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 DESTINY꿀꿀 운세

EP.28A · 37 / 70

옆집의 검은 우산

맑은 날에도 검은 우산을 드는 이웃. 이름을 말하지 않고, 네오는 그녀에게 하악질한다.

한글 약 1,920자 · 읽는 시간 약 5분

사흘째 맑았다. 하늘은 높았고, 일기 예보는 일주일 내내 해 그림이었다.

그런데 옆집 여자는 오늘도 검은 우산을 들고 나왔다.

연이—(또 우산. 오늘 강수 확률 0퍼센트인데.)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여자는 우산을 접은 채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꼭 쥔 손이 하얬다.

연이—안녕하세요. 오늘도 우산 챙기셨네요. 저도 하나 살까 봐요. 비가 오려나.

옆집 여자—안 와요. 그냥 들고 다니는 거예요.

연이—아, 그럼 양산 같은 거예요? 햇빛 가리시는.

옆집 여자—비슷해요. 해가 좀 따가워서요.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천천히 내려왔다. 침묵이 한 층씩 무거워졌다.

연이—저 연이예요. 옆집이요. 이름 여쭤봐도 돼요?

옆집 여자—이름은…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연이—왜요? 이름이 비밀이에요?

옆집 여자—이름을 알려 주면 빚지는 기분이 들어서요. 받을 것도 없는데 주는 건 좀.

연이의 귀 뒤가 간질거렸다. 어디선가 들어 본 말 같았다. 그러나 어디서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연이—(이름이 빚이라니. 뭐 그런 말이 다 있어. …근데 왜 익숙하지.)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둘은 나란히 탔다. 거울 속에 두 사람이 비쳤다. 여자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

연이—이사 오신 지 며칠 됐는데 소리가 하나도 안 나요. 혹시 짐도 아직 안 푸셨어요?

옆집 여자—풀 짐이 별로 없어요. 오래 있을 집이 아니라서요.

연이—아, 잠깐 지내시는 거예요? 출장 같은 거?

옆집 여자—비슷해요. 일이 끝나면 가요. 끝나는 날은 아직 모르고요.

여자가 처음으로 연이 쪽을 보았다. 아주 짧게.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그리고 다시 층수 표시만 보았다.

연이—(방금 그 눈빛, 뭐지. 꼭 내가 잘 있나 세어 보는 것 같았어.)

1층에서 문이 열리자 여자는 먼저 내렸다. 걸음이 빨랐다. 검은 우산 끝이 바닥을 톡, 톡 쳤다.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아이 하나가 넘어졌다. 무릎이 까졌다. 아이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연이가 달려가기도 전에 옆집 여자가 멈춰 섰다. 걷던 그대로, 뚝.

여자는 우산을 바닥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코트 안주머니에서 반창고가 나왔다. 꼭 준비해 둔 것처럼.

옆집 여자—많이 아프면 울어도 돼요. 참는다고 덜 아픈 거 아니에요.

아이는 결국 울었다. 여자는 달래지 않았다. 반창고만 조심스럽게 붙이고, 다 울 때까지 기다렸다.

연이—(말투는 차가운데 손은 엄청 조심스럽다.)

반창고를 붙이느라 소매가 걷혔다. 오른 손목에서 가는 금줄 같은 것이 반짝였다. 팔찌인가 싶었지만, 살 속에 묻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연이의 시선을 느꼈는지 소매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우산을 집어 들었다.

연이—저기요, 고마워요. 아이 대신 제가 인사할게요.

옆집 여자—고마울 거 없어요. 그냥 지나가다가.

지나가다가라기엔 그녀는 한참을 멈춰 있었다. 연이는 그 뒷모습을 오래 보았다.

아이 엄마가 뛰어와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인사를 받지 않고 이미 저만치 걷고 있었다. 감사 인사가 무거운 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연이—(고맙다는 말을 피해. 고맙다는 말 들으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아이가 연이의 소매를 당겼다. 저 언니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연이도 몰랐다.

연이—언니도 몰라.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볼게. 이번엔 대답해 주시겠지.

집에 오니 네오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코를 킁킁거리더니 연이의 소매에 얼굴을 묻었다.

「또 그 여자 만났지. 비 냄새가 묻었다.」

연이—오늘 맑았거든요, 고객님. 비 냄새가 날 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상한 거다. 맑은 날에 비 냄새가 나는 사람.」

연이—(맞아. 이상하긴 해. 맑은 날 우산, 맑은 날 비 냄새.)

연이는 소파에 앉아 메모장을 열었다. 사흘 전에 적은 목록이 있었다. 빵. 루나. 모카. 윤달. 검은 호랑이.

그런데 목록을 읽어도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모카의 꼬리가 무슨 색이었더라. 윤달의 장갑은 어느 손이었더라.

연이—네오. 나 벌써 흐려지고 있어. 모카 목소리가 기억이 안 나.

「나도 그렇다. 여기 공기는 저쪽 기억을 지운다. 지우개처럼, 천천히.」

연이—그럼 더 적을래. 지워지는 것보다 빨리.

연이는 목록 아래에 한 줄씩 덧붙였다. 모카, 수달, 랩 못함. 윤달, 오른손 장갑, 궁합 사기. 검은 호랑이, 붉은 눈, 이름은 빚.

마지막 줄을 적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이름은 빚. 오늘 엘리베이터 앞에서 들은 말과 같은 모양이었다.

연이—(설마. 아니야. 그 호랑이는 저쪽에 있잖아. 여긴 현실이고.)

「무슨 생각 하나. 얼굴이 심각하다.」

연이—아니야. 그냥, 말버릇 비슷한 사람이 세상에 많다는 생각.

연이는 메모를 저장했다. 저장 버튼 옆에 작은 우산 아이콘이 깜빡였다. 그런 기능은 원래 없었다.

밤늦게 연이는 분리수거를 하러 복도로 나갔다. 형광등은 오늘도 깜빡였다.

복도 끝 창가에 옆집 여자가 서 있었다. 검은 우산을 펼쳐 쓴 채였다. 실내에서, 비도 오지 않는 밤에.

연이—…안 주무세요? 거기서 뭐 하세요?

여자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우산 그늘 아래 눈이 어두웠다. 그런데 형광등이 깜빡이는 순간, 그 눈동자에 붉은빛이 스쳤다.

연이—(붉은… 아니야. 형광등 탓이야.)

옆집 여자—들어가세요. 감기 걸려요.

연이—감기요? 비도 안 오는데요.

옆집 여자—그러네요. 안 오네요.

연이—(이 사람, 지금 나한테 비를 맞지 말라고 하는 거야. 비가 안 오는데도.)

연이—그쪽도 들어가세요. 복도 춥잖아요. 우산 쓰고 서 있으면 더 추워 보여요.

옆집 여자—저는 괜찮아요. 여기 서 있어야 잠이 와요.

이상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연이는 더 묻지 않았다. 묻으면 그 사람이 부서질 것 같았다.

연이는 들고 있던 봉지에서 남겨 둔 빵 반쪽을 꺼냈다. 그리고 창틀 위에 조용히 올려 두었다.

연이—야식이에요. 남은 거라 공짜예요. 안 드셔도 돼요.

여자는 우산을 접지 않았다. 연이가 문을 닫을 때까지 창밖만 보고 있었다. 빵에는 손대지 않았다.

문을 닫고 나서야 연이는 알았다. 복도 바닥에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창가에서 옆집 문 앞까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밤에.

아침에 나가 보니 창틀은 비어 있었다. 빵 봉지는 반듯하게 접혀 연이의 현관 손잡이에 걸려 있었다. 안에는 쪽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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