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은 일주일째 계속되었다. 연이는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장학금 서류가 한 번에 통과됐다. 사고 싶던 운동화가 반값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연이가 갈 때마다 1층에 서 있었다.
연이—(불운이 출근을 안 하니까 오히려 불안해. 이게 무슨 체질이야.)
「너는 운이 좋으면 의심부터 하는군.」
연이—그걸 가르친 게 저쪽 세계거든. 공짜 빵 빼고 공짜는 없더라.
「빵 봉지 접혀서 돌아온 거, 아직도 생각하나.」
연이—(응. 빵은 먹었을까. 봉지만 돌려준 걸까. 반듯하게 접은 게 꼭 영수증 같았어.)
연이—그 사람, 받는 걸 무서워하는 것 같아. 받으면 갚아야 하니까.
「그런 사람은 대개 많이 빼앗겨 본 사람이다. 혹은 많이 빼앗아 본 사람이거나.」
연이—둘 다일 수도 있겠네.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여니 옆집 여자가 상자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옆집 여자—택배가 저희 집으로 잘못 왔어요. 이 집 거예요.
연이—아, 감사합니다. 들어오실래요? 차라도 한잔.
옆집 여자—괜찮아요. 금방 갈 거예요.
그러면서도 여자는 돌아가지 않았다. 현관에 선 채 방 안쪽을 보았다. 구석에 세워 둔, 테이프 감긴 우산을.
옆집 여자—우산을 고치셨네요. 버리지 않고.
연이—네. 뒤집혔는데 살 수 있겠더라고요. 버리긴 아깝잖아요.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네오가 소파 뒤에서 낮게 그르렁거렸다.
연이—그 우산 뒤집혔던 날이 제 인생 최악의 날이었거든요. 버스 놓치고, 비 맞고, 앱에다 별점 하나 줬어요.
옆집 여자—별점이요?
연이—네. 우주한테요. 그랬더니 진짜 우주가 답장을 하더라고요. 믿기 어렵겠지만.
여자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이라 부르기엔 짧았다. 금세 사라졌다.
옆집 여자—믿어요. 우주는 답장을 하죠. 대신 늘 늦게.
연이—어, 그거 경험담 같은데요?
옆집 여자—그냥 하는 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옆집 여자—요즘 운이 좋으시죠.
연이—어떻게 아셨어요?
옆집 여자—얼굴에 써 있어요. 근데 좋은 운은 오래 안 가요. 그건 아시죠.
여자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 내일 보증 상담.
명함에는 짧은 계약서가 접혀 붙어 있었다. 이용자의 내일을 대신 보관하고 지켜 드립니다. 어떤 불운도 당신에게 닿지 않습니다.
옆집 여자—불운이 다시 오기 전에 미리 맡겨 두세요. 그럼 아무것도 잃지 않아요.
연이—(시간을 파는 섬에서 이런 거 본 적 있다. 청토끼 계약서. 작은 글씨부터 읽자.)
연이는 계약서를 끝까지 읽었다. 맨 아래, 아주 작은 글씨가 있었다. 보관 기간 중 이용자의 중요한 결정은 보관자와 사전 협의한다.
연이—중요한 결정이 뭔데요. 범위가 안 적혀 있네요.
옆집 여자—전부요. 위험한 결정은 전부.
연이—그럼 지켜 주는 대신 제가 고르는 걸 맡기라는 거잖아요.
옆집 여자—고르다가 다치는 것보단 낫죠. 당신은 고르다가 다치는 사람이에요. 아주 많이.
그 말에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연이가 다치는 걸 여러 번 본 사람처럼.
연이—다치는 것도 제가 고를게요. 감사하지만 안 할래요.
옆집 여자—왜요. 다치면 아파요. 아픈 거 싫잖아요. 누구나 싫어해요.
연이—싫죠. 근데 남이 골라 준 안전한 길로만 가면, 그건 제 내일이 아니잖아요.
여자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무언가 반박하려다 단어를 잃은 얼굴이었다.
여자의 손가락이 명함 모서리를 꽉 쥐었다. 종이가 구겨졌다.
옆집 여자—빚은 남겨 두면 불어나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연이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 말투. 그 문장. 시간을 파는 섬의 금고 앞에서 들었던.
연이—…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옆집 여자—아무것도요. 그냥 어른들이 하는 말이에요.
여자가 명함을 거두려 손을 뻗었다. 소매가 밀려 올라갔다.
오른 손목에 흉터가 있었다. 손목을 한 바퀴 감은 둥근 자국. 무언가에 오래 조여 있던 것처럼. 그 한가운데 가는 금줄이 박혀 있었다.
연이—(고리 자국. 오른쪽. …오른 앞발.)
연이는 그 기억을 붙잡으려 했다. 검은 털, 금장 고리, 이마로 밀던 감촉. 그러나 기억은 젖은 종이처럼 번졌다.
그때 네오가 소파 뒤에서 튀어나왔다. 여자의 손목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발톱이 소매를 스쳤다.
연이—네오! 안 돼! 손님이야!
옆집 여자—…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여자는 고양이를 보지 않았다. 고양이의 금빛 눈을 피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소매를 내리고 뒤로 물러났다.
옆집 여자—실례했어요. 명함은 두고 갈게요. 마음 바뀌면 문 두드리세요.
문이 닫혔다. 연이는 바닥에 떨어진 명함을 주웠다. 앞면은 계약서. 그리고 뒷면.
명함 뒷면에는 손으로 쓴 글씨가 있었다. 가늘고 단정한 글씨. 장부에 적듯 한 획씩 꾹꾹 누른.
[ 비 오는 날엔 정류장에 가지 마세요 ]
연이—(정류장? 왜 하필 정류장이야.)
「경고인지 협박인지 모르겠군.」 네오의 꼬리가 바닥을 탁 쳤다.
연이—둘 다 아닐 수도 있어. 걱정일 수도 있잖아.
「걱정하는 사람이 계약서부터 내미나.」
연이—(그런데 왜 정류장이지. 우리 동네 정류장은 그냥 평범한 버스 정류장인데.)
연이는 창밖을 보았다. 아파트 앞 정류장이 가로등 아래 조용히 서 있었다. 지붕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양이 이상하게 낯익었다.
아주 잠깐, 그 정류장 아래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우산을 반쯤 기울인 채로. 눈을 깜빡이자 아무도 없었다.
연이—네오. 방금 정류장에 누구 있었어?
「아무도 없다. 하지만 비 냄새는 났다.」
연이—저쪽에선 다들 그랬잖아. 걱정을 가격표로밖에 말 못 하는 사람들.
연이는 명함을 메모장 옆에 두었다. 그리고 목록 맨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옆집 여자. 맑은 날 우산. 오른 손목 고리 자국. 빚은 남겨 두면 불어나.
잠들기 전, 연이는 벽에 손바닥을 대 보았다. 차가웠다. 벽 너머에서 아주 작게,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한 장, 또 한 장.
연이—(장부. 그 호랑이도 늘 뭔가를 적고 있었어. 누가 얼마를 빚졌는지.)
소리는 오래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뚝 멈췄다. 그리고 아주 낮게,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일기 예보 앱이 알림을 띄웠다. 내일, 오후 세 시부터 소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