 불과했다. 이제, 진짜 시련이 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지은—…연이. 네가 되찾은 그 여덟 글자, 참 곱더라. 을목의 넝쿨, 임오의 따뜻한 물, 신미의 빛나는 쇠. …그렇게 완전한 그릇을, 나는 백 년 넘게 못 봤어. 그러니 더더욱 탐이 나. 그런 값진 건, 반드시 내 것이어야 하거든. 내 컬렉션의 정점으로 삼아야지.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하지만 나는, 갖고 싶은 건 반드시 갖는 사람이라서.
여자는 창밖의 검은 비를 오래 바라봤다. 더 갖기 위해 세상을 적으로 돌린 백 년. 그동안 얼마나 많은 걸 훔쳤는지, 얼마나 많은 이를 잿빛으로 만들었는지, 그 여자도 이제는 세지 않았다. 곳간은 이미 넘쳤다. 그런데도, 아무리 채워도 그 안은 늘 텅 빈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여자는 오늘도, 또 하나를 탐냈다.
박지은—…세상은 나를 마녀라 부르겠지. 시간 도둑, 운명의 저주. …그래, 맞아. 나는 그런 존재야. 근데 어쩌겠어. 값진 게 눈앞에 있는데 안 갖는 게 더 어리석지. 세상 전부를 곳간에 넣어야, 나는 겨우 잠깐 편해지는걸. …그게 잘못이라면, 나는 기꺼이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도둑이 될 거야. 우아하게, 미소 지으면서.
같은 시각, 부두의 연이는 이유 모를 오한에 어깨를 감쌌다. 분명 따뜻한 여름 바람이었는데도. 저 멀리, 아주 오래된 시계 소리가 — 청토끼의 것보다 훨씬 깊고 서늘한 째깍임이 — 세상의 결 너머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연이—…이 소리. 이 오한. …청토끼가 그랬지. 다음엔 그 여자가 직접 온다고. …벌써 오려나. 나 이제 겨우 온전해졌는데. 조금만 쉬려고 했는데.
네오—…연이? 왜 그래. 얼굴이 안 좋아.
연이—…아니야. 그냥, 잠깐 서늘한 바람이 불어서. …네오. 집에 다녀오면, 우리 곧 그 여자를 만나게 될 것 같아. 왠지. …근데 무섭진 않아. 나 이제 흔들리지 않는 문장이 있고, 곁에 너희가 있으니까. …자, 오늘은 이 웃음 실컷 즐기자. 어둠은, 올 때 마주하면 되니까.
연이는 다시 잔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갓 구운 빵 냄새와 되찾은 이름들의 웃음소리가 그를 감쌌다. 서늘한 예감은 잠시 접어 두었다. 오늘만은, 이 따뜻한 아침을 온전히 누리기로 했다. 다가올 별들의 궁이, 얼마나 깊은 어둠일지는 아직 알지 못한 채.
제27화 · 갓 구운 아침 — 끝. 제28화 「돌아가는 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