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27 · 33 / 73

갓 구운 아침

대가 없이 건네진 갓 구운 빵 앞에서 호랑이는 어쩔 줄 모른다. 집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한글 약 3,333자 · 읽는 시간 약 8분

나룻배가 강 한가운데로 접어들자 연이는 다시 손바닥을 폈다. 다섯 손가락 사이로 새벽바람이 지났다. 아직 제 손 같지 않았다.

연이—너도 좀 쉬어. 아까부터 다친 발로 버티고 있잖아.

영냥이가 자리를 옮기려다 비틀거렸다. 연이가 반사적으로 그 작은 앞발을 받쳤다. 손목의 庚 자가 따뜻해졌다.

영냥이—잠깐. 손, 놓지 말아 봐.

영냥이의 하얀 털끝마다 빛이 번졌다. 작은 몸이 빛에 폭 싸였다. 모자 아래 이마의 네 문양이 차례로 밝아지더니 손목 쪽으로 가라앉았다. 연이 손안의 작은 앞발이, 분홍 발바닥부터 천천히 길어졌다.

[ 庚 · 연결 복구 / 수호자 외형 복원 / 이름의 봉인 유지 ]

빛이 걷히자 은빛 머리의 남자가 배 바닥에 앉아 있었다. 작은 남색 망토는 금실이 수놓인 은빛 외투로 길어졌다. 연이가 쥔 것은 이제 사람의 손이었다.

연이—…영냥아?

네오—응, 나야. 이 모습일 땐 네오라고 불러 줘. 진짜 이름은 아니지만, 오래전에 누가 그렇게 불러 준 이름이야.

그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왼손의 녹빛 자국은 그대로였다. 돌아온 것은 모습뿐이었다. 오래 감춰 둔 이름은 여전히 입 안에서 막혔다.

연이—손이 따뜻해. 아픈 건 그대로야?

네오—조금. 사람 됐다고 다 낫진 않네.

연이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네오는 낯선 무릎을 굽혀 앉았다. 둘의 어깨가 처음으로 같은 높이에서 닿았다.

연이—그럼 천천히 익숙해지자. 나도 방금 돌아왔잖아.

네오—그래. 이번엔 네가 좀 도와줘.

모카가 뒤늦게 잠에서 깨어 둘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네오 쪽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모카—설명은 밥 먹고 해. 둘 다 떨고 있잖아.

연이가 웃자 네오도 작게 웃었다. 얼굴은 낯설어도 곤란할 때 시선을 피하는 버릇은 같았다. 연이는 그제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배는 강을 따라 밤새 내려갔다. 동이 틀 무렵 낯익은 부두가 보였다. 시간을 파는 섬. 골목 끝에서 빵 굽는 냄새가 흘러왔다.

루나—언니! 언니, 빨리 나와 봐! 손님 왔어! 아니, 손님 아니고!

연이—루나야!

루나—어? 누구세요? 목소리는 돼지 언니인데, 얼굴이 사람인데?

연이—돼지 언니 맞아. 이제 사람 언니야.

루나—우와! 진짜 사람이다! 손가락도 있어! 빵 집을 수 있겠다!

루나가 연이의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신기한 듯 만져 보았다.

루나 언니—루나야, 반죽에 손 넣던 거 마저 하고 놀아. 아, 손님들.

루나 언니가 앞치마에 밀가루를 묻힌 채 나왔다. 일행을 한 명씩 훑어보더니, 한숨처럼 웃었다.

루나 언니—고양이님도 사람이 됐네요? 놀라는 건 나중에 하고 다친 데부터 봐요. 네오 씨는 팔, 점쟁이 양반도 팔, 수달은 꼬리까지.

루나 언니—입에 붙어서 고양이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모습이 달라도 손님은 손님이니까요.

모카—꼬리는 원래 이래!

루나 언니—다 들어와요. 씻고, 앉고, 먹어요. 순서 지켜요.

빵집 안은 따뜻했다. 화덕에서 막 나온 빵들이 선반 가득 김을 올리고 있었다. 벽시계는 이제 제 속도로 가고 있었다.

루나 언니—오늘 첫 판이에요. 값은 안 받아요. 그 대신 다 먹어야 해요.

연이—아. 냄새. 냄새가 다 있어. 맛이 있는 냄새야.

모카—이제 손으로 먹겠네. 천천히 먹어. 뜨거워.

연이—알아. 근데 냄새가 너무 좋아서 기다리기 힘들어.

연이는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빵이 따뜻했다. 버터가 녹아 있었다. 혀끝에서 단맛이 천천히 퍼졌다.

연이—맛있어.

네오—울어? 너무 뜨거웠어?

연이—몰라. 장부가 다 가져간 줄 알았는데, 맛있는 건 그대로야.

루나 언니가 말없이 빵 하나를 더 연이 앞에 놓았다. 연이는 그것도 먹었다. 먹으면서 계속 울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루나 언니—운은 가져가도 입맛은 못 가져가요. 그건 몸에 붙은 거라서.

루나 언니는 그렇게 말하고, 화덕 쪽으로 돌아갔다. 그 등이 예전보다 조금 굽어 있었다. 팔아 버린 시간이 아직 다 돌아오지 않은 등이었다.

윤달—언니분, 혹시 생년월일시가 어떻게 되세요. 빵 맛이 이 정도면 식신이 아주 좋으실 텐데.

루나 언니—점쟁이 양반, 빵 먹을 때는 입 다물어요. 그게 이 집 규칙이에요.

윤달—네. 규칙 좋아요.

네오—그 규칙은 마음에 드네.

배가 부른 일행이 하나둘 자리를 뜨자 연이는 빵 봉지를 들고 뒷문 계단에 앉았다. 네오가 옆에 앉으며 왼쪽 소매를 내렸다. 손등에 녹빛 얼룩이 남아 있었다.

연이—가리지 마. 이제 다 봤어.

네오는 잠시 망설이다 소매를 걷었다. 녹빛은 어깨 아래에서 멈춰 있었다. 모습이 바뀌어도 상처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연이—비키라고 한 거, 취소야. 그거 말하려고 강까지 갔었어.

네오—안다. 들었다.

연이—들었어? 어디서?

네오—강 하류에서. 별 다섯 개 준다는 것까지.

연이—그건 왜 기억해.

네오—나도 약속할게. 앞으로는 아프면 말할게. 숨기지 않고.

연이—약속이야. 고객센터는 약속 어기면 별 깎여.

네오—그럴게. 너도 불은 끄지 마. 물이 녹을 때까지 같이 버텨 보자.

연이는 빵 한 조각을 떼어 네오 입에 넣어 주었다. 네오는 사양하지 않았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빵을 씹었다.

안으로 돌아오니 루나가 벌써 다음 판 반죽을 들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해가 조금 더 올라왔다. 연이는 빵 접시를 든 채 창가로 갔다. 골목은 아직 조용했다. 빵 냄새를 맡은 고양이 몇 마리가 담장 위에서 졸고 있었다.

그리고 골목 건너편, 처마 그늘 아래 검은 형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찢어진 망토. 오른 앞발의 금장 고리.

연이—(호랑이.)

호랑이는 빵집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보고 있지 않은 척하고 있었다. 코끝만 빵 냄새 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어 있었다.

연이는 창문을 열려다가 손을 멈췄다. 자기가 나가면 호랑이는 갈 것이다. 그것만은 알 것 같았다.

루나 언니—뭘 그렇게 봐요.

연이—아, 아니에요. 그냥, 밖에 누가.

루나 언니가 창밖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갓 나온 빵 하나를 종이에 싸서 들고 문을 나섰다.

골목은 빵집 안보다 서늘했다. 루나 언니가 처마 아래로 다가가자 호랑이가 몸을 일으켰다. 망토 자락에서 물이 떨어졌다.

검은 호랑이—저는 그냥 지나가던 길이에요.

루나 언니—그래요. 지나가다 배고픈 길이죠.

루나 언니가 빵을 내밀었다. 호랑이는 빵을 보았다. 그다음 루나 언니의 얼굴을 보았다. 셈을 하는 눈이었다. 무엇을 얼마에 사는지, 언제 갚아야 하는지.

검은 호랑이—이거 얼마예요.

루나 언니—공짜예요.

검은 호랑이—공짜는 없어요.

루나 언니—있어요. 지금 여기 하나.

호랑이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루나 언니는 기다리지 않았다. 호랑이의 앞발을 직접 잡아 펴고, 그 위에 빵을 올렸다. 그리고 발을 다시 접어 주었다. 빵이 떨어지지 않게.

루나 언니—따뜻할 때 먹어요. 식으면 그냥 빵이에요.

루나 언니는 돌아서서 빵집으로 들어갔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호랑이는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앞발 안의 빵이 따뜻했다. 금장 고리가 아주 조금, 조이는 것을 잊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검은 호랑이—공짜.

호랑이는 빵을 먹지 않았다. 찢어진 망토 안쪽, 북 아이의 이름을 넣어 둔 자리 옆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리고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빵집 안으로 돌아온 루나 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죽을 다시 치대기 시작했다.

연이—언니. 고마워요.

루나 언니—뭐가요. 빵집은 빵 주는 데예요.

연이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창밖 처마 밑은 비어 있었다. 젖은 자국만 남아 있었다.

그때 빵집 안쪽, 창고로 이어지는 낡은 문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화덕 불빛인 줄 알았다. 그러나 빛은 문틈마다 금빛 실처럼 번지고 있었다.

루나—언니! 창고 문이 빛나! 또 시간 도둑이야?

루나 언니—그 문은 원래 안 열리는 문인데.

낡은 문의 나뭇결이 카드 그림으로 바뀌어 갔다. 테두리에 별이 새겨지고, 가운데에 열린 문 하나가 그려졌다. 아래쪽에 숫자 대신 글자가 떠올랐다.

[ THE DOOR · 운명 코드 8/8 확인 · 귀환 가능 ]

연이—이거. 나 이거 알아. 처음에 앱에서 본 카드야. 이걸 누르고 여기로 왔어.

네오—돌아가는 문이다. 여덟 글자가 다 찬 사람만 지나갈 수 있지.

연이—그럼 나 갈 수 있어? 집에? 내 방에?

네오—그래. 네 방에. 뒤집힌 우산이 있던 그 방.

연이는 문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가 멈췄다. 돌아보았다. 모카, 윤달, 루나, 루나 언니. 그리고 네오.

연이—다 같이 가는 거지?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윤달이 장갑 낀 손을 문 앞에 가만히 대 보았다. 금빛 실이 그의 손 앞에서 뚝 끊겼다.

[ 年 □□ · 月 □□ · 日 □□ · 時 ■■ · 7/8 · 통과 불가 ]

윤달—역시. 저는 안 되네요. 시가 없으니까요.

연이—시? 청토끼가 먹은 거?

윤달—네. 여덟 글자 중에 하나가 없는 사람은, 이 문 기준으로는 아직 사람이 덜 된 거래요. 서운하네요.

연이—그럼 찾으면 되잖아요. 같이 찾아요. 그다음에 같이 가요.

윤달—숙녀분이 저를 기다려 주신다니. 궁합이 좋다는 증거네요.

네오—아니다.

윤달이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 끝이 조금 오래 걸렸다.

모카—나도 안 가.

연이—모카?

모카—난 원래 여기 수달이야. 축제 섬에 불 지킬 놈이 있어야지. 네가 사람 세계에 꼬치 굽는 수달 데려가면 뉴스 나와.

연이—그래도.

모카—그래도는 무슨. 너 없으면 내 랩 듣는 사람 하나 줄어서 아쉬운 거, 그거 하나야.

모카—울지 마, 사람. 돼지일 때보다 더 못생겨.

모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연이의 손등에 이마를 한 번 박았다. 숨을 나눠 주던 그날처럼.

연이—그럼 네오는.

네오—나는 간다.

연이—와?

네오—나는 빌린 칸이다. 칸이 가면 따라가야지. 그리고 고객센터는 출장도 한다.

연이—출장 서비스는 별 몇 개짜린데.

네오—다섯 개. 아까 강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연이—그거 들었어?

연이와 네오가 문 앞에 섰다. 루나가 빵 봉지를 연이 품에 안겨 주었다. 루나 언니는 화덕 앞에서 손만 흔들었다.

루나—언니, 또 와. 사람 언니도 좋고 돼지 언니도 좋아. 꼭 또 와.

연이—꼭 올게. 그때는 내가 빵 사 올게. 돈 내고.

루나 언니—우리 집 빵보다 맛없으면 안 받아요.

윤달—숙녀분. 저쪽에 가면, 이쪽 일은 꿈처럼 흐려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요.

연이—안 흐려져요. 이렇게 맛있는 빵을 어떻게 잊어요.

윤달—그렇죠. 빵은 못 잊죠.

윤달은 그렇게 말하고 장갑 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잊히는 쪽이 어떤 기분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연이가 문고리를 잡았다. 차갑지 않았다. 따뜻한 빵처럼 온기가 있었다. 문이 열리고, 금빛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문턱을 넘는 순간, 연이는 뒤에서 무언가를 들은 것 같았다. 윤달이 아주 작게, 자기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중얼거리는 소리. 그러나 바람이 그 소리를 덮었다.

문이 닫혔다. 빵집에 남은 사람들은 한동안 그 문을 바라보았다. 문은 다시 낡은 창고 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한 곳에서, 닫힌 문틈으로 빗방울 몇 개가 스며들었다. 문 저편으로. 누군가를 따라가듯이.

전체 목차십성 해석 가이드비주얼 노벨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