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 DESTINY꿀꿀 운세

EP.27A · 34 / 70

벌

서한비 시점. 명령을 어긴 벌로 고리가 더 조여 온다. 이번엔 저쪽에서 끝내라.

한글 약 1,962자 · 읽는 시간 약 5분

빵집에서 멀리 떨어진 강 상류. 물살이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곳에, 검은 호랑이가 혼자 웅크리고 있었다.

등에는 검은 손이 남긴 자국이 열두 개 있었다. 찢어진 망토 사이로 상처가 욱신거렸다. 호랑이는 상처를 핥지 않았다. 핥으면 아프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

대신 망토 안쪽을 더듬었다. 종이에 싼 빵이 아직 거기 있었다. 따뜻함은 다 빠져나가고, 모양만 남아 있었다.

검은 호랑이—식으면 그냥 빵이라고 했지.

쪽지를 펼쳤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축제 섬의 북 치던 아이. 그녀가 박수를 거둬 간 아이.

검은 호랑이—너는 아직 북 치니. 박수 없이도.

쪽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호랑이는 쪽지를 다시 접었다. 접는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장부를 덮을 때와는 다른 손이었다.

호랑이는 빵을 꺼내지 않았다. 망토 안의 다른 자리를 확인했다. 북 아이의 이름이 적힌 쪽지. 그 옆에 빵. 장부에 없는 것이 둘로 늘었다.

장부를 펼쳤다. 연이의 칸에는 잔고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 누가 쓴 적도 없는 줄 하나가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 장부 · 乙亥 연이 · 미수 1 ]

검은 호랑이—미수.

받지 못한 돈. 받아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호랑이는 그 줄을 발톱으로 긁었다. 줄은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검은 호랑이—내가 뭘 못 받았는데. 다 받았어. 그 애 내일까지 전부.

그 말을 하는 순간, 이마에 닿았던 감촉이 되살아났다. 아무것도 없는 아이가 제 이마로 고리를 밀던 감촉. 아프면 아프다고 하라던 목소리.

받은 것은 운이었다. 그런데 장부는, 그녀가 무언가를 받았다고 적고 있었다. 갚지 못한 무언가를.

오른 앞발의 고리가 갑자기 뜨거워졌다. 금장 고리가 붉게 달아오르며 한 칸, 또 한 칸 조여들었다. 뼈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검은 호랑이—크윽.

강물 위로 검은 금이 하나 그어졌다. 다른 하늘로 밀려난 틈. 틈 너머에서 목소리가 고리를 타고 흘러들었다.

흑월—호랑이야. 내 그릇을 감싸 안던 그 앞발. 아직 붙어 있구나.

검은 호랑이—붙어 있습니다.

흑월—아쉽구나. 떼어 갔어야 했는데.

고리가 다시 조여들었다. 호랑이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바위에 발톱을 박고 버텼다. 바위가 갈라졌다.

흑월—너는 왜 내게 왔느냐. 기억하느냐.

검은 호랑이—그 아이가 괴물이 되기 전에 막으려고요.

흑월—그래. 그 아이는 언젠가 모두를 배신한다. 너를 배신했듯이. 그걸 막을 기회를 준 것이 누구지.

검은 호랑이—당신입니다.

흑월—그 은혜를 잊었느냐.

검은 호랑이—잊지 않았습니다. 하루도.

흑월—그런데 오늘 너는 그 아이를 구했다.

호랑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강물 소리만 들렸다. 대답할 말이 정말로 없었다. 왜 그랬는지, 그녀 자신도 몰랐다.

대답 대신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그녀가 고른 것이 아니었다. 고리가 조일 때마다 늘 이 장면이 비어져 나왔다.

비 오는 정류장. 젖은 벤치. 누군가 우산을 반쯤 기울여 주던 손. 얼굴은 늘 빗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 같은 손이 그녀를 밀어내던 장면. 그 손의 주인 눈 뒤에, 무언가 검고 둥근 것이 비쳤던 것 같은 기분.

그 기분은 늘 거기서 끊겼다. 끊긴 자리를 흑월의 목소리가 메웠다. 그 아이는 배신한다. 그 아이는 배신한다.

흑월—하나 묻자. 그 빵은 얼마였느냐.

검은 호랑이—네?

흑월—네 망토 안에서 냄새가 난다. 장부에 없는 냄새가.

호랑이는 저도 모르게 망토를 앞발로 감쌌다. 그 동작이 대답이 되었다. 틈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흑월—공짜라더냐. 공짜는 없다.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느냐. 그 빵 값은 나중에 반드시 청구될 것이다. 네 피로.

검은 호랑이—빵 값은 제가 냅니다. 그 빵집은 건드리지 마세요.

흑월—오호. 명령이냐.

검은 호랑이—부탁입니다.

고리가 마지막으로 크게 조였다. 호랑이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강물에 얼굴이 처박혔다. 차가운 물이 코로 들어왔다.

흑월—부탁은 들어주마. 대신 일을 해라.

흑월—그 아이는 문을 넘었다. 사람의 세상으로. 거기서는 사자도 작아지고, 손도 닿기 어렵지.

흑월—너도 가라. 사람의 얼굴로. 이번엔 저쪽에서 끝내라.

검은 호랑이—사람의 얼굴은 오래전에.

흑월—돌려주마. 빌려주는 거다. 이자는 알지?

검은 털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앞발이 손이 되고, 발톱이 손톱이 되었다. 고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른 손목에 가는 금줄이 되어 살 속에 감겼다.

틈이 닫혔다. 강가에는 젖은 머리카락의 여자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손에는 아직 장부가 쥐어져 있었다.

여자는 오래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망토를 뒤졌다. 망토는 이제 검은 코트가 되어 있었다. 안주머니에 쪽지 하나와 빵 하나.

여자는 빵을 꺼냈다. 종이를 벗겼다. 차가웠다. 한 입 베어 물었다.

식은 빵이었다. 그런데 단맛이 났다. 버터 냄새가 났다. 혀끝에서 천천히, 장부에 적을 수 없는 맛이 퍼졌다.

여자의 어깨가 한 번 떨렸다. 울지는 않았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을 뿐이었다.

빵을 반만 먹고, 나머지 반은 다시 종이에 싸서 넣었다. 왜 그랬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물어도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 오는 밤. 낡은 아파트 복도에 형광등 하나가 깜빡였다. 복도 끝 두 집. 한 집 문 앞에는 귀퉁이가 찢어진 우산꽂이가 있었다.

그 옆 빈집 문 앞에 검은 우산 하나가 세워졌다. 빗물이 우산 끝에서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다.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복도에는 비 냄새만 남았다.

빈집은 텅 비어 있었다. 바닥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여자는 불도 켜지 않고 창가에 섰다. 젖은 코트에서 물이 떨어졌다.

얇은 벽 너머에서 소리가 났다.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졸린 목소리.

네오, 그거 내 양말이야. 물고 가지 마. 아 진짜, 고양이가 왜 사자처럼 굴어.

여자는 벽에 손바닥을 댔다. 오른 손목의 금줄이 차갑게 빛났다. 벽 너머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하악, 하고 울었다.

검은 호랑이—여기서도 시끄럽네요, 두 분.

여자는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젖은 코트를 벗지 않은 채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벽 너머의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장부는 무릎 위에 펼쳐져 있었다. 미수 한 줄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여자는 그 줄을 오래 바라보다가, 장부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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