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 예보는 정확했다. 강의실 창문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연이—(정류장에 가지 말라고 했지. 근데 집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는데.)
연이는 테이프 감긴 우산을 펼쳤다. 살이 삐뚤게 섰다. 그래도 펴졌다.
연이—정류장 안 가면 집에 못 가요, 옆집 씨. 걱정은 고마운데.
가방 속 지갑 안쪽에서 접힌 부적이 아주 미지근해졌다. 연이는 알아채지 못했다.
복도에서 동기들이 우산이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편의점 우산은 벌써 다 팔렸다고 했다.
연이—나 이거 하나뿐인데. 살이 두 개 테이프야. 같이 쓸 사람, 반은 젖는 거 각오해.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다들 연이의 삐뚤어진 우산을 보고 웃었다. 연이도 따라 웃었다.
연이—(그래도 이 우산 꽤 괜찮은데. 고친 건 다 괜찮아.)
정류장 지붕 아래는 사람들로 붐볐다. 빗줄기가 아스팔트를 하얗게 두드렸다.
연이—(정류장 왔다. 아무 일도 없잖아. 괜히 겁먹었어.)
전광판에는 버스 도착까지 칠 분이 남아 있었다. 연이는 우산을 털고 지붕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때 지갑 속 부적이 확실하게 뜨거워졌다. 연이가 가방을 열어 보았다. 접힌 종이의 초승달이 아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연이—윤달 씨 부적이 왜. 뭐가 있다는 거야?
지붕 끝, 빗물이 떨어지는 경계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코트. 그런데 오늘은 우산이 없었다.
연이—옆집 씨? 거기서 뭐 해요?
여자의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있었다. 코트 어깨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맑은 날마다 들던 우산은 어디에도 없었다.
연이—우산은요? 맑은 날엔 맨날 들고 다니시더니.
옆집 여자—아까 놀이터 아이한테 줬어요. 혼자 비 맞고 있길래.
연이—그 반창고 아이요? 아니, 그럼 본인은요.
옆집 여자—저는 젖어도 돼요. 익숙해요.
연이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우산을 기울여, 여자 쪽으로 반을 씌웠다.
연이—같이 써요. 둘 다 반씩 젖겠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겹쳤다. 똑같은 정류장. 똑같은 비. 우산을 기울이는 자기 손. 그리고 얼굴이 지워진 누군가.
연이—(이거… 도서관에서 본 장면이야. 그때 그 사람은.)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산 아래 같이 서 있던 사람의 얼굴만, 누가 지우개로 문지른 것처럼 하얗게 비어 있었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서 연이를 보았다. 눈이 붉어져 있었다. 빗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옆집 여자—…이거, 얼마예요.
연이—네? 뭐가요?
옆집 여자—우산 씌워 주는 거요. 얼마예요. 뭘 드려야 해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여자는 정말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격표가 없으면 받을 수 없는 사람처럼.
연이—공짜예요. 비 오는데 무슨 돈을 받아요.
여자의 어깨가 무너졌다. 숨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입을 막았다. 손등 위로 물이 흘렀다.
연이—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옆집 여자—그 말, 예전에도 들었어요. 아주 오래전에. 똑같은 정류장에서.
연이—저한테요?
옆집 여자—아니요.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일 리가 없어요. 당신은 기억 못 하니까.
그 말은 대답이 아니었다. 고백도 아니었다. 혼잣말에 가까웠다.
연이—기억 못 해도 괜찮아요. 지금 같이 쓰고 있잖아요. 이건 지금 거예요.
여자가 연이를 보았다. 오래. 비가 둘 사이로 가늘게 흘렀다. 우산 살 하나가 바람에 떨렸다.
옆집 여자—지금 거. 그런 게 있는 줄 몰랐어요. 다 갚아야 하는 건 줄 알았어요.
연이—갚는 건 나중에 생각해요. 일단 안 젖는 게 먼저죠. 아, 반은 젖지만.
버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들어왔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연이는 여자를 보았다.
연이—같이 타요. 같은 아파트잖아요.
옆집 여자—먼저 가세요. 저는 다음 거 탈게요.
연이—그럼 우산은 가져가요. 저는 내려서 뛰면 돼요.
연이는 여자의 손에 우산 손잡이를 쥐여 주었다. 테이프 감긴 손잡이를. 여자는 그 손잡이를 놓지도, 쥐지도 못했다.
버스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정류장이 멀어졌다. 여자는 우산을 펼치지 않고 품에 안은 채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비에 쫄딱 젖어 아파트에 도착했다. 복도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다. 옆집 문 앞에 택배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늘은 송장이 위를 향해 있었다. 연이는 보려고 한 게 아니었다. 그냥 눈에 들어왔다.
[ 받는 분 · 서한비 ]
연이—(서한비. 한비. …찬비.)
찬 비. 이름에 비가 들어 있었다. 맑은 날 우산, 맑은 날 비 냄새. 이름까지 비였다.
연이—(이름은 빚이라더니, 이렇게 택배에 써 놓고 다니면 어떡해.)
연이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런데 웃음 대신 가슴이 아팠다. 정류장에서 무너지던 어깨가 떠올랐다.
집에 들어오자 네오가 수건을 물고 와 발치에 떨어뜨렸다. 고양이 나름의 위로였다.
「또 그 여자지. 이번엔 냄새가 더 진하다. 비와, 눈물.」
연이—응. 울었어. 우산 씌워 줬더니 얼마냐고 묻더라.
네오가 한참 말이 없었다. 꼬리가 천천히 바닥을 쓸었다.
「…얼마냐고 묻는 사람을 하나 안다. 저쪽에서.」
연이—나도 알 것 같아. 근데 아직 말하지 마. 내가 맞춰 볼래.
「왜 직접 맞추려 하나. 내가 말하면 빠르다.」
연이—네가 말해 주면 그건 네 기억이잖아. 내가 맞춰야 내가 믿지. 그 사람도 그래야 믿을 거고.
고양이는 대답 대신 연이의 무릎에 올라와 몸을 말았다. 젖은 옷인데도 개의치 않았다.
「…고집은 여전하군. 그래서 다행이다.」
같은 시각, 벽 너머. 불 꺼진 방에 우산 하나가 펼쳐져 마르고 있었다. 테이프 감긴, 삐뚤어진 살.
서한비는 그 옆에 앉아 장부를 펼쳤다. 연이의 칸. 미수 한 줄 아래에 새 줄이 번지고 있었다.
[ 장부 · 乙亥 연이 · 미수 2 ]
그녀는 그 숫자를 오래 보았다. 갚을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늘었다.
펜을 쥔 오른 손목에서 금줄이 조였다. 살 속으로 파고드는 통증.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대신 코트 안주머니에서 접힌 쪽지 하나를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 북 치던 아이의 이름. 젖지 않게, 한 번 더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