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천장에 낯익은 얼룩이 있었다. 비가 새던 자리. 연이의 방이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빗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꿈을 오래 꾼 사람처럼 몸이 무거웠다.
연이—여기… 내 방이야? 진짜 내 방?
손을 들어 보았다. 분홍 발굽이 아니었다. 다섯 손가락. 손톱 밑에 밀가루가 조금 끼어 있었다.
연이—(빵집 밀가루. 꿈 아니었어.)
머리맡의 휴대폰이 켜졌다. 날짜는 겨우 하룻밤 뒤였다. 섬 다섯 개를 돌고 온 시간이, 하룻밤.
[ Code Destiny · 운명 코드 8/8 · 귀환 완료 ]
연이—하룻밤? 나 거기서 빵만 몇 개를 먹었는데. 그게 다 하룻밤이라고?
침대 곁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네오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은빛 머리와 짙은 남색 옷. 강 위에서 보았던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
연이—…네오? 너 네오 맞지?
네오는 밤새 앉아 있었는지 굳은 어깨를 폈다. 그리고 평소처럼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고객센터입니다. 귀환 후 첫 아침, 불편하신 점 있으십니까.」
연이—너도 같이 돌아왔네. 진짜 여기까지 온 거야?
「이쪽에서도 다른 사람들 눈에 보여. 그러니까 밖에서는 고객센터라고 부르지 마. 설명하기 곤란해.」
연이—나 원래 좀 이상한 사람이었거든. 너 때문에 더 이상해지는 거지.
「모습은 그대로네. 신분증까지 생긴 건 아니지만. 설명할 게 좀 많겠어.」
연이는 네오의 손목을 조심히 잡았다. 손은 따뜻했다. 왼쪽 소매 아래에는 강에서 보았던 녹빛 상처가 아직 남아 있었다.
연이—사람 손이네. 아직도 신기해.
「너도 어제까지 앞발이었잖아. 서로 너무 신기해하진 말자.」
연이—그러니까 아프면 말해. 사람 됐다고 약속까지 바뀌는 건 아니야.
「알아. 손부터 확인하는 거 보니 숨기기도 어렵겠네.」
네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연이의 손가락을 잠깐 마주 쥐었다.
해가 뜨자 방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쌓인 과제, 말라 버린 화분, 그리고 구석에 처박힌 우산 하나.
우산은 뒤집혀 있었다. 살이 두 개 부러진 채였다. 저쪽 세계로 가기 전날 밤, 바람에 뒤집힌 그대로.
연이—(그날 진짜 최악이었지. 우산 뒤집히고, 버스 놓치고, 별점 테러하고.)
우산 옆에는 카드 한 장이 엎어져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를 카드. 뒷면에 작은 별 무늬가 찍혀 있었다.
연이—이 카드는 뭐야. 원래 우리 집에 있었나?
연이는 카드를 뒤집으려 했다. 손끝에서 카드가 미끄러졌다. 몇 번을 해도 뒤집히지 않았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이.
「그 카드는 네 거야. 준비가 되면 뒤집힐 테니까 지금은 그냥 둬.」
연이—고객센터는 꼭 중요한 건 나중에 알려 주더라. 별 하나 깎는다.
연이는 카드 대신 우산을 집었다. 부러진 살을 테이프로 감았다. 휜 살은 손으로 천천히 폈다. 잡아당기지 않고, 밀어서.
연이—뒤집힌 건 고치면 되지. 버리지 말고.
우산이 펴졌다. 조금 삐뚤었지만 비는 막을 수 있었다. 연이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책상 위에는 종이 봉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루나가 문 앞에서 안겨 준 빵 봉지. 봉지는 아직 따뜻했다.
연이—루나 빵이다. 이거 진짜 가져왔네. 진짜로.
한 입 베어 물자 버터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운은 가져가도 입맛은 못 가져간다던 말이 떠올랐다.
봉지 바닥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붓으로 그린 초승달 하나, 그리고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
연이—(이게 뭐지. 영수증은 아닌데. 루나 언니 글씨도 아니고.)
「부적이다. 냄새가 난다. 궁합 사기꾼 냄새.」
연이—윤달 씨? 이 사람 언제 이걸 넣었대.
종이는 펴지지 않았다. 억지로 펴려 하자 손끝이 따끔했다. 연이는 종이를 지갑 안쪽에 접어 넣었다.
연이—나중에 꼭 물어봐야지. 다시 갈 길이 있으면.
「문은 닫혔어. 당장 돌아갈 길은 없어.」 네오는 창밖을 보았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천천히 굳었다.
학교 가는 길은 이상할 만큼 순조로웠다. 버스는 정시에 왔고, 앞자리가 비어 있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자 음료가 두 개 떨어졌다. 교수님은 지각한 연이를 보고도 웃으며 출석을 불러 주었다.
연이—이상해. 너무 이상해. 오늘 아무도 내 발을 안 밟았어.
강의실 앞에서 동기 하나가 연이를 붙잡았다. 조별 과제 자료를 날린 줄 알았는데, 연이 파일만 멀쩡히 살아 있다고 했다.
연이—내 파일만? 원래 내 파일이 제일 먼저 날아가는 게 국룰인데.
동기는 연이를 구세주 보듯 보았다. 연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칭찬받는 쪽은 익숙하지 않았다.
연이—오늘 내가 좀 운이 좋나 봐. 복권 사야 하나.
가방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메시지 미리보기 창에 한 줄이 떠 있었다. 발신자는 없었다.
「고객센터입니다. 복권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운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연이—(언제 문자를 보냈지? 내 폰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연이—꿈도 못 꾸게 하네. 별 하나 더 깎는다.
연이의 불운은 원래 성실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했다. 그런데 오늘은 연락도 없이 결근이었다.
연이—(8/8이라서 그런가. 코드가 다 맞춰지면 운도 정상이 되는 거야?)
점심때 연이는 벤치에서 빵 반쪽을 먹었다. 나머지 반은 남겨 두었다. 왠지 누군가에게 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이—다이어트는 아니고. 그냥 반은 남겨 두고 싶었어. 빵한테 예의랄까.
그때 맑은 하늘에서 빗방울 하나가 연이의 손등에 떨어졌다. 차가웠다.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었다.
연이—(비 냄새.)
연이는 그 냄새를 알았다. 어디선가 맡았던 냄새. 강가에서, 그리고 젖은 망토에서.
연이—기분 탓이겠지. 여름이니까. 여름엔 원래 냄새가 많아.
그러나 손등의 물방울은 한참 동안 마르지 않았다.
연이는 남겨 둔 빵 반쪽을 다시 봉지에 넣었다. 누구에게 줄지는 몰랐다. 그냥, 반은 누군가의 몫 같았다.
연이—저쪽에서 배운 거야. 빵은 나누면 두 배가 된대. 루나 언니가 그랬어.
저녁이 되자 진짜 비가 내렸다. 아파트 복도에서 형광등 하나가 깜빡였다.
옆집 앞에 이삿짐 상자가 쌓여 있었다. 오래 비어 있던 집이었다.
그 집 문 앞에는 검은 우산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어젯밤부터 거기 있던 우산. 끝에서는 여전히 물이 똑똑 떨어졌다.
연이—(어젯밤에도 저 우산 있었지. 짐보다 우산이 먼저 이사 왔네.)
이삿짐 기사가 마지막 상자를 내려놓고 서명을 받았다. 서명하는 사람은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였다. 등을 돌린 채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코트 깃 위로 흘렀다. 키가 컸다. 서명하는 손이 이상하게 느렸다. 한 획 한 획, 장부에 적듯이.
연이—안녕하세요, 옆집이에요. 비 오는 날 이사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여자의 어깨가 아주 잠깐 굳었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옆집 여자—네. 감사합니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해요.
짧고 정중한 목소리였다. 끝음이 서늘했다. 빗물처럼.
그때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따라 나온 네오가 연이 옆에 멈춰 섰다.
네오의 시선이 여자의 오른 손목에 박혔다. 그는 연이 앞을 반쯤 가로막았다. 인사를 건네려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연이—네오! 왜 그래, 이웃한테. 죄송해요,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옆집 여자—괜찮아요. 일행분이 저를 좀 경계하시네요.
여자는 끝내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검은 우산을 집어 들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복도에는 비 냄새만 남았다. 낮에 손등에서 맡았던, 바로 그 냄새.
그날 밤 네오는 잠들지 않았다. 창틀에 앉아 벽 쪽만 노려보았다.
연이—(얘가 저렇게 경계하는 거 처음 봐. 고양이일 때도 안 그랬는데.)
연이—네오. 그 사람 왜 싫어해? 얼굴도 못 봤잖아.
「모르겠다. 냄새가 난다. 어디서 맡아 본 냄새인데, 기억이 안 난다.」
연이—네가 기억이 안 난다고? 고객센터가?
「여기서는 저쪽 일이 흐려진다. 윤달이 그랬잖아. 꿈처럼 흐려질 수도 있다고.」
연이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 말이 무서웠다. 루나의 웃음, 모카의 독설, 호랑이의 붉은 눈. 벌써 가장자리가 번지고 있었다.
연이는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대로 적었다. 빵. 루나. 모카. 윤달. 검은 호랑이.
연이—잊어버리면 안 돼. 적어 두면 덜 흐려지겠지.
손가락이 멈칫했다. 호랑이 다음에 적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북 치던 아이의 이름. 분명히 보았는데, 글자 모양이 물에 번진 것처럼 흐렸다.
연이—아이 이름이 기억 안 나. 그 망토 안에서 봤는데.
「그 이름은 호랑이가 갖고 있다. 네가 몰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연이—(호랑이가 갖고 있다. 그것도 적어 두자.)
연이는 한 줄을 더 썼다. 북 아이 이름, 호랑이 망토 안.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물음표를 붙였다.
「…좋은 습관이다. 별 다섯 개 주지.」 네오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연이—고객센터가 고객한테 별점 주는 건 처음 보네.
벽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집인데, 숨소리조차 없었다.
그때 휴대폰 화면이 한 번 깜빡였다. 앱 아이콘 귀퉁이에 검은 점 하나가 번졌다. 해를 가리는 달처럼.
[ 연결 상태 확인 중 · · · ]
연이가 화면을 다시 보았을 때 점은 사라져 있었다. 빗소리만 계속되었다. 창틀의 네오는 끝까지 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