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집의 가장 낮은 칸. 베틀 실이 끝나는 자리에 검은 호랑이가 엎드려 있었다. 목의 금장 고리에서 사슬이 아래로 늘어졌다.
사슬은 한 번씩 당겨졌다. 그때마다 호랑이의 몸이 한 뼘씩 아래로 미끄러졌다. 발톱이 바닥에 긴 자국을 남겼다.
검은 호랑이—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돼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호랑이도 몰랐다. 앞발 밑에 장부 한 권이 깔려 있었다. 표지가 흠뻑 젖어 있었다.
장부는 저절로 펼쳐졌다. 낯익은 칸들 사이로 낯선 쪽이 끼어 있었다. 글씨가 그녀의 것이었다. 그런데 쓴 기억이 없었다.
검은 호랑이—이건, 언제 쓴 거지.
첫 줄에 날짜가 있었다. 봄. 숫자는 번져서 읽히지 않았다. 그 밑에 한 줄. 정류장, 비, 우산 반쪽.
검은 호랑이—정류장. 지난번 그 아이도 정류장에서 우산을 내밀었지요. 옆집 동네의, 그 비 오는 날.
호랑이는 고개를 저었다. 같은 장면이 두 번 겹쳐 보였다. 하나는 이번 생의 것, 하나는 기억에 없는 것. 둘이 꼭 닮아 있었다.
검은 호랑이—장부는 거짓말을 안 해요. 그게 내 유일한 자랑이었는데.
글자를 읽자 빗소리가 커졌다. 장부가 창문이 되었다. 창 너머로 낡은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교복 차림의 여자아이가 젖은 채 서 있었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졌다. 그 옆으로 다른 여자아이가 우산을 반쯤 기울였다.
검은 호랑이—그 애다.
우산을 든 아이가 웃었다. 같이 쓰자. 반반. 그리고 자기 어깨가 젖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젖은 아이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누군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무언가를 건넨 건, 그 아이의 기억 속에 그날이 전부였다.
검은 호랑이—나는, 그 애를 알아. 이름은 안 떠오르는데. 알아.
버스가 왔다. 둘은 같이 탔다. 우산을 든 아이가 가방에서 젤리 한 봉지를 꺼내 반을 덜어 주었다. 따지지도 않고, 생각도 없이.
젖은 아이는 젤리를 손에 쥐고 한참 먹지 못했다. 아까워서였다. 받은 것을 갚을 방법을 몰라서였다.
검은 호랑이—갚으려고 했어. 그다음 날 우산을 사 들고 갔어. 그 애는 웃기만 했어. 이미 한 개 있다고.
장부 귀퉁이에 작은 낙서가 있었다. 서툰 우산 그림 두 개. 그 옆에 받은 것, 갚을 것이라고 쓰다 지운 자국.
장부가 넘어갔다. 계절이 지났다. 정류장의 두 아이는 매일 같이 버스를 기다렸다. 우산은 늘 반쪽씩이었다.
젖은 아이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편의점, 새벽 전단지, 주말 식당. 번 돈을 봉투에 모았다. 봉투 앞에 이렇게 적었다. 같이 바다 가기.
검은 호랑이—바다. 그래,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어. 그 애가 바다를 한 번도 못 봤다고 해서.
봉투는 두꺼워졌다. 우산을 든 아이는 그 봉투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손뼉을 쳤다. 나도 모을게. 반반.
검은 호랑이—반반. 그 애는 늘 그 말을 했어. 우산도, 젤리도, 바다도. 내 몫을 먼저 떼어 놓고 나서야 자기 몫을 셌어.
호랑이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읽고 나니 목이 메었다. 장부에 적힌 말이 아니라, 오래전 누군가에게서 직접 들은 말처럼.
검은 호랑이—그런 애가, 왜 그날만 그랬을까.
빗소리가 대답처럼 거세졌다. 정류장 지붕 위로 물이 넘쳐흘렀다. 호랑이는 다음 장을 넘기기가 무서웠다. 그래도 발끝으로 종이를 밀었다.
그리고 마지막 쪽. 같은 정류장, 같은 우산을 든 아이가 서 있었다. 그런데 웃지 않았다. 우산을 내밀지도 않았다.
아이는 젖은 아이의 손에서 무언가를 빼앗았다. 오래 모은 돈이 든 봉투였다. 그리고 돌아섰다.
검은 호랑이—그래. 이거야. 이게 내가 기억하는 거야. 그 애가 날 버린 날.
그런데 장부의 그림이 한 번 떨렸다. 돌아서는 아이의 눈동자 뒤에 둥근 그림자가 비쳤다. 해를 가리는 검은 달 같은.
검은 호랑이—…방금 그거, 뭐였지.
다시 보려 했다. 그림은 이미 번져 있었다. 빗물이 그 칸만 골라 지운 것처럼.
검은 호랑이—그날 그 애, 이상했어.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 늘 부르던 별명이 있었는데.
호랑이는 앞발로 장부를 눌렀다. 젖은 종이가 찢어질까 봐 발톱을 세우지 못했다. 그 칸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검은 호랑이—그 애가 아니었다면. 아니,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돼. 그럼 내가 한 일이 다.
말을 끝맺지 못했다. 목의 고리가 한 번 조여 왔다. 숨이 막혔다. 생각을 그만두라는 것처럼.
흑월—지난 장부는 덮어라. 젖은 종이는 거짓말을 한다.
검은 호랑이—회장님. 방금 그 아이의 눈에.
흑월—네가 본 것은 비다. 비는 모든 것을 흐리게 한다. 너처럼.
사슬이 세게 당겨졌다. 호랑이가 바닥에 엎어졌다. 장부가 앞발 아래서 미끄러져 나갔다. 호랑이는 몸을 비틀어 장부를 끌어안았다.
흑월—아래로 내려가라. 스물일곱 달의 하늘에서 네 마지막 일을 시키겠다. 그 아이를 비워라.
검은 호랑이—비워 왔어요. 계속. 그런데 왜, 그 애가 비워질수록 당신이 배불러지는 거죠.
흑월—네가 셈을 할 줄 알게 되었구나. 쓸데없이.
대답은 그뿐이었다. 사슬이 아래로 확 당겨졌다. 베틀 실들이 찢어지며 길을 열었다. 아래에서 붉은 별빛이 올라왔다.
떨어지는 동안 호랑이는 장부를 놓지 않았다. 젖은 표지가 가슴에 붙었다. 차가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따뜻한 데가 한 군데 있었다.
검은 호랑이—반쪽 우산. 다시 한 번만,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바람이 거꾸로 불었다. 아래쪽에서 붉은 실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 사이에 오래된 사원의 지붕이 보였다. 스물일곱 개의 달이 그 위에 떠 있었다.
검은 호랑이—저 아래에서 그 애를 또 만나겠지요. 이번엔 무엇을 빼앗으라고 하실 건가요.
흑월—전부. 그 아이가 끝까지 쥐고 있는 것까지.
검은 호랑이—그 애가 끝까지 쥐고 있는 건, 메모장이에요. 남의 이름이 잔뜩 적힌.
위에서 대답이 없었다. 호랑이는 젖은 장부를 더 깊이 품었다. 처음 보는 감정이 목의 고리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의심이라는 이름의.
붉은 하늘이 그녀를 삼켰다. 열두 번째 집의 문이 위에서 조용히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