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 DESTINY꿀꿀 운세

EP.38A · 53 / 70

첫 번째 봄

실패한 시간선, 첫 번째 봄을 그대로 본다. 서한비가 진실을 안다.

한글 약 2,217자 · 읽는 시간 약 5분

틈 아래는 바닥이 없었다. 호랑이는 붉은 실 한 가닥에 매달려 떨어지고 있었다. 위에서 누군가 실을 놓지 않았다.

검은 호랑이—놓으라니까. 고집은 그때랑 똑같네.

실을 타고 빗소리가 흘러내렸다. 사슬이 당기는 아래쪽이 아니라, 실이 끌고 가는 옆쪽으로. 호랑이의 몸이 방향을 틀었다.

흑월—그쪽이 아니다. 내려와라.

검은 호랑이—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실이 말을 안 들어요.

실이 환하게 빛났다. 눈앞이 젖은 유리처럼 번졌다. 그 너머로 낡은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이번에는 장부의 그림이 아니었다. 냄새가 났다.

봄비가 내렸다. 정류장 지붕 아래, 교복을 벗은 지 얼마 안 된 여자 둘이 앉아 있었다.

연이—반쪽아, 이거 봐. 이상한 앱이 깔렸어. 고객센터가 우주래.

서한비—우주가 상담도 해 줘? 별점 몇 개야?

연이—아직 안 줬어. 답장 오면 줄 거야. 안 오면 하나.

호랑이는 그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왼쪽의 여자는 젖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자기였다. 사람의 얼굴을 한, 스물두 살의 서한비.

검은 호랑이—반쪽. 그래. 그 애는 나를 그렇게 불렀어. 우산을 반쪽만 씌워 줘서.

서한비—봉투 거의 다 찼어. 다음 달엔 진짜 바다 갈 수 있어.

연이—나도 거의야! 반반 맞춰서 내일 같이 세어 보자. 여기서, 이 시간에.

연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서한비가 그 손가락을 걸었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둘 다 웃었다.

검은 호랑이—내일. 그 내일이 오지 않았지.

장면이 바뀌었다. 좁은 원룸, 한밤. 책상 위 휴대폰 화면만 켜져 있었다. 연이가 이불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화면에서 알림이 하나 떴다. 그리고 또 하나. 같은 문장이 수십 번 겹쳐 올라왔다. 그릇을 찾았습니다.

검은 호랑이—이건, 나는 본 적 없는 장면인데.

실이 보여 주는 것은 호랑이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반대쪽 끝, 연이 쪽 기억까지 같이 끌려와 있었다.

화면에서 검은 손이 기어 나왔다. 하나, 둘, 셋. 손들은 잠든 연이의 얼굴을 덮었다. 연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흑월—아, 맛있다. 오랜만에 꽉 찬 그릇이로구나.

검은 호랑이—그만둬. 그 애 깨워. 깨우라고!

호랑이의 목소리는 그 방에 닿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봄이었다. 검은 손이 물러났을 때, 연이는 눈을 떴다. 눈동자 뒤에 둥근 그림자가 떠 있었다.

연이—이 얼굴, 쓸 만하군.

그것은 거울 앞에서 연이의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한 번, 두 번. 웃는 법을 연습하듯이. 세 번째에야 연이의 웃음과 비슷해졌다.

검은 호랑이—그 애가 아니었어. 처음부터, 그날의 그 애는.

다음 날. 같은 정류장, 같은 시간. 서한비가 먼저 와 있었다. 품에 두툼한 봉투를 안고. 겉에 적힌 글씨가 빗물에 조금 번졌다. 같이 바다 가기.

서한비—왔어? 우산은? 오늘은 내가 반쪽 씌워 줄게.

연이—서한비.

서한비의 웃음이 멈췄다. 연이는 그 이름을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성까지 붙여서, 사무적인 목소리로.

서한비—왜 그렇게 불러. 무슨 일 있어?

연이—봉투 줘. 내가 세어 볼게.

서한비는 머뭇거렸다. 그래도 내밀었다. 그 애가 달라고 하면 주는 게 당연했다. 반반이니까.

연이는 봉투를 받자마자 돌아섰다. 우산도 쓰지 않고 빗속으로 걸어갔다. 한 번도 뒤를 보지 않았다.

서한비—연아? 연아! 어디 가. 내일 같이 세기로 했잖아.

검은 호랑이—쫓아가지 그랬어. 왜 그 자리에 서 있었어, 바보같이.

서한비는 쫓아가지 않았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가 두 대 지나갔다. 세 번째 버스가 왔을 때, 누군가 정류장으로 뛰어들어 왔다.

젊은 남자였다. 흰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접힌 채였다. 펼 새도 없이 뛰어온 모양이었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실이 그 자리만 일부러 흐리게 칠한 것처럼. 목소리만 또렷했다.

남자: 혹시 연이 못 봤어요? 키 이만한, 노란 가방 멘. 어젯밤부터 연락이 안 돼서.

서한비—봤어요. 방금. 제 돈 들고 갔어요.

남자의 손에서 흰 우산이 떨어졌다. 그는 빗속을 둘러보았다. 이미 아무도 없었다.

남자: 늦었구나. 내가 또.

검은 호랑이—저 목소리. 사자 목소리야.

남자는 우산을 줍지 않고 다시 뛰어갔다. 서한비는 그 흰 우산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집어 들지 않았다. 남의 것은 빚이니까.

검은 호랑이—그 사람도 그 봄에 있었어. 너무 늦게 와서, 나보다 더 오래 울었겠지.

그 뒤로 연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서한비는 매일 그 정류장에 갔다. 비가 오든 안 오든.

열흘째 밤. 서한비의 휴대폰이 혼자 켜졌다. 연이에게 깔렸던 것과 같은 앱이었다. 고객센터 아이콘 대신, 검은 동그라미가 있었다.

흑월—억울하냐.

서한비—누구세요.

흑월—너를 버린 그 아이는 이제 괴물이 되었다. 남의 운을 먹고 자라는 괴물. 너처럼 순한 것들을 또 울리겠지.

서한비—그 애가요? 그럴 리 없어요.

흑월—네 봉투를 들고 간 것은 누구였지.

서한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호랑이는 위에서 그 손을 보았다. 오른손이었다.

흑월—기회를 주마. 괴물이 되기 전에, 그 아이가 가진 것을 거둬들여라. 운도, 숨도, 박수도.

서한비—공짜는 아니겠죠.

흑월—공짜는 없다. 너도 이제 알지 않느냐.

그 말이 가장 아팠다. 서한비는 오래 웃었다. 울음처럼 들리는 웃음이었다.

서한비—좋아요. 대신 장부를 주세요. 다시는 아무도 나한테서 공짜로 가져가지 못하게.

화면에서 금빛 고리가 떨어졌다. 고리는 그녀의 오른 손목에 감겼다. 피부가 검은 털로 덮였다. 손가락이 발톱이 되었다. 젖은 장부 한 권이 발치에 떨어졌다.

검은 호랑이—그만해. 받지 마. 그거 받으면 안 돼.

지나간 서한비는 듣지 않았다. 검은 호랑이가 일어섰다. 금빛 눈이 처음 떠졌다. 그 눈 속에도 작은 검은 점이 박혀 있었다.

실이 덜컥 멈췄다. 빗소리가 끊겼다. 호랑이는 다시 일식 아래의 틈에 매달려 있었다. 목의 사슬이 아래로, 붉은 실이 위로. 몸이 두 방향으로 찢길 것 같았다.

흑월—보았느냐.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느냐.

검은 호랑이—다 달라져요. 그 애는 날 버린 적이 없어. 당신이 그 애를 먹었어. 그 애 얼굴로 내 봉투를 가져갔어.

흑월—그리고 너는 내 손이 되었지. 스스로 고리를 찼고, 스스로 장부를 폈다.

호랑이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속은 것은 맞았다. 그러나 북 치는 아이의 박수를 거둔 것은 그녀의 발톱이었다. 식상의 목소리들도, 재성의 시간들도.

검은 호랑이—맞아요. 그건 내 손이었어요.

흑월—그러니 끝까지 내 손으로 남아라. 이제 와서 돌아설 곳이 어디 있느냐.

사슬이 한 번 크게 당겨졌다. 고리가 목을 졸랐다. 금빛 눈이 흐려졌다. 그때 위에서, 실을 타고 목소리가 내려왔다.

연이—호랑이 씨! 아니, 서한비! 듣고 있으면 대답해! 아직 안 따졌다고!

반쪽아, 가 아니었다. 그래도 호랑이는 웃었다. 이번 봄의 그 애가, 자기 이름을 제대로 부르고 있었다.

검은 호랑이—돌아설 곳이요? 있어요. 저 위에, 우산 들고 있는 애한테.

호랑이는 앞발을 들었다. 오른 앞발. 고리가 처음 감겼던 자리. 발톱을 세워 목의 금장 고리를 움켜쥐었다.

흑월—그 고리를 끊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몸도, 힘도, 돌아갈 길도.

검은 호랑이—알아요. 공짜는 없다면서요. 이번엔 제가 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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