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날 아침, 앱이 먼저 알았다.
연이는 빵집 이 층 손님방에서 눈을 떴다. 창으로 재성의 아침 햇살이 들었다. 어제 되찾은 이름들이 아침을 여는 소리, 갓 구운 빵 냄새. 며칠 전까지 값에 짓눌렸던 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머리맡의 폰이 진동했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이상한 앱을 깔던 그 폰. 이번엔 다른 알림이 떠 있었다.
[ Code Destiny 알림 ] 사주 4주(柱) 완성 확인 — 을해 · 임오 · 신미 · 그리고 당신. 귀환 자격이 발급되었습니다.
연이—…귀환. 돌아갈 수 있대. 원래 세계로.
말해 놓고 연이는 제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토록 바라던 말인데, 이상하게 반쪽만 기뻤다.
연이—…이상하다. 처음 이 세계 왔을 땐, 이 알림 하나만 기다렸는데. '집에 갈 수 있다'는 말. 근데 막상 오니까, 왜 이렇게 마음이 무겁지. …아, 두고 갈 사람들 때문이구나. 루나, 언니, 백문 님, 그리고 네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빵집엔 이미 갓 구운 빵 냄새가 가득했다. 언니가 새벽부터 연이를 위한 마지막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루나는 아직 잠이 덜 깬 채로, 식탁에 엎드려 있었다.
루나 언니—연이 씨, 일어났어요? 마지막 아침이니까 특별히 차렸어요. 갓 구운 크루아상에, 루나가 좋아하는 딸기잼이랑. …오늘 떠난다니, 어제 잔치보다 더 서운하네요.
연이—…언니. 이렇게까지. …고마워요. 저 이 크루아상 맛, 집에 가서도 안 잊을 거예요. …아, 진짜 언니 빵보다 맛있는 건 세상에 없어요. 이건 확실해요.
루나—(부스스) …연이? 벌써 아침이야? …아, 맞다. 너 오늘 가는구나. …흐엉, 생각하니까 또 눈물 나. 밥 먹기 전부터 울면 안 되는데.
연이—루나 너, 자다 깨서도 우네. …자, 울지 말고 크루아상 먹자. 언니가 특별히 만든 거잖아. 마지막 아침이니까, 우리 웃으면서 맛있게 먹자. 응?
세 사람은 마지막 아침을 오래 나눠 먹었다. 창으로 재성의 아침 햇살이 들고, 갓 구운 빵 냄새가 부엌을 채웠다. 연이는 이 평범하고 따뜻한 아침을, 마음 깊이 새겼다. 어떤 어둠이 와도, 이 아침을 떠올리면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믿으며.
루나—연이! 우리 약속하자. 너 다음에 오면, 우리 셋이 여행 가는 거야! 재성의 섬 여기저기! 이제 값에 안 쫓기니까,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잖아! 언니 빵 싸 들고, 소풍!
연이—…소풍! 좋다! 그래, 다음에 오면 우리 소풍 가자. 언니 빵 싸 들고, 너 물의 힘으로 강도 건너고, 백문 님이랑 모카도 부르고. …아, 벌써 기대된다. 그거 생각하니까 빨리 준비 끝내고 오고 싶어.
루나 언니—…어머, 소풍이라니 좋네요. 그럼 제가 도시락 열 개쯤 쌀게요. 백문 할아버지가 아홉 개 드시니까. …자, 연이 씨. 그 소풍을 위해서라도, 몸조심하고 꼭 무사히 돌아와요.
연이—…네, 언니. 소풍 도시락, 그거 하나만 생각하고 버틸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돌아와서 다 같이 소풍 가요. …약속. 우리 여섯이서. 아, 소망이 찾으면 일곱이서.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는 약속 하나가 더 생겼다. 여섯 그릇 식탁에, 이제 소풍 도시락까지. 연이가 반드시 돌아와야 할 이유가, 하나씩 더 늘어 갔다. 그 약속들이, 다가올 별들의 궁의 어둠 속에서 연이를 붙들어 줄 밧줄이 될 것이었다.
창밖으로, 어제 잔치가 벌어졌던 골목이 보였다. 되찾은 이름들이 아침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김씨!」 「그쪽도요, 박씨!」 백 년간 값에 지워졌던 이름들이, 이제 서로를 부르는 소리. 연이가 되살린 소리였다.
연이—…저 소리, 내가 되살린 거야. 저 이름들. …근데 나는 이제 저 소리를 두고, 내 세계로 돌아가야 해. 화면 너머로만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조금, 아니 많이 아쉽다.
떠나기 전, 연이는 빵집 이 층 창가에서 잠깐 재성의 아침을 눈에 담았다. 어제 잔치의 온기가 아직 골목에 남아 있었다. 갓 구운 빵 냄새와, 저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이 모든 걸 두고 가는 게, 생각보다 아팠다.
연이—…이상하다. 그토록 집에 가고 싶었는데, 막상 가려니까 발이 안 떨어져. …여기, 정든 곳이 됐구나. 무서운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내 사람들이 다 여기 있어.
사주의 강 어귀에 배웅이 모였다. 빵 냄새와 책 냄새, 그리고 눈물 냄새. 되찾은 이름들이 저마다 손을 흔들었고, 강물은 이번엔 맑게 빛나며 연이를 위해 길을 냈다.
루나—으앙 연이이이! 가지 마아! 아니, 가! 아니 가지 마! 아니, 그냥 행복하게 가!!
루나의 울음은 슬픔만이 아니었다. 재성의 뒷골목에서 겁에 질려 숨어 있던 배달 토끼가, 이 며칠 사이 얼마나 컸는지. 언니를 잃고 혼자 울던 아이가, 이제는 물의 힘을 깨우고, 친구를 지키고, 웃으며 배웅할 줄 아는 아이가 됐다. 그 성장이, 연이는 눈물 나게 자랑스러웠다.
연이—…루나. 너 정말 많이 컸다. 처음 만났을 때 넌 회수단 무서워서 골목에 숨어 있었잖아. 근데 지금은, 나 지키겠다고 청토끼 앞에서 물의 힘까지 깨웠어. …너 진짜 멋진 애가 됐어. 나 너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루나—…흐엉. 그런 말 하면 더 눈물 나잖아. …근데 연이. 나 너 만나기 전엔, 값 없으면 버려진다고만 생각했어. 근데 너는 나한테 값 하나도 안 매기고, 그냥 친구 해 줬어. …그게 나를 바꿨어. 나 이제, 값 말고 마음으로 사는 애야. 너처럼.
연이—루나. 나 어디 사라지는 거 아니야. 그리고 너 회계 담당이잖아. 눈물도 정산해야지, 반만 울어.
루나—반만 우는 게 어딨어! 눈물은 반올림이란 말이야!
연이—…하하, 반올림이래. …루나, 나 진짜 금방 올게. 앱으로 매일 연락할 거고. 그리고 다음에 올 땐, 우리 같이 그 여자랑 싸우기로 했잖아. 너 물의 힘 더 키워 놓기로 했고. 그때까지, 딱 조금만 참자. 응?
루나—…응. 물의 힘, 완전 마스터해 놓을게. 그래서 다음엔 내가 너 지킬 거야. 네가 나 지켜 준 것처럼. …근데 그때까지, 나 매일 앱으로 언니 빵 사진 보낼 거야. 너 배고프라고. 히히.
연이—야! 그건 너무하잖아! …아, 근데 좋아. 언니 빵 사진 매일 보내 줘. 그거 보면서 힘낼게. …자, 이제 눈물 그만. 우리 웃으면서 헤어지기로 했잖아. 어제 그 사진처럼.
루나—…응! 웃으면서! …근데 연이, 너 다음에 올 때 삼각김밥 좀 갖고 와. 나 그거 뭔지 궁금해. 네가 맨날 얘기하잖아.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연이—삼각김밥?! 갖고 올게! 참치마요로! 근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눅눅해지려나… 아니야, 내가 언니한테 부탁해서 이쪽에서 만들어 볼게. 재성표 삼각김밥. 하하.
루나 언니—이거, 가는 길에 드세요. 갓 구운 거예요. …저쪽 세계에도 오븐은 있죠?
연이—있긴 한데, 언니 빵보다 맛있는 건 없을 거예요. 그건 확실해요.
루나 언니—…연이 씨. 잠깐만요. …이거, 제가 담보로 잡히기 전에 우리 루나한테 주려고 접어 뒀던 손수건이에요. 결국 못 줬는데. …루나는 저를 되찾았으니 이제 필요 없고. 이거, 연이 씨가 가져가요. 우리 자매의 마음이라 생각하고.
연이—…언니. 이렇게 소중한 걸. …고마워요. 저 이거, 그 여자랑 싸우러 갈 때 꼭 품고 갈게요. 힘들 때 이거 보면, 언니랑 루나 생각날 거예요. 그럼 안 흔들릴 거예요.
루나 언니—…네. 그렇게 써 줘요. …연이 씨. 저 백 년 갇혔다 나온 사람으로서, 하나만 더. 그 여자를 만나면 무서울 거예요. 시간을 다스리는 존재라니. 근데 기억해요. 아무리 큰 힘을 가진 자도, 결국 사랑하는 누군가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 사랑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여요. 두려움 대신.
연이—…네, 언니. 사랑을 읽기. 백문 님도, 언니도 다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알겠어요. 그 여자를 만나면, 힘 대신 마음부터 읽을게요. 그게 제 무기니까요. …언니, 정말 고마웠어요. 언니 덕분에 저, '지킨다'는 게 뭔지 배웠어요.
루나 언니—…어머, 제가 뭘요. 다 연이 씨가 한 거죠. 자, 그럼 이제 가야죠. 강물이 기다려요. …잘 가요, 연이 씨. 우리 빵집은 언제나 열려 있어요. 갓 구운 빵이랑, 따뜻한 자리, 늘 준비해 둘게요.
백문—자네 사주의 원문은 내가 서가 제일 좋은 자리에, 볕 드는 칸에 꽂아 두지. 언제든 열람하러 오게. 대출 기한은 평생으로 해 두겠네.
연이—…백문 님. 그 말, 서가에서 제일 따뜻한 문장이에요.
백문—…허허. 자, 이건 자네 몫일세. 우체통 씨앗이야. 자네 세계에 심으면, 이 도서관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 힘들 때든, 그냥 심심할 때든, 언제든 이 늙은이에게 편지를 보내게. 백 년을 혼자 산 여우라, 편지 한 통에도 하루가 환해지거든.
연이—…네! 매일 보낼게요. 백문 님 안 외롭게. 그리고 소망이 원본 되쓰다 그 애 위치 나오면, 제일 먼저 편지로 알릴게요. 사서인도 꼭 되찾아 드리고요. …백문 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저 진짜 많이 배웠어요.
백문—…배운 건 자네가 아니라 나일세. 백 년간 혼자 검은 서가나 닦던 늙은이가, 자네 덕에 다시 세상의 빛을 봤어. 웃음도, 빵도, 아이들 노는 것도. …자네는 내 마지막 제자이자, 내 백 년을 구한 아이야. 부디 몸조심하게. 그 여자를 만나거든, 내가 준 축문을 잊지 말고.
백문—…그리고 하나만 더. 별들의 궁은 자미두수(紫微斗數)의 세계야. 열두 궁, 백여덟 별. 재성의 저울보다 훨씬 복잡한 운명의 판이지. 거기선 자네가 배운 '본뜻 읽기'가 별의 뜻을 읽는 데 쓰일 걸세. 별 하나하나에도, 원래의 뜻이 있으니까. …겁먹지 말고, 하나씩 읽어 나가게.
연이—…자미두수. 별의 뜻을 읽기. …네, 기억할게요. 재성에서 값을 읽고, 인성에서 마음을 읽었으니, 이번엔 별을 읽는 거네요. …백문 님이 가르쳐 주신 거, 다 이어져 있었어요. 하나씩, 차근차근 읽을게요.
백문—…그래. 자네라면 할 수 있어. 별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그 판을 짜는 건 한 사람의 마음이거든. 박지은. 그 탐욕가의 텅 빈 마음 하나만 읽어 내면, 백여덟 별의 판도 풀 수 있어.
백문—…그리고 연이. 마지막으로 하나만. 별들의 궁에서, 자네는 파수꾼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될 걸세. 그 은빛 사자가 왜 별자리가 없는지. 무엇을 되돌리려 시간을 거슬렀는지. …그 진실이 자네를 아프게 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때, 오늘 이 작별을 기억하게. 저 파수꾼이 자네를 보는 눈빛을.
연이—…네오에 대한 진실. …백문 님도 아세요? 근데 안 말해 주시는 거예요?
백문—…그건 파수꾼 자신의 입으로 들어야 할 이야기야. 사서는 남의 미완성 원고를 함부로 읽어 주지 않거든. 다만 이것만 새겨 두게 — 그가 무엇을 감췄든, 그 밑바닥엔 오직 자네를 지키려는 마음뿐이라는 것. 그건 내가 백 년 산 눈으로 보증하지.
연이—…네. 저도 알아요. 네오 밑바닥엔 '연이를 지키려는 마음'뿐인 거. 그러니까 무슨 진실이 나와도, 저 안 흔들려요. 먼저 그 마음부터 읽을게요. …백문 님, 다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이제 진짜 갈게요.
백문—…그래. 자, 강물이 오래 기다렸네. 잘 가거라, 나의 첫 제자.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게. 여섯 그릇 식탁을 차려 놓고 기다리마.
모카—자자, 나도 인사! 연이야, 집 가서도 무대 잊지 마! 그리고 우리 콜라보 약속! 인간 연이랑 수달 모카! …아, 그리고 이건 내가 만든 응원가야. 힘들 때 틀어. '삼킨 말은 체하고, 꺼낸 말은 무대가 된다! 연이 파이팅!'
연이—…모카 너, 응원가까지 만들었어? 하하, 고마워. 나 힘들 때마다 틀게. 그리고 콜라보 꼭 하자. 내 노래도 부르라며. 나 이제 온전해졌으니까, 진짜 부를 수 있어. 그때 네가 피처링 해 줘.
모카—당연하지! 공짜로! …아, 근데 진짜 공짜는 아니고, 언니 빵 열 개랑 교환. 히히. 자, 그럼 잘 가! 다음에 만날 땐 무대에서!
강 위로 타로 문이 떠올랐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지던 그 문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문이 연이에게 허리를 굽히듯 살짝 기울어 있었다.
연이는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았다. 네오가 늘 그렇듯 반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연이—네오는… 안 가?
네오—나는 여기 남을게. 지켜야 할 게 있는 자리니까.
연이—…그 지켜야 할 것들 중에, 나는 없어?
네오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수평선이 일렁일 만큼만.
네오—…그중에 제일 먼저가 너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연이는 그 말을 가슴 깊이 접어 두었다. 언젠가 꼭 다시 듣고 싶은 말이었다.
연이—…네오. 그럼 왜 안 따라와? 나 지키는 게 제일 먼저라면서. 나랑 같이 가면 되잖아. 우리 집에서 삼각김밥도 먹고, 노을도 보고. 약속했잖아.
네오—…나는 저쪽 세계로 못 가, 연이. 나는 이 운명 세계의 존재야. 별자리도 없는, 이 세계에조차 이름이 없는. 저쪽 세계의 문은, 나를 안 받아들여. …그리고, 여기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어. '그 여자'가 널 노리고 있으니까. 여기서 그 여자의 움직임을 살펴야 해.
연이—…그렇구나. …나 잠깐만 쉬고 올게. 진짜 잠깐만. 그동안 너 혼자 그 여자 살피지 마. 위험한 짓 하지 말고. 알았지? 나 없을 때 그 금빛 힘 쓰지 마. 절대.
네오—…안 써. 약속할게. …연이, 저쪽에서 잘 쉬어. 이 세계 일은 잠깐 잊고, 삼각김밥도 먹고, 친구들도 만나고. 평범한 하루를 실컷 누려. …그리고 앱이 다시 울리면, 그때 돌아와. 그땐, 진짜 싸움이 시작될 테니까.
연이—…응. 앱이 울리면 바로 올게. …네오. 나 이 말 꼭 하고 싶었어. 너 만나서, 나 진짜 다행이었어. 네가 앞에서, 옆에서 지켜 줘서 여기까지 왔어. …그러니까 너도, 너 자신 좀 아껴. 나만 지키지 말고, 너도.
네오는 대답 대신, 처음으로 연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반 걸음이 아니라, 온전한 한 걸음. 그리고 연이의 머리를 커다란 앞발로 아주 조심스럽게, 한 번 쓸어 주었다. 백 년을 홀로 벼려 온 파수꾼이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작별이었다.
네오—…잘 다녀와, 연이. 나는 여기서, 네가 돌아올 자리를 지키고 있을게. …반 걸음 뒤에서. 늘 그랬듯이.
연이—…응. 다녀올게. 반 걸음 뒤, 꼭 지키고 있어. 나 금방 올 거니까.
연이—갈게. 아, 맞다. 다들 앱 지우지 마! 알림 오면 꼭 받고. 특히 네오, 너 답장 좀 길게 해. 맨날 '이상 없다' 한마디만 보내지 말고!
네오—…선처하지.
연이—선처? 답장에 선처가 어딨어. 그냥 두 문장. 두 문장만 써 줘도 소원이 없겠다.
배웅 나온 이들이 저마다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루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언니는 온기 남은 빵을 한 아름 더 안기며, 백문은 지팡이로 축복의 문장을 허공에 새기며, 모카는 응원가를 목청껏 부르며. 되찾은 섬 사람들도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연이! 잘 가요!」 「또 와요!」
어제 이름을 되찾은 노인이 앞으로 나와, 연이의 두 손을 꼭 쥐었다. 저울추가 될 뻔했던 그였다. 손자에게 처음으로 '할아버지'라 불렸다던 그 노인.
연이—…할아버지. 손자분이랑 잘 지내세요. 이제 아무도 그 '할아버지' 못 뺏어 가요. …저 갈게요. 근데 꼭 다시 올 거예요. 아직 못 되찾은 이름들도 많으니까.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름진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백 년 만에 되찾은 웃음이었다. 연이는 그 웃음을 눈에 담았다. 이런 웃음들을 더 많이 만들려고, 자기가 싸운다는 걸 다시 한번 새기며.
강물이 연이를 위해 맑게 빛났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질 때 손을 잡아 주던 그 강. 식상의 섬, 재성의 섬, 인성의 도서관을 오가며 몇 번이고 건넌 그 강. 연이는 강물에 손끝을 담그고, 작별 인사를 했다.
연이—…강아, 그동안 고마웠어. 나 넘어질 때마다 받아 주고, 길 잃을 때마다 별길 열어 주고. …잠깐 다녀올게. 다음에 올 땐, 이 물이 다신 검게 앓지 않게, 그 여자 문제도 다 풀고 올게. 그때까지, 맑게 흐르고 있어.
강물이 대답하듯 은은하게 반짝였다. 연이가 되살린 진심들의 빛이, 강에도 스며 있었다. 값에 앓던 강이, 이제는 뜻으로 맑아진 강이 됐다. 연이가 이 세계에 남긴 흔적이었다.
연이—…다들, 정말 고마워요. 이 세계에서 나, 진짜 많이 배우고, 많이 웃고, 많이 사랑받았어요. …잠깐 다녀올게요. 힘 회복하면, 꼭 다시 올게요. 그때까지, 다들 건강하고. 앱으로 매일 만나요!
연이가 타로 문에 손을 얹자, 문이 청록빛으로 빛났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질 땐 무섭게 빨아들이던 문이, 이번엔 부드럽게 길을 냈다. 완성된 사주가, 두 세계를 잇는 열쇠가 된 것이다.
루나—연이! 매일 연락할게! 물의 힘 마스터해 놓을게! 다음엔 같이 싸우자! 꼭이야!
네오—…잘 가, 연이. 여기는 걱정 말고. …그리고, 두 문장 정도는… 써 보지.
연이—…어? 방금 그거 약속이지?! 두 문장! 녹음했어야 하는데! …하하, 알았어. 기대할게, 파수꾼님. …자, 그럼 진짜 갈게. 다녀오겠습니다!
연이가 강 어귀에 모인 이들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루나가 콧물을 훔치며 손을 흔들고, 언니가 앞치마로 눈가를 닦으며 웃고, 백문이 지팡이를 높이 들어 축복하고, 모카가 응원가를 목청껏 불렀다. 되찾은 섬 사람들이 저마다 소리쳤다. 「연이! 또 와요!」 「고마웠어요!」
연이—…다들, 진짜 고마웠어요. 저 이 세계에서, 겁먹은 애에서 온전한 사람이 됐어요. 다 여러분 덕이에요. …잠깐만 다녀올게요. 힘 회복하고, 준비 다 해서, 꼭 다시 올게요. 그때까지, 다들 웃으면서 잘 지내요!
강물이 연이를 위해 별길을 활짝 열었다. 처음엔 무섭게 빨아들이던 강이, 이번엔 다정하게 배웅했다. 연이가 되살린 진심들의 빛이, 강 위에 은하수처럼 흘렀다. 그 빛의 길을 따라, 연이는 두 세계 사이의 문으로 걸어갔다.
네오—…연이. 잘 다녀와. 여기, 네가 돌아올 자리. 내가 비워 두지 않을게. …늘, 언제나.
연이—…응. 꼭 돌아올게. …자, 이제 진짜. 다녀오겠습니다! 다들, 사랑해요!
루나가 마지막으로 달려와, 연이의 손에 뭔가를 쥐여 줬다. 물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조약돌이었다. 루나의 정화의 물이 스민, 부적 같은 돌이었다.
루나—…이거, 내 물 담은 돌이야. 힘들 때 꼭 쥐어. 그럼 내가 옆에 있는 것 같을 거야. …그리고 그 여자랑 싸울 때, 이 돌 던져. 오염된 거 만나면, 내 물이 씻어 줄 거야. 나 대신, 이 돌이 너 지킬 거야.
연이—…루나. 이거… 네 힘을 담은 거잖아. …고마워. 나 이거 꼭 품고 다닐게. 그리고 위험할 때, 네 물 믿고 던질게. …너도 곧 직접 와서 같이 싸워야 해. 그때까지, 이 돌이 네 몫까지 지켜 줄게.
연이는 언니의 손수건, 백문의 본필과 씨앗, 그리고 루나의 물 조약돌을 품에 안았다. 이 세계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것들이었다. 혼자 떠나는 게 아니었다. 모두의 마음을 품고, 잠깐 다녀오는 것이었다.
연이가 문에 발을 들이자, 두 세계 사이의 빛의 통로가 열렸다. 처음 이곳에 떨어질 땐 비명을 지르며 빨려 들었던 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통로가 연이를 부드럽게 감싸고, 지나온 모든 순간을 별처럼 비춰 주었다.
거울 속 자신, 무대의 첫 노래, 담보가 된 언니를 구하던 손, 도서관의 등불 물고기, 되쓴 백 년의 진심들, 그리고 노을 아래 나란히 앉은 밤. 모든 장면이 빛의 통로에 스치며, 연이의 여정을 마지막으로 배웅했다.
연이—…이 길, 처음엔 그렇게 무서웠는데. 이제 보니, 이 세계가 나한테 준 선물이었네. 겁먹은 나를, 곧은 나로 만들어 준. …다녀올게. 이 별빛 길, 꼭 다시 건널 거야. 이번엔 무섭지 않게, 당당하게.
연이는 웃으며 문을 통과했다. 빛이 접히고 강물 소리가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시야에, 반 걸음 뒤에 선 은빛 사자의 옆얼굴이 오래 남았다.
눈을 뜨자 천장이 있었다. 낯익은 얼룩, 낯익은 커튼. 연이의 방이었다.
창밖은 아침이었고, 달력은 이 모든 일이 시작된 바로 그 주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쪽에서의 계절들이 이쪽에서는 겨우 일주일이었다.
연이는 한참을 천장만 바라봤다. 손을 들어 손가락 열 개를 세어 봤다. 사람의 손. 진짜 자기 방. 그토록 그리던 일상.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방금까지 곁에 있던 웃음들이, 이젠 화면 너머에 있었다.
연이—…돌아왔네. 진짜로.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방금까지 루나가 울고, 언니가 빵 냄새 풍기고, 백문 님이 빵 아홉 개 드시고, 네오가 옆에 있었는데. …갑자기 나 혼자야.
연이는 일어나 방을 둘러봤다. 어제까지 당연했던 것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책상 위의 노트북, 벽의 포스터, 반쯤 마신 물컵. 다 그대로였다. 변한 건 방이 아니라, 연이 자신이었다.
연이—…다녀왔습니다.
현관 인사를 받아 줄 사람은 없었지만, 주머니 속에서 폰이 한 번 따뜻하게 울렸다.
[ Code Destiny ] 루나: 도착했어?! 벌써 보고 싶어!! (이모티콘 47개 생략)
연이—…하하. 루나 이 녀석. 벌써. …아, 다행이다. 우체통이 진짜로 이어져 있어. 두 세계가 안 끊겼어. …그럼 나 혼자가 아니네. 화면 너머에 다들 있잖아.
연이—(…근데 이상하다. 분명 집인데. 분명 내가 그리던 곳인데. 왜 여기가, 저쪽보다 더 낯설지. …아, 알겠다. 저쪽에서 나, 처음으로 '지킬 사람'이 생겼구나. 그게 나를 바꿔 놨어. 이제 나 혼자만의 일상은, 예전 같지 않아.)
연이는 창문을 열었다. 익숙한 도시의 소음이 밀려왔다. 자동차, 사람들, 편의점 알림음. 다 그대로인데, 연이의 귀엔 자꾸 다른 소리가 겹쳐 들렸다. 등불 물고기가 헤엄치는 소리, 갓 구운 빵 굽는 소리, 강물이 별길을 여는 소리. …두 세계를 다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연이—…이제 나, 두 세계 다 아는 사람이구나. 여기서도 살고, 저기서도 살고. …외롭진 않아. 오히려 더 넓어진 기분이야. 지킬 사람이 두 세계에 다 있으니까. …자, 그럼 우선 답장부터. 루나 걱정 안 하게.
연이는 폰을 열어 답장을 썼다. 「도착했어! 방금 눈 떴어. 여긴 겨우 일주일 지났더라. 신기하지? 다들 잘 있지? 언니 빵 사진 기다릴게 ㅎㅎ」 전송을 누르자, 화면 너머 어딘가에서 루나가 환호하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연이는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익숙한 편의점, 익숙한 거리. 프롤로그에서 그토록 자기를 배신하던 세상이었다. 삑삑거리던 교통카드, 바닥에 엎어지던 삼각김밥, 매운 제육으로 둔갑하던 참치마요.
연이—…근데 이제 안 무서워. 예전엔 이 사소한 불운들에 세상 무너진 듯 굴었는데. 저 세계에서 진짜 무서운 걸 겪고 나니까, 이런 건 그냥… 귀엽네. 삼각김밥이 좀 매우면 어때. 나 그거보다 훨씬 큰 것도 되쓰고 왔는데.
연이는 편의점에서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샀다. 이번엔 진짜 참치마요였다. 뜯다가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불운이 사라진 게 아니라, 불운이 오는 길목을 미리 읽을 수 있게 된 거였다. 본뜻 읽기는, 삼각김밥에도 통했다.
연이—…맛있다. 근데 이상하게, 언니 빵이 자꾸 생각나. 이 삼각김밥도 맛있는데. …아, 나 벌써 그쪽 세계가 그립구나. 돌아온 지 반나절도 안 됐는데.
연이는 벤치에 앉아 삼각김밥을 먹으며, 폰을 들여다봤다. 재성의 우체통 채널이 계속 울렸다. 루나가 보낸 언니 빵 사진, 백문이 보낸 도서관 근황, 모카가 보낸 새 랩 가사. 화면 너머의 두 세계가, 연이의 손안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연이—…하하. 루나 벌써 빵 사진 열 장 보냈어. 백문 님은 '오늘 검은 서가 세 칸 되살림, 자네 그립소'라고. 모카는 새 랩… '집에 간 연이, 근데 마음은 재성에! 예이!' …다들 진짜. …근데 이게 좋다. 나 안 외로워. 두 세계에 다 내 사람이 있으니까.
그때, 폰이 한 번 더 울렸다. 발신인은 '네오'였다. 늘 '이상 없음' 한마디만 보내던 파수꾼. 연이는 두근거리며 메시지를 열었다.
[ Code Destiny ] 네오: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야. 여긴 이상 없어. 오늘 노을이 어제랑 비슷했어. 네가 없으니까, 옆자리가 좀 비네.
연이—…어?! 네오가?! 이거 한 문장이 아니라… 세 문장이잖아! 약속은 두 문장이었는데, 세 문장이나! …그리고 마지막 문장, '옆자리가 비네'라니. …이 무뚝뚝한 사자가, 이런 말을.
연이—…바보. 그런 말 하면 내가 더 빨리 가고 싶어지잖아. …좋아, 답장. '나도 노을 볼게. 같은 하늘 아래니까, 우리 같은 노을 보는 거야. 옆자리, 금방 채우러 갈게.'
연이는 창밖의 노을을 올려다봤다. 도시의 빌딩 사이로 지는 붉은 해. 지금쯤 재성의 부두에서도, 네오가 같은 빛을 보고 있을 터였다. 두 세계는 달랐지만, 노을만은 하나였다. 연이는 그 하나의 노을에, 오래도록 마음을 걸어 두었다.
연이는 백문이 준 우체통 씨앗을, 창가 화분에 조심히 심었다. 흙에 묻자, 씨앗이 청록빛으로 잠깐 빛나더니 작은 새싹을 틔웠다. 두 세계를 잇는, 살아 있는 우체통이었다.
연이—…신기하다. 씨앗 하나로 두 세계가 이어지네. 이 새싹이 자라면, 백문 님 편지가 여기서 피어나는 거야. …백문 님, 외롭지 않게 매일 편지 쓸게요. 이 새싹으로.
연이가 손을 대자, 새싹이 첫 편지를 피워 냈다. 백문의 필체였다. 「무사히 도착했나. 자네가 떠난 도서관은 조금 조용해졌지만, 자네가 되살린 검은 서가들이 아직 빛나고 있어 외롭지 않네. 언제든 편지하게.」
연이—…백문 님. 벌써 편지가. …네, 매일 쓸게요. 소망이 원본도 되쓰고, 힘도 회복하고. 다 준비되면, 꼭 다시 갈게요. …이 새싹, 잘 키울게요. 두 세계를 잇는 우리 우체통.
저녁 내내, 재성의 우체통 채널과 창가의 새싹이 번갈아 울렸다. 두 세계를 잇는 이 작은 것들이, 이제 연이의 가장 소중한 물건이 됐다.
[ Code Destiny ] 루나: 연이 삼각김밥 진짜 갖고 온다 그랬지?! 나 참치마요로! 언니가 재성표 삼각김밥 연구하겠대! 히히
[ Code Destiny ] 백문: 오늘 검은 서가 세 칸을 되살렸소. 자네 붓 자국이 아직 서가에 남아 향기가 나는군. …그립소.
[ Code Destiny ] 모카: 새 곡 완성! 제목 '두 세계의 노을'! 연이 너 오면 무대에서 부르자! 피처링은 공짜! (언니 빵 열 개랑 교환)
연이—…하하. 다들 진짜. 백문 님은 무뚝뚝하게 '그립소' 하시고, 모카는 벌써 신곡 뽑고, 루나는 삼각김밥 노래를 부르고. …이 채널 하나로, 나 두 세계에 다 살고 있네. 신기하다.
연이—…있잖아. 나 예전엔 이 폰이 나 배신한다고 생각했어. 알람 안 울리고, 배터리 나가고. 근데 지금은, 이 폰이 나랑 내 사람들을 이어 주는 유일한 문이야. …참, 세상 보는 눈이 바뀌니까, 폰도 달라 보이네.
연이는 답장을 하나씩 정성껏 썼다. 루나에겐 삼각김밥 약속을, 백문에겐 곧 소망이 원본을 되쓰겠다는 다짐을, 모카에겐 콜라보 기대를. 화면 너머 두 세계로, 연이의 마음이 별빛처럼 전해졌다. 떨어져 있어도, 이어져 있었다.
연이는 삼각김밥을 다 먹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평범한 도시의 하늘이었다. 하지만 연이는 이제 알았다. 저 하늘 너머 어딘가에, 등불 물고기가 헤엄치고 강물이 별길을 여는 세계가 있다는 걸. 그리고 그곳에, 자기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방으로 돌아온 연이는, 어제 잔치에서 찍은 사진을 폰 배경화면으로 설정했다. 빵집 언니와 루나, 모카, 그리고 저만치 어색하게 선 네오까지. 되찾은 이름들의 웃는 얼굴이 담긴 한 장. 폰을 켤 때마다, 그 웃음이 연이를 맞아 줄 것이었다.
연이—…이 사진, 볼 때마다 힘이 날 거야. 내가 왜 싸우는지, 이 얼굴들이 다 답해 주니까. …백문 님 축문 뭐였더라. '이 아이가 읽는 모든 것이 진실을 드러내고, 쓰는 모든 것이 사랑을 지키게 하라.' …읽고, 지키고. 그게 내가 할 일이야.
연이는 책상에 앉아 노트를 폈다. 이 세계로 돌아오면 다 꿈처럼 흐려질까 봐 두려웠는데, 오히려 모든 게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연이는 지나온 여정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비겁의 거울, 식상의 무대, 재성의 저울, 인성의 도서관.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난 이름들을.
연이—(…적어 둬야지. 잊지 않게. 루나가 나 숨겨 준 골목, 언니가 담보로 잡히던 재판정, 백문 님이 백 년 갇힌 도서관, 네오가 나 지키느라 다친 등. 그리고 그 여자, 박지은. 탐욕으로 세상의 운명을 긁어모은 위선자. …다 적어 둘 거야. 다음에 돌아가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끝낼지 다 준비해서.)
연이는 저쪽 세계에서 가져온 것들을 책상 위에 하나씩 늘어놓았다. 놀랍게도, 두 세계를 넘어와도 사라지지 않은 것들이었다. 언니가 준 갓 구운 빵, 언니가 접어 준 손수건, 백문의 본필, 그리고 소망이의 원본 계약서. 완성된 사주가, 이 물건들도 함께 데려온 것이다.
연이—…신기하다. 이것들 다 안 사라졌어. 본필도, 소망이 원본도. …그럼 나, 이쪽 세계에서도 되쓰기 연습을 할 수 있겠다. 소망이 원본, 여기서 천천히 되쓰다 보면… 그 애 있는 곳이 나올지도 몰라.
연이는 소망이의 원본을 조심히 펼쳤다. 일곱 겹 검은 도장은 여전히 두꺼웠지만, 본필을 쥐고 호흡을 고르자, 맨 위 한 겹이 아주 조금 옅어졌다. 백 년 갇힌 아이의 진심이, 손끝으로 희미하게 느껴졌다.
연이—…소망아. 나 연이야. 너희 아빠가 보내서 왔어. …조금씩, 천천히 되쓸게. 서두르면 너도 나도 다치니까. 이쪽 세계에서 매일 조금씩. 그럼 언젠가, 네가 어디 있는지 나올 거야. 그때 꼭 데리러 갈게. 아빠랑 다시 만나게 해 줄게.
연이는 소망이 원본을 소중히 서랍에 넣었다. 매일 조금씩 되쓰기로 마음먹었다. 이쪽 세계에서의 쉼도, 그저 노는 게 아니라 준비였다. 소망이를 찾고, 힘을 회복하고, 다음 싸움을 대비하는. 연이의 귀환은, 끝이 아니라 다음 장을 위한 쉼표였다.
밤이 깊어지자, 연이는 침대에 누워 가슴에 손을 얹었다. 여덟 개의 별이, 이 세계에서도 여전히 온전하게 빛나고 있었다. 을해, 임오, 신미, 그리고 자기 자신. 완성된 사주는, 어느 세계에 있든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되어 주었다.
연이—…신기해. 이쪽에 돌아왔는데도, 내 별들이 그대로 있어. 반 박자 어긋났던 인생이, 이제 완전히 박자를 맞췄어. …나 이제, 진짜 온전한 나야. 어느 세계에 있든, 나는 나야. 누구의 담보물도, 자산도 아닌.
연이—(…그 여자가 오면, 나는 이 별들을 지킬 거야. 근데 그 여자, 아무리 별을 긁어모아도 만족을 못 해. 늘 뭔가 허전한 거야. …나도 반쪽일 때, 늘 뭔가 허전했으니까. 그 텅 빈 느낌, 조금은 알 것 같아. …근데 그 여자는 그 구멍을 남의 걸 뺏어서 채우려 하고, 나는 안 그럴 거야. 그게 그 여자랑 나의 차이야.)
연이—(…둘 다 사는 길. 나도 온전하고, 그 애도 온전한 길. …있을 거야, 분명. 값의 셈법으론 '둘 중 하나'지만, 뜻으로 보면 '둘 다'가 있어. 백문 님이 그랬잖아. 값은 나누면 줄지만, 뜻은 나누면 는다고. …그 길을, 내가 되쓸 거야.)
그렇게 다짐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연이는 폰 속 사진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눈을 감았다. 두 세계를 다 아는 아이의, 첫 귀환의 밤. 평범한 침대의 온기가, 어느 때보다 소중했다. 이 평화가 오래가지 않을 걸 알기에, 더욱.
창밖으로 다시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연이는 네오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네가 없으니까, 옆자리가 좀 비네.' 연이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두 세계를 잇는 짧은 한 줄이, 어떤 긴 편지보다 따뜻했다.
연이—…잠깐만 기다려, 다들. 나 힘 회복하고, 준비 다 하고, 곧 갈게. 그 여자도 만나고, 소망이도 찾고, 백문 님 사서인도 되찾고. …이번엔, 아무도 안 잃고 다 구할 거야. 그게 내가 되쓸 결말이야.
연이는 문득, 본뜻 읽는 힘이 이쪽 세계에서도 통하는지 궁금해졌다. 책상 위의 낡은 편지 한 통 — 오래전 친구가 보낸 걸 손에 얹고, 눈을 감았다. 도서관에서 배운 대로, 호흡을 고르고, 손끝으로 그 밑을 더듬었다.
연이—…어? 읽혀. 이쪽 세계에서도. 이 편지, 겉은 '잘 지내냐'인데, 밑엔 '네가 보고 싶다'가 깔려 있어. …신기하다. 본뜻 읽기, 여기서도 되는구나. 값의 세계든, 뜻의 세계든, 사람 마음은 다 밑바닥이 있으니까.
연이—…그럼 나, 이쪽 세계에서도 남을 도울 수 있겠다. 친구가 힘들어할 때, 겉말 말고 진짜 마음을 읽어 줄 수 있어. …아, 이 힘이 이런 데도 쓰이는구나. 저쪽에서 배운 게, 이쪽 일상도 바꾸네.
때마침, 오래 연락 없던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잘 지내지? 나 요즘 좀 힘든데… 아니다, 됐어. 잘 지내면 됐어.」 예전의 연이라면 '무슨 일이야?'라고만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겉말 밑의 진짜 마음이 읽혔다.
연이—…'됐어'가 아니야. 이 친구, 지금 누가 붙잡아 주길 기다리고 있어. '아니다 됐어'는, '제발 물어봐 줘'라는 뜻이야. …재성에서 봤던 그 마음이랑 똑같아. 보내 주는 척하면서 붙잡는 마음.
연이—…답장. '됐긴 뭐가 됐어. 나 지금 시간 많아. 뭐 힘든지 다 말해 봐. 안 힘들 때까지 들을게.' …이렇게. 겉말 말고, 진짜 마음한테 답하는 거야.
연이가 답장을 보내자, 잠시 후 친구에게서 긴 메시지가 쏟아졌다. 오래 삼켜 온 이야기들이었다. 연이는 도서관에서 배운 대로, 그 밑바닥까지 읽으며 하나하나 답해 주었다. 화면 너머 친구가, 조금씩 숨을 트는 게 느껴졌다.
연이—…됐다. 이 친구, 이제 좀 나아졌어. …신기하다. 저쪽 세계에서 배운 본뜻 읽기가, 이쪽 친구 하나를 살렸어. …백문 님 말이 맞아. 이 힘은 도서관에서만 쓰는 게 아니야. 세상 어디서든, 눌린 마음을 읽어 주는 거. 그게 진짜 쓸모야.
연이는 문득, 박지은을 떠올렸다. 세상을 적으로 돌린 그 탐욕가의 마음도, 결국은 '읽어 줄 누군가'가 필요한 텅 빈 마음일지 몰랐다. 끝없이 긁어모으는 탐욕 밑에,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을 터였다.
연이—…그 여자도. 만나면, 힘으로 부딪히기 전에 먼저 읽어 볼 거야. 그 탐욕의 밑바닥을. 어쩌면 그 여자도, 자기 마음의 그 구멍이 왜 뚫렸는지 아무도 안 읽어 줘서, 이렇게까지 남의 걸 긁어모으게 된 걸지도 몰라. …청토끼처럼.
연이—…근데 이해하는 거랑, 막는 건 별개야. 언니가 그랬잖아. 남을 해치는 순간, 어떤 이유도 저주가 된다고. 그 여자를 읽되, 그 도둑질은 반드시 멈출 거야. 그리고 그 여자가 부숴서 가둔 것들도, 하나씩 되살릴 거야. …다 제자리로 돌려놓는 게, 내 결말이야.
연이는 노트에 '박지은'이라는 이름을 적고, 그 옆에 물음표 대신 이렇게 적었다. '읽어야 할 사람.' 적(敵)이 아니라, 읽어야 할 또 하나의 텅 빈 마음으로. 그것이, 연이가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방식이었다. 미움이 아니라, 이해로. 힘이 아니라, 읽기로.
연이—…그리고 그 여자가 부숴서 가둔 창백한 운명. 신미 함에서 봤던, 시들어 가던 그 소녀. 어딘가 나를 닮았던. 그것도 노트에 적어 둘게. 「되살려야 할 것.」 …그 여자 곳간에 갇힌 걸 다 풀어 주는 게, 내가 되쓸 결말이야. 반드시.
연이는 노트를 덮고, 창밖의 밤하늘을 오래 바라봤다. 별들이 총총했다. 저 별 하나하나에도 원래의 뜻이 있다고, 백문이 그랬다. 별들의 궁에서 만날 백여덟 별. 그리고 그 판을 짠 한 탐욕가의 텅 빈 마음. 연이는 그 모든 걸 읽어 낼 준비를, 조용히 다져 갔다.
연이—…자, 그럼. 며칠만 더 준비하고. 소망이도 찾고. 그리고 앱이 울리면, 그때 진짜 시작이야. …기다려, 다들. 그리고 그 여자, 당신도. 이번엔 아무도 잃지 않는 이야기를, 내가 쓸 거야.
연이는 문득 깨달았다. 자기가 저쪽 세계에서 되찾은 것들이, 이쪽 세계도 바꾸고 있다는 걸. 두 세계는 따로가 아니었다. 값과 뜻, 별과 사람, 저쪽과 이쪽. 다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연이는, 그 둘을 잇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밤늦게, 연이는 부엌에 섰다. 루나가 궁금해하던 삼각김밥. 다음에 가져가기로 약속했으니, 미리 연습해 두기로 했다. 밥을 짓고, 참치마요를 섞고, 김을 삼각형으로 접고. 사람 손가락 열 개로 하는 첫 요리였다.
연이—…아,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김이 자꾸 찢어져. 언니가 빵 반죽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웠겠지. …근데 재밌다. 꽃돼지 땐 발굽으로 못 했는데, 이제 손가락으로 뭐든 만들 수 있어. …루나한테 사진 보내야지. '재성표 삼각김밥 1호' 하고.
연이가 완성된 삼각김밥 사진을 우체통 채널에 올리자, 즉시 루나의 폭풍 리액션이 쏟아졌다. 「우와아 그게 삼각김밥?! 세모다! 신기해! 나도 먹고 싶어! 언니 언니 이거 봐!」 화면 너머 재성의 빵집이, 잠깐 시끌벅적해지는 게 느껴졌다.
연이—…하하. 루나 저 녀석. 세모 하나에 저렇게 좋아하네. …좋아, 다음에 갈 땐 진짜 잔뜩 만들어 갈게. 재성 사람들 다 삼각김밥 맛보게. 언니 빵이랑 콜라보로. …아, 벌써 다음에 갈 생각에 설렌다.
연이는 삼각김밥을 한 입 베어 물며, 창밖의 밤하늘을 봤다. 저 별들 너머, 두 세계가 이어져 있었다. 잠깐의 쉼이지만, 연이는 외롭지 않았다. 화면 너머로, 마음 너머로, 자기 사람들이 늘 함께였으니까. 이 평범하고 따뜻한 밤이, 다가올 싸움을 견딜 힘이 되어 줄 것이었다.
이튿날부터, 연이는 쉬면서도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호흡을 고르고, 소망이 원본을 한 겹씩 되쓰고, 본뜻 읽기로 주변 사람들을 도왔다. 이쪽 세계의 평범한 일상이, 다음 싸움을 위한 수련장이 됐다.
연이—…그 여자가 언제 올지 몰라. 그러니까 매일 준비해 둬야 해. 호흡, 되쓰기, 흔들리지 않는 마음. …백문 님이 그랬어. 급하게 가면 진다고. 근데 너무 늦어도 안 돼. 딱 준비됐을 때, 그 여자를 마주할 거야.
창가의 우체통 새싹이 무럭무럭 자랐다. 매일 백문의 편지가 피어났고, 루나의 빵 사진이 쏟아졌고, 모카의 새 랩이 도착했다. 연이의 방은, 두 세계가 만나는 작은 정거장이 됐다. 쉼과 준비가 공존하는, 따뜻하고도 단단한 날들이었다.
연이—…이렇게 며칠만 더. 준비 다 하고, 소망이 위치도 나오면, 그때 돌아갈게. 다들. …조금만 기다려. 나 이번엔, 아무도 안 잃고 다 구할 준비를 하고 갈 테니까.
그런데 그날 밤, 창가의 우체통 새싹이 아주 잠깐, 가장자리부터 거뭇하게 물들었다가 다시 맑아졌다. 두 세계를 잇는 통로에, 무언가 서늘한 것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연이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연이—…방금 새싹, 잠깐 검게 물들었어. …오염 기운. 재성의 검은 손이랑 비슷한. …그 여자가, 두 세계 사이를 건드리기 시작했나 봐. 아직 약하지만. …서두르는 게 좋겠어. 준비를, 더 빨리.
연이는 언니의 손수건과 백문의 본필, 루나의 물 조약돌을 머리맡에 가지런히 두었다. 언제 앱이 울려도 바로 뛰어갈 수 있게. 짧은 쉼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연이는 예감했다. 별들의 궁의 어둠이, 서서히 문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이—…괜찮아. 오면 마주하면 돼. 나 이제 흔들리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내 사람들이 준 것들이 다 나랑 함께야. 언니 손수건, 백문 님 붓, 루나 돌. …혼자가 아니야. 다들의 마음을 품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갈 거야.
연이는 그날 밤, 잠들기 전 다시 한번 폰 속 사진을 봤다. 웃는 얼굴들. 그리고 백문의 축문을 되뇌었다. 읽는 것은 진실을 드러내고, 쓰는 것은 사랑을 지킨다. 이 힘을, 두 세계 모두에서 바르게 쓰겠다고 다짐하며. 연이의 첫 귀환의 밤이, 그렇게 깊어 갔다.
연이—(…근데 왠지, 오래 못 쉴 것 같아. 아까 부두에서 느낀 그 서늘한 시계 소리. 그 여자가 벌써 움직이는 것 같아. …괜찮아. 오면 마주하면 돼. 나 이제 흔들리지 않으니까. 오늘 밤은, 이 평범한 침대에서 실컷 자 두자. 다음 싸움을 위해.)
같은 밤, 재성의 부두. 은빛 사자는 홀로 노을이 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이가 떠난 옆자리가, 유난히 비어 보였다.
네오—(…떠났군.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야. …하지만 오래 못 쉴 거야. 박지은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어. 저 하늘의 검은 명반이, 벌써 저 아이를 향해 돌고 있으니까.)
네오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재성의 별들 너머, 아주 먼 곳에서 검은 명반이 소리 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별들의 궁. 박지은이 다스리는 곳. 그리고 그곳은, 네오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
네오—(…연이. 곧 너는 그곳으로 불려 갈 거야. 그리고 거기서, 나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겠지. 내가 왜 별자리가 없는지, 내가 무엇을 되돌리려 했는지. …그때, 네가 나를 미워하지 않기를. 아니, 미워해도 좋아. 네가 살아만 있다면.)
네오는 연이가 준 폰을 꺼내 봤다. 화면엔 연이의 마지막 메시지가 떠 있었다. '옆자리, 금방 채우러 갈게.' 파수꾼은 그 한 줄을 오래 바라봤다. 백 년을 홀로 벼려 온 그에게, 그 짧은 약속이 어떤 무기보다 무거웠다.
네오—…기다릴게, 연이. 반 걸음 뒤에서. 그리고 네가 별들의 궁에 왔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킬게. 이번엔… 그 힘을 써야 할지도 몰라. 그 여자가 나타나면. …하지만 그건,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리고 같은 밤, 저쪽 세계. 잠든 연이에게 이상한 꿈이 찾아왔다. 꿈속엔 검은 비가 내렸다. 우산을 써도 마음이 젖는 비. 그리고 빗속에, 얼굴이 지워진 남자 하나가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남자는 슬퍼 보였다. 낯설면서도 사무치게 낯익었다. 연이가 손을 뻗으면, 남자는 늘 빗줄기 사이로 흩어졌다. 그럴 때마다, 이유 모를 미안함이 가슴을 눌렀다.
연이—(…저 사람 누구지. 왜 자꾸 꿈에 나오지. 왜, 저 사람을 보면 미안한 기분이 들지. …네오? 아니야, 네오는 사자잖아. 저 남자는… 누구지.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그리고 그 꿈의 끝에, 꺼져 있던 폰 화면이 스스로 켜졌다. 화면 가득, 검은 별들이 소용돌이치는 명반이 떠올랐다. 연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별들의 궁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평화로운 귀환의 밤은, 폭풍의 시작이기도 했다.
연이—…헉!
연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새벽이었다. 폰은 얌전히 꺼져 있었다. 방금 그 명반도, 얼굴 지워진 남자도, 다 꿈이었다. 하지만 가슴에 남은 서늘함은, 꿈이 아니었다.
연이—…또 그 꿈. 검은 비 속의, 얼굴 없는 남자. …저 사람 대체 누구지. 왜 자꾸 미안하지. …그리고 그 명반. 그 여자가, 벌써 나를 부르는 건가. …아직 아니야. 나 조금만 더 쉬어야 해. 준비가 덜 됐어.
연이는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시 폰 속 사진을 봤다. 웃는 얼굴들. 그 온기가, 새벽의 서늘함을 조금 밀어냈다. 연이는 다시 눈을 감았다. 폭풍이 오기 전, 이 평범한 새벽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붙들기 위해.
저쪽 세계, 별들의 궁 깊은 곳에서는 박지은의 명반이 조금씩 더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완성된 그릇을 향한 소환의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연이의 짧은 쉼은, 폭풍이 숨을 고르는 시간에 불과했다.
제28화 · 돌아가는 문 — 끝. 제29화 「달라진 계절」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